すべての子供経験者の皆さんへ。
いっしょに、ドラ泣きしません?
모든 어린이였던 여러분에게
도라에몽과 함께 울지 않겠어요?
원작이 연재를 시작한 게 1969년이니 근 50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이처럼 도라에몽은 정말 오랜 시간 동안 많은 사랑을 받아온 작품이죠. 원작가인 고(故) 후지코 F. 후지오씨의 탄생 80주년을 기념하여 본 에니메이션 또한 2014년에 만들어지게 되었고, 한국에서는 최근 개봉을 시작했습니다.
도라에몽의 최초의 3D화라 기대가 크게 앞섰는데, 그 기대 이상으로 아름다운 영상과 생생한 캐릭터들의 모습을 잘 보여주었던 것 같아요.
특히 주인공들이 살고 있는 1970년대 마을의 묘사는, 단 한 번도 가본 적은 없지만 언젠가 한 번쯤은 살아본 듯한, 뭔지 모르게 정겨운 그리움을 잘 자아내게 해주었습니다. 너무나 친숙하고 포근하지만, 이제는 다시 돌아갈 수 없음을 아는 까닭에 더욱 애틋해지는 가슴을 따듯한 눈물 한 방울로 증언해야 하는, 바로 그러한 고향의 원형이 어른이 된 우리의 가슴 속에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진실로 잘 느끼게 해준 이 작품의 영상미였어요.
요는, 이 작품이 가장 잘 자극하고 있는 것은 바로 향수(nostalgia)입니다. 어른이 된 우리가, 우리의 과거에 존재했던 가장 소중한 것을 떠올리며 그립게 미소짓게 되는 그 지점 말이죠.
우리는 대체 뭐가 그렇게 그리운 걸까요? 우리가 그리워하는 그 시절에는 대체 어떤 것이 존재했길래, 우리의 가슴이 늘 그 시절에 대한 향수 속에서 허물어지는 걸까요?
그건 아마도 온전함일 것입니다.
쉽사리 온전함이 경험되지 않는 현재와는 달리, 과거의 그 시절에는 이유를 알 수 없는 온전함의 온기가 늘 우리를 감싸안고 있던 것처럼 우리는 곧잘 느낍니다. 그래서 온전함이 존재했던 그 시절을 더욱더 눈부신 색채로 채색해가고, 보다 생생한 멜로디의 화음을 그 위에 덧입혀가곤 하죠. 이를 낭만주의라고 합니다. 이처럼 낭만주의의 화살은 보편적으로 현재 상실한 이상적인 과거를 향해 조준됩니다. 모든 낭만주의는 실낙원의 꿈이죠.
그런데 이 영화가 일견 이러한 낭만주의적 서정을 담보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진정으로 우리의 눈물을 자아내게 되는 지점은 조금 다른 곳에 있는 것 같습니다. 이는 과녁에 대한 더욱 정확한 정중앙으로의 의지라고 표현하는 게 좋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영화는 포기하지 않았거든요. 우리가 그렇게도 그리워하는 온전함이라는 것을, 상실한 과거가 아니라, 현재로 이끌어오기 위한 그 뜨거운 움직임을 결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영화의 주인공인 진구(노비타)는 잘하는 게 아무 것도 없는 아이입니다. 늘 도라에몽의 도움을 받음으로써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게 되는 다소 의존적인 아이죠. 도라에몽은 늘 진구의 편에 서서, 진구의 소원을 들어주고, 진구의 뜻이 현실로 이루어지도록 물심양면으로 돕는 친절한 조력자입니다. 도라에몽은 사실 진구에게 있어서는 신(神)과 같은 존재에요.
그러한 까닭에, 도라에몽이 곁에 있어야만 진구는 비로소 온전함을 경험할 수 있는 것처럼 보여요. 도라에몽이 진구에게 무조건적인 관심과 호혜를 제공하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도라에몽이 사라진 현실은 곧 진구에게 있어서는 온전했던 낙원의 영원한 상실과도 같겠죠. 그 실낙원의 현실 속에서 진구는 도라에몽이 존재했던 시절을 그리워하며, 현재 누릴 수 없는 온전함을 과거에 대한 향수 속에서만 찾고자 하게 될 것입니다.
그와 같은 진구의 모습이 또한, 도라에몽이라는 작품과 함께했던 어린 시절을 거쳐 현재 어른이 된 우리가 이 영화를 바라보는 바로 그 모습입니다.
현재 어른이 된 진구의 곁에 그를 온전하게 해주었던 도라에몽이 존재하지 않듯이, 어른이 된 우리의 곁에도 우리를 온전하게 해주었던 과거의 그 낙원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진구와 우리의 입장은 여기에서 완벽하게 동일시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영화를 보며 그렇게도 애틋한 감상을 공유하게 되는 것이죠.
