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 15: 10 내가 나 된 것은 -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로 자신이 신자와 사도가 되었음을 고백한다.
또 그 하나님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그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자신이 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은혜로 한 것이라고 간증한다.
이것은 모든 시대에 참된 모든 종들의 고백일 것이다.
1]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사도 바울의 나의 나 된 것은 주님을 만난 증거는 겸손에 있다. 그런데 주님을 만나고도 교만할 때가 있는데, 지금 주님과 멀어졌기 때문이다.
다시 주님께 가까이 가게 되면... 겸손해진다. 바울처럼 모든 것을 은혜로 여긴다!
▲ 태동(생명의 움직임)을 못 느끼는 사람
미국에 몸무게가 190kg인 한 부인이 있었다. 그녀는 결혼해서 살고 있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배가 아프더니, 그만 아기를 출산하고 말았다. 지난 10개월간 한 번도 태동을 느끼지 못했는데 말이다.
이유인즉, 부인은 살이 너무 많이 쪄서, 배에 기름기가 많아서 웬만큼 아기가 태동을 해도, 전혀 느끼지 못했다. 자기 몸속에 생명이 자라고 있었는데, 전혀 느끼지 못했다니... 놀라운 일이다.
그런데 이것보다 더 놀라운 사실이 있다. 그것은 우리가 예수님의 새 생명을 받아 마음에 간직하고 살아간 이후로, 그 새 생명을 일상에서 전혀 느끼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다면... 말이다.
살다 보면, 근심, 걱정, 불평 같은 것들이 군살처럼 내 영혼에 가득 달라붙어서 내 영혼의 새 생명을 느끼지 못하게 하는 일이 일어날 수 있다.
또한 세상의 쾌락과 유혹도 우리 영혼에 커다란 비곗덩어리가 된다. 지금 우리 속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태동하고 있다. 우리는 그것을 느끼며 살아야 한다.
부부가 처음 아기를 가지면, 엄마 뱃속에서 꿈틀거리는 태동을 보고 감격한다. 부인은 물론이고 남편도, 막 뱃속에서 움직이는 아기를 보고 흥분하며 놀란다. 그 때의 감격이 기억나시는가? 생명이 꿈틀거릴 때, 그 감격은 엄청난 기쁨으로 다가온다.
오늘 우리 속에 있는 새 생명의 태동을 우리가 설교를 듣는 중에, 내 속에서 (애가 발로 차듯 쿵쾅거리며) 감격적으로 느낄 수 있기를 바란다.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다!’는 고백을 새롭게 하시게 되기 바란다.
(1) 중생은 눈 뜨는 것
보통 출산하면, 얼마 지나서 아기들이 눈을 떠서 보게 된다. 아기들은 어머니 뱃속에서는 아무 것도 볼 수 없었다. 여러분 가운데 어머니 뱃속에 있을 때 기억나시는가? 아무 것도 못 본다.
그러나 배에서 나오면 비로소 보게 된다. 눈을 떠서 사랑스런 엄마의 얼굴이나 아빠의 얼굴을 본다. 처음 바라보는 어머니, 아버지의 얼굴이 얼마나 감격스러웠겠는가!
우리가 중생할 때도 마찬가지다. 이제 주님을 보는 눈이 새로 열리게 된다. 그래서 영의 눈을 떠서 주님을 새롭게 바라보게 될 때 - ‘중생했다’고 말한다. 다른 말로, 내가 거듭나는 순간이다.
세계 크리스천들이 가장 좋아하는 찬송이 405장 ‘나 같은 죄인 살리신’ amazing grace 이다. 거기에‘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가 나온다. 영어는 I once was blind but now I see이다. ‘내가 전에는 소경이었으나, 이제는 (주님을) 보게 되었다.’는 뜻이다.
(2) 중생하면 자기를 보게 된다.
만삭되지 못한 자신을 깨달은 바울은 자신을 만삭되지 못하여 났다, 조산 되었다고 말한다. 인큐베이터 안에 있는 아기를 한번 상상해 보라. 살아 있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산 것도 아니다. 아직 눈도 못 뜨고 있다.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이 말씀의 진짜 의미는, ‘조산’ 정도가 아니라, ‘유산’했다는 뜻이다. 다시 말하면, 전혀 능력이 없는 완전히 버림받은 가치 없는 존재였는데, 하나님이 그런 자기에게 와서 보여주셨다는 뜻이다. 주님의 은혜를 보여주시고, 주님의 사랑을 보여주시고, 주님의 놀라운 섭리를 보여주셨다.
예수님을 보지 못하고, 자신을 보면, 자기가 자격이 넘치는 사람으로 보인다. 자기는 모든 것을 잘하고, 훌륭한 사람으로 보인다. 자기가 있는 자리는, 자기에 비해서 너무 형편없이 낮은 자리로 여긴다. 그러나 예수님을 본 자는 자기를 알게 된다. 그때, 자기가 너무나 자격이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내가 있는 이 자리는, 내 처지에 비하여 너무 과분한 자리로 여기게 된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고백했다. ‘나는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라 내가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을 받기에 감당치 못할 자로라.’ (고전 15: 9) 우리도 이런 고백을 하게 되기를 바란다.
사람에게 있어서, 지위가 올라가고, 직분이 올라가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자기 내면적 가치가 더 올라가야 한다. ‘나는 부족합니다!’하며 하나님 앞에 겸비하게 서 있는 사람이라야 한다. ‘나는 자격 없습니다! 지금 이 자리도 과분합니다!’ 이렇게 말하며 감격하는 그 사람이 진짜 주님의 은혜를 받은 사람이다.
