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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공로사상의 뿌리를 뽑자>의 줄거리:
발본색원(拔本塞源)이란 어떤 일의 폐단을 없애기 위하여 그 일을 뿌리째 뽑아 버림을 말합니다. 우리 영혼에 독버섯처럼 작용하는 것이 바로 공로 사상입니다. 공로 사상은 하나님 관계를 망치고 사람 관계를 망칩니다. 나를 해하고 남을 해하고 하나님을 모독하게 됩니다. 그런데 뽑아버려야 할 공로 사상의 뿌리가 바로 더러움입니다.
공로 사상의 뿌리를 뽑자
(누가복음 11:39~44)
39. 주께서 이르시되 너희 바리새인은 지금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나 너희 속에는 탐욕과 악독이 가득하도다
40. 어리석은 자들아 겉을 만드신 이가 속도 만들지 아니하셨느냐
41. 그러나 그 안에 있는 것으로 구제하라 그리하면 모든 것이 너희에게 깨끗하리라
42. 화 있을진저 너희 바리새인이여 너희가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의 십일조는 드리되 공의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버리는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43. 화 있을진저 너희 바리새인이여 너희가 회당의 높은 자리와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을 기뻐하는도다
44. 화 있을진저 너희여 너희는 평토장한 무덤 같아서 그 위를 밟는 사람이 알지 못하느니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공로 사상의 뿌리를 뽑자>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공로 사상의 뿌리를 뽑자’
발본색원(拔本塞源)이란 어떤 일의 폐단을 없애기 위하여 그 일을 뿌리째 뽑아 버림을 말합니다. 본문에서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을 향해 세 가지 저주를 하십니다. 이 저주는 바리새인을 향한 것이지만 우리에게도 얼마든지 해당될 수 있는 내용이기에 성경에 기록되었으며 또한 유익을 줄 수 있습니다.
세 가지 저주에는 공통적인 원인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잔과 대접의 비유를 통해 말씀해주시는 더러움입니다. 하나님 이외에 세상의 가치들을 좋아하는 것이 탐욕입니다. 하나님의 주권 아래에 놓여있는 것들을 내 것으로 만들고자 하는 일이기에 도둑질이고 강탈이고 약탈입니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하나님만이 들어오시도록 만들어진 마음의 공백은 더러워지게 되고, 더러움이라는 하나의 뿌리로부터 세 가지 저주에 해당하는 사람으로 살게 됩니다. 그리고 이 더러움을 뿌리로 하여 자라나는 독버섯과 같은 일이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공로(功勞) 사상입니다. 말 그대로 공로를 쌓으면 그에 합당한 보답을 받으리라는 사상입니다.
우리의 마음속에 있는 더러움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습니다. 깨끗하고 멋진 옷을 입고 향수를 뿌린 사람도 그 마음은 더러울 수 있습니다. 그런데 더러움을 뿌리로 하여 자라나는 독버섯은 겉으로도 드러나게 됩니다. 아름답고 화려한 색채를 자랑하는 독버섯처럼 자라나는 것이 바로 공로 사상입니다. 믿는 사람이든 믿지 않는 사람이든 공로 사상에 사로잡히지 않은 사람이 거의 없다고 할 정도로 공로 사상에 의해 인생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본문에서 예수님께서는 이 공로 사상과 연관하여 십일조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42절을 보면 ‘…너희가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의 십일조는 드리되 공의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버리는도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일조를 내라고 요청하고 계신 것이 아닙니다. 공로 사상이 왜 문제가 되는지를 십일조를 통하여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박하와 운향과 채소는 십일조로 계산하지 않아도 율법을 어기는 것이 아닌 사소한 것들이었습니다. 본문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심지어 땔감까지 십일조를 드렸다고 합니다. 바리새인은 이렇게 계량하기도 힘든 사소한 것들까지 십일조를 드리는 치밀함과 열심을 보였습니다. 겉으로만 보자면 이러한 모습은 어쨌든 칭찬할만한 모습일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모습을 공의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을 버린 것이라 말씀하고 계십니다.
한편 이어지는 말씀을 보면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렇게 말씀하신 것을 보면 십일조를 드리는 것 자체를 문제시하고 계신 것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왜 공의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을 회복하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십일조를 언급하신 것일까요? 그 이유가 바로 공로 사상과 연관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바리새인은 십일조 규정을 열심히 지키고 있었으나 십일조의 근본 취지에 대해서는 무지했습니다. 오히려 독버섯같이 자라난 공로 사상의 마음가짐으로 십일조의 행위만을 하고 있었을 뿐입니다. 공로 사상에 사로잡힌 결과 공의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을 버리게 되었습니다. 문제는 바로 이 공로 사상이 마음의 더러움에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결국 예수님은 마음의 더러움을 문제시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는 말씀대로 십일조 그리고 공의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을 회복할 수 있을까요?