그리고 그 감상 속에서 영화는 실낙원을 그리워하고 있는 진구이자 우리인 그 하나의 주체에게 물음을 던집니다.
'도라에몽이 없는 현실 속에서 어른으로 살아가는 당신도 아직 온전한가요?'
도라에몽이라는 작품을 주요하게 구성하는 두 축이 모험과 성장이라고 할 때, 이 물음은 결국 어른인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두 가지를 묻고 있는 것입니다.
'당신의 모험은 어른이 되어서도 즐겁게 계속되고 있나요?'
'당신은 얼마나 멋진 어른으로 성장했나요?'
이 물음들에 대한 응답의 요청은 영화 속에서 다시 한 번 도라에몽이 진구를 염려하는 목소리를 통해 절절히 표현되기도 하죠.
"난 이제 니가 도와달라고 해도 도와줄 수 없단 말이야! 난 이제 더이상 여기에 있을 수 없어! 진구야, 내가 없어도 잘 할 수 있겠어?"
그리고 진구는 도라에몽이 없는 현실을 받아들인 가운데, 다음과 같이 스스로 응답합니다.
"내가 믿을 수 있는 게 나 말고 대체 누가 있겠어? 나를 도울 수 있는 건 나뿐이잖아."
이처럼 "나 없이도 잘 할 수 있겠어?"라는 말에 정확하게 응답되는 목소리는 "걱정마, 나 혼자서 할 수 있어."입니다. 즉, 이 모든 문답은 어떠한 대상의 형식과도 관계없이 나 스스로를 드러내고 있는 묘사입니다.
이 우주에 나말고는 나의 편이 없습니다. 도라에몽은 진구 스스로의 그 나의 역할을 대신 보여주고 있었을 뿐이죠. 도라에몽이 진구를 걱정하며 그 필요성을 상기시키는 사실이나, 진구가 스스로 이룬 현실 속에서 발견하게 되는 사실이나, 둘 다 동일하게 이 나에 대한 요청만을 드러내고 있는 사실입니다.
이 영화는 이렇게 이 지난한 삶을 관통해온, 도라에몽과 같은 전능한 조력자 없이도, 하루하루 최선을 다해 스스로의 삶을 살아내옴으로써 지금 이 자리에 당당하게 서 있는 바로 이 나의 문제로 모든 관심을 수렴시킵니다. 이처럼 도라에몽의 핵심적인 주제라고 할 수 있는 모험과 성장의 주체는, 곧 이 현실에 발을 붙이고 열심히 살아가고 있는 바로 이 나인 셈이죠. 이 나에 의해 우리 삶의 모험과 성장은 즐겁고도 멋지게 완수됩니다.
이러한 나의 존귀함이 발견될 때, 우리의 현실은 온전해집니다.
우리가 이 영화를 보며 모자라고 부족한 어린이 진구의 모습을 그 자체로 온전하게 바라보게 되듯이, 도라에몽이 없이도 부족한대로 스스로의 삶에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어른 진구의 모습을 그 자체로 온전하게 바라보게 되듯이, 우리가 스스로의 역사에 대해서도 진구를 바라보는 것과 같은 동일한 시선으로 바라보게 될 때, 그 시선의 주체인 나 또한 그 자체의 온전함을 회복합니다.
그래서 온전함은 늘 현재에만 존재하는 것입니다. 과거가 아닙니다. 우리가 현재의 온전함으로 그 과거를 바라보았기 때문에 과거가 온전하게 경험된 것일 뿐입니다. 때문에 온전함은, 과거에는 누렸지만 현재는 상실해버린 실낙원이 될 수도 없습니다. 언제나 현재 속에서 거듭해서 발견될 수 있는 것이 바로 온전함입니다.
작품의 묘사 속에서 도라에몽은 진구의 과거에도, 진구의 미래에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오직 진구의 현재에만 도라에몽이 존재하고 있는 이 묘사는 대단히 함축적인 중요성을 갖습니다.
도라에몽의 역할이, 끝내 진구가 스스로 발견하게 될 나에 대한 요청이라고 할 때, 도라에몽이 그러하듯이 나는 늘 현재에만 존재하는 것입니다.
현재 속에서, 도라에몽은 늘 진구 곁에 있습니다.
현재 속에서, 진구는 늘 진구 곁에 있습니다.
현재 속에서, 나는 늘 내 곁에 있습니다.
이 영화가 우리를 최종적으로 끌고 가는 곳은 바로 이 지점입니다.
울고, 웃으며, 화내고, 슬퍼하며, 참 열심히 살아온 우리들에게, '그 시절만큼이나 당신은 아직도 온전하세요.'라는 상냥한 울림을 다음과 같은 목소리로 들려주고 있는 바로 이 자리가, 이 영화의 종착지입니다.
"나는 늘 당신 곁에 있습니다."
Motohiro Hata - Himawari No Yakusok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