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한국말로 정확하게 표현을 할지 걱정입니다. 한국말이 완벽하지 못하다 보니 조금 부담스럽습니다.
먼저 소개부터 하겠습니다. 우리 가족은 산동성에서……, 다른 이민자와 마찬가지로 산동성에서 1949년 인천으로 도항하였습니다. 부모님이 조부모님을 모시고 왔습니다. 중국이 공산화되면서 산동성에서 웬만큼 산다는 사람들은 그곳에서 살 수 없게 되어 본토를 떠났습니다. 이념적인 문제가 컸지요. 처음엔 인천에 정착했는데 6·25 전쟁이 발발하게 되면서 부산으로 피난 왔습니다. 부산으로 왔을 때 초량 중화가는 이미 포화 상태였다고 합니다, 한국 정부와 대만 대사관에서 화교들에게 거처를 마련해 주었습니다. 영주동
1951년에 제가 태어났습니다. 한국은 그때 경제적으로 아주 어려운 시기였습니다. 우리 가족도 이렇게 오랫동안 한국에서 살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하고 중국에서 이곳으로 오게 되었습니다. 조부모님 두 분 다 고향 땅을 밟지 못하시고 여기서 돌아가셨고 아버지도 일찍 돌아가시게 되었습니다. 지금 나는 부산화교학교에서 30년이 넘도록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부산 지역 화교 학교의 역사는 길지 않습니다. 소학교가 있을 뿐이었지요. 6·25 전쟁 당시 부산 지역에 피난민들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게 되었고 피난민들의 요구 때문에 중고등학교가 생기고 발전하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 이전에는 학생 수가 10명도 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나 역시 부산에서 화교 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은 대만으로 갔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정년이 되어서 학교에서 퇴직을 하고 여기서 내가 할 일이 없어지게 되면 그땐 대만으로 돌아가야지요. 여기는 내 고향이 아닙니다. 요즘 학생들은 한국에서 살겠다고 하는 경우가 많은데 나는 왜 그런지 여기가 고향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다.
아버지는 산동성에서 한국과 무역업을 하셨는데, 한국으로 넘어오신 후에도 계속 무역업을 하셨습니다. 중국이 공산화되면서 한국과 국교가 단절되었고, 이념이 같았던 우리는 6·25 전쟁 당시에도 미국으로부터 연합군으로 인정을 받아서 한국 사회에서 꽤 정당한 대우를 받았습니다. 당시 전쟁에 참여하였던 화교민들의 역할이 인정을 받았던 거지요. 하지만 1971년 중국이 국제연합[UN]에 가입하게 되면서부터 중국의 위세가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하였습니다. 중국은 UN에서 중국 공산주의가 유일한 합법 정부임을 주장하였고, 동남아시아 국가 연합[ASENA]과도 화해를 주도해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먼저 국교를 맺은 말레이시아도 중국을 유일한 합법 정부로 인정하게 되면서 동남아의 질서가 재편되기 시작하였습니다.
당시 동남아에 퍼져 있던 화교들은 자신들만의 단결이나 치부(致富), 모국에 대한 충성 등으로 거주국 국민들과 갈등이 많았습니다. 국교 재개 이후 가장 큰 골칫거리는 화교의 처우 문제였습니다. 이때 중국은 공산 분자의 지원을 끊고 혁명을 수출하지 않겠다는 뜻을 전했고, 화교들에게 거주국으로의 귀화 정책을 펴 자신들이 몸담고 있는 곳에서 융화하여 살도록 했습니다. 이것은 여러 해 동안 분쟁을 가져온 동남아 국가들에게 화교의 불간섭을 표방한 것이었습니다.
동남아의 여러 나라들은 힘으로 실력을 행사하던 시기를 벗어나 자력갱생의 길을 걷기 시작한 때였고, 또 에너지 위기에 처해 있던 개발 도상국들은 공산국과의 화합이 불가피하였기 때문에 중국과의 교역을 배척할 수만은 없었지요. 이 새로운 동남아의 정세는 다시 세계 속으로 뻗어 나갔습니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이미 이전부터 화교에 대한 배척이 이루어지고 있었는데, 1962년 화폐 개혁은 현금 시장에서 우위를 점하고 있던 화교들에게 충격이었습니다. 1인당 현금 교환액을 500원으로 정해 놓은 이상 그 이상의 돈은 그저 휴지에 불과했습니다. 우리 부모 세대들은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으로 살고 계셨고, 또 은행에 저축을 하거나 한국의 제도권 내에 속하려고 하지 않으려 했던 탓에 화폐 개혁은 화교들에게 큰 타격을 가져왔었습니다. 타향에서 힘들게 모은 돈을 날리게 생겼으니 어떻게 살 수 있겠습니까? 한강으로 가서 투신자살한 사람도 많았지요. 그때 자살한 화교들 좀 됩니다.
