둔암 한양조공(규양) 묘갈명
한양조씨(漢陽趙氏)는 바로 동방(東方)의 대성(大姓)이며 유산(酉山)의 한 파(派)는 또한 영남(嶺南)의 이름난 문벌(門閥)이 되었으나 문장(文章)과 행의(行誼)와 대과(大科)와 소과(小科)등 과환(科宦)의 명성이 양자(陽字) 오형제(五兄弟)에서 더욱 성하였으며 둔암선생(鈍巖先生)이 또한 여러 형제 중에서 가장 뛰어난 분이었다. 선생의 휘(諱)는 규양(葵陽)이며 자(字)는 향경(向卿)이니 먼 조상 휘(諱) 지수(之壽)께서는 벼슬이 첨의중서사(僉議中書事)며 그 뒤로도 고려조(高麗朝)에서 크게 현달(顯達)하였는데 휘(諱) 연(涓)에 이르러 조선조의 태종(太宗)임금을 섬겨서 벼슬이 우의정(右議政)에 이르고 시호(諡號)는 양경(良敬)이다. 휘 련(憐)은 벼슬이 동지돈녕부사(同知敦寧府事)요 휘 운종(云從)은 군수(郡守)였고 휘 종(琮)은 현감(縣監)을 지냈는데 처음 영남(嶺南)에서 살았으니 공(公)에게는 팔세조(八世祖)가 된다. 휘 명한(鳴漢)은 진사(進士)로 좌승지(左承旨)에 증직되었고 휘 봉징(鳳徵)은 문과에 급제하여 도사(都事) 벼슬을 하고 예조참판(禮曹參判)에 증직되었으며 휘 원익(元益)은 수직(壽職)으로 정헌대부(正憲大夫)의 자급(資級)에 올랐으니 이 삼대(三代)가 공에게는 증조와 조부와 부친이 되신다. 어머니는 예안이씨(禮安李氏)이니 이기만(李基晩)의 따님인데 조선 숙종(肅宗) 三十二年(서기 一七○六) 병술 十二月 十一일에 출생했으며 어려서부터 재주가 특출하고 기개(氣槪)가 걸출하며 풍채가 당당하여 무엇에도 구속받지 아니했고 선고(先考)공이 교육 방법이 대단히 엄하여 회초리를 곧 썼으며 어머니 정부인(貞夫人)도 또한 언사(言辭)와 안색(顔色)을 빌리지 않고 반드시 법도에 따라서 행하도록 했다. 열 살 때에 아버지 상(喪)을 당하여 어버이 곁에 뫼시고 있으면서 조석(朝夕) 상식(上食)이 예법대로 곡읍(哭泣)했으며 이윽고 또 신당공(新塘公) 이성전(李成全)의 문하에서 수업을 했으니 이공(李公)은 즉 고산선생(孤山先生)의 재주가 뛰어난 수제자였다. 이렇게 배우고부터 내외(內外)와 경중(輕重)의 구별을 알게 되어서 집에 들어가면 형제간에 우애가 금옥(金玉)같았고 서로 도와서 학문을 넓히고 예법으로써 자신의 행동을 제약하여 그의 덕업(德業)을 이루게 되었다. 정사년에 어머니 상(喪)을 당하여 치상(治喪)과 슬픔을 지극히 갖추었으며 갑자년에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했는데 이어서 세 동생이 나란히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했으며 영조(英祖) 四十九년 계사(서기 一七七三)에 다음 동생 보양(普陽)과 둘째 아들 석회(錫晦)가 증광대과(增廣大科)에 급제했는데 그때 아버지 정헌대부공(正憲大夫公)이 九十의 늙은이로 건강하게 살아있었으니 영광을 고하는 잔칫날에 공과 두 동생이 옛날의 난포(襴袍)와 복두(幞頭)를 쓰고 급제한 두 사람을 거느리고 뜰에서 춤을 추니 보는 사람들이 높이 축하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영달과 명리(名利)에는 초연하였으며 몸소 농사짓기를 권하고 비천한 일에도 많이 능하였으며 널리 세상을 구제함에 뜻을 두고 남의 과실을 말하지 않으며 작은 벌레도 밟지 않았다. 고금에 대한 견문이 넓어서 역대(歷代)의 치란(治亂)과 흥망에 대한 일과 인물(人物)의 현부(賢否)와 득실(得失)에 대해서도 손바닥을 가리키 듯 분명했으며 문장(文章)을 함에 있어서도 마치 긴 강물을 바다로 흘러들게 하는 것처럼 도도하게 끝이 없었다. 정승 이복원(李福源)과 상서(尙書) 이성원(李性源)이 공의 육의고(六義稿)를 보고 자신도 모르게 무릎을 치고 말하기를 “이 글은 한 지방에만 사사로이 숨겨둘 수 없다.” 했다. 그로 인해 서울지방에도 두루 보이게 되어 과거에 응시하는 사람들이 일시에 과거의 체제를 크게 변하시켰다고 했으니 예컨대 시전의홍범부(始電義洪範賻)와 백조편(白棗篇)과 상우책(尙友策)등은 한 세상 사람의 입에 자주 오르내렸으며 만년(晩年)에 손수 베낀 주절어류(朱節語類)와 또 저술한 성리감인집(性理鑑人集)과 오총구(五總龜)등과 같은 책을 밤낮으로 보고 살폈으니 여기에는 또 중년(中年)과 만년(晩年)의 공부를 함이 같지 아니했다.
