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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자연과진리 원문보기 글쓴이: 자연과진리
나의 파평尹 조상을 찾아서
★1世, 시조 莘達(신달)
파평윤씨의 시조는 윤신달(尹莘達)이다. 윤신달은 고려 태조를 도와 후삼국을 통일한 공으로 개국통합삼한벽상익찬공신(開國統合三韓壁 上翊贊功臣) 2등에 책록되었고 관직은 삼중대광태사(三重大匡太師) 에 이르렀으며 소양(昭襄)이라는 시호(諡號)를 받았다.
《조선씨족통보》와 《용연보감(龍淵寶鑑)》 등에 의하면 윤신달은 파주 파평산(坡平山) 서쪽 기슭에 있는 용연(龍淵)에서 옥함(玉函) 이 물위에 떠오르면서 그 안에서 나왔다고 한다. 윤신달 이전의 자 세한 세계(世系)는 알 수 없다.
★2世, 先之(선지)
★3世, 金剛(금강)
★4世. 執衡(집형)
★ 5世, 瓘(관) 문숙공(文肅公)고려때명장 윤관장군
본관 파평(坡平). 자 동현(同玄). 시호 문숙(文肅). 문종 때 문과에 급제하고
습유(拾 遺)·보궐(補闕)을 거쳐 1095년(숙종 즉위) 좌사 낭중(佐司郞中)으로
요나라 에 파견되어 숙종의 즉위를 알렸다. 추 밀원지주사·어사대부·이부상서 등을
거쳐 1104년 추밀원사로서 동북면 행영병마도통사(東北面行營兵馬都統使)가
되어 여진을 정 벌하다가 실패하였다.
그뒤 별무반(別武班)을 창설하여 군대를 양성, 1107년(예종 2) 여진 정벌군의 원수가 되어 부원수 오연총(吳延寵)과 17만 대군 을 이끌고 동북계에 출진, 이때 함주(咸州)·영주(英州)·웅주(雄州)· 복주(福州)·길주(吉州)·공험진(公嶮鎭)·숭녕(崇寧)·통태(通泰)·진양 (眞陽)의 9성을 쌓아 침범하는 여진을 평정하고 이듬해 봄에
개선, 그 공으로 추충좌리평융척지진국공신(推忠佐理平戎拓地鎭國 功臣)·문하시중(門下侍中)·상서이부판사(尙書吏部判事)·군국중지사 (軍國重知事)가 되었다. 그뒤 여진은 9성의 환부를 요청하며
강화를 요청해오자, 조정은 9성을 지키기 어렵다 하여 여진에게 돌려주었다. 정세가 바뀌자 여진정벌의 실패로 모함을 받아 벼슬 을 빼앗기고 공신호마저 삭탈되었으나, 예종의 비호로 1110년 수 태보(守太保)·문하시중(門下侍中)·병부판사(兵部判事)·상주국(上柱 國)·감수국사(監修國史)가 되었다. 예종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6世, 彦頤(언이) 문강공(文康公)
본관 파평(坡平). 호 금강거사(金剛居士). 시호 문강(文康). 문하시 중 관(瓘)의 아들. 문과에 급제, 인종 때 기거랑(起居郞)이 되었 다. 이어 좌사간 정지상(鄭知常) 등과 정치의 득실을 논하여 시정 에 반영하게 하였다. 1128년(인종 6) 예부시랑(禮部侍郞) 때
송나라에 가서 국교 재개를 청하고 돌아왔다.
1132년 국자사업(國子司業)이 되어 경연(經筵)에서 경의(經義)를 강의, 화서대(華犀帶)를 하사받았다. 앞서 예종 때 아버지가 지은 의천(義天)의 비문을 김부식(金富軾)이 함부로 고쳐 원한을 품고 있었는데, 1133년 김부식의 주역 강의를 묻고 논란하라는 왕명에 정연한 논리로 반박 설분하였다.
1135년 묘청(妙淸)의 난 때 김부식의 막료로 출전, 공을 세웠으 나 정지상과 내통하였다는 김부식의 보고로 양주방어사(梁州防禦 使)로 좌천되었다. 그 뒤 광주목사(廣州牧使)에 이어, 1148년(의 종 2) 정당문학(政堂文學)이 되었다. 《주역》에 정통하고 문장이 뛰어났다. 저서에 《역해(易解)》가 있다.
★7世, 惇信(돈신) 시랑공(侍郞公)
문강공 諱:언이의 3자 이시다. 자(字)는 우경(友卿)이시고, 관직은 중봉대부(中奉大夫) 상서이부시랑(尙書吏部侍郞) 동궁내시강학사 (東宮內侍講學士)를 거치시었다.
슬하에 諱:상계(商季), 諱:상영(商英) 두 형제를 두셨다.
고려 인종조 문과에 올라 맑은 덕망과 문장이 최포(崔褒) 등과 함께 명성을 나란히 하시었다.
고려 의종 19년(서기 1165년) 12월에 이부상서 이지심(李知深) 과 중서사인(中書舍人) 윤돈신을 파견하여 존호(尊號)를
하례 하였다고 되어있다.
