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예술> 원고
나목의 냉기를 이겨낸 광합성의 인고
- 남지은의 수필집, <빈지의 틈으로> -
권대근
문학박사, 대신대학원대학교 교수
I.
문학성을 향한 미친 듯한 몰두가 없으면 본격수필은 되지 않는다. 그것이 비록 하찮은 소재라 해도 그것과 하나 되려는 동화와 그것 앞에서 자기를 벗는 열린 자세를 취하지 않고는 본격수필을 맛볼 수 없다. 남지은을 생각하면 인간의 열정이 뿜어내는 거친 호흡과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끌어들이는 흡인력이 느껴진다. 바로 ‘필마’의 기운이다. 필마, 그렇다. 남지은의 첫 수필집 <빈지 틈으로>를 읽으면 작가가 필마라는 이름의 말을 타고 달리고 있고, 그 말을 보는 순간 우리는 촉촉한 감동이 실핏줄을 타고 온몸 구석구석 전달되는 것을 느끼게 된다. 쏜살같은 열기를 뿜어내며 그녀가 달려가는 곳은 어디일까? 문학성이란 고지다.
II.
‘수필을 만난 지 삼십 년 만에 내 삶의 가난한 화분에 이 수필집을 심으려 합니다’라는 권두언에 있는 글귀에서 소박한 수필가적인 심성이 느껴진다. 한 편 한 편을 읽을 때마다 문예성이 세포 속으로 스며들어 오는 감동이 전해오는 48편의 수필을 그녀는 12편씩 나눠 4부로 정리했다. 첫 작품에는 ‘농민신문’ 신춘문예 당선작인 ‘흑자’를 배치하고 제일 마지막에는 ‘부부싸움’이란 작품을 놓았다. 제목부터가 예사롭지 않다. 낯선 순 우리말이라 참신한 느낌이다.
남지은 수필집, <빈지 틈으로>에서 ‘빈지’와 ‘틈’은 파편화된 사람들의 정서를 치유해 줄 유일한 통로로 기능하고 있다. 위선과 가식이 판치는 세상에서 작가는 무엇보다도 솔직한 자세로 자기를 정직하게 조명하고 있다는 데서 필자는 남지은은 수필을 쓸 운명을 타고 났다고 본다. 한 인간이 독립적인 자아로 세계와 마주 서 있기 쉽지 않다. 그녀는 어쩌면 세계와의 접점에 서 있는 작가일지도 모른다. 삶의 경계에 위치한 그녀가 쏟아내는 언어들의 내포에는 불꽃이 피어 있다. 그녀는 누구보다도 진실하다. 작품 속에는 그녀가 교통사고로 남편을 잃고 모진 세상을 홀로 무쏘의 뿔처럼 당당히 살아가고 있음이 나타나 보여 다행스럽다. 전통적 사회적 관습을 존중하며, 홀로된 여인으로서 가족이라는 운명의 끈을 쥐고 살아가는 건강한 삶의 모습이 수필 속에 아름답게 그려져 있다. 미망인으로서 그녀가 가진 왜소한 자아가 거대한 세계와 부딪히면서 일으키는 영혼의 스파크가 불꽃을 휘황하게 번쩍일 때마다, 수필의 아킬레스 건이라고 할 수 있는 잡문성은 남지은의 수필 속에서 자취를 감추어 버린다.
그녀의 말처럼, ‘사람은 일생 동안 수많은 절규를 삼키며 사는 것이다’. 대부분 왜소한 자아를 가진 사람들은 불꽃 속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흔적도 없이 연소되지만 남지은은 그 불꽃의 터널로 빠져나와 자신만의 빛깔로 빛나기 시작한다. 그것은 직접 온몸으로 세계와 부딪히면서 형성된 숨쉬는 상처이며, 그 상처의 흔적에는 ‘필마’가 기생하고 있는 것이다. 자신만의 렌즈를 가지고 있는 작가는 편편의 주옥 같은 수필을 통해 인간의 다양한 세계 이해 방법론을 제시하고 있다.
<촛불처럼>에는 기존 질서에 도전하고 저항하는 순수한 젊음의 열정과 조국애, 효심이 짙게 담겨져 있다. 아직 완고한 기득권자에 속해 있지 않기 때문에 남지은의 젊음은 순수하다. 이 수필에는 전쟁의 상처를 통해 인간 사회에 어린 냉기를 확인하고자 하는 작가의 의도가 담겨 있어 감동을 준다.
