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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야곱의 좌우파 대 요셉파>의 줄거리:
축복 주도권, 혹은 생에 대한 자기 주체성을 놓지 않음에 야곱파의 공통적인 특징이 있다면 좌파는 자기 주체성을 붙잡으면서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자들이고, 우파는 자기 주체성을 붙잡긴 하지만 야곱이 이스라엘이 될 때처럼 하나님을 인정하는 자들입니다. 그러나 진정한 선민은 야곱 좌파도 이스라엘로 발전한 야곱 우파도 아니고 바로 요셉파여야 합니다. 요셉파의 특징은 자기 주체성을 버리고 하나님의 주체성만을 붙잡는 하나님의 노예들입니다.
야곱의 좌우파 대(對) 요셉파
(창45:21~28)
25. 그들이 애굽에서 올라와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서 아버지 야곱에게 이르러
26. 알리어 이르되 요셉이 지금까지 살아 있어 애굽 땅 총리가 되었더이다 야곱이 그들의 말을 믿지 못하여 어리둥절 하더니
27. 그들이 또 요셉이 자기들에게 부탁한 모든 말로 그에게 말하매 그들의 아버지 야곱은 요셉이 자기를 태우려고 보낸 수레를 보고서야 기운이 소생한지라
28. 이스라엘이 이르되 족하도다 내 아들 요셉이 지금까지 살아 있으니 내가 죽기 전에 가서 그를 보리라 하니라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말씀 중심으로 <야곱의 좌우파 대(對) 요셉파>라는 제목의 하나님말씀 증거 합니다.
‘야곱의 좌우파 대(對) 요셉파’
대(對)라고 하는 것은 상대한다는 뜻인데, 야곱의 좌우파와 요셉파를 비교해 본다는 뜻에서 제목을 이렇게 정했습니다.
야곱에게서 무슨 좌우파가 나올 수 있겠느냐? 라는 생각이 듭니다.
한 사람의 이름과 연관되어서 좌우파라고 한다면 언뜻 철학자 헤겔이 생각납니다.
서양의 모든 철학이 19세기에 헤겔로 모아졌다가 헤겔로부터 갈라져 나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헤겔로 모아졌다가 갈라져 나갈 때에 헤겔의 철학 속에 담겨져 있는 관념론적인 성향을 받아들여서 발전시킨 사람들이 우파이고, 유물론적 성향을 받아들여서 발전시킨 사람들이 좌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헤겔의 좌파는 유물론을 받아들여 발전시키기 때문에 당연한 귀결로 신을 인정하지 않게 되고, 신을 인정하지 않는 좌파적 성향이 칼 마르크스로 와서 꽃을 피우면서 단순히 해석하던 철학에서 세상을 변혁시키는 철학으로 바뀌며 공산주의가 나오게 됩니다.
헤겔의 우파는 관념론적인 성향을 받아들이면서 신을 인정하는 가운데 부르주아들의 이데올로기가 되면서 이것이 바로 자본주의로 발전하게 됩니다.
철학자들은 헤겔 철학의 핵심을 어떻게 보는지 모르겠지만, 신학을 공부한 저의 입장에서는 헤겔 철학의 아킬레스건이라고 할 만한 곳을 어디에서 발견하느냐?
헤겔은 성서의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은 사건을 타락으로 보지 않고 인간이 인간답게 되기 위한 필연적 사건이라고 봅니다. 그것을 타락이라고 한다면 헤겔로서는 인간은 타락해야만 인간다워질 수 있었다고 생각하는 것이고, 그렇게 타락한 인간을 다시 신격화 시킵니다. 왜냐하면 선악과를 따먹은 결과 인간이 스스로 생각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인데, 주체적으로 생각하고 판단하는 합리성을 갖게 되었으므로 신격화될 만한 존재라는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귀는 “너희가 하나님처럼 될 수 있다”라고 했기에 선악과를 따먹게 된 것입니다.
그 말과 통하는 바가 있지 않습니까?
창세기의 이야기를 여러분은 어떻게 듣고 계신지 모르겠습니다만, 창세기를 관통하고 있는 핵심 내용은 주체성의 문제입니다.
