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르릉... 따르릉.... 따르릉..... ”
정적을 깨며 계속 울려대는 날카로운 금속음 때문에 그전날 숙취속에 잠든지 불과 오래지않아 일어나지 않을수없었는데 처음엔 에이 잘못걸려온 전화라고 애써 외면하려하면서도 나도 모르게 휴대폰으로 다가갔다. 하지만 선듯 집어들지못하고 시계쪽으로 눈을 돌려보니 03:44이 반짝이고 있었다. 잠시의 피말리는 시간이 흐른후 수화기를 들지않을수 없었고 순간 나는 느꼈다 나도모르게 떨고있음을...
2017년 2월 18일 본인이 소속된 검악산악회의 하루는 세(3)방면의 일정이 계획되어 있었다. 첮째는 모처럼의 눈덮힌 설악산을 즐기려고 용대리-백담사-오세암-마등령-비선대를 가고자 최회장과 다수의 회원이 새벽일찍 나섰지만 눈 때문에 용대리-백담사간의 Shuttle이 끊겨 고생끝에 이어진 산행이 마등령에서 폭설로 입산이 통제되는 바람에 싱겁게 끝나 올라온길을 되돌아나와 속초에서 회한접시로 쓰린가슴을 달랜팀과, 대한산악연맹에 임원으로 봉사하는 회원들은 강원도지사배 산악스키대회를 천태산일원에서 실시하였는데 각각 심판위원장 또는 진행요원으로서의 막중한(?) 임무를 완수하고 용평으로 이동, 스키로 멋진하루를 준비하고있었으며 (요즈음은 밴드에서 일거수 일투족이 보고되어 보안사령부가 필요없어졌다) 그런데 또한명 한국산악회 구조대장 직책을 놓지않고있는 이친구는 신입대원들의 훈련을 핑개로 설악산토왕성빙폭 등반에 나섰는데 나는 이친구에 대해서는 괜히 화장실에서 뒤안닦고 나온 기분, 햐여튼 노심초사 뭔가 불안하였다.
영겁의 시간도 찰나 역시 발신자이름을 확인하며 수화기를 들어 첫소리가 “그래 쏟겼냐??...(추락하였느냐?) 아닙니다.. 장시간의 저체온증에 의한 심장마비입니다. 휴--.. 다행이다.... “ 아니 이무슨 잠자다 봉창 두드리는소리... (그리고 뭐가 다행이란 말인가!)
그렇지만 본인과 후배JB군은 어쩌면 예상하고 있었음이리라. 나는 한동안의 공황상태에서 빠져나오고자 스콧틀랜드에서 건너온 약간 붉은물을 글라스로 몇잔들이켰더니 혼절하고 말았다
.
송년회가 열렸던 작년 12월의 어느날, 우리들이 부어라 마셔라 할시간에 그는 유럽 Alps 삼(3)대북벽인 MT. Grand Joras 등반을 위하여 출국하였다. 그후 Band등을 통하여 간간히 들려온 소식은 악천후에 발목잡혀 고군분투하는 모습이었는데 기어코 눈사태에 탠트 및 등반장비를 쓸려보내고 40여일만에 쓸쓸히 축처진 어깨로 돌아왔는데 귀국일성은 “이번엔 재수없어 쫓겨왔지만 올연말에는 꼭 성공하겠다” 였다. 그후 여독을 풀시간도 없이 하루는 암벽,
이틀후는 빙벽을 찾아 매일같이 배낭을 메고 집을 나섰으니 그가족의 심정은 어떠하였으리오.
무릇 산군들의 가족 또는 동료들이 말리지않는 이유는 어차피 그고집을 꺽지못함을 잘알고 반대하다 괜히 부정이라도 타서 좋지않은 결과가 두려워서이지 그행위를 찬성함은 아니리라. 그렇지만 우리옛말에 헤엄 잘치는놈 물에 빠져 뭐 어떻게되고 또 방귀가 잦으면 X을 싼다나 어쩐다나...
아뭏튼 촛불이 꺼지기전에 제일 밝은 불꽃을 피운다는 별 좋지않은 옛말에
본인이나 주변의 많은 사람들의 우려를 받은것은 사실이다. 정말 요근래 그의 행동은 물가에 어린애 내놓은 기분에 위태위태한 마음이었지 뭐 본인에게 미아리고개언덕에 돛자리 깔 정도의 예지력이 생긴 것은 더더욱 아니었다.