송나라와 금나라의 역사를 살펴보면, 금나라 세종대정 5년에
중서사인인 공을 보내어 표로서 존호를 하례 하였는데 이는
송나라가 아니라 금나라의 존호를 하례한 것이다.
의종 24년(서기 1170년)에 의종이 종사 돌보기를 등한시하고
문관들을 편애하는 것을 불만하던 정중부를 위시한 무관들이 난 을 일으켰다.
이것이 정중부의 난으로 “머리에 문관을 쓴자는 위로는 정승,
아래로는 서리(胥吏)에 이르기까지 종자를 남기지마라”고하며,
닥치는데로 문관을 살육 하였다. 이때 공께서도 참변을
당하시었다.
묘소는 장단 임단 석주원 남향원(長湍臨湍石注院南向原)이라고 자손 사록에 되어 있으나 실전되어 추원단(追遠壇)에서
제향을 받든다.
★8世, 商季(상계) 유수공(留守公)
미상∼1201년(신종 4). 고려의 문신. 본관은 파평(坡平). 자는
수익(受益).문하시중을지낸 관(瓘)의 증손이고,정당문학(政堂文學) 을지낸 언이(彦頤)의 손자이며, 병부시랑을 지낸 돈신(焞信)의 아 들이다.
문벌귀족출신으로 벼슬은 서경부유수(西京副留守)에 이르렀으나, 성품이 소박하고 순진하여 화려함이 없고, 청렴하고 근신하며 재 간과 기국이 있었다 한다.
★9世, 復元(복원)
윤복원(尹復元 : 錄事公) 생몰년 미상. 代言公. 派. 9世. 留守公
상계(商季)의 아드님으로 고려 신종조에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많은 세월을 草野에 계셨기 때문에 太常府錄事 외는 뚜렸한 관직
기록이없다.
★10世, 純(순) 어사공(御史公)
★11世, 珤(보)문현공(文顯公)
미상∼1329년(충숙왕 16). 고려 충렬·충선·충숙왕 때의 재상. 본 관은 파평(坡平). 초명은 문옥(文玉).관(瓘)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감찰어사를 지낸 순(純)이고, 아들로는 충목왕 때 찬성사에 오른 계종(繼宗)을 비롯하여 안적(安𥛚)·안숙(安淑, 安肅)·암(諳)·안비 (安庇) 등이 있다.
1278년(충렬왕 4)에 내시(內侍)·첨사부녹사(詹事府錄事)로서 정 방필도치(政房必闍赤)에 임명되어 전주(銓注)를 관장하였다.
1296년에는 좌승지로 있으면서 국자감시(國子監試)를
주관하였고, 다음해에 밀직학사로 승진하여 재추의 반열에
올랐다.
1298년 충선왕이 즉위하자 곧 홍문관학사·의조상서(儀曹尙書) 에 임명되었으며, 다시 밀직부사·성균감대사성(成均監大司成)·수 문전학사(修文殿學士)로 옮겼다.
그러나 이해에 충렬왕이 복위하자 외직으로 나가 서북면도지휘 사(西北面都指揮使)가 되었는데, 다음해에 한희유무고사건(韓希 愈誣告事件)을 일으킨 인후(印侯)가 원나라로 가는 것을 막지 못하였다 하여 파직되었다.
1307년에 충선왕이 원나라에서 무종을 옹립한 공으로 실권을 장악한 뒤에야 비로소 복직되어 밀직부사가 되었다.
그뒤 1321년(충숙왕 8)에 수첨의찬성사(守僉議贊成事)로 치사 하였으며, 다시 정승치사(政丞致仕)로 가직(加職)되고 영평군(鈴 平君)에 봉하여졌다. 시호는 문현(文顯)이다.
★12世, 安淑(안숙) 양간공(良簡公)
윤보의 아들 윤안숙(尹安淑)〔벼슬이 찬성(贊成)이었다. 시호가 양간공(良簡公)이다.〕
13世, 陟(척) 영평군(鈴平君)
미상∼1384년(우왕 10). 고려의 문신. 본관은 파평(坡平). 첨의 찬성사(僉議贊成事) 안숙(安淑)의 아들이다.
1350년(충정왕 2) 우부대언(右副代言)이 되었고, 1363년(공민왕 12) 군부판서(軍簿判書)로서 앞서 홍건적이 침입하였을 때 경성 (京城: 開城)을 수복한 공으로 2등공신이 되었다. 우왕 때 영평 군(鈴平君)에 봉해졌다.
★14世, 承順(승순)충간공(忠簡公)
미상∼1392년(공양왕 4). 고려의 무신. 본관은 파평(坡平).
1367년(공민왕 16) 상호군으로 지도첨의(知都僉議) 오인택(吳仁 澤), 전시중 경복흥(慶復興) 등과 함께 신돈(辛旽)을 살해하려고 모의하다가 누설되어 유배되었다.
1371년 신돈이 주살된 뒤에 풀려나 응양군상호군(鷹揚軍上護軍) 이 되었다.
