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영] 미스 코리아 살인사건 23-24.
문제의 칵테일 잔 2.
"연박사님은 병원에 안 계신다구요? 네, 잘 알겠어요. 수고하세요, 조박사님."
강희 여사가 무선전화기를 끊고 소파에서 막 일어나려는 순간 윤형사가 의상실 문을 열고 들어오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강여사님."
강여사 앞의 소파에 앉은 윤형사는 실내를 한번 휙 둘러보고는 질문을 던졌다.
"성주라양한테서는 아무런 연락도 없었죠?"
"그러게요. 무슨 일이 있으면 나한테 제일 먼저 연락을 했었는데...... 주라한테 무슨 일이 일어난 게 틀림없어요......"
강여사는 슬픔에 젖어있는 눈으로 윤형사를 보며 말끝을 채 잊지 못했다.
"유여사님 댁을 방문하고 나서 그 집을 나오자마자 행방이 묘연해졌는데, 혹시 그날 저녁에 강여사님과 개인적인 약속이 없었나요?"
"나는 그날 경기도에 있었어요. 골프장에요."
강여사는 애써 지명을 피하고 있었다.
"경기도 어디에 있는 골프장인가요?"
"그날은 마침 의상실이 쉬는 날이어서 용인에 있는 골프장으로 골프를 치러갔어요."
"혼자요?"
"골프를 혼자 칠 수는 없지요......"
강여사는 동행인의 이름을 밝히는 걸 망설이는듯 하더니 이제부터는 개의치 않겠다는 눈빛으로 입술을 움직였다.
"권의원님과 함께 골프를 쳤어요."
"네......"
윤형사는 회의실에서 봤던 사진들을 떠올렸다.
"7시쯤에 남산 기슭에 있는 P호텔 레스트랑에서 저녁식사를 하고 9시에 집으로 들어갔어요."
"권의원님과는 자주 골프를 치셨나보지요?"
"자주는 못치고요, 한 달에 한번 두 달에 한번 정도 쳐요."
"연박사님과 유여사님은 두 분이 골프를 치는 걸 알고 계시나요?"
강여사는 쌍거풀 진 유형사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질문 내용이 좀 이상하네요."
"아이, 그런 뜻으로 질문드린 게 아니고요, 연박사님과 유여사님은 골프를 못치시느냐 하는 뜻으로 우회적으로 여쭈어본거예요."
윤형사는 변명하듯이 말했다.
"어머,내가 오해를 했군요. 두 분은 전혀 못쳐요. 그래서 몹시 망설이지요. 그렇지만 사업상 권의원님이 차지하는 비중이 워낙 커서.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우리 의상실 고객 중에는 의원님 사모님들이 상당한 수입원이 되고 있어요."
강여사는 여비서가 가져온 쥬스를 윤형사에게 권하며 상냥하게 미소짓고 있었다. 여비서와 인사를 나눈 후에 예의상 쥬스 한 모금을 마시고 탁자 위에 내려놓은 윤형사는 쥬스로 마른 입술을 축이고 있는 강여사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러자 강여사가 슬쩍 그녀의 시선을 피하며 쥬스잔을 내려놓고 있었다.
"혹시 누구한테 협박 같은 거 받고 있지 않나요?"
윤형사는 강여사를 정면으로 보면서 물었다.
"무, 무슨 말인가요?"
강여사의 얼굴에 당황한 빛이 역력히 나타났다.
"강여사님, 우리 경찰은 수사상의 일로 여러 가지 정보를 얻게 돼요. 그 중에는 개인의 사생활도 은가루 속의 금가루처럼 들어오곤 하지요."
"난 무슨 뜻인지, 무슨 말뜻인지 전혀 모르겠군요."
"윤보혜양과 성주라양은 강여사님이 발굴해낸 미스코리아 진이었는데, 이번 사건으로 인해 아름다운 두 진이 우연하게도 신변에 큰 이상이 생겼어요. 강여사님으로서는 비통한 마음 금하실 길이 없겠지만 사건해결을 위해서는 한가지도 숨김없이 진실을 말해 주셔야 해요. 그래야만 사건의 실마리가 하나 둘씩 풀리게 돼요."
윤형사는 강여사의 양심에 한 가닥 희망을 걸어보았다.
강여사는 그녀의 의도를 간파한 듯 순순히 권의원과의 관계를 털어놓았다.
"......권의원님과는 처녀시절부터 아주 가깝게 지내온 사이였어요. 제가 열아홉 살의 나이로 미스코리아 진에 당선된 후 영화배우셨던 권의원님과 결혼까지 오고갈 정도로 뜨거운 사이였는데 3년 선배인 유여사가 마담뚜를 중간에 넣어서 결혼을 성사시켰어요. 십수년 전의 아픈 첫사랑이었지요. 그후 나는 1년 후에 지금의 남편인 연박사와 중매결혼을 했어요. 그 후로 권의원님은 정계에 진출하셨고 난 대학교 때 전공이었던 의상학을 살려 의상실을 경영하게 되었어요. 사실 지금까지 권의원님의 정치자금 일부가 내 손지갑에서 나오고 있어요. 권의원님과 나하고는 사업상의 관계일 뿐이예요. 과거시절에 결혼이 오고 갔던 옛 연인이라는 사실이 고작일 뿐이예요."
