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36] 다음 글을 읽고 물음에 답하시오.
사랑채로 들어간 두목이, 한 수하를 시켜 윗미닫이를 열어젖히고서 성큼 마루로 올라설 때에, 그는 뜻밖에도 이편을 앙연히 노려보고 있는 말대가리 윤용규와 눈이 딱 마주쳤습니다.
두목은 주춤하지 않지 못했습니다. 그는 윤용규가 이 위급한 판에 한 발자국이라도 도망질을 치려고 서둘렀지, 이다지도 대담하게, 오냐 어서 오란 듯이 버티고 있을 줄은 천만 생각 밖이었던 것입니다.
더욱, 핏기 없이 수척한 얼굴에 병색을 띠고서도, ⓐ일변 악이 잔뜩 올라 이편을 무섭게 노려보는 그 머리 센 늙은이의 살기스런 양자가 희미한 쇠기름불에 어른거리는 양이라니, 무슨 원귀와도 같았습니다.
두목은 만약 제 등 뒤에 수하들이 겨누고 있는 십여 대의 총부리와 녹슬었으나마 칼들과 몽둥이들과 도끼들이 없었으면, 그는 가슴이 서늘한 대로 물심물심 뒤로 물러섰을는지도 모릅니다.
“으응, 너 잘 기대리구 있다!”
두목은 하마 꺾이려던 기운을 돋우어 한마디 으릅니다. 실상 이 두목(그러니까 오늘 밤의 이 패들)과 말대가리 윤용규와는 처음 만나는 게 아니고 바로 구면입니다. 달포 전에 쳐들어와서 돈 삼백 냥을 빼앗고, 그 밖에 소 한 마리와 패물과 어음 몇 쪽을 털어 간 그 패들입니다. 그래서 화적패들도 주인을 잘 알려니와 주인 되는 윤용규도 두목의 얼굴만은 익히 알고 있고, 그러고도 또 달리 뼈에 사무치는 원혐이 한 가지 있는 터라, 윤용 규는 무서운 것보다도(이미 피치 못할 살판인지라) 차차로 옳게 뱃속으로부터 분노와 악이 치받쳐 올랐습니다.
“이놈 윤가야, 네 들어 보아라!”
ⓑ두목은 종시 말이 없이 앙연히 앉아 있는 윤용규를 마주 노려보면서, 그 역시 분이 찬 음성으로 꾸짖는 것입니다.
“……네가 이놈 관가에다가 찔러서 내 수하를 잡히게 했단 말이지……? 이놈, 그러구두 네가 성할 줄 알었드냐……? 이놈 네가 분명코 찔렀지……?”
“오냐, 내가 관가에 들어가서 내 입으루 찔렀다, 그래……?”
ⓒ퀄퀄하게 대답을 하면서 도사리고 앉은 윤용규의 눈에서는 불이 이는 듯합니다.
“……내가 찔렀으니 어쩔 테란 말이냐……? 흥! 이놈들, 멀쩡하게 도당 모아 갖구 댕기먼서 양민들 노략질이나 히여 먹구, 네가 그러구두 성할 줄 알았더냐? 이놈아……!”
치받치는 악에 소리를 버럭 높이면서 다시,
㉠“……괴수놈, 너두 오래 안가서 잽힐 테니 두구 보아라! 네모가지에 작두날이 내릴 때가 머잖었느니라, 이노옴!”
하고는 부드득 이를 갈아붙입니다.
목전의 절박한 사실에 대한 일종의 발악임은 틀림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일변 깊이 생각을 하면 하나의 웅장한 선언일 것입니다.
핍박하는 자에게 대한, 일후의 보복과 승리를 보류하는 자신 있는 선언…….
사실로 윤용규는, 무식하고 소박하나마 시대가 차차로 금권(金權)이 유세해 감을 막연히 인식을 했던 것입니다.
그것은 그러므로, 비단 화적패들에게만 대한 선언인 것이 아니라, ⓓ그 야속하고 토색질을 방자히 하는 수령까지도 넣어, 전압박자에게 대고 부르짖는 선전의 포고였을 것입니다. 가령 그 자신이 그것을 의식하고 못 하고는 고만두고라도……, 말입니다.
