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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후 5: 7 믿음으로 행하고 - 고후 5: 9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
고후 5: 7 믿음으로 행하고 -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행하지 아니함이로라. (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하지 아니함이로라 )
그러므로 우리는 주 예수님과 교제하되 보는 것에 근거하지 않고 오직 믿음으로 한다.
1]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믿음의 선조들은 모두 이와 같은 신앙을 가졌다.
* 히 11: 1-12 – 1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2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 3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4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언하심이라. 그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지금도 말하느니라. 5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겨졌으니 하나님이 그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는 옮겨지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 6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7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이지 않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준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따르는 의의 상속자가 되었느니라. 8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 9 믿음으로 그가 이방의 땅에 있는 것 같이 약속의 땅에 거류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 및 야곱과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 10 이는 그가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라. 11 믿음으로 사라 자신도 나이가 많아 단산하였으나 잉태할 수있는 힘을 얻었으니 이는 약속하신 이를 미쁘신 줄 알았음이라. 12 이러므로 죽은 자와 같은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하늘의 허다한 별과 또 해변의 무수한 모래와 같이 많은 후손이 생육하였느니라.
2] 보는 것으로 행하지 아니함이로라.
본 절은 그리스도와의 교제의 친밀성이 재림 이후의 완전함에 못미친다는 현실적인 경험이기에 세상에서 육을 입고 사는 삶이란 그리스도를 눈으로 볼 수 있는 세계의 삶이 아니라 믿음으로 사는 세계의 삶이다.
* 고전 13: 12 -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사람의 눈으로 보통의 물질은 다 볼 수 있다. 그러나 물질을 이루고 있는 원자는 보이지 않는다. 그러므로 사람이 보이지 않는 부분을 볼 수 있기 전에는 이 물질 속에 내재하는 힘을 사용할 줄 몰랐다.
우리는 가까운 것은 잘 보지만 먼 것은 잘 보지 못한다. 먼데 있는 것을 볼 줄 알아야 바로 살 수 있다. 우리가 이 지구에 산다고 땅만 보면 안 된다. 눈을 들어 하늘을 보아야 한다. 눈으로 볼 수 없는 광범한 세상을 볼 줄 알아야 바로 살 수 있다.
중요한 것은 물질세계는 맨눈으로 보이나 영적 세계는 보이지 않는다. 세상은 보이지만 온 우주를 창조하신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볼 줄 알아야 한다.
* 고후 4: 18 -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
그러면 모든 것을 보기 위해 갖추어야 할 조건은 무엇일까?
(1) 거듭나야 한다.
주님은 니고데모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 요 3: 3 -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산상보훈에서는
* 마 5: 8 -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2) 높은 산으로 올라가야 한다.
* 사 40: 9 - 아름다운 소식을 시온에 전하는 자여! 너는 높은 산에 오르라. 아름다운 소식을예루살렘에 전하는 자여! 너는 힘써 소리를 높이라. 두려워하지 말고 소리를 높여 유다의 성읍들에게 이르기를 너희의 하나님을 보라 하라.
우리의 심령이 고상한 수준에 이르러야 그리스도의 수준에서 모든 것을 볼 수 있고, 성결과 의와 진실과 공명정대의 수준에 올라가게 될 때 바로 볼 수 있다.
(3) 믿음의 경지에 도달하여야 한다.
사람은 보이는 것만 보고, 보이지 않는 것은 돌아볼 줄 모른다. 보잊 않는 하나님을 경외할 줄 모른다. 현재 눈앞의 영달만 보고 장래가 어떻게 될지는 알지 못한다.
* 히 11: 27 - (모세는) 믿음으로 애굽을 떠나 왕의 노함을 무서워하지 아니하고 곧 보이지 아니하는 자를 보는 것같이 하여 참았으며
육신의 눈으로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을 믿음으로 알고 경외하면서 육신의 명령을 거절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보면서 이런 세상에서 일어나 빛을 발하여야 한다.
3] 날마다 새로워지는 생활 : 박조준 목사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 새 번역에 보면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고 있으나 속사람은 나날이 새로워 지고 있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사도 바울은 자기 자신의 체험을 말하고 있습니다. 사실 그의 겉사람, 곧 육체는 점점 후패하여 갔습니다. 그 원인이 몇 가지 있었습니다.
