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상 15년 기미년(1739, 영조15) 3월 18일 갑자일에 사천(泗川) 목군 사무(睦君士懋)가 남포(藍浦) 임소에서 세상을 떠났다. 사람들이 모두 “군이 여기에 그친 것은 운명이다.” 하였다. 나는 군을 위해 변명하기를 “애초에 남포현이 작은 고을인 데다 폐단이 쌓여 있었다. 조정에서 천거하여 군에게 맡겼는데 1년 만에 잘 다스려졌다. 군이 남포현에서 이룬 것은 극히 일부분이지만, 이곳이 아니었다면 군의 재능이 쓰이지 못할 뻔하였다.” 하였다.
군은 기묘명현(己卯名賢)인 현헌(玄軒) 선생 휘 세칭(世秤)의 후손이다. 현헌은 이조 참판을 지낸 휘 첨(詹)을 낳고, 이분이 승지를 지낸 휘 대흠(大欽)을 낳고, 이분이 황해 감사를 지낸 휘 행선(行善)을 낳고, 이분이 병조 판서를 지낸 휘 창명(昌明)을 낳고, 이분이 진사 휘 중광(重光)을 낳았다. 이분이 공의 선고(先考)인데 백부 휘 종유(宗儒)에게 출계하였다.
공은 성품이 어려서부터 슬기로워 힘들게 훈도하지 않아도 학업이 진보되었다. 약관에 향교의 시험에 응시하여서는 매번 수석을 차지하였고 글 한 편이 나올 때마다 사방에서 전해 가며 음송하였다. 기해년(1719, 숙종45)에 성균관에 들어갔고, 정미년(1727, 영조3)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정사년(1737)에 중시(重試)에 제2명(名)으로 급제하였다.
군은 옥 같은 얼굴에 키가 훤칠하며 맑기가 얼음으로 만든 병과 같았다. 사관(史官)으로 입시하니 조정 신하들이 이목을 집중하였고, 조정에서 여러 대부들과 말을 하니 또한 모두들 이 시대의 명류라고 말하였다. 그러나 세상이 군을 대우한 것이 어찌 한갓 모르고 남겨 두듯이 버릴 뿐이었겠는가. 더 나아가 죄에 빠지지 않을까 염려하였다. 결국 빠져서 구원되지 못하였으니, 지위는 낭서(郞署)에 불과하였고 수명은 46세에 그쳤다. 운세가 닥치면 하늘도 어쩔 수 없는 것이 있단 말인가. 그러나 이는 모두 세속에서 떠드는 말일 뿐이다. 어찌 그것으로 군을 충분히 안다고 하겠는가.
군은 조실부모하고 할머니인 정부인(貞夫人) 이씨(李氏)의 손에서 자랐다. 부인은 바로 나의 큰 누님이니, 군은 내 손자뻘이다. 그러니 세상에서 군을 잘 알기로 나만 한 이가 없는 것이 당연하다.
군은 타고난 품성이 화통하고 영민하였다. 일을 처리할 때는 구차히 하지 않았고 발론할 때에는 두서가 있었으며 집안에서의 행실은 순일하였다. 부모를 여읜 뒤에는 할머니 모시기를 어머니와 똑같이 하였다. 봉급이 박한데도 친족들을 넉넉히 대접하였으며 아우와 누이들을 보살피고 아껴 주어 근심과 기쁨을 자기 일처럼 절실히 여겼다. 스스로 덕행을 쌓아서 남에게 미더움을 받았으니, 내가 보고 기억하기에 군만큼 독실한 사람이 거의 없었다.
경술년(1730, 영조6) 옥사 때 중죄인의 공초에 이름이 거론되었다. 당시 국문하는 자가 사냥꾼이 짐승을 잡듯이 샅샅이 조사하여 갖은 방도로 얽어매려고 하였으나 군은 기색이 의연하고 변론이 간명하였으므로 혐의를 받을 만한 점이 자연 하나도 없었다. 이후 바로 쓰이지 못하자 물러나 이계(伊溪) 가에 우거하고 자호를 ‘이계’라 하였다. 몹시 가난하여 나물로 끼니를 때우면서도 편안하였다. 날마다 성현의 서책을 손에 들고 여유롭게 소요하며 음미하고 탐구하였다. 그리하여 성정(性情), 사단칠정(四端七情)의 근원에 대해 궁구한 것이 꽤 많았다. 당시에 내게 글을 보내 문난(問難)하며 감정(勘訂)을 구하였는데 모두 이치와 뜻이 충실하였다.