“……이놈들! 밤이 어둡다구, 백 년 가두 날이 안 샐 줄 아느냐? 두구 보자, 이놈들!”
윤용규는 연하여 이렇게 살기등등하니 악을 쓰는 것입니다.
“하, 이놈, 희떠운 소리 헌다! 허!”
[중략 부분의 줄거리] 화적패의 두목은 체포된 부하를 구하는 데 필요한 뇌물을 윤용규에게 요구하지만, 윤용규는 끝내 거절하고 저항하다가 화적패의 부하들에게 폭행을 당하고 죽을 위기에 처한다.
윤용규가 마지막, 목덜미에 도끼를 맞고 엎드러지자, 피를 본 두목은 두 눈이 불덩이같이 벌컥 뒤집혀졌습니다. 그는 실상 윤용규를 죽일 생각은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윤용규 하나쯤 죽이기를 차마 못 해서 그런 것은 아니고, 제 구혈로 잡아가쟀던 것입니다. 한때 만주에서 마적들이 하던 그 짓이지요. 볼모로 잡아다 두고서 가족들로 하여금 이편의 요구를 듣게 하쟀던 것입니다.
“노적(露積)허구 곡간에다가 불질러랏!”
두목은 뒤집힌 눈으로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진 윤용규를 노려보다가 수하를 사납게 호통하던 것입니다. 이윽고 노적과 곡간에서 하늘을 찌를 듯 불길이 솟아오르고, 동네 사람들이 그제야 여남은 모여들어 부질없이 물을 끼얹고 하는 판에, 발가벗은 윤두꺼비가 비로소 돌아왔습니다. 화적은 물론 벌써 물러갔고요. 윤두꺼비는 피에 물들어 참혹히 죽어 넘어진 부친의 시체를 안고 땅을 치면서,
“이놈의 세상이 어느 날에 망하려느냐!”
고 통곡을 했습니다.
그리고 울음을 진정하고는, 불끈 일어서 이를 부드득 갈면서,
㉡“오—냐, 우리만 빼놓고 어서 망해라!”
고 부르짖었습니다. ⓔ이 또한 웅장한 절규였습니다. 아울러, 위대한 선언이었고요.
- 채만식, ‘태평천하’
34 윗글의 인물에 대한 이해로 적절한 것은?
① 두목은 처음에 윤용규의 대응에 당황했지만 기세를 잃지 않는다.
② 두목은 윤용규를 살해함으로써 처음에 의도했던 목적을 달성한다.
③ 윤용규는 상대방의 협박에 점차 자신감을 잃어 간다.
④ 윤용규는 상대방의 약점을 공격함으로써 협상에서 우위를 점한다.
⑤ 윤두꺼비는 가정사의 불행을 막지 못한 동네 사람들을 원망한다.
35 ㉠과 ㉡에 대한 이해로 적절하지 않은 것은?
① ㉠은 ㉡에 비해 청자가 더 구체적이다.
② ㉠에 담긴 정서는 ㉡에서 증폭되어 나타난다.
③ ㉠은 전략적 의도에서, ㉡은 즉흥적 감정에서 나온 말이다.
④ ㉠과 ㉡ 모두 인물들의 피해 의식에서 비롯된 말이다.
⑤ ㉠과 ㉡ 모두 반어적 표현을 통해 골계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36 <보기>를 바탕으로 ⓐ~ⓔ에 대해 이해한 내용으로 적절하지 않은 것은? [3점]
<보기>
소설에서 시점은 누구의 목소리로 말하는가의 문제이면서 동시에 누구의 눈으로 보는가의 문제이기도 하다. 서술자는 자신의 시각에서 이야기를 직접 서술하기도 하지만, 특정 인물의 시각에서 그의 처지와 인식을 반영하여 서술하기도 한다.
① ⓐ는 서술자가 ‘두목’의 시각을 반영하여 서술한 것이겠군.
② ⓑ는 서술자 자신이 비교적 객관적으로 직접 서술한 것이겠군.
③ ⓒ는 서술자 자신이 주관적 해석을 포함하여 직접 서술한 것이겠군.
④ ⓓ는 서술자가 ‘윤용규’의 처지와 인식을 추측하여 서술한 것이겠군.
⑤ ⓔ는 서술자가 ‘윤두꺼비’의 인식을 반영하여 서술한 것이겠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