하나님의 주체성에 의해서 이 세상이 창조되었습니다.
모든 삼라만상, 꽃과 나무와 동물과 바다 속의 물고기와 하늘에 나는 새와 산과 구름 같은 것들은 하나님의 주체성을 받아들여서 그것으로 될 수가 있습니다.
오직 인간만 자발적으로 하나님의 주체성을 받아들이는 피조물로 만드셨습니다. 그 주체성을 받아들이면 하나님에 의한 질서가 유지되면서 에덴이 유지될 것이고, 하나님의 주체성을 자발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에덴에서 쫓겨나는 삶을 살게 될 것이라고 하나님께서 경고하셨습니다. 그러나 인간 스스로가 하나님의 허락하신 주체성으로 자기의 주체성을 죽이는데 쓰지 않고, 스스로 자기의 생을 이끌어 가기 위한 수단으로 주체성을 활용하면서 인간의 삶은 타락해서 구렁텅이로 빠지게 되었고, 에덴이 사라지고 기쁨을 쫓아가는 삶이 되었습니다.
기쁨과 축복이 출발점이 되었을 주체성을 가지고 자기의 생을 살아가기 위한 방법으로 사용함으로 축복을 향해가는 삶이 되고 말았습니다.
아브라함의 특징은 주체성을 거부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주체성을 자기의 삶을 위해 사용하지 않으므로 믿음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오늘 제목에 야곱의 좌파와 우파가 나오는데 이렇게 다 연관이 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내용은 무엇이냐?
형제들이 2차로 만나서 잔치를 벌이고, 집으로 돌아가는 베냐민의 곡식 자루에 은잔을 집어넣고 다시 잡아온 후에 베냐민을 종으로 삼겠다고 엄포를 놓으니 유다가 자신을 노예로 삼아달라는 유다의 노예 친화적인 마음 상태를 봤습니다. 자기 주체성을 발휘할 수 없는 인간이 되기를 자처하여 탄원하는 그 광경에서 요셉이 감동을 하고 울음을 터뜨리고 자기의 신분을 드러내고 이제 고향에 내려가서 아버지 야곱과 모든 식솔들을 데리고 애굽으로 와서 살자고 합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 집으로 돌아와서 아버지 야곱에게 요셉이 살아있다는 이야기와 살아있을 뿐만 아니라 그 큰 제국인 애굽의 총리가 되었고, 그 총리가 된 요셉이 아버지와 모든 식솔들에게 아직도 5년이나 계속될 기근을 위해 가나안 땅을 떠나 애굽에 내려와 사시라는 전갈을 보냈다는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그러자 야곱이 맨 처음에는 믿지 않고 어리둥절했다고 합니다. 기절했겠죠.
죽은 줄 알았던 요셉이 살아있다는 것을 길거리에서 봤다고 해도 굉장한 일이고, 그렇게 채색 옷을 입혀가며 사랑했던 요셉이 보디발의 집에서 노예 생활을 하고 있었다고 해도 야곱이 기절할 일인데, 살아있을 뿐만 아니라 거기에 더해서 애굽의 총리가 되어 있다고 하니 미쳐버리지 않겠습니까? 이걸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어리둥절했다는 것은 믿기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집 앞에 나와 보니 애굽 총리가 보낸 마차가 있습니다.
28절에 “족하도다.”라고 합니다.
‘족하도다.’
이 말은 여러 가지 의미가 있을 수 있겠지만 여기에서는 마차를 보니 요셉이 살아있다는 증거가 충분하다고 여긴 것입니다.
그리고 (25절에) “아버지 야곱에게 이르러 / (26절에) 알리어 이르되 / (27절에) 아버지 야곱은 요셉이 자기를 태우려고 보낸 수레를 보고서야 / (28절에) 이스라엘이 이르되 족하도다 내 아들 요셉이 지금까지 살아 있으니 내가 죽기 전에 가서 그를 보리라 하니라”라고 나오는데 “야곱”과 “이스라엘”과 “요셉”이라는 이름이 한꺼번에 나오고 있어서, 야곱 좌파와 우파와 요셉파를 한 번 비교해보자는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야곱 좌파는 누구입니까?
