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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택의 우선순위
(신 30:19-20)
어떤 알코올 중독자에게 아들이 둘 있었습니다. 도저히 두 아들을 키울 수 없을 것이라고 판단한 복지과 직원에 의해서 이 아들들은 각각 다른 집으로 입양을 보냈습니다. 수십 년이 지난 다음 두 아들의 행방이 궁금해서 복지과 직원이 추적을 했습니다. 과연 이 두 아들의 삶이 어떻게 달라졌을까요?
첫째 아들을 찾아가 보았더니, 아버지와 똑같이 알코올 중독자가 되어 수용소에 갇혀 있었습니다. 그래서 질문했습니다.
"아니, 어떻게 당신도 이렇게 살 수 있단 말인가?" 그 아들이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이 대답했습니다.
"아버지가 알코올 중독자인데, 어떻게 내가 알코올 중독자가 안 될 수 있단 말입니까?"
부전자전이라는 말이 맞는 듯합니다.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라는 말입니다. 부모가 본을 보여야 한다는 말이지요. 웃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다는 말도 할 수 있지요. 여러분 꼭 그럴까요?
이번엔 둘째 아들을 찾아갔습니다. 그런데 동생은 형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동생은 사랑하는 아내와 예쁜 자녀들과 함께 아주 단란한 가정을 가꾸면서 행복하게 잘 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질문했습니다.
"아니, 어떻게 아버지와 전혀 다르게 살 수 있습니까?" 그때 아들이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습니다.
"당연하지 않습니까? 아버지가 그렇게 사셨는데, 내가 어떻게 똑같이 살 수 있단 말입니까?" 타산지석이나, 병가지상사란 말이 맞는 것입니다. 두 아들이 살아온 삶의 조건은 똑같습니다. 같은 환경에서 자랐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너무도 판이 합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두 아들은 똑같은 아버지의 유전자를 받고, 똑같이 처절한 환경 속에서 삶을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한 사람은 알코올 중독자가 된 것이 너무나 당연한 노릇이라 생각했지만, 또 다른 사람은 알코올 중독자가 되지 않은 것이 너무나 당연하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여러분, 생각의 차이, 판단의 차이는 결국 삶의 결과까지도 엄청나게 차이를 가져오는 것입니다. 중요한 의미를 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어느 편에 서 있습니까?
인생은 선택입니다. 매순간 선택하며 삽니다. 친구, 학교, 배우자. 직장, 책, 만날 사람 등 '무엇을 선택하느냐?' 에 따라서 운명이 바뀌는 법입니다. 선택의 결과는 당장 나타나지 않습니다. 선택은 순간이지만 결과는 영원합니다. 요한복음 19장에 보면 빌라도의 선택이 나옵니다. 그는 예수님이 죄 없음을 알았으며 따라서 예수님을 놓아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결국 그는 십자가에 못박게 하는 결정을 내렸습니다. 그 선택은 영원한 형벌을 받게 되었습니다. 우리 주위를 살펴보면 잘못된 선택으로 후회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선택이 중요합니다. 잘 선택을 해야 합니다. 바르게 판단을 해야 합니다. 행복과 미래는 판단에 의해 좌우된다는 것입니다. 결코 운명이 아닙니다. 환경을 탓하며 원망과 불평을 하며 자신은 물론 함께한 사람들까지도 망치고 있는 사람은 아닙니까? 불행한 사람이 가는 길입니다. 아니면, 환경을 뛰어 넘어 하나님의 축복을 만들어 가는 사람입니까? 행복한 사람이 되시렵니까?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 로봇으로 만들지 아니하셨습니다. 로봇은 선택권이 없고 오직 시키는 대로만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드셔서 사람이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권한을 주셨습니다.
아담이 하나님께 지음 받아 에덴동산의 낙원에 거하게 된 것은 선택의 여지없는 하나님의 정하신 뜻이요 운명이었습니다. 창세기 1장 26~27절에는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그들의 의지와 상관없이 하나님께로부터 지음을 받아 에덴동산에서 살도록 운명지어졌습니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에게도 하나님은 선택의 자유를 주셨습니다. 에덴동산의 모든 나무의 실과는 먹되 동산 중앙에 있는 생명나무와 선악과나무 가운데 선악을 아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먹는 날에는 네가 반드시 죽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잘못된 선택을 하면 무서운 결과를 갖는다고 경고하셨습니다. 창세기 2장 15~17절에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 동산에 두사 그것을 다스리며 지키게 하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고 성경은 증거하고 있습니다. 생명을 얻는 나무 실과는 아담과 하와가 자유로이 먹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선악을 아는 나무의 실과는 먹으면 죽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에 대한 선택은 아담과 하와에게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선택의 자유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마귀의 유혹으로 잘못된 선택을 했습니다. 뱀이 하와를 유혹하여 “정말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고 묻자 하와는 “동산 나무의 실과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실과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마귀는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고 말하며 하와를 유혹했습니다. 마음에 탐욕이 들어온 하와는 스스로 선택하여 선악과를 따먹고 아담에게도 주었습니다. 아담은 이를 거부할 수 있었지만 스스로 선택하여 선악과를 먹었습니다. 결국 그들은 타락하여 하나님을 배반하게 되었고, 에덴동산에서 쫓겨나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삶에는 운명지어진 것과 우리가 선택해야 하는 일들이 있습니다. 부모나 나라나 남자나 여자로 태어나는 것은 내가 선택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모든 것은 운명지어진 것이 아니며 또한 모든 것이 선택의 자유가 있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의 정해진 삶 속에는 선택의 자유가 있지만 그 결과에는 반드시 책임이 따릅니다.
루치아노 파바로티가 세계적인 테너 가수로 성장하기 까지는 그의 아버지의 힘이 컸다. 빵가게를 하던 아버지는 파바로티가 어렸을 때 남다른 음악적 재능과 타고난 목소리를 지닌 것을 알고 최선을 다해 소질을 계발시켜 주었다. 그러나 파바로티는 대학에서 교육학을 전공했고 졸업할 때 “음악과 교육” 사이에서 방황했습니다. 이 문제로 고민하던 파바로티에게 아버지는 말했습니다. “두 의자의 사이를 크게 벌려 놓고 두 의자에 동시에 다 앉으려고 하면 바닥에 떨어진다. 평생을 보고 하나의 의자만 택하라. 그리고 그것은 네가 결정할 문제다.”
두 마리의 토끼를 동시에 잡을 수 없습니다.
선택권은 바로 우리 자신에게 있습니다. 선택은 근본적으로 자유롭습니다. 아마 처음부터 늘 최선의 선택을 하지는 못하겠지만, 매순간 선택을 해가는 과정에서 우리의 솜씨는 점점 향상되어 갈 것이고, 그에 따라 우리는 더 적극적으로, 더 자유롭게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인생은 선택입니다. 어떤 것에 우선 순위를 두고 선택하여, 집중하느냐에 따라 성공과 실패가 갈립니다. 좋은 선택, 그 다음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성공의 지름길입니다.