병진년(1736, 영조12)에 승문원 정자를 거쳐 6품관의 품계에 올라 성균관 전적에 제수되었다. 예조 좌랑으로 옮겼다가 얼마 후 정랑으로 승진하고 춘추관 기주관을 겸임하였다. 예조는 바로 나라의 전장(典章)을 관장하는 곳이다. 우리나라 풍속이 본래 격식에 어긋난다는 기롱이 있었는데 문서와 기록이 누적되어 두서가 뒤죽박죽이었다. 관장(官長)이 그것을 근심하여 마침내 군에게 정리하여 바로잡도록 하였다. 그해 9월 남포 현감으로 나가면서 나에게 인사하러 들러서는 백성을 소생시킬 대책을 물었는데, 진지하고 간곡한 어조로 보아 관직이 낮다는 이유로 마음을 다하지 않는 것이 아니었다. 얼마 되지 않아 병으로 세상을 떠났으니 아, 슬프다.
군의 아우인 진사 달경(達敬)이 내게 와서 군의 집안에서의 언행을 매우 상세하게 기록한 것을 보여 주었다. 내가 거듭 탄식하며 말하기를 “이는 족히 자신을 단속하고 세상의 모범이 될 만한 것이다.” 하였다. 군은 평소에도 매일 관복을 입고 새벽에 사당에 참배한 다음 단정히 앉아 주 문공(朱文公)의 〈경재잠(敬齋箴)〉을 읽었는데, 반드시 수렴하는 것을 제일 먼저 할 일로 삼고 매양 기상(氣像)을 이해하고 외면을 통제하여 내면을 안정시키라는 가르침을 요결(要訣)로 삼았다. 일찍이 말하기를 “《근사록(近思錄)》은 사서(四書)로 올라가는 디딤돌이다. 《퇴계집(退溪集)》은 또 《근사록》의 디딤돌이다. 《퇴계집》에 ‘겉으로는 혜완(嵇阮)의 행동을 하고 안으로는 정주(程朱)의 마음을 가진 자는 아직 없었다.옛사람이, 형체도 그림자도 없는 마음을 보존하고자 하면 반드시 그 형체도 그림자도 있어 의거해 지킬 수 있는 곳으로부터 공부를 해야 한다고 하였으니, 사물(四勿)과 삼귀(三貴)가 그것이다.’ 하셨다.” 하였다. 또 말하기를 “선비는 의당 경술을 근본으로 삼아야 한다. 세상이 나를 알아주지 않는다고 하여 먼저 스스로 움츠러들어서는 안 된다. 또 기한(飢寒)에 시달려서 망녕되이 피하려고 급급해하는 마음을 가져서는 안 된다. 다만 해야 할 일에 힘을 다하면 그만이다.” 하였다. 병이 심해지자 시중드는 이가 다른 방으로 옮기고자 하였다. 이에 군이 질책하며 말하기를 “나로 하여금 재앙을 물리치는 일을 벌여 살기를 구하게 할 셈인가?” 하였다. 기운이 이미 다하였는데도 오히려 기물을 가지런히 정리하여 구차히 어지럽히지 말도록 하였다. 어떤 이가 말하기를 “보기 좋게 하려면 이와 같이 해야 합니다.” 하자, 군이 기운을 모아 간신히 소리 내어 경계하기를 “일은 순리대로 해야 한다. 어찌 보기 좋게 할 것인가.” 하였다. 여기에서도 군을 알 수 있다.