이를 위해 먼저 십일조의 근본 취지를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십일조 규정의 근본 취지는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는 곧 하나님을 좋아하고 하나님을 기쁨과 만족으로 삼고 하나님을 즐기는 것이며 이를 위해 하나님 버는 것을 일생의 유일한 목적과 사명으로 삼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구약 시대에는 이렇게 하나님을 사랑하기 위한 방법으로써 성전 생활화가 필수적으로 요구되었습니다. 성전의 맨 안쪽 지성소에는 법궤가 안치되어 있었습니다. 법궤는 곧 하나님의 이름을 상징합니다. 가장 거룩한 지성소에 하나님의 이름만이 안치되어 있다는 것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는 주기도대로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는 상태를 형상화한 것입니다.
그리고 지성소의 휘장 바깥 성소에는 분향단과 떡상과 금촛대가 있었습니다. 분향단은 기도를 상징하는 것으로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추구함을 의미합니다. 마음에서 돈, 건강, 형통이라는 이름을 붙잡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만을 붙잡고 그 이름이 가리키는 실재 하나님을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것입니다. 떡상은 배부름 즉 마음의 채워짐을 의미합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이유는 바로 마음의 기쁨과 만족을 위함입니다. 금촛대는 밝음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을 구하고 찾고 두드려서 하나님으로 마음이 채워지면 하나님의 뜻과 섭리가 빛을 발하듯이 나타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의미를 염두에 두면 주기도문은 이러한 성전을 문자화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성전은 곧 인간의 마음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상태를 형상화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갈릴리에 살고 있는 농부가 농사를 짓다가 추수가 잘되면 좋겠다는 바람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성전을 떠올리고 그러한 바람이 잘못되었음을 깨닫습니다. 하나님으로 기뻐해야 하는데 추수를 잘해서 기뻐하려 하였고 그로 인해 마음이 더러워진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성전을 떠올리면 지성소에는 하나님의 이름을 상징하는 법궤가 있고 지성소 바깥의 성소에는 분향단과 떡상과 금촛대가 있습니다. 분향단의 의미를 떠올리면 하나님만을 좋아해야 하는데 추수를 좋아하였습니다. 또 떡상의 의미를 떠올리면 하나님으로 배불러야 하는데 추수로 인해 배부르고자 했습니다. 또 금촛대의 의미를 떠올리면 하나님의 기운이 나타나야 하는데 추수로 인한 기운이 나타나기를 바랐습니다.
이렇게 더러워진 마음은 번제단에서 죽었음을 고백함으로써 깨끗해질 수 있었습니다. 추수를 좋아하던 나를 번제단에서 죽어가는 어린 양과 동일시함으로써 하나님께 대한 사랑으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구약 시대에는 이렇게 성전을 기억함으로써 나를 진단함을 통해 하나님께 대한 사랑을 이룰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오신 뒤에는 그리스도의 연쇄 사건을 통하여 성전의 의미를 완성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연쇄 사건에 나를 동일시하는 것이 바로 십자가 생활화입니다. 우리는 십자가 생활화를 통하여 성전 생활화와 동일한 효과를 얻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한편 성전 생활화를 돕기 위하여 성전에서 봉사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레위인들은 평생 다른 일을 하지 않고 성전에서 일하며 제사장을 비롯한 각종 직책들을 가지고 봉사하였습니다. 개인적인 일들을 하는 대신에 선민들이 하나님을 사랑하며 하나님을 갖고 하나님으로 즐기며 살아갈 수 있도록 돕는 일을 하였습니다. 이들이 먹고 살기 위한 돈이 십일조였습니다.
