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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사렛 예수
본문<요7:37~52>
37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이르시되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38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 39 이는 그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않으셨으므로 성령이 아직 그들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
지난주에 방금 읽은 부분을 살펴보았는데요,
초막절의 의미에 대해 오늘 좀 더 부연하고 이어 가겠습니다.
위의 세 구절을 요약하면 목마른 자들이 IX를 믿게 되고, 그러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넘친다는 말인데, 그게 언제 어떻게 일어나는 일이냐? 성령을 받으면 된다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목마른 자들이란 자신에게는 죄밖에 나오지 않는 자라는 것을 깨닫게 된 자를 말합니다. 그래서 철저히 ㅎ님의 심판과 저주를 받을 수밖에 없는 자라는 것을 발견한 자들이, 죄의 용서함을 주시는 그리스도께 나아올 때, ㅎ님의 긍휼하심으로 의롭다고 여김을 받게 되는 십자가 복음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아니, 그저 죄만 지은 자들을 그냥 조건 없이 용서하다니요? 이게 말이나 되는 셈법입니까? 이 세상에서는 자신이 뿌린 대로 거두는 법칙이 운행되니까, 어디에서도 이런 경우는 없습니다. 한마디로 이세상은 인과응보와 상선필벌의 정신사조로 움직여지는 곳입니다. 그러나 ㅎ님의 나라는 이게 아니라, 무조건 용서, 무조건 긍휼이 넘치는 은혜의 세계이지요.
그러나 자기 행함의 의를 가치를 삼고 사는 바리새인은 이런 복음이 도저히 용납이 안 되기에 발로 차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을 전하시는 예수가 걸림돌이 되어 눈엣가시처럼 여기는 것입니다. 반면에 죄로 범벅이 되어 살아온 세리와 창기는 자기 의란 털끝만큼도 없기에 IX의 십자가 복음으로 주어지는 구원이 그렇게도 감사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 복음이 들려질 때 감격에 겨워 기쁨의 환호성이 터지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에, 세상에, 내 모든 죄를 묻지 않으시고 그저 용서하신다니, 이럴 수가! 이럴 수가!
-오! ㅎ님 감사합니다. 오! 예수님 감사합니다. 예수님만이 나의 주요 그리스도 이십니다.
라고 기쁨과 감격으로 환호성을 지르는 상태를 -그 배에서 생수가 흘러난다고 표현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ㅎ님은 왜 창기와 세리 같은 죄인을 아무 조건도 없이 용서하실까요? ㅎ님의 공의는 어디 간 걸까요? 여기에 대속의 은혜가 깃들어 있는 것이지요. 우리 죄인이 ㅎ님의 저주와 심판을 받고 지옥가는 것이 마땅하지만, 구세주 IX께서 우리 죄를 몽땅 지시고 대신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심으로 ㅎ님의 공의를 대신 이루셨기 때문에 우리에게 죄값을 물으시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53장에서-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이것을 받아서 롬 5장10절에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곧 우리가 ㅎ님과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이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ㅎ님으로 더불어 화목 되었은즉 화목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으로 인하여 구원을 얻은 것이니라.’
예수님의 죽으심의 역할과 부활의 역할을 구분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IX의 십자가 대속으로 우리 죄가 완전히 사해져서 ㅎ님과 화목 되었고, 그런 자에게 이어서 부활성령이 오심으로 ㅎ님의 자녀가 되는 온전한 구원이 완성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이 한 구절로 유월절과 오순절과 초막절이 성취되었음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유월절, 오순절, 초막절은 ㅎ님 구원의 삼박자(혹은 3단계)입니다. 이것이 실제 역사적으로는 유월절 이후 오순절이 50일 이후에 일어났고 오순절 성령 강림은 ㅎ님의 택하신 백성들에게 즉시 임하는 초막절이기에, 전체적으로는 유월절에서 오순절의 성령강림은 50일 걸렸지만 이것이 우리 성도에게 적용되는 것은 동시에 일어나는 사건입니다.
다시 말하면, 내가 성령을 받은 즉시 깨달아 알게 되는 것이, 아하, 2천년 전에 IX가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 할 때 우리와 함께 죽고, 함께 장사되었고, 함께 부활한 거로구나를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게는 유월절, 오순절, 초막절이 동시패션으로 임한 놀라운 ㅎ님의 구원사역임을 깨닫고 감격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유월절 없는 오순절은 있을 수 없고, 유월절 없는 초막절도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IX의 십자가 피 공로로 성도의 구원이 성취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십자가상에서 ‘다 이루었노라’ 선언하시고 영혼이 떠나신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을 위해 창세전부터 예정하신 ㅎ님의 뜻을 십자가를 통해 완성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자기의 구원을 위해 할 일이 전혀 없습니다.