평자가 이 수필집의 48편의 작품 중에서 이 작품을 제일 먼저 언급하게 된 배경은 송나라 구양수가 처음으로 말해 고전시학에서 중요한 명제가 된 ‘시궁이후공론’의 관점으로 남지은 수필의 문학적인 힘의 원천을 찾아보기 위함이다. ‘시궁이후공’ 즉 시는 궁해진 뒤에 더 좋아진다는 논리다. 구양수는 궁하면 궁할수록 시가 좋아진다고 단정하여 ‘궁’이 ‘공’을 위한 전제임을 밝힌 바가 있다. 남지은에게 있어서 수필쓰기는 일종의 구원행위다. 트릴링이 말한, 불만족의 상태에서 만족을 구하려고 하는 모순적 충동 지향은 이를 잘 설명해주고 있는 셈이다. 이때 ‘궁’은 물질적 빈궁보다는 실의와 좌절 같은 정신적 가치를 뜻한다. 정신적 갈등이 배제된 궁은 ‘궁’이 아니라 ‘빈’일 뿐이다.
<나목>은 자신의 심적 나상을 문학적인 형상화를 통해 보여주고 있는 작품이다. 이러한 자기 고백과 성찰은 그녀의 영혼 속에 고여 있던 어두운 그림자들을 몰아내고 그 빈자리에 신선하고 맑은 영혼이 채워지게 하고 있다. 이런 자각과 끊임없는 자기 성찰은 불만족 상태에서 만족을 구하려는 모순적 충돌지향이기에, 충돌의 아픔만큼 그로 인해 흘리는 눈물의 양만큼 그의 영혼은 더욱 성숙해 감을 잘 그려 내었다.
‘그 무엇’ 밖에 놓여 있다는 느낌이 수필가의 내부에 한을 머금게 해, 그 결과 예술에 퍼부어진다는 것이 ’시궁이후공론‘ 기본 생각이다. 이상과 현실 사이 극단의 괴리감에, 여기서 벗어나려는 자아의 노력이 덧붙여져 좋은 수필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아닐까? 문득 <춧불처럼>과 <나목>이란 작품을 읽고 나니 그런 생각이 스친다. 대체 문학은 모든 것이 충족된 만족 속에서 나오지 아니 하고, 무엇인가를 상실하거나 무참하게 버려진 느낌 속에서 더욱 밝게 빛나는 법이란 사실을 이 수필집은 말하고 있다.
<흑자>는 작가의 인식이 절정이 달한 작품이다. 검은 색 돌에 담긴 메시지를 읽어내려는 집요한 작가의 노력에 화답이라도 하듯 젊은 여인의 한을 감춘 흑자는 ‘상처야말로 자기 정신의 시발점’이라고 한 어느 연사의 말을 절감하게 하는, 작가의 분신이요, 상처받아 웃음 하나로 지탱하는 여인의 상징물이다. 이 수필은 좌절된 삶, 좌절된 꿈 속에서 현실을 딛고 일어서려는 자세가 필요하다는 것을 말해주는 작품이다.
III.
모든 것이 구족된 환경에서 문학은 설 자리를 잃는 법이다. 욕망이 좌절되고 꿈이 상처를 입을 때, 사람들의 마음에 정서가 생겨나는 것이다. 아버지의 묘비 밑에 남의 시신이 묻혀 있는 기막힌 현실과 교통사고로 남편을 잃어버린 상황은 남지은으로 하여금 ‘궁’의 상황에서 ‘한’의 정서로 수필을 쓰도록 요구한다. 무릇 작가는 무지개를 쫓아가다가 놓쳐버린 소년의 안타까움을 지녀야 한다. ‘돌덩이 하나에도 의미를 부여하면 그럴 듯하게 보이는’ 법인데, 하물며 인간의 삶이야 생각하기 나름이 아니겠는가. <빈지 틈으로>는 예술은 억압을 거부하는 데서 시작한다는 말을 실감나게 하는 작품집이다. 남지은 수필집이 많이 팔려 부산수필의 새로운 활로로 이어지기를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