그러므로 자발적으로 십일조를 드린다는 것은 하나님을 최고로 여겨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이 이생과 내세에서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고 인정한다는 의미였습니다. 이 중요성을 모르는 사람은 십일조를 낼 수도 없으며 설령 낸다 한들 의미를 가질 수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바리새인은 하나님만을 사랑하는 것이 얼마나 좋은 일인지는 알지 못한 채 십일조에 열심이었습니다. 구약의 십일조 규정은 곡식이나 가축 혹은 기름 같은 생필품에 국한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십일조에 대한 열심을 겉으로 드러내기 위하여 박하와 운향과 채소나 땔감 같은 사소한 것들에까지 적용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정작 십일조의 근본 취지인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간과되고 있었습니다. 바리새인의 십일조는 하나님께 대한 사랑과 전혀 관계없는 공로 사상에서 드려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공로 사상의 밑바닥에는 세상의 가치를 좋아하는 마음이 깔려있습니다. 본래 세상의 가치들이란 내가 따로 좋아하지 않아도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 주어지기도 하며 없어지기도 할 것들입니다. 그런데 좋아하라는 하나님은 좋아하지 않고 좋아하지 않아도 될 세상의 가치를 좋아하게 됨으로써 마음은 더러워지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죄입니다. 그리고 더러움을 깨닫지 못하고 묵인한 채 살아가는 것이 악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도 이러한 죄악은 일어날 수 있습니다. 바리새인은 하나님께서 삼라만상의 창조주이시며 세상의 주권자이심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설득해서 세상에서 원하는 것들을 많이 얻고자 하였습니다. 그 방편으로 율법에 기록된 십일조 외에 과도하게 함으로써 더 많은 세상의 가치들을 얻고자 하였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저주하신 바리새인들의 공로 사상이었습니다. 박하와 운향과 채소와 땔감의 십일조까지 드리는 정성을 보였으니 그에 상응하는 보답을 해달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공로 사상은 세상의 가치에 국한된 것은 아닙니다. 죽은 다음에 하늘에서 얻을 자리에 대해서조차 탐하게 됩니다. 사후의 삶을 위해서 살아 있는 동안 공을 들이는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그러한 공로 사상의 대표적 예가 면죄부 판매였습니다. 내가 면죄부를 사기 위해 돈을 들였으니 내세에서도 복을 누리도록 해달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공로 사상은 교황이나 추기경들에 의해서 묵인되었고 오히려 부추겨졌습니다.
공로 사상은 바리새인이나 중세 가톨릭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지금 우리의 신앙생활에서도 얼마든지 발견할 수 있습니다. 공로 사상은 교인들을 예배당에 묶어놓기 위한 전가의 보도처럼 활용되고 있습니다. 예배당에서 직분을 맡고, 조직을 위하여 헌신하고, 헌금을 많이 하고, 성수주일을 하면 그에 상응하는 하나님의 상이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모두 공로 사상입니다.
이것의 문제는 하나님을 원할 때는 공로 사상을 내세울 수 없습니다. 하나님 외에 다른 것을 좋아하고 다른 것을 갖고 싶기에 탐욕이 생기고 마음은 더러워지게 됩니다. 그럴 때 반드시 하나님 앞에서 공로 사상을 내세우게 됩니다. 공로 사상 안에서만 하나님과 관계하고자 하게 됩니다. 그럴 때는 예수님이 말씀하신 대로 공의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버릴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겉으로 드러나는 것이 아닙니다. 우선 겉으로 드러나는 것은 공의입니다. 공의(公義)는 말 그대로 공평한 올바름입니다. 인간관계에서 공의란 상대방의 상태에 맞는 말과 행동을 하는 것입니다. 배우자를 대할 때에 나를 위한 말과 행동을 하는 것이 아니라 배우자의 상태에 맞춘 말과 행동을 하는 것이고, 자녀를 대할 때에도 나의 주장을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자녀의 상태에 맞춘 말과 행동을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힘으로는 이렇게 치우침이 없고 합당한 말과 행동을 하는 공의를 드러낼 수가 없습니다. 먼저 하나님을 사랑하여 내 안으로 모셔 들일 때에 하나님께서는 나를 장갑 삼아 사람들에 대한 하나님의 생각과 말과 행동을 해나가실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사랑하여 모셔 들일 수 없다면 공의가 나타날 수도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에게서 공의가 나타날 수 없는 이유를 십일조를 통해 드러내십니다. 말씀드린 대로 십일조는 백성들이 하나님만을 사랑할 수 있도록 평생 자기 기업과 직업을 갖지 못한 채 성전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바리새인의 십일조의 저변에는 하나님께 대한 사랑이 아닌 세상의 가치에 대한 사랑이 깔려있었습니다. 세상을 사랑하기 위하여 하나님을 채무자로 만드는 것이 이들의 공로 사상이었기 때문입니다.