군의 휘는 시경(時敬)이고 사무는 자이다. 선고가 안동 김씨(安東金氏)인 부사(府使) 봉지(鳳至)의 따님을 아내로 맞아들였으니, 부사는 바로 판서 휘(徽)의 손자이고 판중추부사 시양(時讓)의 증손이다. 숙종 갑술년(1694, 숙종20) 6월 16일에 군을 낳았다. 부인은 연안 이씨(延安李氏)로 진사 지방(之昉)의 따님이자 참판 만원(萬元)의 손녀이다. 군은 충주(忠州) 모산(某山)에 안장되었다. 아들 모(某)가 있고, 딸은 모에게 시집갔다.
명은 다음과 같다.
재주는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이요 / 才吾有也
명은 내가 받은 것이다 / 命吾受也
재주가 펴지지 못한 것은 / 才之不布
명이니, 허물할 수 없다 / 命不足咎也
죽은 자는 편안하나 / 死者安焉
남은 자들은 유감스럽도다 / 遺憾在後
[주-D001] 15년 : 대본에는 ‘十四年’으로 되어 있는데, 기미년이 영조 15년에 해당하고 영조 14년 3월 18일은 갑자일이 아닌 것에 의거하여 ‘四’를 ‘五’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주-D002] 경술년 옥사 : 1728년(영조4)에 있었던 이인좌(李麟佐)의 난에 이어, 정계에서 물러난 남인(南人)이 혐의를 받은 역모 사건이다. 궁궐 내에 흉물이 발견된 것이 발단이 되어 군관 박도창(朴道昌)이 주범으로 붙잡혔는데, 이로 인해 종실인 여흥군(驪興君) 이해(李垓), 여릉군(驪陵君) 이기(李圻) 및 정사효(鄭思孝) 등의 남인계 인사들이 연좌되어 화를 당했다.[주-D003] 경재잠(敬齋箴) : 송나라 주희(朱熹)가 장경부(張敬夫)의 〈주일잠(主一箴)〉을 읽고 그 빠뜨린 뜻을 보충하여 스스로 경계하기 위해 지은 글이다. 〈경재잠〉에서는 맨 먼저 “의관(衣冠)을 바루고 시선을 장엄하게 하여 마음을 가라앉히고 거처하여 상제를 대하며, 반드시 발의 움직임은 무거워야 하고 손의 움직임은 공손하여야 한다.〔正其衣冠 尊其瞻視 潛心以居 對越上帝 足容必重 手容必恭〕”라는 것을 말하였다. 《心經 敬齋箴》[주-D004] 겉으로는 …… 없었다 : 퇴계 이황이 고봉(高峯) 기대승(奇大升)에게 답한 편지에서 한 말이다. 《退溪集 卷18 答奇明彦》 혜완(嵇阮)은 진(晉)나라 죽림칠현(竹林七賢) 가운데 혜강(嵇康)과 완적(阮籍)을 병칭한 것으로, 이들은 예법의 구속을 받지 않고 일생을 보냈다. 정주(程朱)는 송나라 학자 정호(程顥)ㆍ정이(程頤) 형제와 주희를 말한다.[주-D005] 옛사람이 …… 그것이다 : 이 말은 《퇴계집》 권29 〈답김이정(答金而精)〉에 나온다. 사물(四勿)은 공자가 안회(顔回)에게 훈계한, 사욕을 이겨 예에 돌아가는 네 가지 조목으로 “예가 아니면 보지 말며, 예가 아니면 듣지 말며, 예가 아니면 말하지 말며, 예가 아니면 동하지 말라.〔非禮勿視 非禮勿聽 非禮勿言 非禮勿動〕”라는 것이다. 《論語 顔淵》 삼귀(三貴)는 증자(曾子)가 맹경자(孟敬子)에게 가르친, 귀중히 여겨야 할 세 가지 도로 “용모를 움직일 때에는 사나움과 태만함을 멀리하며, 얼굴빛을 바꿀 때에는 신실함에 가깝게 하며, 말과 소리를 낼 때에는 비루함과 도리에 어그러짐을 멀리해야 한다.〔動容貌 斯遠暴慢矣 正顔色 斯近信矣 出辭氣 斯遠鄙倍矣〕”라는 것이다. 《論語 泰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