우선, 그는 항상 과로하여 그 몸이 지쳐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그 몸에 가시 곧 그를 괴롭히는 병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 위에 그는 종종 핍박을 받아서 그 몸에 상처를 입은 것도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이미 생각한 대로 고린도후서 1장 8절 이하에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받아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우리 마음에 사형선고를 받은 줄 알았다”고 했습니다.
고린도후서 11장 23절 이하에 보면 좀더 구체적으로 말했습니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았다”고 했습니다. 그러니 말하자면 그 몸이 골병이 들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세월이 지나는 동안에 점점 늙어가니 쇠약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실 이것은 사도 바울뿐만 아닙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가는 길입니다. 이 자리에 할머니들도 눈에 띄는데 아마 50년 전에는 아주 젊은 부인들로서 허리가 곧고, 탄력이 있고, 시력도 좋고, 목소리가 아름답고 활기가 넘쳤을 것입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는 동안에 곧던 허리는 굽어지고, 머리는 희어지고, 얼굴엔 주름살이 생기고, 눈은 어둡고, 귀는 멀어져 보는 것, 듣는 것이 불편해지고 자신의 몸 하나 가누기도 귀찮아집니다.
제가 스물 일곱 살에 목사 안수를 받고 교회를 담임하고 나니까 너무 어려서 좀 나이가 들어 보였으면 하여 옷을 입어도 나이 든 사람처럼 입어 보려 애썼습니다. 성도들이 기도할 때도 저를 위해 기도하면 “젊은 종 박목사님”하면서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세월이 지나는 동안 언제인지는 모르겠지만 달라졌습니다. 이제는 저더러 ‘젊은 종’이라고 하는 분이 안 계십니다. 그런데 이제 좀더 있으면 아마 ‘노종’이라고 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이요, 세월이라는 것입니다. 아직은 마음으로 하고 싶은 것은 합니다. 그러나 얼마 더 지나노라면 마음은 하고 싶으나 몸이 말을 듣지 않을 때가 올 것입니다. 이것을 막을 길은 누구도 없습니다.
현재 젊은이라고 불리는 사람들도 이제 앞으로 30년, 40년 후에는 분명히 다 노인이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이 없는 사람들은 이 육신 늙어지는 것이 아쉬워서 여러 가지 노력을 합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늙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 믿는 사람은 사도 바울의 말대로 겉사람은 후패하나 낙심하지 않습니다. 왜요? 그의 속사람, 그의 심령이 날로 새로워지기 때문입니다.
여기 사도 바울은 날로 후패해지는 육신 가운데서도 날로 새로워지는 은혜를 받은 것입니다. 우리도 이러한 은혜를 받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첫째로, 이 새로워진다는 말은 생명을 연상케 합니다.
살아있는 것은 언제나 새로워집니다. 산 나무에 새잎이 돋아납니다. 산 풀에 새싹이 납니다. 산 꽃이 더 아름답습니다. 죽은 것이 새로워질 수는 없습니다. 우리의 심령이 날로 새로워지려면 먼저 죄와 허물의 죽음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합니다. 거듭나야 합니다. 영적으로 부활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4장 22절에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고 하였습니다.
고린도후서 5장 17절에는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새로워지는 은혜는 먼저 온전히 거듭나서 새 사람이 되고 혹은 그리스도 안에서 새 피조물이 됨으로 시작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날로 새로워지는 은혜를 받으려면 먼저 과거의 죄를 온전히 회개하고 예수를 믿음으로 거듭나서 새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날로 새로운 은혜를 받는 첫단계입니다.
둘째로, 이 새롭다는 말은 아침을 연상케 합니다.
아침에는 만물이 새로워집니다. 그것은 아침 햇빛이 비취는 까닭입니다. 동편에 아침해가 돋을 때 어둠의 그늘은 사라지고 만물이 빛나고 새롭게 됩니다.
시편 27편 1절에 보면 “여호와는 나의 빛이시요” 했습니다. 하나님은 빛의 근본이십니다. 하나님은 이 우주를 비추는 빛이십니다. 예수님도 “나는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빛, 우리 주님의 빛이 우리 심령의 지평선 위에 솟을 때 우리의 심령은 새로워집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새 마음, 새 기쁨, 새 소망을 주십니다. 그러므로 이사야 40장 31절에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치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치 아니하리로다” 했습니다.