내가 노력과 수고를 베풀었으니 채권자가 된 것이고 하나님은 나의 노력과 수고를 받은 채무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공로 사상은 하나님을 좋아하지 않고 세상의 가치들을 좋아하는 더러움에서 비롯됩니다. 하나님을 채무자로 만든다면 하나님을 사랑할 대상으로 마음에 모실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모실 수 없기에 인간관계에서도 맞춤형 공의는 드러날 수 없습니다.
43절을 보면 바리새인에 대한 두 번째 저주가 나옵니다. ‘화 있을진저 너희 바리새인이여 너희가 회당의 높은 자리와 시장에서 문안받는 것을 기뻐하는도다’라고 하셨습니다. 이 또한 공로 사상과 관계가 있습니다. 공로 사상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을 만날 때도 나타나게 됩니다. 내가 이만큼 노력하고 수고하여 잘난 사람이 되었으니 그에 상응하는 존경과 인정을 해달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공로 사상으로 인해 인간관계와 하나님 관계도 모두 파괴됩니다. 사람에게는 사람에게 맞춘 관계가 있고, 하나님께는 하나님께 맞춘 관계가 있어야 하는데 공로 사상에 빠져있는 상태에서는 자신에게만 맞추려고 합니다. 세상 것을 좋아하여 더러워진 마음에 사람도 맞추고 하나님도 맞추려고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부모가 자녀의 형통을 바라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로 여겨집니다. 그러나 이러한 상태에서 하나님과 관계할 때는 공로 사상이 작용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채무자로 만들기 위하여 헌금도 하고, 기도를 하고, 성수주일하고, 봉사와 충성도 하게 됩니다. 그렇게 공로를 했으니 이제 자녀를 형통하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또 예배당 생활 바깥에서는 사람들에게도 동일하게 공로를 베풀며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얻어서 자녀를 형통하게 하고자 합니다.
“내가 이 정도 했으면 인정해줘야 하지 않겠느냐?”라는 공로 사상으로 살다 보니 사람도 하나님도 채무자로 만들어 나에게 맞추려고 하게 됩니다. 늘 채무자를 상대하는 마음이 되어있으니 항상 불만이 가득합니다. 내가 기대하는 존경과 인정과 사랑과 관심이 돌아오지 않고, 하나님에 대해서는 기대하는 세상의 가치들을 받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회당은 선민들의 모임이고 선민은 하나님께 선택받은 사람들입니다. 마음 채움인 기쁨과 만족을 근거로 삼기 위해 하나님 한 분만을 붙잡도록 선택하신 사람들이 선민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선택하신 이유도 이와 같습니다. 돈 대신, 배우자 대신, 자녀의 형통 대신, 건강과 장수 대신 하나님을 기쁨과 만족으로 선택하라고 우리를 선택하셨습니다.
이러한 선민들이 모이는 회당의 모임에서 이루어져야 하는 일이란 당연히 하나님을 관심사로 삼는 것이었습니다. 결코 내가 인정받기 위한 모임이 아니라 하나님이 최고로 좋으신 분으로 인정을 받으셔야만 했습니다. 하나님을 최고로 인정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면 하나님이 얼마나 좋으신 분인가를 증언하고 나눔으로써 그 사람에게서도 하나님을 최고로 좋은 분으로 인정하게 하는 것이 선민의 모임이었습니다.
이러한 모임은 우리에게서도 이루어져야만 합니다. 그런데 지금 예배당에서는 목사 장로 권사 집사 등의 온갖 직분과 서열을 만들어놓고 누가 높은 자리에 가느냐를 두고 선거를 하고 경쟁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회당이 우리에게는 교회에 해당합니다. 이렇게 모인 자들의 관심은 하나님이 되셔야만 합니다. 이러한 모임의 목적은 내가 얼마나 하나님을 좋아하고, 삶에서 어떻게 하나님으로 기쁨을 누렸으며,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로 나의 삶을 이끌어 가셨는가를 간증하고 나누는 것이 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앞서가고 더 많이 하나님을 누리는 사람은 적게 누리는 사람이 하나님을 더 가질 수 있도록 돕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올바른 모임의 의미입니다. 그러나 공로 사상에 사로잡힐 때 모임은 스스로를 높이기 위한 기회로 전락하고 맙니다.
선민들의 모임이었던 유대사회에서조차 공로 사상으로 인해 하나님이 인정받지 못하시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최고로 좋으신 행복의 근간이시다, 하나님만이 나의 기쁨이고 만족이시다.”를 고백할 수 없는 상황이 된 것입니다. 대신 “나를 좀 알아주기를 바란다. 내가 이만큼 했으니 인정할 만하지 않느냐? 당신들은 곡식의 십일조만 드리지만 나는 박하와 운향과 채소의 십일조까지 드리는 것이 증거이다.”라는 식이 바리새인의 마음가짐이었습니다.