우리는 인생의 갈림길에서 어느 쪽을 선택할까 망설일 때가 많습니다. 올바른 선택이 쉽지 않습니다. 좋은 약이 입에 쓴 것처럼 의로운 선택은 아끼던 것, 좋은 것을 버리고 포기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 중에는 손가락으로 어느 쪽을 택할 까 방향을 왔다 갔다 하며 정하는 경우도 있고 제비뽑기로 선택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요나가 탄 배가 폭풍을 만나 위기에 빠졌을 때도 제비를 뽑았습니다.(욘1:7) 로마 군인들이 예수님 겉옷을 나누어 가질 때에도 제비를 뽑았고(마27:35), 가룟유다 대신 12제자 중 한 명을 뽑을 때도 제비를 뽑아 맛디아를 선택했습니다.(행1:26)
“사람이 제비를 뽑으나 일을 작정하기는 여호와께 있느니라”(잠16: 33)
제비뽑기는 여러 사람의 다른 의견을 하나로 통일하고 해결하는 데는 때로 유익합니다.
“제비뽑는 것은 다툼을 그치게 하여 강한 자 사이에 해결케 하느니라”(잠18:18)
우리가 선택할 때에 어떤 것을 선택하는 것이 지혜로운 선택이며, 하나님의 뜻인가를 살펴봅시다.
첫째, 우리는 선택할 때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먼저 구해야 합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6:33)
어떤 중국인과 미국 청년이 대화하는 중에 중국인이 물었습니다. "당신네 미국 사람은 아침에 일어나 제일 먼저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는 수염 깎고 세수를 합니다." 그러자 중국인은 "그래요? 우리 중국 사람은 제일 먼저 옷을 입는데요"하면서 서로 웃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사실 하루의 생활에도 무엇을 먼저 해야 하는가 하는 우선 순위와 무엇을 택할까 하는 선택의 문제가 있습니다. 이 우선 순위와 선택을 바로 할 때 그 날의 성패를 크게 좌우합니다. 더 나아가 인간의 삶에 있어서 일생의 우선 순위를 어디다 두어야 하는 것과 선택을 어떤 것으로 하느냐는 실로 누구에게나 중대한 문제입니다. 우리는 우선 순위를 세상적인 것이나, 육적인 것보다 하늘나라 일과 영적인 것을 우선해야 하고, 우리가 무엇을 선택할 때에도 어느 쪽이 주님을 더 기쁘시게 할까? 또는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를 먼저 생각하고 선택하여야 바르고 후회 없는 선택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신30:19, 왕상18:21)
많은 선교사들이 세상의 부귀영화를 버리고 복음 전하기 위해 십자가의 길을 선택합니다. 한국에 선교자사로 온 허버트라는 목사가 6,25동란시 북한 감옥에 갇혀 있었습니다. 하루는 그를 괴롭히는 인민군 간수가 성경을 한 손에 들고 감방으로 들어왔습니다. 그는 말하기를 “나는 공산당원이기 때문에 네가 믿는 예수를 멸시한단 말이야! 자, 어디 네 하나님에게 기도해서 그 하나님의 능력을 내게 보여 달란 말이다. 내가 한 손에는 성경을 들고, 다른 손에는 권총을 들고 있을 것인데, 어떤 손에 내가 성경을 들었는지 네 하나님께 가르쳐 달라고 해! 만약에 너의 대답이 틀리면 나는 권총으로 너의 머리를 쏘아버릴 것이다.” 험악한 간수는 이렇게 말하며 두 손을 등 뒤로 감추었습니다. 허버트는 머리를 숙이고 조용히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밖에는 눈보라가 휘몰아치고 있었습니다. “어디보자, 너는 네 하나님께 기도를 했나?” 간수가 물었을 때 허버트는 고개를 끄덕했다. “자, 그러면 그 하나님은 내가 어떤 손에 성경을 잡고 있는지 말해 주더냐?” 허버트는 조용히 그러나 분명히 대답했습니다. “나는 하나님께 그것을 여쭈어 보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무엇을 물어보았단 말이냐?” 허버트는 간수를 바라보며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나는 하나님께 두 가지를 기도했습니다. 첫째는 내 마음이 분노로 흔들리지 않게 해 주십시오 라고 했고,
둘째로는 당당히 죽을 수 있는 힘을 주십시오 라고 기도했습니다.”
이 말을 들은 간수의 얼굴은 일그러지며 총을 들었던 손은 무릎 앞으로 힘없이 내려졌습니다. 그리고는 후다닥 감방에서 뛰어 나가 버렸습니다.
둘째, 세상으로 통하는 넓고 쉬운 길 보다는 십자가의 길, 의의 길, 좁은 문을 선택해야 합니다.(마7:13-14, 눅13:24)
뉴욕의 한 유대인 여자가 예수님을 영접했습니다. 가족들은 그 여자로 하여금 새로이 얻은 믿음을 버리게 하려고 온갖 노력을 다했습니다. 유럽여행을 시켜주기도 하고 그리스도를 부인하기만 한다면 갖고 싶은 것이나, 하고 싶은 어떤 일이라도 다 하게 해 주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 여자는 조금도 흔들림이 없이 굳세게 버티었습니다. 마침내 여자의 부모는 딸을 위해 만찬회를 베풀고 모든 친구들을 다 불렀습니다. 아버지가 식탁에 서서 손님들에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오늘 밤 특별한 이유로 여러분을 이 자리에 모셨습니다. 우리 딸이 저 비천한 나사렛 사람을 따르기로 작정했습니다. 오늘 밤 내 딸은 마지막 결정을 내려야만 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를 단념하든가 그렇지 않으면 영원히 부모의 집을 떠나든가 해야 합니다.” 이 말에 놀라고 당황한 딸은 한동안 말문을 열지 못했습니다. 얼마후 딸은 피아노를 치면서 찬송가를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십자가를 내가 지고 주를 따라가도다. 이후부터 예수로만 보배 삼겠네....” 노래를 마친 딸은 자기 방으로 들어가서 옷을 갈아입고 가방을 꾸려 부모의 집을 떠났습니다. 세상과 하나님,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습니다.(마6:24)
어느 교회에서 결혼을 앞둔 사람들에게 질문지를 돌렸습니다. 질문지에는 직업, 배우자, 자녀, 친구, 가족, 교육, 교회, 여가, 자아실현 등 결혼 생활에서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예들이 적혀있었고 이 예들을 바탕으로 자신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순서대로 적어 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예로 든 것 중에는 한 가지 의도적으로 빼놓은 것이 있었습니다. 바로 하나님입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그 목록에 하나님을 적지 않았습니다. 어떤 사람은 교회와 하나님을 동일시해서 적지 않았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우리가 이런저런 일로 바빠 삶의 우선 순위가 바뀌게 되면, 하나님은 우리의 인생 목록에서 아예 빠지고 맙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는 것이 그리스도인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또한 예수님은 우리에게 무엇이 가장 중요한 것인지를 정확히 가르쳐 주고 계십니다.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마26:1) 여러분은 주님을 삶의 최우선 순위에 두고 살고 있습니까?