그럼 왜 ㅎ님은 인간 우리로 하여금 스스로 노력해서 구원을 쟁취하라고 아니하시고 굳이 당신의 독생자를 죽이시는 방법으로 우리에게 구원을 선사하시는 걸까요? 왜지요? 이게 아주 중요한 대목입니다. 한마디로 인간은 죄로 죽었기에 ㅎ님의 선과 의를 행할 수 없는 존재가 된 것입니다. 이것을 엡2장에서 인간의 영적 현주소를 죄와 허물로 죽어 사단에 속한 자요, 본질상 진노의 자식(무엇을 해도 저주의 대상)이라고 합니다.
이게 ㅎ님이 보시는 인간상입니다. 신앙의 출발선은 여기서부터 해야 합니다.
죄로 죽어서 마귀에게 속한 더러운 자요, ㅎ님의 말씀을 도저히 지켜낼 수 없는 무능과 무력함과 무가치한 자라는 것을 인식하는데서 구원이 시작된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인간은 도저히 고쳐 쓸 수 없는 존재입니다. 자동차로 말하면 고장난 부분을 수리해서 쓸 가능성이 전혀 없는, 완전히 박살나서 폐차장으로 가야하는 존재라는 말입니다. 정비소가 아니라 폐차장에 왔는데 벤츠니 티코니 구분할 필요가 있나요? 다 고철 덩어리인걸요.
그런데 인간들은 자신들을 그래도 고쳐 쓸 수 있는 차도 여기고 있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얼마든지 훈련하고 노력하면 다시 제네시스가 되고 벤츠가 될 수 있다고 여깁니다. 나는 티코가 아니라고 자존감에 불타서 날마다 더 좋은 신분으로 상승하고자 동분서주하는 게 인간입니다. 사회에서도 그렇고 교회에서도 그렇습니다. 이방인이나 교인들이나 다 마찬가지로 자기 가능성을 발동시키며 내일에 대한 기대와 희망에 부풀어 사는 자들입니다. 정말 ㅎ님도 모르고 성경도 모르는 소경들이지요.
그렇다면 ㅎ님의 시각으로 보여지는 인간상을 무엇일가요?
렘13:23~ 구스인이 그 피부를, 표범이 그 반점을 변케할 수 있겠느냐? 할 수 있을진데, 너희도 선을 행할 수 있으리라(인간은 도저히~ 선을 행하지 못한다는 반어법)
렘17:9~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이 사람의 마음이라. 이를 누가 알랴마는..(ㅎ섭리)
창6장,8장~ 사람이 어려서부터 그 마음의 생각에서 나오는 계획이 항상 악할 뿐이다.
- 그렇지요? 구제불능의 존재들, 그래서 심판받고 지옥가야 마땅한 본질상 진노의 자식들
롬3장에서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선을 행하는 자도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저희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베풀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계속 이어짐)
*프랑스의 신학자, 철학자, 과학자(파스칼이 팡세에서- 나는 의인, 위인, 성자 이 세 단어를 믿지 않는다. 이 땅에는 오직 한 가지 종류의 사람만이 존재한다. 모든 사람은 죄인이다.)
아마도 파스칼이 이런 것을 깨달은 것은 성령이 임했기 때문일 것임(인간 스스로는 불가능)
그렇습니다. 성령이 임하지 않고는 인간은 자기 주제를 모릅니다. 그래서 자기 행함으로 ㅎ님께 의롭다고 여김 받으려고 쉴 새 없이 무거운 짐을 지고 온갖 율법 행함에 열을 올리고, 여타 반듯한 삶을 구현한다고 동분서주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죄가 죄를 낳을 뿐이지 더러운 그 마음이 결코 깨끗해지지 않습니다. 방법은 오직 하나 무엇이지요?(IX의 십자가 대속)
그렇다면 왜 ㅎ님은 인간을 이렇게 스스로 빠져 나올 수 없는 죄의 감옥에 가두어 두셨나요?
이 비밀 아는 게 구원의 문을 여는 가장 중요한 Key 입니다(지금 천기누설을 선포...)
모든 사람을 죄의 감옥에 가두어 두고(거기는 마귀가 지키는 철옹성 감옥이라서 탈출 불가)
거기서 택한 자들을 끄집어내되 IX를 믿는 방식으로 죄사함을 주시는 오직 하나의 길입니다.
즉, 십자가 복음이라는 은혜와 사랑으로만 구원시키심으로 그 은혜를 세세토록 찬양케 하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롬11:32~33> 읽고,
엡1.6절~ IX를 통해 거저 주신 구원에 감격해서 그 은혜의 영광을 찬미케 하려는 것
사43:21~ 이 백성을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
그래서 골2:16절에, 만물이 예수님에 의해 예수님을 위해 창조되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의 구원이 궁극적으로는 IX에 의한 IX를 위한 창조라는 말입니다.
