3. 부록 첨지공유사(附錄僉知公遺事)
(1) 통정대부첨지중추부사최공행장
(通政大夫僉知中樞府事崔公行狀) {최상중(崔尙重)}
公諱福男字德胤完山府人也成均進士諱彥潾其考也蔭官補木浦萬戶諱演文其祖考也蓋以豪邁之士責其主倅時政之得失而主倅投印而歸其後竟坐其事有是補諱忠成其曾祖考也以文章學行負重名世稱山堂先生是也上祖諱阿仕麗朝爲門下侍中贈諡文成公其子諱龍鳳爲中郞將是生諱乙仁爲司醞直長同正是生諱霮年十七司馬三十二登洪武丁巳文科仕至檢校戶曹參議集賢殿提學其第四子德之亦以生員登永樂乙酉文科由槐院入翰院歷玉堂臺閣屢典州郡皆有聲績官至中直大夫藝文館直提學嘗以南原府使退居靈巖永保村扁其樓曰存養若將終身其後文宗召拜藝文館直提學未幾告老而歸名公巨卿至如六臣輩皆以詩送別嗟羨不已世所稱存養先生是也是生諱氵敞司勇母夫人珍原吳氏進士彭壽女有至性篤行以嘉靖乙巳八月日生公幼有器度藻思超絶稍長峻潔剛正風姿玉峙不爲戲言進士公奇愛之期以遠到十九歲委禽於咸陽朴參奉文精之女朴公見其丰姿秀異氣宇軒昂亦以遠大期之其年捷鄕試第二入京晦齋李公見而加敬曰如某人物置之顯隆何所不宜其推尙之重可知宣廟甲戌以大臣薦除光陵參奉辭以疾不就明年乙亥復拜直長不就己亥四月拜僉知中樞府事始入謝蓋丁酉之亂與弟吉男及其子澈收義糧南原兵賴以無飢上以爲扶植國脈多活人命有是命公每戒子弟以謹身寡言毋或忝辱先祖又常擧古人格言善行俾爲之法不免內困而常暇貸以給尤謹於辭受雖交知所饋非義則輒却之雅不喜紛華竹素書畫之外無他好不談財利爭訟之事門庭之內不設(說)聲妓博奕翫好之物此皆本自家之法而亦公之天性然也同時流輩咸謂一第不足取而不幸數奇生居草野身極蹇躓用不究才論議惜之前後喪皆廬墓三年每朝夕上食哭泣之戚感動閭閈祭饌必自其手不委之婢僕與李栗谷曺南溟爲忘年之友南溟則稱曰氣味心事峻潔貞固者罕見如此人栗谷曰不爲崖異之行衒飾之態者始見此人矣平居必晨謁家廟出入必告執友有過輒加規正或見其持心不韙者則雖其爲人一時所尊重者而直斥不撓以是多忤時論屢蹈禍機而亦不之悔也公自乙巳三月九日偶得奇疾不幸於翌年丙午正月二十一日卒得年六十二以遺命不書官職三月葬于羅州尺洞甑峴丑坐之原公配朴氏先公二年而卒合爲一窆焉有子四人男子子二人女子子二人男長澈主簿次澂奉事女適金拭次適李榮先主簿二男三女男長由巘女適金宗慶餘幼奉事三男一女男長由峽餘幼內外孫總若干人嗚呼公自幼仰奉庭訓以溫厚持心謹潔制行事進士公無少違與二弟一妹盡其友愛之道奉祭事必以誠愨待宗族必務和睦接朋友必事款密平生不作矯飾之態躁暴忿厲之言不出於口傷人傲物之念不萌於心一見輒知其爲善人長者公卒而有年墓道無文公之子澈類公之行以不朽之圖來請狀於尙重尙重竊惟公平日言行亦可謂聞之熟矣於此不敢以無文辭焉公雖未及積學攻文以廣其志業然其著於身修於家皆誠實粹白表裏一致雖巧毀者不敢以惡聲加焉所謂談義理通古今者夷考其實不能無遜於公豈非公生質之美宅心之善有大過人者耶顧公屈跡鄕閭才未得展於當時壽又未極於耇耋天之報施抑何舛歟惟其令德懿行不可泯泯無傳略加詮次以俟立言君子之採擇焉
歲著雍涒灘之四月上澣
嘉善大夫同知經筵事司諫院大司諫朔寧崔尙重謹識
공의 휘는 복남이고 자는 덕윤이며 전주최씨이니 성균 진사 휘 언린은 아버지이며 음직으로 목포 만호에 임명된 휘 연문은 할아버지로 이들은 모두 성격이 호탕하고 인품이 뛰어난 분들이다.