셋째, 생명력 있는 것을 우선적으로 선택해야 합니다.(신30:19-20, 잠11:30)
민수기17장에 보면 고달픈 광야에서 40년을 청산하고 가나안으로 들어갈 준비를 갖추고 있을 때 그들은 한 가지 결정해야 할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 열 두 지파중 한 지파를 선택하여 제사장을 뽑는 일이었습니다. 제사장은 모든 백성을 위해 제사를 드리고, 백성을 재판하는 권한을 가진 막중한 일이기 때문에 모든 지파가 서로 선출되기를 원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한 방법을 가르쳐주셨는데 열두지파의 대표자가 지팡이에 이름을 세기고 하루동안 제단의 법궤앞에 두게 했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날 아침 열두 지팡이 중에서 레위지파의 대표인 아론의 지팡이에만 움이 돋고 순이 나고 꽃이 피어서 살구열매가 열렸습니다.(레17:8) 결국 모세는 하나님이 보여주신 결과대로 이 지팡이의 소유자인 아론이 속한 레위지파를 제사장지파가 되게했습니다.
넷째,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첫째되는 계명입니다.(마22:36-40, 신6:5) 다른 어떤 계명보다도 이 계명을 우선적으로 순종해야합니다.
룻은 모압여인으로 결혼한 지 몇년 만에 남편도 죽고 이제 시어머니 고향으로 돌아가야 할 처지에 있었습니다. 인간적으로는 자기의 나라에 남아 새출발하고 싶었겠지만 그러나 그녀는 어떤 길이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길인가를 생각하고 단호히 시어머니를 따라 나섰습니다. 또한 롯은 인간관계에서 사랑과 신의를 철저히 실천했습니다. 그의 시어머니가 새출발하라는 권고도 물리치고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장사될 것이라 만일 내가 죽는 일외에 어머니와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룻1:17)라고 하며 외로움과 슬픔에 잠긴 시어머니를 봉양하였습니다. 그래서 후일 그녀는 메시아의 조상이 되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모든 우리의 삶에서 하나님 뜻을 먼저 앞세우며 살고 있는지 점검해 봅시다. 하나님 뜻대로 사는 자가 그리스도의 지체입니다.(마12:50, 롬15:32)
다섯째, 물질보다 더 가치있는 것을 선택해야 합니다.
저는 총각시절에 은행장 딸과 사귀였고, 이화여대 메이퀸과도 사귀었고, 오늘의 제 아내와도 사귀었습니다. 제가 아내를 선택한 가장 큰 이유는 아내의 신앙을 높이 평가하였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는 물질보다 더 소중하고 가치있는 것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물질보다 더 소중한 것은 시간입니다. 아무리 모든 것을 다 가졌어도 시간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물질보다 더 소중한 것은 지혜입니다. 지혜가 있으면 부귀영화는 저절로 뒤 따라옵니다. 솔로몬을 보십시오.
물질보다 더 소중한 것은 건강입니다. 건강을 잃으면 물질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물질보다 더 소중한 것은 사랑입니다. 가난하여도 사랑이 있는 가정은 천국이요, 부유하여도 사랑이 없는 곳은 지옥입니다.
물질보다 더 소중하고 가치 있는 것은 목숨(생명)입니다.
큰 저택이 불타고 있었습니다. 그 집 여주인은 겁에 질려 홀로 뛰쳐나왔다가 갑자기 불 속으로 용감하게 뛰어 들었습니다. 그리고 귀중품이 들어 있는 보석상자를 안고 나오면서 “아, 이제 살았다. 내 귀고리, 내 목걸이, 내 팔지, 모든 보석을 찾았다. 참으로 다행이다”고 외쳤습니다. 그런데 얼마 뒤 사람들이 “저기 보세요. 아이들이 불이 난 집의 창가에 있어요”라고 외쳤습니다. 그 소리를 들은 그녀는 “내 아이들! 내 아이들!”하고 소리쳤습니다. 그녀는 아이들이 불속에 있음을 알고 발을 동동 구르며 몸부림을 쳐보았지만, 이미 불은 아이들의 생명을 삼켜버렸습니다. 어머니는 물질에 눈이 어두워 아이들의 귀중한 생명을 건지지 못했습니다.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마16:26)
우리는 항상 어떤 양자 택일의 기로에 서게 됩니다. 그리고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서 그 결과는 상당한 차이가 납니다. 우리는 매일 순간순간 크고 작은 선택을 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어떤 기준으로 선택하며 살아가고 있나요?
먼먼 훗날 우리의 인생을 돌아볼 때, 그래도 나의 선택이 아름다운 것이었다고 생각할 수만 있다면 그건 참 행복한 일일 것입니다.
여러분이 지금 가고 있는 인생의 길은 좁은 길입니까? 넓은 길입니까?, 또 의인의 길입니까? 악인의 길입니까?(잠4:10-27) 검소와 절제의 길입니까? 사치와 낭비의 길입니까?
오늘날 일어나는 지구상의 많은 비극은 우리 인간이 스스로 택한 것입니다. 사람들은 ‘왜 하나님께서 살아계시다면 아파트에서 뛰어 자살하려는 사람을 막지 않으셨느냐,’‘왜 전쟁과 가난과 고통을 그대로 두고 보시느냐’ 하면서 ‘하나님은 안 계신다’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과 세계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지으시고 지으신 것을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름답고 좋은 세계를 지으셨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보는 죄와 불의, 추악과 저주, 절망과 죽음의 비극적 세계는 하나님께서 지으신 것이 아닙니다. 이는 아담과 하와가 스스로 택한 삶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을 반역하고 먹으면 죽는다고 한 선악과를 따먹고 이러한 비극적인 운명을 초래했습니다.