그렇기에 인간의 행함이라는 공로는 단 1도 가미될 수 없습니다. 이것을 아는 자가 성령을 받은 자이고 구원 받은 자입니다.
그러나 성령을 받지 않은 천연적인 모든 인간은 자기 가능성에 의미와 가치를 두고 살아들 갑니다. 그들의 대표가 바로 유대인과 바리새인들 이었습니다. 이들도 성경을 보며 ㅎ님의 이름을 부르지만 인간 자기가 죄로 죽은 자요, 더러운 자요, 본질상 진노의 존재인 것을 전혀 모릅니다. 그런 자들이 지금 예수님을 보고 ‘갈릴리에서 무슨 그리스도가 나오냐?’ 라고 주님을 부정하고 있는 장면입니다. 요2(나다나엘이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요7:40~44> 읽고,
예수님에 대해 의견이 분분 합니다. 누구는 선지자 혹은 그리스도로 말하고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예수가 그리스도가 아닌 이유'로 내세우는 것이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성경이었습니다. 자신들이 알고 있는 성경을 가지고 예수님을 부인하는 아이러니한 일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그들은 미가서 5장을 근거로 예수는 이에 부합한 자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미가서 5:2절)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태초에니라"는 말씀을 보면 분명 그리스도는 베들레헴에서 나옵니다. 그의 근본은 상고에 태초에니라고 말한 것을 보면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는 ㅎ님으로서 하늘로부터 오시는 메시아, 곧 그리스도를 의미함을 알 수 있습니다.
마2:2절에도 보면, 동방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와서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뇨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고 합니다. 이 말을 듣고 헤롯 왕이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을 모아 그리스도가 어디서 나겠는지 묻습니다. 그때 그들 역시 미가 선지자의 예언을 말하면서 유대 베들레헴이라고 합니다. 이것을 보면 그리스도가 베들레헴에서 난다는 것은 유대인들이 예로부터 가지고 있던 성경지식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정말 그리스도가 베들레헴에서 태어난 것을 안다면 그들이 예수를 왕으로, 그리스도로 대접을 할까요? 아니었지요. 그리스도가 베들레헴에서 난다는 것을 알았으면서도 동방에서 온 박사들이 경배하러 왔는데 헤롯 왕과 예루살렘 종교지도자들은 오히려 예수님을 죽이려고 합니다.
만약 그들이 예수를 그리스도로 인정을 하게 되면, 자신들이 그동안 누려오던 왕의 권세와 종교지도자로서의 기득권이 흔들리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자신들을 지키기 위해서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인정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죄인된 인간의 영적인 현주소입니다. 성경도 ㅎ님도 십자가도 다 자기 욕심을 채우는 수단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런데 왜 미가 선지자는 베들레헴에서 난다는 예언을 했는데, 정작 그리스도로 오신 예수님은 나사렛 사람으로 불리워지는 것입니까?
(마2:22-23절)에 보면 이런 말씀을 합니다. "그러나 아켈라오가 그 부친 헤롯을 이어 유대의 임금 됨을 듣고 거기로 가기를 무서워하더니 꿈에 지시하심을 받아 갈릴리 지방으로 떠나가 나사렛이란 동네에 와서 사니 이는 선지자로 하신 말씀에 나사렛 사람이라 칭하리라 하심을 이루려 함이러라"
헤롯 왕과 종교지도자들의 살수를 피해 잠시 애굽으로 피신해 있다가 다시 유대로 갈 때는 변방의 나사렛으로 가서 살게 된다는 내용입니다.
여기서 ‘나사렛 사람~’ 에서 나사렛의 의미를 알아야 합니다. 나사렛이란 히브리어로 ‘순, 싹’이라는 뜻을 가집니다. 즉, 나사렛은 강함과는 반대의 뜻을 갖는 존재감이 거의 없는 연약함을 의미하며 좀 더 덧붙이자면 멸시와 천대, 조롱과 경멸의 뜻을 가지는 말입니다. 나사렛은 아주 비천한 자들이 모여 살던 빈민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나사렛과 유사한 용어가 또한 갈릴리입니다. 갈릴리 역시 ‘오물에서 뒹굴다’라는 의미를 가지는 말로서 ‘흑암 또는 사망의 처소’라는 뉘앙스를 내포 합니다.