형님! 정말 죄송합니다. 아니 어찌할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와 같이 등반하였던 대원이 눈물을 글썽인다. "알고있으며 너희들의 잘못만도 아니다" 하긴 빙폭 상단벽 150m지점에서 하강중 갑자기 당한일이니 손쓸수가 없었으리라. 평지라면 몰라도 벽에줄에 메달려있었으니 뭐 어떻게 한단 말인가? "그날 물이 너무많이흘러 저희들은 일찌감치 포기하였는데 준이형은 강행을 하더라고요..." 상가(喪家)에서 만난타산악회 후배가 그날의 상황을 나에게 이야기하는데 "야! 임마 그럼 말렸어야 했잖아..." 하니 "아니 준이형이 언제 저희들말을 듣습니까?" 하긴 무슨 긴말이 더 필요하리오. 2월중순이면 벌써 봄이 와있는데 아무리 방수가 잘되는 옷을 착용하였다하여 조금씩 스며들어 체온을 뺐어 가는데는 천하장사도 소용없다.
산악인 “이 준(李俊)” 한국을 대표하는 Best-climber중의 한명으로 젊은시절 인수봉에서 신기에 가까운 등반실력을 구사하였는데 본인과는 20대초반에 만나 40여년을 “자일파트너”로 청춘을 보낸사이이며 張-李의 우정은 산좀 다닌사람이라면 모르면 간첩이다(그렇지만 조사해보니 모르는 사람이 당연히 훨씬 많더라)
“Seil-partner" 과연 이단어를 산좀다녔으며 또 같이 다닌다하여 쉽게 쓸 수 있는 단어인가 의문스럽다. 부모/아내/형제/자식 아니 그이상의 존재로서 줄하나 같이 묶음으로서 서로의 생명을 담보하고 서로의 이상을 추구하기 위하여 한방향을 바라볼수있다는게 동물이 아닌
인간이니까 가능할것이라 나는 감히 믿는다. 한편 나의 아내를 알기 훨씬전부터 생사고락을 같이 하며 붙어다녀 ”당신둘사이 혹시 호머아냐??“ 하는 우리 안식구로부터의 오해를 불식시키기위하여 부단히 노력하였었다. 또 우리 어린시절 신상명세서란에 부모직업(글쎄 그것이 왜필요했는지 모르지만) 종교 바로뒤 취미란에 ”등산“ (그때는 대다수가 ”독서“라고 써 넣엇었다) 이라고 써넣은죄로 평생 업보를 갚고있는지 모른다. 주변의 다수는 본인이 술값이 너무 많이 부담되어 이렇게 초라하게 사는줄 알지만 본인 생각에는 ”등산“이란 어쩌면 취미생활에 내 인생을 전력추구하여 이렇게 될줄은 나자신도 몰랐으며, 지금이 전시체재도 아닌데 수많은 선후배들이 하나 둘 내곁을 떠나가 나이가 들수록 고독을 느끼고 있다.
각설하고 2017년 4월 22 일 북한산 산악인 추모공원(2008년 북한산 무당골에 조성된 산악인의 묘지, 즉 동작동국립묘지와 같아 산악업적이 지대하고 또 산에서 희생되어야 올수있으며 엄격한 심사후 봉헌이 가능하다.)에서는 이번에 이준군을 포함 6인의 새신위의 봉헌과 먼저가신 약 230여신위에 대한 추모식이 있엇는데 날이 갈수록 너무나 상념이 엄숙하다. 어쩌면 나같이 나약한 인간은, 아니 침대에서 조용히 천명을 받아들인다면 이동네에는 얼씬도
못하리라. 좌우지간 49재와 더불어 고인의 가족들도 이날 동참하였는데 그의 신위가 이추모공원에 안치되어 매년 추도됨에 안심하는 분위기라 괜히 흡족하였다.