큰 호수는 물고기가 만들지 못합니다. 큰 호수는 하나님께서 만드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 호수에 사는 물고기가 오른편에 살 것인가 호수의 왼편에 살 것인가, 헤엄을 칠 것인가 그 자리에 머물 것인가 하는 것을 택합니다. 호수 그 자체는 운명지어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만들어 놓으신 것입니다. 그러나 호수 안에 사는 물고기가 어디에서 살 것인지, 움직일 것인지의 여부는 스스로 선택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 역시 많은 부분이 운명지어져 있지만 또한 우리 스스로가 선택해야 할 것도 많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어떻게 선택을 하셨을까요? 예수님은 완전한 하나님이시지만 또한 완전한 사람이시므로 예수님도 아담과 하와처럼 시험에 넘어질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자유가 없는 로봇과 같다면 시험할 필요가 없을테지만, 예수님은 우리와 같은 인간으로 이 땅에 오셨으므로 선택의 자유가 있으시고, 또한 시험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예수께서 사십주야를 금식하신 후 매우 굶주리셨을 때 마귀는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이 돌들에게 명하여 떡덩이가 되게 하라”고 하였습니다. 금식을 해본 사람은 금식 후 얼마나 배가 고픈지 압니다. 보통 사람들은 사흘만 금식해도 배고픔을 호소합니다. 예수님은 사십주야를 금식하셨으니 얼마나 주리셨겠습니까? 예수님이 마귀의 유혹에 넘어가 ‘금강산도 식후경인데 우선 먹자’는 마음을 택하셨다면 돌을 변하여 떡으로 만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마귀의 유혹에 그 마음을 빼앗기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고 단호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마귀는 예수님을 예루살렘 거룩한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것을 내려다 보게 했습니다. 그리고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여기서 뛰어 내리라 기록하였으되 하나님이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사 너를 지키게 하시리라 하였고 또한 저희가 손으로 너를 받들어 네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시리라”고 예수께 말했습니다. 이번에도 예수님은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귀는 물러서지 않고 높은 산에 올라가 온 천하 영광을 예수님께 보여주었습니다. 부귀와 영광을 보여주었습니다. 이 세상의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는 일본도 저렇게 잘 살고, 홍콩이나 싱가포르 사람들도 잘 사는데 꼭 예수님을 믿어야 잘 산다고 하느냐’고 우리를 유혹합니다. 마귀도 이 세상의 부귀와 영광을 우리에게 줄 수 있습니다. 마귀가 예수님을 유혹한 이 마지막 장면은 높은 산 위로 올라가 천하의 영광을 보이면서 “네가 만일 내게 절하면 다 네 것이 되리라”고 유혹하였습니다. 마귀를 따라가면 마귀가 부귀와 영광을 줍니다. 그러나 우리는 영안을 빼앗기고 영의 귀를 빼앗기며 깨닫는 마음 역시 빼앗겨 결국 지옥에 떨어지게 됩니다. 이 세상의 부귀와 영화, 공명이란 잠시 있다가 사라지는 안개와 같습니다. 마귀는 잠시 있는 것을 취하게 하고 영원한 하나님을 버리게 하기 위해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섬기고 주님을 따라가면 하나님은 현세에서 뿐 아니라 내세에서도 부귀와 영광을 주십니다.
예수님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 염려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염려하는 것이요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더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모든 일에 항상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진실한 그리스도를 통한 부귀와 영화입니다.
우리에게는 절망할 자유와 희망할 자유가 있습니다. 믿을 자유도 있고 믿지 않을 자유도 있습니다. 맡길 자유도, 내가 움켜쥐고 있을 자유도 있습니다. 영원히 살 자유도, 영원히 멸망할 자유도 있습니다. 둘 중하나를 선택할 자유도 있습니다. 어떤 것이든 뜻대로 선택할 자유도 있습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어떤 것을 선택하시겠습니까?
우리가 늘 알아야 될 것은 삶의 큰 틀은 운명지어져 있지만 그 안에서 우리는 선택의 자유가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부모님은 우리가 태어난 시대와 지역은 운명지어져 있으므로 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예수님을 선택할 것인지, 세상을 선택할 것인지는 우리가 정해야 합니다. 우리가 복음전도를 받았을 때 예수님을 택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택하지 않았을 때 내세에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는 그 어떤 변명도 할 수 없습니다. 복음을 듣고 난 이후 내가 하나님을 믿을 것이냐 믿지 않을 것이냐, 성령께 순종할 것이냐 안 할 것이냐 하는 것은 스스로가 선택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부름 받은 사람은 많되 택함 받은 사람은 적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불러 주셨는데 대답을 하느냐 안 하느냐는 우리에게 달린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 사람을 통해 여러 모양으로 우리를 불러주셨을 때 우리가 ‘예’하고 따라 왔으므로 우리는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부르셔도 대답하지 않으므로 택함을 받지 못했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선택하든 그 이후의 결과는 우리의 책임입니다.
하나님의 소원은 우리가 생명을 택하고 사망을 택하지 않는 것, 복을 택하고 저주를 택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우리의 후손들이 살기 위해 생명을 택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며 그 말씀을 순종하라고 간청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도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생명과 사망과 복과 저주를 함께 놓았는데 너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 보혈을 통해 죄악과 절망 대신 용서와 의와 사랑을 택하고 세속과 마귀 대신 성령과 거룩함을 택하고, 병과 고통 대신 치료와 건강을 택하고, 저주와 가난 대신 아브라함의 축복과 예수 그리스도의 형통을 택하고, 죽음과 지옥과 영원한 멸망 대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부활과 천국과 영광을 택하라’
하나님의 자녀된 우리들은 정말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잘 택하였습니다. 우리는 영원히 후회하지 않을 길을 택한 것입니다. 우리는 복이 많은 사람들입니다. 복이 없는 사람은 이 길을 택하지 못합니다. 복이 있어야 예수님을 믿을 수 있습니다. 우리의 운명은 우리 선택의 갈림길에 놓여 있습니다.
우리 앞에는 항상 두 길이 있습니다. 생명의 길과 사망의 길, 하나님의 길과 세상의 길이 있습니다. 생명의 길은 좁고 험합니다. 마태복음 7장 14절에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을 섬기고 사는 것은 쉽지 않으므로 그 길을 찾는 사람이 적습니다. 여러 가지 절제를 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게다가 하나님의 계명을 따라 살기는 더욱 어렵습니다. 그래서 세상의 많은 사람들은 이 길을 택하지 않고 쉬운 길, 넓은 길을 택합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좁고 험한 이 길을 택했지만, 예수님을 믿고 막상 안에 들어와 보면 이것이 참으로 넓고 좋은 길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을 이기고 하나님의 성령과 사는 것보다 더 의와 평강과 희락과 믿음, 소망, 사람이 넘치는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 안에 들어와 보기 전에 좁은 길을 걷지 못하고 세상으로 나갑니다. 인간적이고 세상적인 길은 얼핏 보아서는 넓고 편합니다. 그러나 마태복음 7장 13절에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어떤 길을 갈 것인가의 선택은 우리에게 달려 있는 것으로 남을 원망할 수 없습니다.