호가 강좌(江左)인 권만(權萬)공과 두릉(杜陵)인 이제겸(李濟兼)공과 명고(鳴皐)인 정권(鄭權)공은 모두 후진(後進)의 벗이지만 마음을 허여하고 지냈으며 세상을 함께한 유명한 인사(人士)로 서울에는 지사(知事)를 지낸 홍성(洪晟)과 상서(尙書)를 지낸 홍중효(洪重孝)와 상서(尙書)를 지낸 강세황(姜世晃)과 호가 석북(石北)인 신광수(申光洙)와 영남(嶺南)에는 호가 구사당(九思堂)인 김낙행(金樂行)과 삼산(三山)인 류정원(柳正源)과 호가 하지(下枝)인 이상진(李象辰)과 호가 경담(鏡潭)인 이수정(李守貞)과 호가 금옹(錦翁)인 이춘식(李春植) 등은 혹은 도의(道義)로써 혹은 기풍과 절조(節操)로써 혹은 문장(文章)으로써 모두 마음을 기우려 사귀기를 원했으며 서로 더불어 훌륭함을 권하고 격려하여 자질과 품행이 대단히 확고하니 사람들이 은산(銀山)의 철벽(鐵壁)이라고 지목했다. 항상 자손들을 경계하여 말하기를 “샘을 파다가 다 파지 못하고 구슬을 꿰다가 다 꿰지 못하면 샘을 버리고 구슬도 버림을 면치 못한다” 라고 했다. 만년(晩年)에 중풍이 들어서 삼년 간이나 앉고 눕기를 사람에 의지하였지만 한번도 신음 소리를 내지 않은 것은 어버이가 계시기 때문이었다. 모년(某年) 월일에 졸(卒)하니 향년애 七十一세였으며 처음엔 예천(醴泉)의 지과동(知過洞)에 장사지냈다가 후에 같은 군(郡) 마명동(馬鳴洞) 건좌(乾坐, 서북을 등지고 동남을 향한 곳)의 둔덕에 개장(改葬)했다. 아! 공은 넉넉한 자질과 넓은 도량과 웅변으로 부모 봉양에는 효도했고 남을 접할 때에는 정성을 다하여서 덕(德)이 사람들을 감화시켜서 행(行)함이 되지 않은 것이 없었으며 성균관(成均館)에 유학할 때에 고관(高官)과 벼슬아치가 한번 보고 감탄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으니 주(周)나라 종묘(宗廟)의 호련(瑚璉)이요, 우(虞)나라 사직을 도울 인재라고 말할 수 있었지만 곧 공(公)의 뜻은 이런 것을 얻으려 아니했고 스스로 특별한 뜻이 있었다.
이동운(李東運) 진사가 일찍이 이별의 시를 지어주며 말하기를 “향교(香橋) 다리 위에 칼을 풀어놓으니 뜬 구름에는 말 머리도 많구나. 강한(江漢, 양자강과 漢水)은 날마다 수세(水勢)가 웅장한데 가고 또 가면 어떻게 할 것인가?” 라고 했으니 이것은 마음을 알아주는 말이라고 말할 수 있고 한 선비의 출처(出處)에 깊은 감회의 뜻이 있었다. 한 시대의 벼슬아치들이 공이 졸(卒)했다는 말을 듣고 탄식하며 말하기를 “이와 같은 사람이 이렇게 세상을 마쳤으니 우리들의 죄이다.“ 라고 했다.