축복 주도권을 쥔 자입니다.
축복 주도권이라는 것은 내 생애에서 이루고 싶은 것, 갖고 싶은 것, 되고 싶은 것을 어떻게 얻을 것인가에 대해 생을 몰고 가는 생의 주체성을 말합니다.
생에 대한 자기의 주체성을 붙잡고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자들이 야곱 좌파입니다.
그러므로 헤겔의 좌파와 우파를 이야기하기 전에 이미 3,800년 전에 야곱에게서 벌써 사상적 좌파와 우파는 나뉘었다는 것입니다.
우파는 누구입니까?
이스라엘로 발전한 자들입니다.
자기 주체성을 붙잡고 내가 한 번 태어난 생애에 대해서 ‘예술가로서 성공해야 되겠다. 돈 많이 벌어서 성공해야 되겠다. 정치가로서 성공해야 되겠다. 자식 잘 기른 엄마로서 성공 해야겠다’라고 목표를 정하고 그리로 몰고 가는 자기 주체성을 붙잡되 하나님을 인정하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을 인정하지만 자기 주체성으로 생을 이끌어 가는 것은 자기 자신입니다.
왜냐하면 무엇이 좋은지에 대해서 내가 결정하고 어디로 가겠다는 것도 내가 결정한 뒤에 하나님은 그런 자기 주체성을 가지고 삶을 이끌어 가는 후원자, 지지자, 백업하는 분으로 존재하게 되고 축복을 주지 않으면 안 놔주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정하되 자기 주체성의 효율을 위한 수단으로 등장시키는 것이 이스라엘로 발전한 야곱의 우파입니다.
지금 요셉과 야곱이 만나는 장면에서 아버지와 아들이기 때문에 요셉에게 일어난 모든 일들을 야곱이 질투하거나 라이벌로 생각해서 받아들일 필요는 전혀 없어요.
그러나 우리 입장에서는 야곱도 선민이고 요셉도 선민인데, 도대체 이 두 선민에게서 어떤 차이가 나타나는지에 대해서 요셉이 자기의 생애의 꽃을 피우고 있는 이 시점에서 야곱과 비교를 해보자는 것입니다.
야곱은 지금 130세인데 아들 요셉에게 내려가서 17년을 살고 147세에 죽으므로 생애를 마감하고 결산하는 자리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까지 야곱의 살아온 생애와 요셉의 절정을 이루는 생애를 한 번 비교해보자는 것입니다.
야곱의 우파와 좌파의 공통적인 점은 주체성을 내가 붙잡는 것이고 주체성으로 삶을 영위하는 것입니다.
주체성은 거듭 말씀드리지만, 무엇이 내 생애에 좋은 것인가를 내가 선택하는 것이고, 그건 이 세상에 있을 수밖에 없는데 그것을 얻기 위해서 살아갑니다.
우리가 어제 이야기했어요.
“떨어진 사과를 팔아라.”
이 책에서 성공을 정의하기를 ‘자기 가치기준을 따라 갖고 싶은 것을 갖고, 하고 싶은 것을 하고, 되고 싶은 사람이 되는 것이 성공이다’라고 했는데 이게 바로 야곱의 좌우파의 공통적인 특징입니다.
단, 좌파는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내 힘으로 하겠다는 것이고, 우파는 하나님을 인정하면서 바로 그 성공을 추구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요셉이 성공했다고 보이는 이 상황과 야곱의 지금까지의 생애를 비교해보면 야곱은 성공했습니까?
야곱의 좌파든 우파든 공통적으로 자기 주체성을 갖고 성공을 향해 달려가는 사람입니다.
그 대표자가 야곱인데 성공을 했습니까?
성공의 정의에 따르면 갖고 싶은 것을 가졌습니까?