미국에 아주 친한 두 친구가 있었습니다. 하루는 두 사람이 술집으로 가다가 교회 앞을 지나게 되었는데 그곳에는 ‘오늘 저녁 설교는 죄의 값은 사망입니다’라는 설교제목이 붙어 있었습니다. 그것을 본 한 친구는 “교회에 가보자”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나머지 한 친구는 “술 먹고 내 마음대로 자유롭게 사는게 얼마나 좋은데, 나는 싫다”고 말했습니다. 결국 한 친구는 교회로, 다른 한 친구는 술집으로 갔습니다. 세월이 지나 당시 술집으로 갔던 사람은 살인을 저지르고 중죄인으로 감옥에 갇혔습니다. 어느 날 신문에 그의 옛적 친구가 신문에 크게 보도된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놀라서 자세히 보니 함께 가다가 교회가겠다고 하던 친구인 클리블랜드가 미국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는 보도였습니다. 사람의 길이 한 순간의 선택으로 인해 이처럼 달라질 수 있습니까? 똑같이 청년시절에 술 먹고 방탕했는데, 하루 저녁의 갈림길에서 한 사람은 교회로, 다른 한 사람은 술집을 선택했습니다. 오랜 세월이 지난 후 교회를 택했던 사람은 대통령으로, 술집을 향했던 사람은 죄인으로 감옥에 갇히는 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마태복음 6장 29~33절에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는 말씀과 같이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이 땅에 살면서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면 다른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돌보아 주십니다.
인생의 성공과 실패는 이 선택여하에 달리게 됩니다. 지혜롭게 선택하면 성공과 행복이 뒤따르고 선택을 잘못하면 실패와 불행이 따릅니다. 아담과 이브는 선악과를 따먹을 수도 있고 순종하여 안 먹을 수도 있는데 선택을 잘못하여 인간에게 죽음이 찾아왔습니다. 사실 인간의 매일의 생활은 선택으로 이루어집니다. 무슨 옷을 입고, 무엇을 먹으며, 어떤 집을 사고, 어떤 물건을 살까? 어떤 학교로 진학하고 어떤 배우자와 결혼하며 무슨 사업을 하고 어떤 지도자를 택하여 투표할까? 그런데 이 선택의 자유는 결국 책임이 따릅니다.
모세는 공주의 아들로서 호화롭게 지내느냐? 압박 받는 내 민족과 운명을 같이하고 살 것이냐는 두 갈림길에서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히11:24-26)
아브라함의 조카 롯은 목자들의 싸움으로 넓은 들과 골짜기를 선택할 때 푸른 풀만 보고 소돔과 고모라 사람들의 악함을 염두에 두지 않았으므로 불행한 일을 당합니다. 솔로몬에게 장수의 축복과 부귀의 축복에서 무엇을 줄까 물었을 때 지혜의 축복을 달라고 하자 장수와 부귀의 축복도 더하여 주셨습니다.
에서는 장자의 명분과 팥죽 한 그릇의 선택에서 굶어죽게 되었는데 장자의 명분이 내게 무슨 상관이냐며 팥죽 한 그릇을 선택하고 마음으로 여호와를 원망하였습니다.(잠19:3)
다니엘은 우상의 제물로 바쳐진 왕의 진미를 먹지 않는 것을 선택하였고 사자의 밥으로 던지워지는 것을 알면서도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것을 선택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구하셨습니다. 다니엘의 3친구 사드락 메삭, 야벳느고는 느부갓네상 왕이 세운 황금우상에게 절하지 아니한 결과 풀무불에 던지워졌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죽지 않았고 하나님이 살리셨습니다.
롯은 시어머니 나오미가 고국으로 돌아갈 때, 친정으로 돌아가지 않고 고부의 의리를 택하였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롯을 어떻게 축복하였는지 우리는 구약성경 롯기를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 앞에는 생명의 길과 사망의 길, 축복의 길과 저주의 길, 선한 목자와 삯꾼 목자의 길(요10:11-14)이 놓여 있습니다. 지금 여러분이 가는 길은 어느 길을 가고 있습니까?
“엘리야가 모든 백성에게 가까이 나아가 이르되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두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좇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좇을 지니라 하니...”(왕상18:21)
여러분은 하나님과 바알, 하나님과 세상(약4:4), 하나님과 재물(마6:24) 중 무엇을 선택할 것입니까? 둘 다 섬길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어떤 것 중하나를 선택할 때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먼저 구하고, 성경말씀을 중심으로 선택하고, 어느 것이 하나님의 뜻이고, 하나님께서 더 기뻐하실 것인가를 생각하여 선택할 때 자연히 모든 선택이 바르게 됨을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우리 주위에는 많은 사이비종교가 있습니다. 어떤 교회를 선택해야 합니까? 대개 사이비종교에 빠지는 사람들을 보면 자기 의를 앞세우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인간의 의를 앞세웁니다. 사람이 보기에 바르게 보이나 필경은 사망의 길이 있습니다. 사도바울도 한 때는 그리스도인을 핍박하고 잡으러 다니면서도 자기가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의를 행한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습니다. 천국이 저희 것입니다. 심령이 부한 자란 자기 주장, 자기 가치관, 자기 철학, 자기 가치관, 자기 의가 가득한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에게는 진리가 들어갈 자리가 없습니다. 인본주의자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합니다. 그들은 인간중심으로만 생각하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들의 마음에 들어갈 자리가 없습니다. 사이비종교 신자들과 인본주의자들은 선입견과 편견 때문에 진리를 받아들일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선택을 할 때 어느 쪽이 성령의 9가지 열매 즉 사랑, 희락, 화평, 온유, 절제, 자비, 양성, 충성, 오래참음의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길인가를 살펴보고 택해야 합니다.
보험회사에 근무하는 베벌리 셰아(Beverly Shea)라는 한 월급쟁이가 있었습니다. 1930년대 당시 미국은 극심한 불황으로 회사마다 혹독한 구조조정과 임금삭감에 시달렸습니다. 어느 주일날 아침, 그는 찬송가를 연습하기 위해 피아노 앞에 앉았습니다. 그런데 회사문제로 인해 좀처럼 마음의 안정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때 셰아는 건반 위에서 조그마한 종이쪽지 하나를 발견했습니다.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이 세상 부귀와 바꿀 수 없네..."