오죽(梧竹) 의양(宜陽)은 공이 넷째 동생인데 공의 행장(行狀)에 말하기를 “인재를 보고 능력을 식별하기는 마치 대용주(戴容州) 같았고 후진을 권장하고 인도하기는 마치 소장공(蘇長公)같았으니 살던 곳에서 교화(敎化)가 비록 양사업(楊司業)의 인재를 감화시킴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학문(學文)으로 인하여 교화(敎化)를 시킨 것은 역시 정강성(鄭康成)의 서대(書帶)에 뒤 떨어지지 않아서 한번 심장적구(尋章摘句, 깊은 이해없이 자잘한 語句에만 집착함의 비유)하는 고을 풍습을 일소하고 경전을 주시하는 위씨(緯氏)와 사씨(史氏)의 마을이 되도록 변하게 했다.” 라고 했으니 그 공(功)을 어떻게 작다고 말하겠는가?
후세에 공(公)의 사행(事行)을 찾으려고 하는 사람은 이 말만으로도 넉넉할 것이다. 배위(配位)는 풍산김씨(豐山金氏)이고 아들 다섯은 석범(錫範)이요, 석회(錫晦)는 문과급제하여 벼슬이 좌승지(左承旨)이고 다음은 석충(錫忠)이며 석상(錫商)은 출계했고 석경(錫景)은 일찍 요수(夭壽)하여 백씨의 둘재 아들을 후사(後嗣)로 했고 딸은 손시룡(孫時龍)에게 출가했으며 측실(側室)의 아들은 석전(錫
)이다. 석범(錫範)은 오남삼녀(五男三女)를 두었으니 아들은 현모(顯謨)요 현장(顯漳)은 출계했고 현문(顯汶)도 출계했으며 다음은 현풍(顯灃)이요 다음 현준(顯濬)은 생원(生員)이며 딸은 신응요(申應堯)와 이창술(李昌述)과 김영습(金永習)에게 출가했고 석회(錫晦)는 삼남육녀(三男六女)를 두었으니 아들 현수(顯洙)는 일찍 죽었고 다음 현구(顯
)는 생원이며 다음은 현로(顯潞)이고 딸은 장태준(張泰儁)과 박종신(朴宗臣)과 이창근(李昌瑾)과 홍최근(洪最根)과 안정민(安廷敏)과 이경수(李敬秀)에게 출가했으며 석충(錫忠)은 이남이녀(二男二女)를 두었으니 아들 현진(顯震)은 생원(生員)이요 다음은 현철(顯喆)이며 딸은 권휴복(權休復)과 권위도(權緯度)에게 출가했다. 석상(錫商)은 일남이녀(一男二女)를 두었으니 아들 현휴(顯休)는 문과에 급제했고 딸은 이구호(李龜祜)와 이현복(李鉉福)에게 출가했으며 석경(錫景)의 계자(系子)는 현장(顯漳)이고 석전(錫
)은 아들이 넷이니 현발(顯潑)과 현표(顯豹)와 현윤(顯潤)과 현복(顯福)이며 나머지는 기록하지 않은다.
공(公)의 후손들은 순순하게 언행(言行)이 단아한 사람이 많아서 나 만규(晩煃)가 외람되게 심교(心交)를 의탁한지 여러 해 되었는데 여러 친우가 굳이 공의 묘갈명(墓碣銘)을 지어달라고 청하기에 두 번 세 번 사양했으나 되지 않아서 이에 감히 행장(行狀)에 의거하여 차례로 찬술(撰述)하고 이어서 명(銘)을 말하노니 재예(才藝)는 높았고 기개(氣槪)는 호탕하며 학문은 넓게 배우고 행의(行義)를 닦았다. 나라 일에 있어서는 반드시 통달했고 성균관에 있을 때는 필적(匹敵)할 사람 적었다. 특별한 지기(知己)의 벗이 있어서 도의(道義)를 통해 서로를 찾았으며 한쪽 손으로 지휘하여 학문의 물결이 기우는 것을 되돌렸다. 나의 천륜(天倫)을 즐기기 위해서 집에 돌아옴과 일찍함이 더불어 합당했다. 늘그막에 산중에 집을 지어서 완공을 이루고 세상을 떠났으며 끝까지 효도를 못한 것이 애통했으니 八十을 바라보는 나이도 오히려 요수(夭壽)일세. 그 동생이 행의를 차례로 닦았으니 명백하게 상고할 수 있었다. 내가 그 행장의 요점을 모아서 묘도(墓道)를 나타내는 글로 쓰노라.
진성(眞城) 이만규(李晩煃) 삼가 짓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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