그 분들이 살고 있는 고을을 다스리는 수령이 잘못 다스리는 일이 있으면 무엇이 잘못되었는지에 대하여 공들이 나서서 잘못을 꾸지람한 일이 많았는데 수령은 벼슬을 그만두고 돌아간 다음에야 비로소 자신이 그 자리에 있을 때 그 분들이 꾸지람하신 말씀이 고을을 다스림에 있어서 큰 보탬이 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휘 충성은 증조부인데, 문장이 뛰어나고 학문과 행실로 널리 이름을 떨친 세상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이른바 산당 선생 바로 그분이시다.
시조 휘 아는 고려 때 문하시중을 지냈으며 문성공이라는 시호가 주어졌다.
문성공의 아들 휘 용봉은 중랑장이고, 중랑장공이 휘 을인을 낳았으니 사온서 직장 동정이며, 동정공이 휘 담을 낳았으니 나이 17세에 사마시에 급제하고 32세가 되는 1377년(우왕 3)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검교 호조 참의 집현전 제학에 이르렀다.
참의공의 넷째 아들 휘 덕지 또한 생원으로서 1405년(태종 5)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을 거쳐서 한림원에 들어가 옥당 대각을 역임하고 여러 고을을 다스렸는데 가는 곳마다 큰 업적을 남겼으며 벼슬이 중직대부 예문관 직제학에 이르렀다.
남원 부사로 재직하던 중 벼슬에서 물러나 영암 영보촌으로 낙향하여 집안에 서루를 지어 존양루라고 편액을 걸어 놓고 일생을 그곳에서 마치고자 하였다.
그 후 문종이 불러서 예문관 직제학을 제수하였지만 임기를 다 채우지 아니하고 늙었다고 알리고 시골로 돌아오니 이름 있는 선비들과 높은 벼슬아치를 비롯하여 사육신 등 저명인사들이 모두 시를 지어 주면서 이별을 아쉬워하였는데 세월이 흘러도 그 일에 대한 칭찬이 그치지 아니하였으니 세상 사람들로부터 크게 존경받고 있는 이른바 존양당(연촌) 선생, 바로 그 분이시다.
존양당 선생께서 휘 창을 낳았으니 바로 사용으로 산당공의 아버지이다.
공의 어머니 진원오씨는 진사 팽수의 딸로 더할 수 없이 착한 성질과 함께 성실하고 친절한 행실이 있었는데 1545년(인종 1) 8월 모일에 공을 낳았다.
공은 어려서부터 재기와 도량이 뛰어나고 글 짓는 재주가 비상하였으며 점차 자랄수록 엄숙하고 정결하며 굳세고 올발라서 드러나 보이는 겉모양이 고귀하고 아름다웠으며 함부로 농담을 하지 않았으므로 진사공이 특별히 사랑하면서 학문과 재주가 높은 경지에 오를 것으로 크게 기대하였다.
나이 19세에 함양박씨 참봉 문정의 딸과 혼인하였는데 박공 또한 공의 빼어나게 아름다운 자태를 보고 기개와 도량이 빼어나며 풍채가 좋고 당당하여 역시 장래에 큰 사람이 될 것이라고 기대하였다.
그 해에 향시에 2등으로 합격하여 회시를 치르기 위하여 서울에 들어갔는데 회재 이언적(1)이 공을 보고 공경하여 말하기를
아무개 같은 인물은 반드시 높이 드러나게 되어 있으니 어느 자리에 앉힌들 적당하지 아니한 자리가 있겠는가?
그를 받들어 높이지 않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알 것 같다.
라고 하였다.
1574년(선조 7)에 대신의 천거를 받아서 광릉 참봉에 제수되었으나 병을 핑계 삼아 사양하고 취임하지 아니하였으며 다음해 1575년에 다시 직장에 제수되었으나 역시 취임하지 아니하였다.
