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불씨」
1979년 여름, 휴전선 최동북단의 철책선을 지키던 군(軍) 시절, 길고 긴 밤을 지새우며 그녀의 편지를 기다렸다. 그러나 그녀는 그해 봄 어느 날 긴 편지를 보낸 후 약 40여 일간 내게 편지를 보내지 않았다.
그녀의 편지는 길고 길었다. 그녀가 기다려야 했던 그 시간처럼. 그리고 그 편지에서는 어느 아득한 날에 피어나던 라일락꽃 향기가 나는 듯 했다. 그녀의 편지에는 창문을 흔들다 가는 바람소리와 밤을 적시며 내리던 빗소리가 들어 있었다. 그녀의 편지에는 온통 기다림의 이야기들이 아프게 적혀 있었다.
그녀는 라일락꽃이 이젠 피었다가 그 꽃잎이 퇴색하여 져버렸는데도 내가 오지 않는다고 하였다. 오늘 내일 손꼽아 기다렸다고도 했다. 어제는 연안부두에 갔다 왔으며, 교회에서는 바자회를 하였다고 쓰여 있었다.
성,
나는 어찌해야 성을 즐겁게 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 나 성을 무척 기쁘게 해주고 싶어. 성이 내게 무관심해지고 멀어져도 식지 않는 애정을 지니고, 성이 나를 미워해도 변하지 않는 일념으로 사랑하고 싶어. 그런데 나는 왜 이렇게 외로운지 모르겠어(後略).( 79.5.12. )
나는 얼마나 많은 것을 그녀에게 원하였던가
무엇이 정녕 참된 사랑인가.
거울처럼 그녀의 영혼을 바라보라.
네가 울고 싶을 때 그녀도 따라서 울고 있지 않는가.
79.5.20.
어둠을 몰고 가는 새벽바람이 분다.
구름도 하나 없는 허무의 공간에서 나의 이름은 잊혀져 가고 있다.
산새들이 울고 가는 숲 사이로 타오르는 밝은 햇빛, 햇빛.
너의 얼굴이 떠오른다.
가끔씩 쓸어안고 울고 싶은 너의 얼굴
바다는 서서히 밝아오고 있다.
흰새 같은 물결은 춤을 추면서.
환상의 아리아를 듣고 싶다.
가슴을 쥐어짜는 듯 아픈 소리라면 더욱 좋으리라.
이 세상 모든 살아있는 것들은 조금씩 죽어가고 있다.
생명을 가졌다해서 모두 살아 있는 것은 아니다.
오늘 나는 아카시아 잎사귀를 쥐어 뜯어 던지며 울었다.
죽어가는 내 생명이 불쌍해서 운 것은 아니었다.
고통을 주는 운명의 신(神)이 야속해서 울고
그런 운명을 딛고 살아야 한다는 것이 슬퍼서 울었다.
그것은 생각하면 너무도 슬픈 일이어서
퍼지르고 앉아서 크게 통곡해도 모자랄 것 같았다.
79.6.7.
유리창 밖에서는 세찬 빗줄기가 쏟아지고, 밤을 새운 병사들은 고단한 잠을 이루고 있을 때, 나는 홀로이 어두운 취사장에 내려와 등잔불을 밝혀놓고 낡은 천장에서 떨어지는 빗방울을 바라보며 그녀에게 편지를 쓰고 있었다.
사랑은 받는 것보다 주는 것이 행복한 것이라고 믿어왔기에, 스스로 위안하고 기다리자 하였으나, 나는 속되고 평범한 인간이었기에 그녀의 뜨거운 확인과 응답을 원하였고, 고단하고 외로울 때 그녀의 사랑을 찾고 불렀다.
끝없는 관용과 용납의 두 팔로 나는 흔들리는 내 마음을 묶어놓고, 사랑스런 여인에게 보내는 행복한 사랑의 시를 쓰고자 하였지만, 마음과는 달리 편지는 애원의 음성으로 젖고 있었다.
무엇이 그녀를 아프게 하였는가. 그녀가 내게 보내는 이 긴 침묵의 사연은 얼마나 슬프고 아픈 이야기 이기에 이렇게도 전하기가 어렵다는 것인가. 격정에 휩싸이는 하루가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른다. 서러운 마음이 진하여서 편지를 쓰다가 엎드려서 잠이 들었다. 내 가난한 영혼을 울리는 일은 이렇게 하지 않아도 아주 쉽다. 사랑이 무엇인지 모르는 우리들에게 절대자 하나님은 무슨 가혹한 형벌을 주시려는가.
비오는 날보다 탄식하는 내 마음이 더욱 쓸쓸하구나.
(79.6.24.)
그녀는 내게서 무엇을 원하는 것일까.
떠나는 연습을 하고 있을까.
섬세한 손을 흔들며
눈물 따윈 흘리지 않겠다고
입술을 꼭 깨물면서
익숙한 몸짓을 하면서
헤어지는 연습을 하고 있지는 않을까.
(79.6.29.)
바로 이 무렵에 내가 노트에 적은 글이 ‘불씨’ 였다.
불씨
바람에 날려가는
불씨가 되고 싶을 때가 있다
모두 다 타버린 후에
남은 것 하나 없을 때에
어디론가 자취도 없이 사라져버리는
수 만개 불씨가 되고 싶을 때가 있다
기억도 남지 않고
아무런 이야기도 남지 않은
완전한 허무가 나의 전신을 휘감을 때
움켜쥐고 싶은 것도
잃어버리고 싶은 것도 하나 없을 때에
소리 없이 흔적도 없이
영원 속으로 흘러 들어가는
한낱 불씨가 되고 싶을 때가 있다
버림받아도 좋을 운명이
부서지고 흩어져도 서럽지 않을 목숨이
어느 한 순간에
슬프도록 행복한 이야기로 남고 싶을 때
이름도 없이 기억도 없이 사라져 버리는
찬란한 밤의 불씨가 되고 싶을 때가 있다.
1979. 6. 19.
2024. 11. 2. 나는 이 원시(原詩)를 토대로 가곡 「불씨」를 만들었다. 그리하여 이 가곡은 2025. 5. 30. 장충레코딩스튜디오에서 바리톤 송기창의 가창으로 녹음되었다.
https://youtu.be/SJmDGV9k8Sw?si=wtXYxClH-KukuG_p
첫댓글
그러니요
인생의 한 페이지에서
이렇게 명곡을 창작하셨나 봅나다
작곡가님
양떼님,
찾아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