거기다 외국인 토지 취득 금지에 대한 법을 제정해서 토지 소유를 막았고, 대외 교역도 규제를 해서 먹고 살길이 막막해졌습니다. 그나마 요식업을 하게 된 사람들도 면적의 제한을 두어서 대형 음식점을 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화교들은 한국 사회에서 숨만 쉬고 살 수밖에 없었습니다. 화교들이 할 수 있는 것은 165.3㎡[50평] 이하의 점포를 가지고 요식업이나 하면서 살아가는 것이었습니다. 또 한국 정부의 가격 차별 정책으로 분식업은 가격 경쟁에서 살아날 수가 없었습니다. 정부의 분식 장려 정책으로 중국집에서는 쌀밥을 팔 수 없었고, 영업 연수가 많으면 거기에 대한 과세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그러니 많은 화교들이 떠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한국 정부의 화교 배척 정책 이후로는 현금을 모아두어도 마음을 놓을 수가 없어서 모은 돈으로 집을 샀는데, 아버지 친구에게 명의를 빌려서 샀습니다. 그러데 아무 말씀 없이 돌아가시고 나니 그 자식들이 돌려주지를 않는 겁니다. 그 집이 자기 부모의 유산이라고 우겨서 빼앗았습니다. 법적으로 대항할 수 없는 우리는 돈만 뺐긴 것이 아니라 한국 사람에 대한 신뢰도 깨지게 되었습니다. 더 믿으면 우리가 바보죠.
그때 우리 아버지는 무역업을 하시다가 그만두시고 회사에 취직을 하셨습니다. 회계 관련된 일을 하셨지요. 그러다 일찍 돌아가셨는데…… 내가 대학 다닐 때였습니다. 나는 당시 대만에서 학교를 다녔는데 그 당시 한국 정부에서 한화 유출 문제로 대만에 보내는 송금액에 제한이 있었지요. 그 돈으로는 대만에서 생활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보따리장수도 하고, 방학 때는 아르바이트해서 돈 벌면 대만에서 학교생활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대만으로 공부하러 많이 들어간 이유는, 대만은 학비가 싸서 충분히 조달할 수 있었던 것도 있지만, 당시 냉전 체제로 장개석 정부의 이념적 대립 갈등이 분명하던 때였고, 미국 정부에서도 대만으로 들어오는 화교들에게 지원을 해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때는 화교들에게 많은 혜택을 주었습니다. 사범 대학 같은 경우는 정부에서 생활비까지 지원해 주어서 웬만하면 대만으로 공부를 하러 갔습니다. 이후에 상황이 또 좀 달라지긴 했습니다만, 어쨌든 대만은 물가도 싼 편에 속하고 대만식 교육을 계속 받은 화교들이 대학을 가기는 대만이 수월한 부분이 많이 있습니다. 지금도 학생들이 대만으로 대학 진학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물론 한국 대학으로 진학하기를 원하는 학생도 있습니다. 요즘 우리 세대와 생각이 다른 젊은 세대들 중에는 아이를 초등학교 때부터 한국 학교에 보내고 한국식으로 교육시키는 부모가 늘어나고 있습니다. 그런데 대만식 교육을 받은 학생들이 한국 대학교에 진학할 때 외국인 전형이라는 특례를 받기 때문에 아직 부산 지역에서는 대만 학교를 선호하는 것 같습니다. 입시가 우리에게도 중요한 문제입니다. 또 중국이나 대만의 대학교를 선택하게 되어도 화교에게는 등록금이나 그 외의 특혜가 따릅니다. 그래서 아직까지 한국식 교육보다 대만 교육을 선호하고 있으며, 꼭 그런 이유가 아니더라도 민족적인 성향으로 대만식 교육을 고집하기도 합니다.
요즘 우리 학교에는 엄마가 중국인이면서 한국인과 결혼한 결혼 이민자의 자식들이 입학하기도 하는데요. 이유인즉 한국 학생들로부터의 왕따 문제 때문입니다. 사실 대학 친구들 중에서 어린 시절에 집이 시골인 아이들-김해 지역이나 경상남도 지역-은 화교 학교에 다닐 수 없었는데요. 지금은 우리 학교에 기숙사가 있지만 그때는 기숙사가 없었습니다. 한국 학교에 다닐 수밖에 없었는데, 한국 사람들한테 ‘떼놈’이라고 멸시를 많이 당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웬만하면 부모들은 아이들을 한국 사람들과 함께 어울리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우리 부모 세대는 한국말을 제대로 하는 사람이 많지 않았습니다. 우리 아버지도 한국말을 못했습니다. 그 시절에는 화교가 많았고 영주동 화교촌
그리고 대학 때 대만으로 유학을 갔으니 내 세대는 한국 사회에 살고 있다는 것을 느끼기가 좀 힘들지 않았나 싶습니다. 지금은 한국말을 하는데 무리가 없습니다만, 당시 나도 대학을 졸업하고 한국에서 직장을 가지게 되면서 한국말을 배웠지 그전에는 어린 시절 조금 알던 한국말도 대만에 가서 공부하면서 다 잊어버린 상태였습니다. 하하. 요즘 우리 학교 학생들을 보면 오히려 한국말을 더 잘하고 중국말을 못하는 아이들이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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