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대를 제대하고 군 생활 중에 만난 선배의 몇 마디를 참고로 신림동에 있는 몇 학원을 무작정 찾아갔다. 그냥 기웃거리며 이것저것 정보를 얻어 어설프게 나의 고시 공부는 시작된 것 같다.
돌이켜보면 참으로 시행착오가 많았던 수험 기간이었던 것 같다. 1차 과목에 대한 간단한 정보만으로 무작정 책을 사고 덤벼 들었으니....아마도 1차 공부하는 기간동안 헌법 교과서만도 3권은 다시 사지 않았나 싶을 정도였다.
공부는 주로 학교 도서관 2층에서 친구들과 하곤 했는데 고시공부보다는 학교 학점에 더 신경을 썼던 것 같다. 만일의 하나 공부를 포기하고 취직할 때를 대비해서 말이다. 그러던 중 1차도 몇 번의 실패를 경험하며 친구들이 다 포기할 무렵 난 마지막이라고 마음을 가다듬고 다시 한 번 더 하게 되었고, 공부하는 중에 만난 사람과 헤어진 어려움을 피하려고 절간 같은 신림동 고시원으로 기어 들어가게 되었다. 창문도 없는 1.5평의 숨막히는 공간에 갇혀 하루 종일 공부만 하는....그래서 밥주시는 아주머니와 식사시간에 "감사합니다."라고 말 건네는 것이 전부인 시간을 보내며 미칠 것 같았다. 하지만 그 덕분에 그 해 처음으로 1차에 합격하고 학교 고시반 입실 시험에도 합격해 답답한 신림동 생활을 청산하게 되었다.
그런데 1차를 합격하고 보니 2차는 금방이라도 될 것 같은 착각이 들어 첫 2차 시험 때까지 무작정 시간을 보내고 말았다. 다른 합격생들이 신림동에서 체계적인 강의를 듣고 있을 무렵 말이다.... 그 첫해는 시험장에서 모르는 내용도 10장의 답안을 꽉 채워 냈다는 뿌듯함에 취해 합격을 기다리는 바보 같은 시간도 보냈었던 것 같다. 참으로 어리석은 시간이었다. 그 다음해의 합격을 위해 땀을 흘리며 차근히 준비해야 하는 시기임에도 불구하고.....
첫해 불합격하고 점수를 보니 의외로 60점 이상의 고득점 과목이 있었다. 난 그것만을 믿고 또 방심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시험 점수에 존재하는 무기억성(memoryless property)에 대한 경험이 없었기에 나를 또 다시 실패로 이끄는 전철이 되고 말았다. 그런 실패의 시간들이 몃 해가 지나가기 시작했던 것이다.
합격과 그 순간의 기쁨으로
결국 2차 시험을 준비하면서도 1차만큼이나 많은 시행착오를 보내고 말았다. 어느덧 고시반에서도 가장 나이 많은 책임자로 있게 될 때까지 말이다. 많은 후배들의 합격을 바라보기만 하는 자리에 있게 되다니.....난 언제나 합격한다는 말인가....
그러나 학교 고시반은 활력이 있었다. 운동도 하고 매일 팩차기를 하며 지루함도 잊을 수 있었고 무엇보다 사람이 살아 있는 것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역시 고시생에게는 사치인지도 모르겠다. 어쩜 그래서 수험기간이 길어졌을 수도 있으니까....
중간에 나는 고시를 포기하고 졸업과 동시에 신한은행에 취직하였다. 그러나 얼마 못 가 그 자리를 박차고 나올 수밖에 없었다. 그때 나를 기다리는 것은 하지 못한 일에 대한 자괴감뿐이었기 때문이다. 그 당시 업계 최고 수준의 대입 초봉이 있었음에도 난 어딘가 허전했던 것이다. 그 후 다시 본 1차 시험에 보기 좋게 낙방하고 말았다. 흔히 말하는 해걸이라는 것을. 그것도 1차 시험에서 .....