우리 심령 위에 날마다 하나님의 빛, 진리의 빛, 생명의 빛이 비칠 때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집니다. 그래서 성경은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기도의 창문을 통하여 하나님의 빛이 우리 속사람을 비출 때 우리의 속사람은 새로워지기 때문입니다.
셋째로, 이 새롭다는 말은 샘물을 연상케 합니다.
더운 여름 사막 길을 걷던 나그네가 길가의 오아시스를 만나 그 맑은 샘물을 마시게 되면 모든 것이 새로워집니다. 새로운 원기를 회복하게 됩니다. 새로운 힘을 얻습니다. 주님은 일찍이 사마리아에 있는 수가라고 하는 동네, 야곱의 우물가에서 마침 물 길러 나온 한 사마리아 여인에게 다음과 같은 의미 심장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토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이 세상은 사막과 같이 메마른 곳입니다. 이런 곳을 지나가는 인간들은 다 피곤하고 쇠약해집니다. 그러나 주님을 믿고 기도를 통하여 그와 항상 교통하는 이들은 시원한 생명수 곧 성령을 충만히 받습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심령은 아무리 피곤한 인생 행로를 걸어도 그 심령은 날로 새로워집니다. 새 힘과 새 용기를 얻는 것입니다. 샘은 흐려지게 해도 한참 후에 다시 맑아집니다. 샘은 언제나 맑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은혜는 언제나 새롭습니다. 날마다 새로운 샘물 같은 은혜를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넷째로, 새로워진다는 말은 안식을 연상케 합니다.
우리가 피곤하고 지칠 때 평안히 쉬어야 육체가 새로워집니다. 피곤한 몸이 하룻저녁 잠을 푹 자면 그 이튿날 아침 새로운 건강을 가지게 됩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빌립보에 편지할 때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했습니다. 사도 베드로도 “너희의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리라” 했습니다.
우리가 무거운 짐들을 우리 스스로 지려고 하지 않고 믿음으로 다 주께 맡기고 우리 심령이 편히 쉬게 될 때 우리의 속사람이 날로 새로워지는 것입니다. 우리 심령이 쉴 때 더 아름다워집니다. 장성합니다. 그리고 열매를 맺습니다. 하나님의 동산, 푸른 풀밭 쉴 만한 물가에서 편히 쉴 때 우리의 심령이 새로워집니다. 그러므로 의지하는 믿음 안에서 우리가 새로워집니다.
다섯째로, 새롭다는 말은 영양이 좋은 것을 연상케 합니다.
꽃은 물과 비료를 주어야 날로 새로워집니다. 곡식도 옥토에 심고 좋은 비료를 주어야 날로 새로워집니다. 어린애들도 영양 있는 음식을 먹어야 잘 자라고 새로워집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심령에도 날마다 새로운 양식이 필요합니다. 옛날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 있을 때 만나를 날마다 새롭게 내려 주셨습니다. 우리도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새롭게 먹어야 심령이 새로워집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날마다 읽어서 일용할 양식으로 삼아야 합니다.
항상 기도하고 성경 말씀을 읽는 습관, 말하자면 거룩한 습관을 가져야 신앙 생활을 바로 할 수가 있고, 우리의 심령이 날마다 새로워지고 새 힘을 얻어 맡은 바 책임을 바로 감당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여섯째로, 사실 믿음 있는 사람은 겉사람이 후패하여질수록 반비례로 속사람은 더욱 새로워집니다.