"연박사님을 사랑하시나요?"
강여사는 "사랑?"하면서 어금니가 보일 정도로 소리내어 크게 웃었다.
"사랑 없는 결혼의 끝은 의무밖에 안 남아요."
강여사는 손끝으로 눈가의 눈물을 찍으면서 간신히 울음을 억제하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자녀는 어떻게 되는지요?"
"없어요. 남자쪽에 문제가 있어요."
"윤보혜양에 관한 질문인데요. 박만하라는 캠코더 기사는 보혜양이 출산 경험이 있는 여자라고 퀸서울에서 주장하던데, 강여사님은 지금도 허위 게재라고 보십니까?"
윤형사는 질문 내용을 바꾸었다.
"퀸서울에는 죽은 보혜에 대한 명예 훼손죄로 고소할 생각이예요. 억울하게 죽은 보혜의 등에 재차 칼을 꽂는 그런 몰상식하고 무자비한 잡지사는 문을 닫아야 해요. 퀸서울이 확인도 하지 않고 그 기사의 엉커리 글을 실은 건 윤리상으로나 도덕적으로나 용납받지 못할 범죄행위예요."
강여사는 박만하의 얘기가 나오자 분노섞인 음성으로 말했다.
그동안의 일이 소름끼치는 모양이었다.
"우리 경찰에서도 지금 진실을 가리기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니고 있어요. 그런데 보혜양의 과거는 전적으로 강여사님의 증언에 의해 추적해 들어간 결과인데, 혹시 보혜양이 자신의 과거를 거짓으로 얘기하지 않았을까요?"
"사실 보혜의 경우는 마찬가지지만, 몇 년 전에도 잡지사 기자들이 미스코리아의 과거 행적을 눈사람 굴리듯이 크게 불려서 당사자를 곤경에 처하게 만든 적이 여러 번 있었어요. 요정에 출입했다든지 남자 친구와 제주도로 밀월 여행을 갔다와서 혼인신고를 했다든지 가지 가지지요. 생각해 보세요. 아들까지 낳았다는 여자가 미스코리아 대회에 출전한다는 것 자체가 상상도 못할 일 아니겠어요. 여기에는 뭔가 엄청난 음모가 있을거예요. 아니면 착각이구요."
강여사는 몹시도 불쾌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신문을 보니까 권의원께서 개각 명단에 포함되지 않았더군요."
윤형사는 강여사의 표정을 관찰하면서 말했다. 순간 강여사의 얼굴이 슬픔에 젖어있었다.
"운이 없었지요. 보혜가 독살당했을 때 권의원님이 불안해하던 이유가 현실로 나타났어요."
강여사는 무척 안타까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박만하라는 사람한테 협박 같은 걸 전혀 받지 않았나요?
보혜양이 독살당하기 전후를 해서 특히 말이예요."
"그 기사의 협박과 의원님의 입각과 무슨 연관이 있는건가요?"
강여사는 눈빛을 흐리며 물었다.
"정말 협박이 없었나요?"
"정말 없었어요."
"그것 참 이상하네요. 그 작자는 강여사님과 권의원님을 궁지에 몰아넣을 결정적인 증거를 불법적이고 야비한 방법으로 취득하고 있었어요."
"도대체 그 증거라는 게 뭔데 아까부터 자꾸 협박당하지 않았느냐고 묻는거예요?"
"사진이예요. 두 분이 함께 있는 사진이요."
강여사의 얼굴이 밀납처럼 하얗게 변하고 있었다.
"......그, 그 사진이 지금 어디 있나요......?"
"그 사진에 관해선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다만 우리가 확인하고 싶은 것은 강여사님에게든 권의원님에게든 어떤 협박이 있었느냐는 사실이예요."
"다시 한번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나에게도 권의원님에게도 협박은 없었어요."
"그럼 그 기사가 어째서 미스코리아 선발대회장에 나타났을까요? 우연히 S문화회관에 들렀을 리가 만무일텐데요."
"그거야 그 사기꾼한테 가서 물어보아야 자세히 알 일이지요."
강여사는 목이 타는지 반쯤 남은 쥬스를 들이켰다.
윤형사는 어둡고 공포스런 눈빛을 감추고 있는 강여사와 작별인사를 하고는 택시를 집어타고 금지선 변호사 사무실로 갔다.
문제의 칵테일 잔 3.
책상 위의 국화가 시들해져있는 사무실에서 금변호사와 인사를 나눈 윤형사는 밝은 표정으로 소파에 앉았다.
"강여사님 의상실에서 오는 중이예요. 강여사님이 안부 전해달라고 하더군요."
윤형사는 금테안경을 고쳐쓰면서 소파에 마주 앉은 금변호사에게 하지도 않은 말을 만들어 전해주었다.
"강여사께서 무척 상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