기근이 있는 이 상황과 요셉을 만나기 직전까지의 야곱의 삶은 요셉을 잃은 것에 행복이 있을 수 없습니다. 베냐민도 잃을 가능성에 놓여 있고 시므온도 애굽에 붙잡혀 있는 상태이고, 먹을 것이 없어서 식솔들은 다 죽게 생겼습니다. 어느 모로 보나 야곱의 결과는 요셉과 비교해 볼 때 가진 자라고 말할 수가 없어요.
재미있게도 어제 본 본문에서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바로가 요셉의 형들이 왔다는 말을 듣고 형들에게 다 모시고 와서 여기서 살라고 할 때에 뭐라고 하는가 하면?
20절에 “또 너희의 기구를 아끼지 말라 온 애굽 땅의 좋은 것이 너희 것임이니라”라고 합니다.
‘너희의 기구를 아끼지 말라’
이 말은 너희들이 가나안 땅에서 이제까지 마련한 모든 살림을 다 버리고 오라는 것입니다. 호의로 한 이야기인데, 이 이야기 속에는 가나안 땅에서 너희들이 평생 모아놓은 살림이 궁색 맞을 것이기 때문에 그런 것을 가지고 오느라고 지체하지 말고 다 버리고 오라는 것입니다. 애굽 땅에 좋은 것이 넘치니 다 애굽 땅에서 가지라는 것이고, 그 애굽 땅의 좋은 것들이 다 요셉의 손 안에 있습니다.
요셉이 형들에게 아버지를 모시고 오라고 이야기할 때에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형들에게 자신을 판 것에 대해서 걱정하지 말라는 이야기를 할 때에 8절에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이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 나를 바로에게 아버지로 삼으시고 그 온 집의 주로 삼으시며 애굽 온 땅의 통치자로 삼으셨나이다”라고 합니다.
이 말을 줄여서 주어와 목적어와 동사만 이야기하면 ‘하나님이 나를 삼으시고, 하나님이 나를 삼으시며, 하나님이 나를 통치자로 삼으셨나이다’라는 말입니다.
즉, 하나님이 나를 삼으시고, 삼으시고, 삼으셨나이다. 다 하나님이 하신 것이라고 합니다.
야곱의 좌파와 우파의 공통적인 특징은 내가 해야 되는 것인데, 요셉은 다 하나님이 하셨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바로에게 아버지로 삼으시고’
이 말은 바로가 무슨 일을 하든지 다 자기에게 물었다는 것입니다.
‘그 온 집의 주로 삼으시며’
이 말은 왕궁과 왕가의 모든 일을 요셉이 통치했을 뿐만 아니라 애굽 온 땅의 통치자로 삼으셨다고 합니다.
이것에 비하면 야곱은 축복 주도권을 쥐고 생에 대한 자기 주체성을 놓지 않고 자기가 잘살아보겠다고 뛰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요셉은 전부 하나님이 하셨다고 합니다. 자기가 한 것은 아무것도 없어요.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이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 나를 바로에게 아버지로 삼으시고 그 온 집의 주로 삼으시며 애굽 온 땅의 통치자로 삼으셨나이다’라고 다 하나님이 삼으셨다고 합니다.
이것과 비교해보니 야곱에게는 성공이라고 할 만한 것이 없어요. 이것은 비교의 대상이 되지를 않습니다.
야곱은 자기 주체성으로 산 자이고, 요셉은 하나님의 노예로 산 자입니다.
꿈을 꾸었다는 이야기는 그 꿈을 통해서 형들이 자기에게 절하는 미래를 비전 삼아서 갔다는 것이 아니고, 아브라함처럼 꿈을 꾸게 하시는 하나님을 늘 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땅과 자손을 약속해 주시면 아브라함은 땅과 자손이 이 땅에서 이루어질 날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그 약속을 해주신 하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땅에 있는 약속이 이루어질 때를 멀리 내다보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노예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좋아서 하나님을 바라보는 이 사람들이 갖고 싶은 것은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을 고스란히 담고 싶고 담으려니 내 주체성이 생선 내장 비워지듯이 싹 비워지고, 하나님이 담겨지므로 이 땅에서 노예가 될 수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좋으니 하나님을 얻기 위해서 요셉이 그렇게 살았던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좋아해서 하나님의 노예가 된 요셉의 상황과 야곱의 생애의 결말을 봅니다.