1599년(선조 32) 4월 첨지중추부사에 제수되어 비로소 조정에 들어가서 감사의 인사를 올렸는데 이는 정유재란 때 동생 길남 그리고 아들 철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양곡을 거두어 남원에 주둔하고 있는 부대에 공급하여 병사들이 굶주리지 않고 싸울 수 있도록 병참을 지원하였기 때문인데
주상께서 나라의 명맥을 도와서 바로 서게 하였으며 많은 사람의 목숨을 구했다는 사실을 알고 그 보답으로 그와 같이 명령을 내리신 것이다.
공은 항상 자제들에게 가르치기를
몸을 삼가고, 말을 적게 할 것이며, 조상을 욕되게 하는 일은 절대로 해서는 안 된다.
라고 하였으며 또 항상 옛 사람들의 격언을 따라서 올바르게 살았고 모든 것을 법에 따라 엄정하게 처리했으므로 안으로 곤궁함을 면하기 어려웠다.
합당한 대가를 지급하지 않고 얻어지는 이익에 대해서는 쉽게 사양하거나 쉽게 받아들이지 않았고 가리는 것을 매우 조심스럽게 하였으며 비록 알고 지내는 사람의 부탁이라고 하더라도 옳지 않은 것이라고 생각되면 언제나 반드시 물리쳤으며
번잡하고 화려한 것을 좋지 않게 생각하였고 역사책을 비롯한 글이나 그림을 제외하고는 그 외의 어떤 기호품도 좋아하지 않았고 재산을 불린다거나 재판을 벌이는 등과 같은 일에 관해서는 일절 말하지 않았다.
집안에서는 유흥이나 오락에 관한 이야기나 장기나 바둑 같은 놀이에 관한 이야기는 꺼내지도 않았는데 이는 모두 가문에 전해오는 법도를 지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공은 천성이 이러하였으니 함께하였던 동료들이 모두
최고로 인정하기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다.
라고 말하였다.
불행하게도 운수가 사나워서 초야에 묻혀 몸을 웅크리고 살았으므로 가슴에 품은 뜻을 펼치지는 못하였으나 훌륭한 재주를 헤아려 불러 쓰지 못하는 조정의 논의가 안타까울 뿐이로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상을 당하여 모두 3년간 씩 움막을 지어 놓고 묘소를 지켰으며 매일 아침저녁으로 밥을 올릴 때마다 친척들이 모두모여 함께 곡을 하였으므로 마을 사람들이 모두 감동하였고 제상을 차릴 때면 반드시 모든 것을 자기 손으로 스스로 장만하고 종들에게는 아무것도 맞기지 아니하였다.
율곡 이이, 남명 조식과 함께 나이를 뛰어넘어 친구로서 사귀었는데(2), 남명이 칭찬하여 말하기를
생각하는 것이나 마음 쓰는 것이 엄숙하고 정결하며 곧고 굳은 사람으로서 이런 사람은 세상에서 보기 드물다.
라고 했으며,
율곡이 칭찬하기를
남달리 모난 행동을 하지 아니하고 스스로를 잘 지켜 나가는 사람으로서 이 사람을 처음 본다.
하였다.
평상시에도 언제나 이른 아침이면 일찍 일어나 반드시 가묘에 올라가서 문안 인사를 올렸으며, 외출하거나 돌아올 때에도 반드시 가묘에 올라가서 알렸으며
친구가 잘못을 저지르면 수시로 바로잡아 주고 혹 마음가짐이 옳지 못한 사람을 만나면 비록 그 사람이 한 때 사람들로부터 존중받던 유명한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그 자리에서 바로 나무라고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으니 그로 인하여 그 시대 사람들의 여론에 거슬리는 경우도 많았고 여러 번 위기를 겪기도 하였으나 결코 그 일에 대하여 뉘우친다거나 하기를 그만 두는 일이 없었다.
공은 1605년(선조 38) 3월 9일에 우연히 원인 모를 이상한 병을 얻어 불행하게도 다음해 1606년 1월 21일에 돌아가시니 당시 나이는 62세인데 자신이 올랐던 관직 이름을 기록하여 남기지 말라는 유명을 남기셨다.
3월에 나주 척동 시루고개에 서남향으로 장사지냈다.
공의 배 박씨는 공보다 2년 먼저 돌아가셨는데 공이 돌아가시자 합조로 장사지냈다.
자식은 네 명을 두었는데 아들이 둘이요 딸 둘이다.
아들로서 큰 아들 철은 주부이고 작은 아들 징은 봉사이며 큰 사위는 김식이며 작은 사위는 이영선이다.