그것은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의 겉사람인 육신이 점점 후패하여 허약하게 되면 이 육신을 근거로 하던 여러 가지 추한 욕심이 사라지게 됩니다. 정욕, 물욕, 권세욕, 명예욕 같은 것이 사라집니다. 세상에 붙은 온갖 허영심이 없어지게 됩니다. 그래서 남에 대한 시기, 분노, 증오심 같은 악한 감정도 사라지게 됩니다. 그래서 자연히 남을 용서하게 되고 너그러운 마음을 가지게 됩니다. 옛말에 “인지장사에 그언야선”하고 했습니다. 사람이 죽을 때 그 말이 선하게 됩니다. 죽으면서까지 나쁜 말하고, 욕하고, 악담하고, 저주하고, 미워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이 세상의 소망이 끊어지게 되니 자연히 하나님께 소망을 두게 됩니다. 세상을 사랑하는 것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하게 됩니다. 그러다가 겉사람이 아주 후패하여질 때, 육신의 눈이 어두워지나 심령의 눈이 더욱 밝아져서 하늘 나라를 바라보며, 육신의 귀는 어두워 세상의 소리 듣지 못하게 되나 신령한 귀는 더욱 밝아져서 하늘의 음성을 듣게 됩니다. 이처럼 겉사람이 후패할수록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겉사람인 육체가 아주 무너질 때면 새로워진 그 심령은 옛 집을 버리고 하나님이 준비하신 새 집으로 가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 같은 사람을 보세요. 그가 밧모섬에 유배 되어 홀로 굴 속에 앉아 있을 때 그의 겉사람은 늙고 병들어 후패하여 졌습니다. 그러나 그의 속사람은 아주 새로워졌습니다. 그의 신령한 눈은 아주 밝아져서 영원한 장래를 미리 볼 수 있었고 지극히 높은 하늘 나라의 영광을 분명히 본 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신령한 귀는 아주 밝아져서 천군 천사들의 노래와 구원받은 수없이 많은 성도들이 화답하는 소리를 들을 수가 있었습니다. 신앙 생활이란 날마다 새로워지는 생활입니다. 우리에게도 이와 같이 새로워지는 축복이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본문 17절에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했습니다. 바울은 이 세상에서 받는 어떠한 환난도 다음 세상에서 기쁘게 누릴 영광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 받는 고난은 하늘에서 누릴 영광 속에서 다 잊어버리게 됩니다.
요한계시록 7장 마지막에 보면 하나님의 보좌를 말하면서 “하나님께서 저희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이러라” 했습니다. 그래서 로마서 8장 18절에도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했습니다. 모든 복음서의 이야기를 보면 예수님께서는 한 번도 그의 부활을 전제하지 아니하고는 자신의 죽음을 예언하지 않으셨는데 그것은 주목할 만한 사실입니다. 그리스도를 위해 고난을 당하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영광에 동참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 자신의 명예가 그것을 보증합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18절에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 했습니다. 우리의 눈은 보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보이는 것, 다시 말해서 이 세상의 것은 한 때뿐이며 사라질 날이 있습니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것, 하늘에 있는 것은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보이는 것만을 생각하면 우리는 인생을 그렇게 밖에 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또 다른 방법이 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모세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는 보이지 아니하는 자를 보는 것같이 하여 참았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는 것같이 알고 사는 생활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8장 24~25절에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 했습니다.
사람이 보는 것과 그 삶은 큰 관계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바로 볼 줄 알아야 바른 선택을 할 수가 있습니다. 무엇을 바로 보고 바로 보지 못하는가에 따라 일생의 흥망성쇠가 결정되는 것입니다.
본문 말씀은 우리가 무엇을 보려고 한다면 보이지 않는 것을 보라고 권면했습니다. 얼른 듣기에는 모순된 말 같지만 여기에 진리가 있습니다. 물질 가운데 보이는 것이 있고 보이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가령, 우리가 물을 한 잔 떠왔다고 합시다. 우리 눈으로 맑은 물이 보입니다. 그러나 그 물 한 방울을 떠서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면 그 물 가운데 여러 가지 미균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보이지 아니하는 물질을 보기 시작하기 전에는 위생에 신경을 쓸 줄 몰랐습니다. 그러나 물질 가운데 보이지 않는 미균을 볼 줄 알게 되면서부터 차츰 의학이 발전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 눈으로 보통 물질은 다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 물질을 이루고 있는 원자는 보이지 아니합니다. 전자와 양자도 보이지 아니합니다. 그러나 인간이 보이지 않는 부분을 볼 수 있기 전에는 이 물질 속에 내재하는 힘을 사용할 줄 몰랐습니다. 보이지 않는 물질을 볼 줄 알 때부터 원자를 사용하게 되었고 원자탄까지 만들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가까이 있는 것은 잘 보지만 먼 데 있는 것은 잘 보지 못합니다. 그러나 먼 데 있는 것을 볼 줄 알아야 바로 살 수 있습니다. 사람은 발부리에 있는 것만 보지 말고 먼 장래의 것을 볼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이 지구 위에 산다고 해서 땅만 보면 안 됩니다. 눈을 들어 하늘을 볼 줄 알아야겠습니다. 우리의 눈으로 볼 수 없는 광범한 세계를 신령한 눈으로 볼 줄 알아야 우리가 바로 살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람을 볼 때 흔히 외모를 보기 쉽습니다. 그래서 결혼 상대를 택할 때도 얼굴 생긴 것부터 보게 됩니다. 서양 속담에 “Beauty is a skin deep”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미인은 피부 한꺼풀”이라는 말입니다. 겉만 보아서는 안 됩니다. 속을 볼 줄 알아야 합니다.