그것은 어머니 레아 밀러(Rhea Miller)가 괴로워하는 아들을 위해 적어놓은 시였습니다. 어머니는 아들이 삶의 우선 순위를 분명하게 정하길 원했습니다. 셰아는 이 시를 읽고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이 시에 곡을 붙여 찬송을 만들었습니다. 이 곡이 바로 그 유명한 찬송가 102장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입니다. 한 번 함께 불러보겠습니다.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이 세상부귀와 바꿀 수
없네 영 죽을 내 대신 돌아가신 그 놀라운 사랑 잊지못해
(후렴)
세상 즐거움 다 버리고 세상 자랑 다 버렸네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예수밖에는 없네
어머니의 지혜와 사랑이 한 젊은이의 방황을 멈추게 했습니다. 어머니는 자녀의 교통순경입니다. 그는 후에 세계 제일 가는 엄청난 부자가 되었습니다. 그가 어떻게 그렇게 부자가 될 수 있었을까요? 그의 삶의 목표가 바로 영적인 것이었고, 하나님을 위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영적인 것에 관심을 먼저 갖고 하나님의 일을 구할 때 곧 우리의 인생을 책임져 주십니다.
이제는 우리의 가치관이 달라져야 합니다 땅의 것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위의 것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땅의 것을 바라볼 때 이기심, 분노, 시기, 질투, 미움, 욕심으로 가득 차서 실패의 인생을 살아가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위의 것을 바라볼 때 하나님께서 붙들어 주시고 하나님의 축복으로 우리의 인생을 인도하십니다.땅의 것을 바라보고 인생을 살면 낙담하고 실패하고 맙니다. 이제는 위를 바라보십시오 육적인 성공 너머에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일을 위해 새로운 비전을 마음속에 품고 나아가기를 바랍니다.
어떤 사람이 배를 타고 항해하다가 풍랑을 만났습니다. 배가 파선되고 배에 탔던 모든 사람이 다 죽고 그 사람만이 간신히 어떤 섬에 도착하였답니다. 그를 본 섬에 사는 토인들이 1년간 왕으로 모시겠다고 하였습니다. - 이하 생략-
위가 있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하나님, 이번 일만 잘되면 주일에 빠지지 않고 예배드리겠습니다” “자녀가 어려서 지금은 힘이 듭니다.자녀를 키울 때까지만 기다려 주십시오” 그것은 인생을 실패하는 삶의 모습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 이렇게 말씀하십니다.“네가 먼저 예배 드려라.그러면 너의 삶을 책임지리라” “네가 먼저 영적인 것에 초점을 맞추는 삶을 살아라. 그러면 내가 너에게 나머지 삶의 일들을 인도하겠다”
우리가 영적인 것을 먼저 구할 때 나머지는 하나님이 채워주신다는 말씀이십니다. 사업을 책임져 주시는 분이 누구입니까? 아이를 책임져 주시는 분이 누구입니까? 우리에게 시간과 기회를 줄 수 있는 분이 누구입니까? 오직 하나님이십니다. 예를 들어 밥을 짓는다고 합시다. 첫째로 맛있고 좋은 쌀이 있습니다.둘째로 비싼 솥이 있습니다. 셋째로 물이 있고, 넷째로 가스레인지가 있다고 합시다. 밥을 짓기 위한 모든 재료가 준비되어 있습니다.그런데 밥을 할 때 아무리 좋은 재료가 다 있다고 한들 순서가 잘못되면 맛있는 밥을 지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물은 붓지 않고 쌀만 불에 올려놓고 밥을 짓는다면 분명 새까맣게 타고 말 것입니다 기대했던 맛있는 밥을 먹지 못할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재료가 없어서 그렇습니까? 아닙니다. 재료는 최고급이었습니다. 그러나 순서가 틀렸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삶의 순서가 중요합니다. 먼저 해야할 것은 해야 아름다운 내일을 기다릴 수 있습니다. 인생의 모든 것이 먼저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지 않고 말씀 가운데 서지 않기 때문에, 영적인 것에 삶의 목표를 맞추지 않기 때문에 우리의 삶이 일그러지는 것입니다. 하나님만이 우리의 내일을 아시는 분이십니다.하나님만이 우리의 삶을 책임질 수 있는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미래를 영광스럽게 준비하셨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영적인 것에 우선 순위를 두고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는 것입니다.순서를 어기면 삶이 무질서해지고 마음이 정리정돈이 안되고 하루종일 어수선해 집니다. 우리가 매일 매일 살아가는 계획도 확실한 우선 순위를 쫓아야만 합니다. 일생을 살아가는데도 삶의 우선순위를 정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삶을 살아갈 때 어떻게 우선 순위를 정하고 살아가면 좋을까요?
첫째로, 몸과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먼저 할 것 먼저하고 나중 할 것 나중 할 줄 알아야지 나중 할 것을 먼저하고 먼저 할 것을 나중하면 혼란이 다가오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에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 하시리라" 순서를 올바르게 하면 삶의 다른 모든 필요한 것은 자연적으로 이루어 주겠다고 말씀한 것입니다. 먼저 단추를 올바르게 끼워 놓으면 끝까지 올바르게 단추가 끼워지는데 첫 단추 잘못 끼워 넣으면 끝까지 옷이 삐뚫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순서를 잘 정하고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의 가장 중요한 일은 하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이보다 더 중요한 일이 없습니다. 마태복음 22장 37절로 38절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라고 말했습니다.
왜 우리가 하나님을 먼저 섬겨야만 할까요? 그것은 하나님은 우리를 지으신 아버지이시기 때문인 것입니다. 우리 근본이 하나님께 있고 하나님이 우주의 주재자되시고 중심이 되시고 역사의 지배자 되시고 우리의 생사화복을 주장하시는 아버지가 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아버지를 먼저 섬기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이사야 44장 24절에 "네 구속자요 모태에서 너를 조성한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는 만물을 지은 여호와라 나와 함께 한 자 없이 홀로 하늘을 폈으며 땅을 베풀었고"라고 그렇게 말씀했습니다. 절대 주권자요, 유일무이한 우리를 지으신 우리의 아버지시니 우리가 하나님을 먼저 섬기는 일은 마땅한 일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 땅에 사는 동안 우리를 위로해 주실 분도 하나님이시오, 우리가 어려울 때 우리를 도와주실 이도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위로자 되신 하나님을 먼저 우리가 섬겨야 우리가 어려울 때 위로 받을 수 있고 우리가 도움이 필요할 때 먼저 하나님께 의지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하나님을 먼저 섬겨야 우리가 어려움을 당할 때 하나님의 도움을 바랄 수 있습니다.