정치적 선거에 나오는 후보들은 제각기 ‘나는 자격이 넘칩니다!’라고 말한다. 자기에게 맡겨주면 나라가 잘살게 된다고 자신감을 피력한다. 우리는 많은 정치가들에게서 ‘나는 준비된 사람’이라는 소리를 들어왔다.
그런데 그런 사람에게 맡겨 봐도, 생각만큼 잘 안되는 경우가 많다. 세상 사람들은 스스로 자격이 넘친다고 말할지 몰라도, (그런 상황을 이해하지만) 그러나 성도들 입에서는 그런 말이 나오면 안 된다.
‘나는 자격이 없습니다. 부족합니다. 나는 신발 끈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습니다. 지금 내가 있는 이 자리도 과분합니다.’ 이런 고백하는 성도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란다.
여러분을 향해, ‘아버지, 어머니’로 부르는 자식 앞에 무슨 마음을 느끼시는가? 나를 아버지로 불러주니 너무 감격스럽지 않으신가! 갓난아기들이 “엄마!”를 입을 떼기 시작할 때, 큰 감격과 축복이 넘친다. 부모도 마찬가지다. 자식들이 ‘아버지, 어머니!’ 하고 부를 때, ‘나는 자격 없어, 내게는 과분한 자식들이야!’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은혜를 받은 성도들이다.
배우자가 여러분에게 “여보!” 하고 부를 때, 감동하시기 바란다. ‘난 자격이 없는데, 내게는 과분한 사람을 하나님이 내게 주셨어!’ 이렇게 생각하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시기 바란다. 교회 오면 여러분을 향하여 “집사님, 권사님, 장로님!” 하고 불러준다. 그 소리를 들으면 여러분, 깜짝 놀라시기 바란다. 너무 내게는 과분한 직분이라며, 하나님께 감사하시기 바란다.
여러분이 제게 ‘목사님!’ 부르면, 깜짝 놀라게 된다. 가만히 하나님 앞에서 생각해 보면, 자격이 없는데 과분한 직분이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 각자가 처한 것이, 나에게 얼마나 과분한 것인지를 깨닫는 복된 성도들이 되기 바란다.
사도 바울이 바로 그랬다. 하나님 앞에 바로 서 있었기에, 자기의 부족함을 알았다. 그래서 은혜를 받은 성도는, 바울과 같이, 이렇게 고백한다.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고전 15: 10)
2]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우리가 주님을 만나기 전에, 자주 했던 말이 있다. ‘이것은 내 능력 때문이야, 난 역시 똑똑해!’ ‘우리 집안은 역시 명문 가정이야! 나는 탁월한 사람이야!’ 그러나 주님을 만난 후에는, 바울의 고백을 우리도 하게 된다. ‘하나님의 은혭니다!, 주님이 도와주셨죠! 주님이 은혜 주셔서 여기까지 왔습니다!’
여기서 바울은 두 가지를 말한다.
(1) 나의 나 된 것이 하나님의 은혜다.
‘나의 나 된 것’이란 - 내 존재, 내 삶의 자리, 내 지위 모든 것을 통 털어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한다.
(2) 내가 더 많이 수고한 것도 은혜다.
내가 행한 것, 내가 이룬 것 모두, 심지어는 40에 하나 감한 매 5번 맞은 것, 3번 태장으로 맞고, 3번 파선 당한 것도, 수고하고, 애쓰고, 자지 못하고, 주린 것 모두 자기 자랑이 아니라, 내가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하나님의 은혜였다고 고백하고 있다.
‘이거 내가 했습니다!’, ‘내가 제일 공로잡니다!’, ‘내가 이런 사람입니다!’ 이런 저런 말들은, 주님을 바로 만나지 못했거나, 주님과 멀리 떨어진 상태다. 주님을 바로 만난 사람은 이말 저말 길게 하지 않고, 오직 한마디만 한다. ‘모두 주님의 은혜입니다!’ 지금 이시간, 한 번 직접 고백해 보시기 바란다.
중요한 자리든지, 하찮은 자리든지 그것은 은혜의 자리인 줄 믿는다. 심지어, 신앙 때문에 믿음 지키느라고 극심하게 고생했던 자리라도 ‘내가 수고했다, 고생했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것도 은혜였다!’고 고백한다.
남은 여생에 무엇이 더 된다고 해도 하나님의 은혜다. 많은 고생을 당했다면, 그것도 하나님의 은혜의 또 다른 표현이다. 그 은혜로 인하여 곤란과 핍박도 견딘 것이다.
연로하신 권사님이 천국 가실 때가 가까워서 숨을 헐떡이고 계셨다. 그는 이렇게 마지막 숨을 몰아쉬며 고백했다. “나는 지금 요단강을 건너가기 직전입니다. 요단강 이편에도 주님이 계셨고, 요단강 저편에도 주님이 거기 계시니, 나는 어디서든지 기쁘고 행복합니다!”
그렇다. 중생한 성도는, 괴롭든지, 기쁘든지 죽든지, 살든지 눈물이 나든지, 기쁨이 넘치든지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 속에 살고 있다. 높아져도, 낮아져도 병들어도, 나아져도 죽게 되어도, 살게 되어도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는 살아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