또 현재는 보지만 장래는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장래까지 내다볼 수 있어야 합니다. 지금 승리했다고 즐거워할 것이 아닙니다. 장래가 어떻게 될지 미리 보아야 합니다. 특히 정치에 관계하는 이들은 장래의 역사를 미리 보고 행동을 조정할 줄 알아야 합니다.
더 중요한 것은 물질적 세계는 육안으로 보이나 영적 세계는 보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 속사람, 영혼의 가치를 볼 줄 알아야 합니다. 세상의 모든 것은 보이지만 온 우주를 창조하신 하나님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볼 줄 알아야 삽니다. 세상 나라는 육안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보이지 아니합니다.
그러나 볼 수 없는 나라를 바로 볼 줄 알아야 우리가 삽니다. 현세는 보이지만 내세는 보이지 아니합니다. 그러나 내세를 미리 보고 살아야 바로 삽니다. 천당과 지옥은 육안으로는 보이지 아니합니다. 그러나 이것을 미리 보아야 이 다음에 놀라지 않을 것입니다. 심판의 자리도 미리 보아야 이 다음에 두려움이 없을 것입니다.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
그러면 모든 것을 바로 보기 위해서 갖출 조건이 무엇입니까?
첫째로, 거듭나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 나라를 볼 수가 있습니다. 요한복음 3장 3절에 예수님께서 니고데모에게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산상보훈에서도 “마음이 깨끗해야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둘째로, 높은 산에 올라야 시야가 넓어져서 모든 것을 바르게 볼 수가 있습니다.
이사야 40장 9절에 “아름다운 소식을 시온에 전하는 자여 너는 높은 산에 오르라” 했습니다.
우리의 심령이 고상한 수준에 이르러야 그리스도의 도덕적 수준에서 모든 것을 바로 볼 수가 있습니다. 성결과 의와 진실과 양심과 공명정대의 수준에 올라가게 될 때 모든 것을 바로 볼 수가 있습니다. 전에 사도 바울이 예수님 만나기 전에는 자기의 육신적인 조건이 굉장해 보였습니다. 그러나 회개하고 난 후에는 그 모든 것이 아무것도 아닌 것을 깨닫고 분토같이 여기게 되었습니다.
셋째로, 믿음으로 하나님을 보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모세는) 믿음으로 애굽을 떠나 임금의 노함을 무서워 아니하고 보이지 아니하는 자를 보는 것같이 모든 고난을 참았다”고 했습니다. 육신의 눈으로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을 믿음으로 알고 경외하면서, 육신의 명령을 거절해야 합니다.
사람들은 보이는 것만 보고 보이지 않는 것은 돌아볼 줄을 모릅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경외할 줄을 모릅니다. 현재 눈 앞에 영달만 보고 장래가 어떻게 될지 알지 못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보면서 우리의 생활을 올바르게 해서 이런 세상에서 일어나 빛을 발해야 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심령의 눈을 밝혀 주시기를 축원합니다.
2. 담대히 원하는 바 ( 5: 8 – 10 )
8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있는 그것이라. 9 그런즉 우리는 몸으로 있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기를 힘쓰노라. 10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고후 5: 8 주와 함께 있는 그것 -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있는 그것이라. (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라 )
여기서 우리는 처음에는 살아있는 육체를 가지고 부활을 경험하고자 희망했던 바울이 점차 죽음의 가능성을 받아들이고 그것이 오히려 자신에게 유익하다고 깨달아가는 변화를 볼 수 있다.
사람이 죽으면 주님이 계시는 영원한 집(천국)으로 간다(1절).
바울은 몸을 떠나 주와 함께 있기를 바랐는데, 그것은 임시 거처인 이 땅의 장막을 떠나 영원한 거처인 저 하늘 나라의 영원한 집으로 돌아가고픈 심정을 나타낸 말이다(1-2절).
1]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성도는 죽음을 담대히 원할 수 있다.