시편 33편 20절에 "우리 영혼이 여호와를 바람이여 저는 우리의 도움과 방패시로다" 하나님은 우리를 도와 주시고 우리를 지켜주시는 방패가 되시기 때문에 하나님을 먼저 섬기는 것은 마땅한 일인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 나라를 먼저 섬겨야 될 것은 이 세상을 떠난 후에 가야 될 곳이 그곳입니다. 사람은 영원히 살지 못합니다. 우리는 다 궁극적으로 죽음을 향해서 달려가고 있습니다. 그 죽음이 언제 다가올지 우리는 알지 못하지요. 그러나 죽음 저 건너편에 갈곳이 어디입니까? 하늘나라 아닙니까?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은 하늘나라이기 때문에 우리가 궁극적으로 가서 영원히 살 처소가 하늘나라인 이상은 하늘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먼저 구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인 것입니다. 하나님을 우리 삶의 가장 공경할 자로 우리가 모시고 살아야 됩니다. 시편 91편 14절로 16절에는 하나님을 공경하고 살 때 하나님의 마음을 감동시키는 겁니다. 하나님도 감동을 하십니다. 하나님을 먼저 섬기고 사랑하는 자 때문에 감동하면 하나님이 가만 계시겠어요?
시편 91편 14절로 16절에 "하나님이 가라사대 저가 나를 사랑한즉 내가 저를 건지리라 저가 내 이름을 안즉 내가 저를 높이리라 저가 내게 간구하리니 내가 응답하리라 저희 환난 때에 내가 저와 함께 하여 저를 건지고 영화롭게 하리라 내가 장수함으로 저를 만족케 하며 나의 구원으로 보이리라 하시도다" 감동하시는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여러분을 하나님을 먼저 섬기면 하나님께서는 정말 여러분의 공경하는 마음을 받으시고 감동하셔서 주님께서 그 손을 펴서 여러분에게 복을 내려 주시는 것입니다.
욥기 22장 21절에 "너는 하나님과 화목하고 평안하라 그리하면 복이 네게 임하리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평안이 있어야 복이 있지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전쟁상태에 있으면 우리에게 평안이 있을 수도 없고 복이 있을 수도 없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제자가 되기 전에 먼저 자신의 부친을 장사하게 해 달라고 요청했을 때 주님은 “죽은 자들로 저희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좊으라”하셨습니다.(마8:22)
가사의 일보다 하나님이 일이 우선입니다.
둘째로 우리 삶의 우선 순위는 가정과 가족입니다. 오늘날 나는 너무 바쁘기 때문에 가정이나 가족을 돌볼 시간이 없다고 말하는데 여러분 무엇 때문에 바쁩니까? 무엇 때문에 직장에 나가고 무엇 때문에 사업을 합니까? 가정과 가족을 보존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목적과 방편이 서로 뒤바뀌는 안되잖아요. 우리의 삶의 뿌리는 가정입니다. 가정 없이 홀로 태어난 사람 한사람도 없습니다. 우리는 다 가정에서 태어나서 자라났습니다. 가정이 우리 삶의 뿌리인 것입니다. 가정이 불안하면 삶 전체가 불안합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있는 특이한 화병이 걸렸다는 시부모들이 많은데 고부갈등이 걸리면 마음에 화병이 걸리지요. 폭력남편, 방탕한 자녀문제, 경제문제 이러한 것들이 가정을 뒤흔들어 놓는 것입니다. 여러분 가족 간에 화목하지 못하면 행복과 평안은 없습니다. 아무리 좋은 집을 짓고 기름진 음식을 먹으며 호의호식한다 해도 가정이 평안하지 못하면 결코 행복이 없습니다. 비록 좋은 집에 살지 못하고 좋은 옷을 입지 못하고 좋은 음식을 못 먹어도 가정에 서로 사랑하고 평안하게 살면 행복은 거기에서 출발하는 것입니다. 잠언서 17장 1절에 "마른 떡 한 조각만 있고도 화목하는 것이 육선이 집에 가득하고 다투는 것보다 나으니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른 떡 한 조각을 먹고도 가정에 화목하고 사랑하며 사는 것이 쌀밥에 고깃국 먹어도 가정에 화목과 사랑이 없으면 행복은 없는 것입니다. 불행한 결혼생활은 부부와 자녀뿐 아니라 직장의 업무효율과 육체적인 정신적인 건강과 재정상태와 수면까지도 파괴하는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가정이 화평하기 위해서는 먼저 부모를 공경하고 불효하지 말아야 됩니다. 여러분 부모공경하고 부모하고 싸우면 안됩니다. 부모하고 싸우고 난 다음에 그 마음속에 평안과 행복이 없습니다. 부모하고 싸우고 난 다음에 하나님 앞에 바로 설 수가 없습니다.
출애굽기 20장 12절에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너의 하나님 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고 말했습니다. 또 부부간에 이해와 동정과 사랑과 화목과 평안을 위하여 노력하고 기도해야 되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5장 33절에 "그러나 너희도 각각 자기의 아내 사랑하기를 자기 같이 하고 아내도 그 남편을 경외하라"
가정에 화평을 위해서는 자녀들과 대화를 하고 친밀하십시오. 이 세상에 가장 가까운 골육친지가 자식 아닙니까? 여러분 자식하고 불화하면 자식도 불행하고 부모도 불행하지 않습니까? 가장 가까운 것이 자식입니다. 에베소서 6장 4절에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고 했습니다. 자식농사 잘못 지어놓고 난 다음 나중에 가슴을 치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자식 농사가 그만큼 나 개인의 행복에도 절대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이렇기 때문에 여러분께서 자식들과 좋은 관계를 가져야 되는 것입니다.
셋째, 그 다음 삶의 우선순위는 무엇일까요? 건강에 관심을 가지고 살아야 됩니다. 돈을 잃으면 조금 잃은 것이고 명예를 잃으면 절반을 잃은 것이고 건강을 잃으면 다 잃어버립니다. 삶의 성공과 행복의 기초가 건강입니다. 그러나 건강은 건강할 때 지켜야 되는 것입니다. 병들고 난 다음에 건강하려고 발버둥치지 말고 건강할 때 건강을 지키면 늘 건강하게 살수 있는 것입니다. 세계 장수촌에 가보고 그 특징 세 가지를 발견했는데, 세끼 소식(少食)을 한다. 배불리 먹지 않고 배가 부르기 전에 숟갈 놓아야 돼요. 그리고 부지런히 일한다. 늘 몸을 움직여 활동을 하고 그리고 화목한 가족관계를 가진다. 이 세 가지가 장수하는 사람들의 전반적인 비결이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건강을 얻기 위해서 우리 삶을 절제하고 살아야 됩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은 술, 담배, 무질서한 삶을 살지 말아야 됩니다. 술이 얼마나 나쁩니까? 에베소서 5장 18절에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고 말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건강을 위해서는 절제할 줄 알아야 됩니다. 술, 담배, 무질서한 삶을 버려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3장 16절로 17절에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가장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길은 우리가 의롭게 살고 진실하게 살고 거룩하게 사는 것이 가장 행복한 길입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괴로움을 갖다 주는 것이 아니라 가장 평안하게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길이 의와 진실함과 거룩함으로 사는 길인 것입니다. 건강은 그냥 있는 다고 건강이 되어지는 것이 아니고 건강을 얻기 위해서 노력해야 됩니다. 올바른 식생활을 해야 됩니다. 과식하지 말고, 너무 고기 많이 먹어서 콜레스테롤이 몸에 꽉 들어차서 동맥경화증 일으키지 말고 식사를 올바르게 해야 됩니다. 채식도 많이 하고 소식해야 합니다. 무질서한 삶이 하나님이 만들어 놓은 육체의 건강을 해칩니다. 올바른 식생활과 적당한 운동과 청결한 삶. 이런 것 노력이 있어야 우리가 건강장수 할 수 있습니다.