그와 같이한 무수한 나날들속에 본인은 불과 7m의 추락으로 왼발 복숭아뼈가 밖으로 튕겨져 나오고 발목이 90도 확 꺽여서 그이후의 레이스는 접어야만 햇지만 그친구는 그많은 크고작은 부상속에 용케 살아 남아 지금까지 현역으로 활동하며 2030보다 더 활발한 산행을 하였는데, 그렇다고 그와의 Zeil-partnership이 끊어진게 아니라 더 돈독히되었으며 단지 항상 그친구가 Leading을 하고본인은 그뒤를 따라 줄잡고가면서 본인은 후배양성이라면 너무 거창한 소리일지 모르지만 그저 후선활동을 하였지만 그는 항상 앞장서서 돌격앞으로로 후배들을이끌었다.
이에, 모산악계 잡지사에서 그와의 소회에 대하여 원고청탁이 있었지만 그많고 많은 추억이 어찌 몇장의 원고지로 채울수 없음에 정중히 거절하였는데 지금 심정이 그리하여 더 이상 왈가왈부하지 않고 그와의 인연을 이정도에서 끊고싶다.
그렇지만 평생 돈버는 재주도 없고 또 인연조차 없어 한량같이 산에 묻혀 살아온 그이지만, 경기도 모 초등학교 교장선생님으로서 정년을 기다리는 그의 아내, 보건복지부산하 연구소에서 연구원으로 근무하는 박사학위소지자인 그의딸 또 경기북부경찰청의 경찰관으로 봉직중인 그의 아들의 바램은 그저 우리 남편/아빠 조용히 껀수(?)치지말고 가늘고 긴인생을 염원하였는데 그소박한 소망마져 뿌리치고 불과 65년이라는 짧디짧은(?) 시간에 떠난 그친구가 너무 야속하며 183cm의 장신에서 강력히 뿜어져나온 근력에 의거 300yd를 넘나드는 그의 호쾌한 드라이버샷을 다시 구경할수없음이 못내 안타깝다.
언젠가 그 어느날 나 산에서 눈감으면
오랜 산친구여 전해주게.....
편안히 죽었다고 사내답게 떠났다고
내사랑 그녀에게 꼭 전해주.....
산친구여 조그만 케룬(돌무더기)을 쌓아
무덤을 만들어 주고
그케룬위에 피묻은 나의 피켈을 꽂아주게
아! 행복한 산사나이, 포근한 흙냄새여...
生從何處來 死向何處去
生也一片浮雲起 死也一片浮雲滅
삶의 시작은 어디에서오며 그끝은 어디로 가는가?
生은 한조각 구름이 모임이요 死는 그구름이 흩어짐이거늘...
“그대는 어떤연유로 이땅에 왔는지 아는가?” “예 조금은 압니다” “그럼 어디에서왔는지는?” “모릅니다” “그대는 필히 병들고 늙어죽는다는 사실은 아는가??”
“예 압니다” “그럼 어디로 가느냐??” “모릅니다.”
그렇지만 이순(耳順)을 훨씬 넘긴 나이가 되다보니 조금은 알것같다 生과死는 백지한장 차이이며 앞에 놓인 저문을 열고나가면 또다른 세상이 있음을...
그때 그친구와 다시만나 줄 같이 묶고 이쪽에서 보다 더 멋진 등반을 할 것을 기대하며 다시한번 그의 명복을 빌어본다.
졸필 읽어주셔 감사합니다.
2017년 5월 일
장 세 규 재배
토왕성폭포 - 아시아 3대폭포중 하나이며 상단 150m, 중단 80m, 하단 90m 총 320m 로서 그동안 45년 통행이 제한되어 허가받지 않고는 올라갈수 없었으나
2015년 11월 개방되어 전망대(View Point)까지는 갈수있다.
조난 당하기 2시간전 Leading하고있는 그의 모습, 마침 View-Point에서 취제하던 한산악잡지사 기자가 촬영하여 우리들에게 넘겨준 귀한 사진이다.
1980년 1월 토왕성폭포앞에서, 이후 37년이 흐른후 그는 이곳에서 산화했다.
1981년 강촌 구곡폭포를 등반중인 이 준과 장세규
1980년 여름의 설악산 울산바위 캠프장에서, 좌,뒤에서 시계방향으로 장세규, 송원우, 이준등으로 연결된다.