왜냐하면, 성도의 죽음은 그 영혼이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성도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 히 2: 14-15 – 14 자녀들은 혈과 육에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같은 모양으로 혈과 육을 함께 지니심은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시며 15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한평생 매여 종 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주려 하심이니
2] 차라리 몸을 떠나
성도의 영혼은 죽는 즉시 천국에 들어가 주와 함께 거하게 된다.
* 눅 23: 43 -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헬라와 로마의 사상가들은 육체를 멸시하고 무시했다. 유대인들도 때로는 그와 같은 생각을 하였다. 이것은 이원론적인 사상에서 나온 것이다. 육신은 악하고 영혼은 선하다는 사상이다.
그러나 바울 사도는 그렇게 생각하거나 말하지 않았다. 육신을 떠난 영의 자유를 기대하지도 않았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새로운 몸을 주실 날을 기대하고 있었다. 그 몸은 신령한 몸인데 그 몸을 입은 채 하늘나라에서도 하나님을 섬기고 경배할 수 있는 몸으로 생각하였다.
바울은 앞으로 올 생명에 대한 강한 기대와 동경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의 생명을 경멸하지 않았다. 그가 말한 대로 그는 언제나 담대했다.
여기서도 우리는 하나님의 성령을 소유하며, 성령은 앞으로 올 생명의 보증이 되시기 때문이라고 했다(5절).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에 살면서 영원한 생명을 미리 맛보며 살 수 있다고 말한다.
그렇게 생각하면 믿는 사람은 두 세계의 시민이 되도록 허락 받았다. 우리의 몸이 지상에 있지만 영은 하늘에 속하여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을 멸시하지 않는다. 이 세상은 앞으로 올 위대한 영광을 반사하는 영광의 광채로 둘러싸여 있다고 믿었다.
3] 주와 함께 있는 그것이라.
* 빌 1: 23 - 내가 그 둘 사이에 끼었으니 차라리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 그렇게 하고 싶으나
성도의 소원은 이 땅에 오래 사는 것이 아니다.
그는 주님과 함께 있기를 사모하며 천국에 들어가기를 갈망한다. 그러므로 성도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또 성도는 이 땅에 살면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묵상하며 기도함으로 하나님과 교제하는 시간을 즐거워한다.
고후 5: 9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 - 그런즉 우리는 몸으로 있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기를 힘쓰노라. ( 그런즉 우리는 거하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노라 )
1] 그런즉 우리는 몸으로 있든지 떠나든지
‘있든지’라는 말은 영혼이 몸 안에 거하는 것 곧 생명이 연장되는 것이요, ‘떠나든지’는 영혼이 몸을 떠나는 것 곧 몸의 죽음을 의미한다.
성도는 몸으로 있든지 떠나든지 곧 살든지 죽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의 긍휼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救贖)의 은혜로 구원받았고 영생을 얻었고 천국 백성이 되었기 때문이다.
2]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기를 힘쓰노라.
그러면 어떻게 사는 것이 주를 기쁘시게 하는 것인가?
그것은 주의 뜻대로, 즉 성경의 진리와 교훈대로 사는 것이다. 그것은 곧 경건한 삶이요 의와 선과 진실의 도덕적 삶이다.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말미암는 영광스러움이 산 자나 죽은 자 모두에게 같다는 확신은 삶과 죽음의 문제에 대해 초연(超然)하게 하며 오직 모든 관심을 주를 기쁘시게 하는 데 집중하게 한다.
본문에서 바울은 매우 중요한 핵심을 진술하고 있다. 그것은 그의 삶에 있어서 그리스도 중심성을 재확인하는 것이다.
심지어 그가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복음을 전하거나 그들을 위한 봉사자가 될지라도 그것은 궁극적으로 오직 그리스도를 위하여 행한 일이다(4: 5, 15).
또한, 바울은 주님의 기쁨을 위하여 육의 몸을 입고 있을 때 당하는 모든 환난을 견디어 낼 수 있었고(4: 8, 9), 장막을 벗어 버리고 주님과 함께하기 위해 희망을 버릴 수 있었다.
* 빌 1: 21-24 – 21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22 그러나 만일 육신으로 사는 이것이 내 일의 열매일진대 무엇을 택해야 할는지 나는 알지 못하노라. 23 내가 그 둘 사이에 끼었으니 차라리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 그렇게 하고 싶으나 24 내가 육신으로 있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