넷째로, 삶의 우선 순위는 학업과 직업과 사업입니다. 우리 학업과 직업과 사업이란 하나님의 주신 것입니다. 학생은 공부해야 합니다. 학생 여러분! 만약 F-4 꽃미남과의 데이트와 친구와의 도서관중 어느 쪽을 택해야 합니까? 베드로전서 4장 10절에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각양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 직장과 직업이란 청지기 사업인 것입니다. 여러분 직업이란 단지 생계의 방편만은 아닙니다. 물론 직업을 통해서 우리가 먹고삽니다.
이제 막 신부 입장의 웨딩마치가 울리고 있는데 기다리던 신랑이 갑자기 밖으로 달아났습니다. 식장은 소란해졌고 주례 목사는 당황하여 어찌할 바를 몰랐습니다. 축하객들의 형편도 말이 아니었다. 몇몇은 뿔뿔이 흩어져버렸고 신부는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약 30분이 지난 후였습니다. 헐떡거리며 되돌아온 신랑의 예복은 검댕과 물기로 젖어 있었습니다. '목사님 죄송합니다. 주례를 진행해 주십시오'. '아니, 신랑은 어딜 갔다 오는 길인가?' 의아한 목사가 물었습니다. '네 목사님. 저는 소방수입니다. 신부 입장과 동시에 화재 싸이렌이 들렸는데 가만히 멈춰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제는 다 진화가 되었습니다' 하는 것입니다. 축하객들은 모두 박수를 보냈고 칭찬해마지 않았습니다. 조금은 웃음을 자아내게 하는 이야기이지만 이 소방수의 마음에는 우선순위가 확실하게 세워져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도 우리의 마음 속에 주님과 그의 일에 대한 우선 순위가 이 소방수만큼만 확실하게 세워져 있다면 아마도 하늘나라의 일은 더 쉽게 전파되게 될 것이라고 봅니다
데살로니가후서 3장 10절에 "우리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도 너희에게 명하기를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 하였더니"고 했습니다. 학생은 공부하지 않았으면 먹지도 말아야 합니다. 직업을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이 일용할 양식을 주시기 때문에 우리가 직장에 충실해야 됩니다. 그리고 직장이란 것이 미래의 꿈을 가꾸는 것입니다. 내가 의사가 되겠다. 변호사가 되겠다. 약사가 되겠다. 꿈이 있지 않습니까? 이것은 직업을 통해서 내 꿈을 이루는 것이기 때문에 직업은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 꿈이 이루어질 때 자기만족과 성취가 있는 것입니다. 골로새서 3장 23절로 24절에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 이는 유업의 상을 주께 받을 줄 앎이니 너희는 주 그리스도를 섬기느니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직장을 통해서 주님을 섬긴다고 하고 있으니까 하나님을 올바르게 섬길 수 있도록 우리가 능력에 맞도록 직업과 직장을 하나님께 구하게 되시기를 원합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삶의 우선순위를 무시하고 살아갑니다. 그렇게도 중요한 삶의 우선순위를 말입니다. 그래서 시간이 지난 후에 사람들은 후회의 눈물을 흘리는 것입니다. 오늘 삶의 우선 순위의 표본을 여러분께 말씀드렸습니다. 첫째, 하나님 둘째, 가정. 셋째, 건강. 넷째, 직업과 사업 다섯째, 취미와 여가라고 했습니다. 이 순위가 뒤바뀌어서도 안됩니다. 선택할 때도 어느 것이 먼저인가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고 생명을 얻되 넘치게 얻으며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는 삶의 우선순위를 확실히 정해놓고 매일같이 그 우선순위를 읽고 내가 삶의 순위를 따라서 살고 있느냐 안 살고 있냐를 살펴서 자기를 체크하면서 살게 될 때 여러분의 삶이 의미가 있고 가치가 있고 성공적인 인생을 살게 될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5장 13절에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는 우리가 자유를 가졌으되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 이 세상 자랑을 따라가는 길을 걸어가지 말고 믿음과 소망, 사랑의 길을 택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인간은 잘되면 자기 탓이요 잘못되면 남의 탓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모든 길은 자신이 선택한 것이고 자기의 잘못된 선택을 남의 책임으로 돌릴 수 없습니다. 우리 각자는 잘못된 선택을 회개하고 올바른 선택을 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선택하고 하나님 섬기는 것을 택해야 합니다. 오늘 이 시간 하나님을 택하고 예수님을 택하고 말씀을 택하여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먼저 구하는 삶을 택하십시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일생에 우리와 함께 하셔서 우리의 영혼이 잘되고 범사에 잘되며 강건할 뿐 아니라 천국 영생을 얻어 영원한 영광으로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 부활과 생명의 하나님! 우리는 이 세상에 태어나 이미 운명지어진 것도 있지만 우리 삶의 많은 것을 우리가 선택할 자유가 있음을 압니다. 운명지어진 것은 하나님께 맡기고 우리가 선택해야 하는 길에서 언제나 하나님을 택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택하며, 말씀을 택하고 천국을 택하여 영생을 얻게 도와주시옵소서. 그래서 영원히 후회하지 않는 삶을 사는 우리들이 되도록 주께서 은혜를 베풀어주옵소서. 우리는 인생을 혼돈가운데 살 때가 많습니다. 먼저 할 것 나중하고 나중 할 것 먼저해서 삶이 실타래처럼 이리저리 엉켜지고 개인과 가정도 불행하고 사람들과 사이에도 서로 알력과 다툼이 생기고 맙니다. 하나님 아버지여 우리의 삶을 확실히 우선순위를 정해 놓고 정리정돈해서 삶으로 행복하게 살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며 살게 하여 주옵소서. 저희들의 인생이 불쌍하고 어리석은 면이 많으나 그러기에 아버지를 더욱 찾게 하시고, 아버지께 더욱 무릎 꿇어 기도하게 하심을 감사하나이다 세상 속에 굴하지 않게 하시며 세상과 타협하지 않게 하시고 모든 것의 우선이 우리 하나님이심을 저희가 잊지 않게 하소서.구리 은혜교회가 날로 날로 부흥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