바로가 궁색 맞은 살림을 갖고 오지 말라고 하는 것은 호의이면서도 동시에 모욕 아닙니까?
내가 이제까지 생애동안 모았던 살림살이들, 양과 가축이야 애굽에서도 마찬가지겠지만 살림에 필요한 모든 도구가 버리고 갈만한 정도밖에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런 야곱이 성공했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자기가 원한 것을 가진 것도 아닙니다. 지금 요셉을 만나기 전까지는 벌벌 떨고 있었을 뿐입니다.
곡식 없어서 떨고 있고, 자식 잃을 까봐 벌벌 떨고…
그게 무슨 성공한 것입니까?
자식 낳은 거야 하나님이 주신 것이니 자기 주체성으로 이룬 것이 아니고 자기가 되고 싶었던 자리에 서지도 못했고, 하고 싶은 것을 한 열매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요셉은 성공한 것입니까?
성공의 정의는 자기의 가치기준에 따라서 갖고 싶은 것을 갖고, 하고 싶은 것을 하고, 되고 싶은 사람이 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어제 본 45장 13절에 “당신들은 내가 애굽에서 누리는 영화와 당신들이 본 모든 것을 다 내 아버지께 아뢰고…”라고 나오는데 요셉이 애굽 전체의 권력을 가졌고 그 영화를 갖고 싶어서 가진 것입니까?
아니에요. 요셉이 지금 애굽을 통치하고 있는데 자기 가치기준에 따라서 애굽 전체와 바로 왕가의 모든 일들을 자기가 다스리고 싶어 했기 때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다스리고는 있지만 하고 싶어 한 적은 없습니다.
요셉이 지금 바로의 아버지가 되고 바로 왕궁의 통치자가 되고 온 집의 주가 됐습니다.
성공은 되고 싶은 사람이 되는 것이라고 했는데, 요셉은 되고 싶어 한 적이 없습니다.
요셉은 총리가 되어서 대 제국의 모든 재산을 손에 넣고 심지어는 왕가의 문제까지 자기가 다스리고 있지만, 성공한 것이 아닌 것은 자기가 갖고 싶은 것을 가진 것이 아니고, 행하고 싶었던 것을 행하는 것이 아니고, 자기가 되고 싶었던 사람이 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이 원해서 요셉에게서 일어난 일이지 요셉이 원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요셉은 어떤 의미에서 성공한 사람입니까?
요셉의 가치판단을 따른 최고의 가치는 하나님이고 하나님을 갖고 싶은 것입니다.
하고 싶은 것을 하는 것이 성공이라는데 요셉을 뭘 하고 싶어 했습니까?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무엇이 되고 싶었습니까?
하나님의 노예가 되고 싶었고 그래서 노예가 됐습니다. 그러므로 요셉은 성공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주체성을 갖고 계신 분이십니다. 그런데 나도 주체성이 있습니다.
주체성과 주체성은 부딪히게 되어 있고, 더군다나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시고 천지를 창조하신 분이신데 그 분이 생각하는 것을 내가 생각할 수 없기 때문에 그 분이 생각하는 것과 같을 수가 없는 나는 인간이고 죄인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내 생각과 주체성은 뿌리째 뽑혀져야 하고 노예가 되는 것입니다.
요셉에게 제일 좋았던 것은 하나님이고 이 땅에서 제일 하고 싶었던 것은 하나님의 뜻이 고스란히 이루어지는 것이고, 하나님의 노예가 되고 싶은 것이었는데, 하나님이 하고 싶은 것을 하시기 위해서 요셉을 총리 자리에 앉히시고 바로의 권력을 이양 받게 하셨던 것이지요.
야곱은 좌파든 우파든 내 주체성을 가지고 내 인생에서 무엇이 좋은가를 생각하고 이루겠다고 살았던 것입니다.
야곱 좌파 중에 칼 마르크스가 대표적인 사람입니다.
칼 마르크스를 야곱 좌파로 손꼽는 이유는 칼 마르크스가 유대인입니다.