또 44절을 보면 바리새인에 대한 세 번째 저주가 나옵니다. ‘화 있을진저 너희여 너희는 평토장 한 무덤 같아서 그 위를 밟는 사람이 알지 못하느니라’고 하였습니다. 당시에 유대 땅에서는 동굴에 시체를 넣어서 바위로 막는 것이 일반적인 매장이었습니다. 한편 평토장이라는 것은 사람들이 발로 밟고 다니는 평지 위에 묘를 쓴 것입니다. 평토장은 세월이 지나면서 그 위에 뿌려둔 석회가 다 지워져서 맨땅과 구분이 되지 않게 됩니다. 당시에 유대사회에서는 무덤이나 시체에 접촉하게 되면 일정기간 동안 부정하다 여겨졌습니다. 부정하다는 것은 하나님과 끊어지게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과 연관된 모든 삶의 영역과 행사로부터 제외된다는 것입니다.
공로 사상에 사로잡힌 사람들이 지도자가 되는 모습이 이와 같습니다. 예를 들어 예배당 건축을 목표로 하고 있는 목사님이 365일 새벽기도를 하고 집을 팔아 헌금을 하는 모범을 보였습니다. 그리고 성도들에게 하나님께서 이러한 수고와 노력을 보시고 복을 주시고 상을 주실 것이라 가르칩니다. 이러한 모습은 특별히 잘못된 것이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실은 평토장 한 무덤과 같은 모습입니다.
문제는 목사님의 마음속에 있습니다. 멋진 예배당이 세워질 것을 꿈꾸는 동안 마음은 예배당을 탐욕하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교인들에게 헌금을 강요하는 수단을 생각하게 됩니다. 마음으로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를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아름다운 예배당을 좋아하게 된 것입니다. 그 결과 공로 사상에 입각하여 새벽기도도 하고 집을 팔아 헌금으로 드립니다. 그리고 교인들에게도 그러한 공로 사상을 가르치게 됩니다. 그 결과 무덤에 접촉한 사람이 부정하게 여겨져 교인들은 공로 사상에 의해 어느덧 하나님과 끊어지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모습을 향해 저주를 선언하신 것입니다.
지도자가 세상의 가치를 좋아하여 탐욕으로 더러워진 자기를 묵인하고 공로 사상에 사로잡힙니다. 이러한 지도자는 선민들을 하나님으로부터 끊어지게 하는 저주에 합당한 악독한 사람이 됩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아니라 세상의 가치를 좋아함으로써 공로 사상이라는 독버섯의 기운에 사로잡힌 결과입니다. 목회자가 이러한 공로 사상에 사로잡힌다면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할 때마다 교인들을 하나님으로부터 끊어내게 됩니다. 무서운 일입니다.
공로 사상은 더러움에서 만들어집니다. 그리고 더러움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아니라 이 세상의 가치들을 좋아함으로부터 나타납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성전의 지성소를 떠올리며 하나님의 이름만을 붙잡을 수 있어야만 합니다. 또한, 성소의 분향단과 떡상과 금촛대를 떠올릴 수 있어야만 합니다. 분향단은 하나님의 이름이 가리키는 실재 하나님을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추구함을 의미합니다. 그렇게 하는 이유는 바로 떡상이 의미하는 대로 하나님으로 배부르기 위함입니다. 또한 금촛대가 의미하는 대로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기운이 발산되는 촛대가 되기 위함입니다.
이 마음가짐을 망각한 채 세상을 좋아할 때 마음은 더러워지게 됩니다. 더러움의 양분을 먹고 공로 사상이 꽃피게 될 때에 하나님에 대한 관계가 끊어지고 사람과의 관계도 끊어지게 됩니다. 행여 지도자의 위치에 있는 사람이라면 다른 사람들이 하나님께 가는 길도 끊어버립니다.
이 더러움의 뿌리를 둔 공로 사상을 뿌리째 뽑아버리기 위해서 오늘도 성전의 의미를 완성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연쇄 사건만을 마음에서 붙잡고 공로 사상의 뿌리를 발본색원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그리스도의 연쇄 사건에 마음과 뜻과 힘을 다 던짐으로써 공로 사상의 뿌리가 되는 더러움이 근원적으로 제거되는 복과 은혜를 누리는 하루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