삼악산 무지개폭포에서
1979년 여름, 인수봉 정상에서의 망중한, 김재봉, 이준, 장세규
1980년 세계적인 Climber 일본 하세가와(長谷川 恒男)씨와 인수봉 정상에서
2013년 춘천 구곡폭포 등반을 마치고
날짜는 기억나지 않지만 등반을 일찍 끝내고 소주한잔후 취침소등하였는데 옆텐트의 동료가 안주좋은것 있으니 한잔 더하라고 깨웠는데 불빛에 채 눈을 뜨지 못하고있다. 들고있는 촛불이 없었으면 대낮이라 하겠다.
설악산 잦은바위골에서 2박3일의 등반을 마치고 하산하고있다.
설악산 소토왕골에서
설악산 울산암에서 하계등반을 마치고 신흥사에서 사진한장 찍어봤다
뒷줄 좌가 장세규, 제일우측이 이준
까마귀조차 다얼어죽은 춥디추운 설악산의 어느날 잠깬모습 본인옆이 이준군이다.
1980년대의 어느날, 강촌 구곡폭포등반을 마치고 강촌역에서...장세규, 서석환, 이준...
당시 최고의 패션인 울쉐터에 니커바지, 신발은 모두 Nordica, Dolomite, Galibier등 유럽제품의 2중 중(重)등산화를 착용하였으며, 스타킹은, 노르웨이제 Janus 아니면
현 유명 아웃도어회사인 밀레(Millet) 한사장의 어머니인 고순이님이 한올한올 손뜨게질한 Edelweiss를 신었었다.
인수봉 아미동코스를 선등중인 이준군
1979년 여름 도봉산 선안봉 남측T오버행을 인공등반중인 이준군
2000년대의 어느날 설악산 적벽을 등반중인이준과 최정희 대원
적벽에서의 하강
11980년대의 어느날 인수봉 의대길을 올라가고있다.
1980년대의 동계등반 잦은바위골을 줄줄이 훌텄었다. (그렇지만 아사진속에서 현재 4명이 보이지않는다)
2015년의 설악산 소승빙폭을 등반중인 이준
이폭포는 남향으로 햇빛을 하루종일 받아 좀채 얼지않으며 언다고 하여도 위에서부터 고드름으로 연결되는등 최대의 난코스로 유명하며 등반중 고드름을 안고 추락하지 않기위하여
피를 말리는 등반을 하여야하는데 60대의 그가 오르리라고는 상상도 할수없었다.
2015년 강원도 화천 딴산빙장(지방자치단체에서 호스로 물을 끌어올려 인공빙장을 만들어서 산천어축제와 더불어 유명하다)캠프터에서
좌로부터 이준, 최정희, 본인, 하지만 현재 옆의 두(2)사람과는 등반을 함께할수없다.
2015년 새해 헤드램프를 켜고 야간등반을 준비중인 이준과 최정희. 그뒤 그둘(2)은 우리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2015년 새해, 백운산장앞에서. 제일 오른쪽 무거운짐을 진이가 그다.
2015년 (최근의 그의모습) 도봉산 선인봉 검악T Over-hang코스 출발지점에서
2016년 (최근의 동계등반시의 그의 모습)소승폭포 등반후 정상에서서...
2017년 1월 Alps 3대 북벽의 하나 Grand Joras등반을 나가서 출발지점에서....
눈사태등과 나쁜일기때문에 패퇴하였는데 귀국후에도 계속 폭포등을 등반하였는데 불과 20여일후 그는 우리곁을 떠나갔다.
2017년 4월 22일 북한산 무당골, 산악인의 추모공원의 모습
이번에 유명을 달리한 나의 영원한 산친구 "이준"의 위패.......
일찌기 우리곁을 떠난 산후배 "장윤호"군의 위패도 보인다.
묵념중인 검악산악회 회원들
2010년대의 어느날 아시아나골프장에서... 좌로부텨 장세규, 송열현(한국산악구조협회 부회장), 김재봉(대한산악연맹 부회장), 이 준.
이글을 다쓰고 마무리 할즈음 모 산악관계 잡지사 기자가 낡은 사진한장을 우리산악회에 제공하였다.
1979년 "한국산악회 하계등산학교"에서 자일매듭법을 강의하고있는 생전의 "이 준"강사
오른쪽의 시범조교는 그이름도 유명한 "허영호"대장이다. (당시만하여도 변방인 제천산악회소속으로 열심히 산에 다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