1375년(우왕 1) 경상도부원수로서 왜적을 물리쳤으며, 1377년 계림부윤(鷄林府尹)으로 있을 때 왜구를 무찔러 이 지역이 평온 하였다 한다.
1379년 양백연(楊伯淵)을 주살할 때 지문하사(知門下事)로 이에 연루되어 수졸(戍卒)이 되었다.
1389년(창왕 1) 문하평리(門下評理)로 첨서밀직사사(簽書密直司 事) 권근(權近)과 함께 사신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는데, 이때 왕 씨(王氏)로 공민왕의 후사를 정하라는 명제(明帝)의 지시를 전함 으로써 창왕이 폐위되고 정창군 요(定昌君瑤: 나중에 恭讓王)가 즉위하였다. 뒤에 판개성부사(判開城府事)에 이르렀고, 영평군(鈴 平君)에 봉하여졌다. 시호는 충간(忠簡)이다.
★15世, 坤(곤)소정공(昭靖公)소정공파 시조
미상∼1421년(세종 3).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은 파평(坡平). 판개성부사 승순(承順)의 아들이다. 젊어서 문과에 급제하였으 며, 아우 향(珦)과 함께 문학으로 이름이 높았다.
1400년(정종 2) 방원(芳遠: 뒤의 태종)이 그의 동복형인 방간(芳 幹)이 일으킨 난을 평정하고 왕위에 오르는 데 협력한 공으로, 1401년(태종 1) 익대좌명공신(翊戴佐命功臣) 3등에 책록되고, 우군동지총제(右軍同知摠制)로 파평군(坡平君)에 봉작되었다.
1406년 좌군도총제(左軍都摠制)로 있을 때 다른 사건에 연루, 파직되어 파평현에 유배되었다가, 1418년 세종이 즉위하자 평안 도관찰사로 기용되었다. 그가 학덕이 높은 것을 알고 있는 세종 은 침전에서 환송연을 베풀어주는 등 크게 총애하였다.
이듬해 9월에 이조판서로 승진되었다. 그의 파격적인 출세는 평 안도관찰사로 있을 때에 기악(妓樂)을 폐지하여 풍속을 바로잡 는 등 많은 치적을 쌓았기 때문이다.
그뒤 우참찬까지 지냈다. 성질이 관후(寬厚)하고 풍채가 매우 좋 아, 복옹(福翁)이라는 별칭을 받았다. 시호는 소정(昭靖)이다.
★16世, 希齊(희제)한성공
★17世, 垠(은) 參議公(참의공) 9형제에서 구방파로 나누어짐
★18世, 師哲(사철)집의공(執義公), 師晳(사석)확인요족보에는 哲로기록
되고 사료에는 晳(석)으로됨
생몰년 미상. 조선 전기의 선비. 본관은 파평(坡平).
호는 돈암(遯菴).성종 때 사헌부집의를 지냈으나 연산군 때 거듭 되는 사화로 현인군자들이 희생되는 것을 본 그는 사모(紗帽)와 관복을 찢어버리고 가족들을 거느리고 청주의 옥화대(玉華臺)로 내려가 은거하였다.
《동문선》에 그의 시 한 수가 전하고 있으며, 이이(李珥)의 행장 에 “그가 평소에 저술한 것들이 은둔생활을 하는 중에 모두 불 살라버려 후세에 전하는 것이 없으니 애석한 일”이라고 하였다. 용궁(龍宮)의 죽락사(竹樂祠)에 배향되었다
★19世,礇욱(옥돌 욱) ,상황족보에는 (오)로 표기됨(옥편 에는 옥돌욱 으로표기)
★20世, 殷佐(은좌)찰방:
조선시대에 각 도(道)의 역참을 관장하던 종6품의 외관직(外官職).
※이상은족보 己亥譜(1539년編)참조함
★22世, 希商(희상)
★23世, 湖(호)상황리 土安입성
★24世, 天玉(천옥)
★25世, 起運(기운)
★26世, 三省(삼성)
★27世, 廷敏(정민)
★28世, 義弼(의필)
★29世, 世權(세권)
★30世, 德化(덕화)
★31世, 碩柱(석주)
★32世, 相圭(상규)
★33世, 學晟(학성)
★34世, 在炳(재병)
★35世, 漢柱(한주)
★36世, 東吉(동길),3형제
★37世, 甲炳(갑병).基奉,仲烈,成烈,學烈,且烈
★38世, 甲炳-子
京俊(경준),처 김숙자(산내 중황댁)
경분(대구)
정임(인천)
点埈(홍준)처 박윤숙(전남화순댁),
경숙(김포)
泰埈(태준)처 정인숙(진안댁),
容埈(용준)처 김현숙(전남해남댁),7남매
★39世,点埈 - 嘉英,文英, 勝煥(승환),
泰埈 - 효진, 勢彰(세창),
容埈 - 혜원,혜진,東錫(동석)
-한국역대인물 참조함-
첫댓글 뿌리을알게하는
좋은자료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