세계 3대 문제아인 찰스 다윈도 유물론 계통의 사람으로 인간을 물질로 봅니다.
프로이드도 마찬가지예요. 인간을 성의 노예로 봅니다. 칼 마르크스는 인간을 돈의 노예로 봅니다. 세 명 다 유대인입니다. 이 사람들이 다 야곱의 자손입니다.
그리고 자본주의 계통에서는 빌 게이츠가 유대인이고, 델컴퓨터의 창시자인 델도 유대인이고, 베스킨라빈스나 던킨 도너츠, 스타벅스의 창립자도 다 유대인이고 자본주의 세계의 리더들입니다. 자본주의 세계가 공산주의처럼 싸잡아서 하나님을 부인하는 자들은 아닌 우파입니다.
자본주의 세계에서 재계와 IT업계와 예술계와 학문계를 주름잡고 있는 유대인들이 이 우파가 되어서 이들이 이끄는 삶의 흐름 속에서 요새 유행하는 것이 자기계발서입니다. 이 세상을 거시적으로 보면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헤겔의 좌파와 우파를 따지기 전인 3,800년 전에 야곱의 좌파와 우파에 의해서 결정되었고, 그 좌파와 우파가 지금 세상을 주도적으로 이끌고 가는 것입니다.
공산주의가 없어졌다고요? 자본주의 안에서 빈부의 격차가 심해지면 반드시 다시 부활합니다. 마르크스가 있어서 공산주의가 생긴 것이 아니고 돈의 불균형 때문에 생긴 것이고, 한마디로 이 세상에 사랑이 없어서 생긴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야곱의 좌파나 우파가 아닌 요셉파라야 되고 하나님의 노예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간단해요. 갈라디아서의 말씀처럼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돈, 자식, 사업, 애인, 성공, 권력, 내가 이 세상에서 갖고 싶어 하는 그 어떤 것보다도 먼저 밝히 보여야 합니다. 그것을 밝히 보라고 날마다 이렇게 말씀드리고 오늘의 번제를 하는 것 아닙니까?
그것을 밝히 보고 있으면 마음이 하나님을 갖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주님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기다리세요.
이 세상의 문제가 산같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내 마음에 평강이 주어지는데 이게 바로 절대 평강이고 하나님을 만나는 증거입니다. 이것이 자꾸 성숙해 가면서 하나님의 친밀도가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세상을 보는 눈도 달라지기 시작하면서 요셉파가 될 수 있습니다.
고후4:10절에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진다.’
이 말은 내 몸이 가정이 있으면 가정에 대해서 내 마음이 죽는 것이고, 내 몸이 직장에 있으면 직장에 대해서 죽는 것인데 내 주체성이 죽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주체성이 나타나기 위해서.
애굽에 있는 요셉은 애굽에 대해서 죽은 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주체성이 요셉을 통해서 표현되면서 총리자리에서 다스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간단해요.
내가 직장이나 가정이나 어디서든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을 밝히 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요셉파가 되어서 하나님의 노예가 되는 것이고, 나는 하나님을 갖고 하나님은 나를 통해서 당신의 뜻을 이루어 가십니다. 하나님의 뜻이 고스란히 담겨지기 위해서 하나님의 노예가 되는 것이죠. 이게 바로 요셉파입니다.
야곱의 좌우파의 특징은 내가 주체적으로 내 생을 이끌어 가는 것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내가 성공하고 싶어서 달려가는 것입니다. 우파는 여기서 하나님을 동원해서 내가 달려가는 길에 박차를 가할 수 있는 백업과 스폰서로서 하나님을 강압합니다.
하나님의 노예가 되심으로 마음은 하나님을 갖는 하나님의 아들이 되시고, 여러분의 몸은 예수의 죽음을 짊어진 자들로서 어디를 가든지 여러분의 주체성을 죽이고, 하나님의 주체성만이 표현 될 수 있는 요셉파로서 살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야곱의 좌파도 우파도 아닌 자들로 붙잡아 주시고, 야곱의 좌파와 우파가 섞여있는 이 세상에서 오직 요셉파로 하나님의 노예가 되어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