주부는 2남 3녀를 두었는데 큰 아들은 유헌이고 큰 사위는 김종경이며 나머지는 모두 어리다.
봉사는 3남 1녀를 두었는데 큰 아들은 유협이고 나머지는 모두 어리다.
그 외에 친손과 외손이 몇 명 있다.
오호라! 공은 어려서부터 훌륭한 가훈을 우러러 받들었고 온화하고 후덕한 마음을 항상 유지하였으며 삼가하고 결백하여 행동을 자제하였다.
아버지 진사공을 받들어 모심에 조그만 어긋남도 없었으며 동생 두 사람과 누이 한 사람과 함께 우애의 도를 다하였다.
제사를 받들 때면 반드시 성실하게 하였으며 일가들을 대할 때에는 반드시 화목에 힘썼고 친구를 대할 때에는 반드시 진심을 가지고 가까이 하였다.
평생을 거짓되게 보이도록 겉모양을 꾸미지 아니하였고 화내는 거칠고 사나운 말은 입에 담지 않았다.
남을 깔보거나 얕잡아보아 상처를 줄 생각 같은 것은 아예 처음부터 마음속에 두지 아니하였으니 한 눈에 보아도 바로 착한 사람이요 장자라는 것을 알아볼 수 있었다.
공이 돌아가신지 여러 해가 지났으나 묘비가 없으므로 공의 아들 철이 공의 행실에 관한 기록이 영원히 전해질 수 있도록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으로 상중(저자)에게 찾아와서 행장을 지어 줄 것을 요청하므로 상중이 공의 평소 언행 등을 혼자 곰곰이 생각하여 볼 때 역시 공에 관하여 들어서 알고 있는 것들이 많을 뿐만 아니라 이러한 상황에서 감히 글을 짓지 못하겠다고는 차마 말할 수가 없었다.
공이 쌓은 학문이 비록 자신의 품은 뜻을 충분히 펼치기에는 부족하여 미치지는 못하였지만 몸을 바로세우고 가정을 다스림에 있어서는 모두 성실하였고 티 없이 맑고 깨끗하였으며 겉과 속이 조금도 다르지 아니하고 하나같아서 비록 교묘하게 헐뜯으려고 마음먹은 사람이 있다고 할지라도 감히 나쁜 평가를 더할 수는 없었다.
이른바 사람으로서 지켜야할 도리에 관하여 평가하고 고금을 통틀어서 그 실제를 깊이 생각하고 살펴본다면 공을 따를 만한 사람이 없으니 어찌 공의 타고난 자질이 아름답다고 하지 않을 수 있겠으며 마음가짐이 착하기를 보통사람보다 크게 뛰어난 사람이 아니라고 할 수 있겠는가?
시골 마을에서 공의 발자취를 돌아보니 비록 당시에 재주를 펼쳐 이룩한 업적은 크지 않고, 돌아가신 나이도 또한 매우 오래 살았다고 하기에는 부족함이 있지만 하늘이 은혜를 베풀어 어그러짐을 억누를 수 있게 하여 그 아름다운 덕과 좋은 행실로 나타났으니 큰 흐름 속에서 아무것도 전하지 않을 수는 없는 일이므로,
글의 짜임새를 조리 있게 만들기 위한 부분을 약간 보태었으니 후세에 교훈이 될 만한 단어를 군자(독자)께서 스스로 채택하여가며 읽어 주기를 바란다.
1608년(선조 41) 4월 상순(3).
가선대부 동지경연사 사간원 대사간 삭녕 최상중 삼가 지음
* 각주 ----------------------------
(1) 李彦迪. 이언적은 1491년에 태어나 1553년에 죽었으므로 공과는 54세의 나이 차이가 있고 이언적이 죽은 1553년에 공의 나이는 9세에 불과하였다. 따라서 19세 때 이언적을 만났다는 것은 성립될 수 없는 일이다.
(2) 조식은 1501년생으로 공과는 44세 나이 차이가 있고, 이이는 1536년생으로 공과는 9세의 나이 차이가 있다. 조식은 1572년에 죽었는데 그 때 공의 나이는 28세이다.
(3) 저자 최상중(崔尙重, 1551~1604)은 남원사람으로 노봉서원(露峰書院)에 배향되었다. 최상중은 첨지중추부사공보다 2년 먼저 사망하였으므로 이 글을 지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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