참으로 인내를 요하는 시간들이었다. 나는 총 2차 시험을 6번 보고서야 합격한 늦깎이 수험생이었다. 선택과목에서 그동안 정보가 없던 경영학을 고집하느라 매번 떨어졌었다. 그러나 합격하는 해에는 용기를 내어 과목을 바꾸고 그 과목만 3개월은 공부했던 것 같다. 다른 과목은 손 볼 여유도 없었다. 그런데 과목을 바꾸고 바로 합격을 하게 된 것을 단지 우연만으로 볼 수는 없는 것 같다. 어떤면에선 쓸 대 없는 고집을 비우는 것도 장수생들에겐 합격을 위한 활력이 되지 않나 싶다.
합격하는 해는 후배들이 내게 이렇게 말해 주었다. "형, 참 편안하게 시험 치루시내요." 난 거저 하는 말이려니 했다. 하지만 돌이켜 생각하면 중요한 말이었다. 많은 수험생들이 실전에서 실력을 다 발휘하지 못하는 것은 긴장하기 때문이다. 나 역시 그런 시간을 보내었고....남들만큼 공부해 왔다면 그 다음엔 욕심을 접고 모의고사 보듯이 시험을 본다는 것이 중요한 것인데도 말이다.
아무튼 합격의 순간은 한 선배의 전화로부터 내게 전해져 왔다. 순간의 감동이 가장 짜릿하게 감싸는 순간 나를 위해 눈물로 기도하신 어머님과 그 뒤에 계신 하나님이 떠올랐다. 감사 드리고 또 겸손히 감사 드렸다. 내 손등엔 뜨거운 눈물이 떨어지고 있었다.
연수원 생활의 아름다움 속에서
3차 면접을 치루기 위해 중앙공무원 교육원을 처음 찾아 왔을 때 그 떨림과 기대감은 대단한 것이었다. 면접때 마주 대한 교수님과 국장님들의 얼굴이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떨리는 시간이었다. 동기중 누군가는 떨어져야 하니까... 나 역시 친구가 3차에서 떨어지고 말았지만.....
그때 46기 신임관리자 과정은 마지막날을 보내고 있었다. 부처 선택이 있는 날이라 저마다 희비가 엇갈리고 있었다. 가만 보니 이글을 쓰고 있는 나도 어느덧 연수원 생활이 얼마 남지 않았다. 그동안 연수원에서는 성적에 연연하지 않고 열심히 사람 사귀고 분임 활동하면서 정말 시간가는 줄 모르고 잘 지났었다. 특히 잔디 위에서의 축구경기는 잊지 못할 것이다. 근데 점점 아쉬움이 가슴을 저미어 온다. 직장동료라 하기엔 너무 부족하고 학교 선후배라 하기엔 모두 사무관인 동기들이고.... 그런데도 인간관계는 학교 다니던 시절보다 더 끈끈하니 말이다. 평생 잊지 못할 동기들과의 시간이 벌써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이 못 내 아쉬운가 보다.
인생은 아름다워란 영화를 본 적이 있다. 한 아이의 아버지로서의 모습을 죽음 앞에서도 아름답게 보여 준 귀도역을 맡은 로베르토 베니니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 하다. 공무원으로서의 모습도 나의 생을 다하는 순간까지 국민 앞에 봉사자로서 남아 있기를 마음 속으로 다짐해 본다.
결국 난 공무원이 되기 위한 수험기간 동안 여섯 해라는 시간을 잃고, 공무원 자격 하나를 얻고, 대신 기다림과 믿음에 대해 좀 깨우치게 된 것 같다. 이 글을 읽고 계신 여러분들은 수험기간동안 몇 개나 잃고 몇 개나 얻고 몇 개나 배우게 될까요? 전적으로 여러분에게 달려 있습니다. 도전해 보십시오. 젊다는 것은 공직에 대한 험난한 도전도 아름답게 만들어 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