<마4:12-16절> “12 예수께서 요한이 잡혔음을 들으시고 갈릴리로 물러가셨다가 13 나사렛을 떠나 스불론과 납달리 지경 해변에 있는 가버나움에 가서 사시니 14 이는 선지자 이사야(사9장)를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15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과 요단 강 저편 해변 길과 이방의 갈릴리여 16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치었도다 하였느니라”
예수님에게 나사렛 혹은 갈릴리 출신이라는 별칭이 생긴 것은 우연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였습니다. 갈릴리는 흑암과 사망에 놓여 있는 자들의 상징이었습니다. 얼마나 무시당하였으면 이방의 갈릴리라고 합니까? 자신이 흑암과 사망에 놓여 있음을 아는 자들만이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알아 볼 수 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자 예수님을 갈릴리로 보내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게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 시키러 왔노라’ 말씀하신 겁니다. 누구의 구원자? (죄인들의...) 그러므로 나사렛 예수, 혹은 갈릴리 출신이라는 용어가 주는 메시지는 죄인들의 구세주로 오신 그리스도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는 말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예수님은 베들레헴 출신이 아닌 갈릴리 출신으로 세상에 등장하신 것입니다. 메시아가 베들레헴에서 나온다는 성경의 예언을 알고 있던 자들은 갈릴리 출신의 예수를 알아보지 못합니다. ㅎ님께서는 이렇게 세상이 그리스도를 알아보지 못하도록 안배하셨습니다.
이같이 성경은 비밀로 덮여 있습니다. 그래서 문자대로 보면 속에 감추어진 비밀을 알 수가 없기에 진리에 접근할 수가 없습니다. ㅎ님은 인간의 지혜로 그리스도를 알 수 있는 길을 완벽하게 차단해 놓으셨습니다. 어느 누구도 이 세상 지혜로 그리스도의 비밀을 깨달지 못하도록 가려놓으신 것입니다.
비유적인 부분을 한 군데 더 살펴보겠습니다.
(마2:14절) "요셉이 일어나서 밤에 아기와 그의 모친을 데리고 애굽으로 떠나가 헤롯이 죽기까지 거기 있었으니 이는 주께서 선지자로 말씀하신 바 애굽에서 내 아들을 불렀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동방박사들이 오면서 예루살렘 궁정의 헤롯을 만나서 정보를 주는 바람에, 헤롯이 아기 예수를 죽이려고 베들레헴에 군사를 보내게 되자, 이를 미리 천사가 알려주어서 이스라엘 국경을 넘어서 애굽으로 피신하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이 모든 일도 ㅎ님의 예정 속에서 이루어진 일이기에 ‘주께서 선지자로 말씀하신 바’라는 문구를 쓰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다시 의문을 갖게 되는데, 분명 요셉의 가족은 예수님과 함께 유대 땅을 떠나 애굽으로 피신 갔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애굽에서 내 아들을 불렀다’고 한 예언을 이루시기 위해서라고 말합니다. 애굽으로 갔는데 애굽에서 불러냈다는 말이 어떻게 예언이 이루어진 것입니까? 이것을 보면 선지자로 말씀하신 애굽은 비유이지 애굽이라는 실제 지명을 두고 한 얘기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유대 땅에서 나와서 애굽으로 갔습니다. 그것을 애굽에서 나온 것으로 말씀한다면, 결국 이스라엘의 유대가 애굽이라는 뜻이 됩니다. 예수님을 거부한 그곳이 곧 애굽(이방의 땅, 죽음의 세상을 상징)이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ㅎ님을 섬긴다는 유대교일지라도 IX가 없으면 사망의 처소라는 말입니다. 오늘날 기독교의 모습이 오버랩 되는 부분입니다.
계17~18장에도 세속화된 교회를 음녀교회 혹은 큰성 바벨론으로 부르며, 각종 더러운 영들이 모이는 귀신의 처소라고 폭로 합니다. 이런 모습이 우리에게는 너무도 잘 보이는데, 저들은 전혀 감도 못 잡고 있으니 참 아이러니한 일입니다.
이처럼 성경은 성경 문구만을 가지고 해석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리스도가 베들레헴에서 난다는 문구만으로 예수님이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자들은 성경의 의미를 모르면서 성경을 이용하고 있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요7:45-46> 7:45 하속들이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에게로 오니 그들이 묻되 어찌하여 잡아오지 아니하였느냐 7:46 하속들이 대답하되 그 사람이 말하는 것처럼 말한 사람은 이 때까지 없었나이다 하니
바리새인들이 하속들을 보내 예수를 잡아오도록 했습니다만, 군중들로 둘러 싸이셨기에 접근할 수 없었고, 할 수 없이 군중들과 함께 주님의 말씀을 듣게 됩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집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그들의 마음을 서서히 사로잡기 시작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붙들린 것입니다. 말씀에 붙들린 이들이 예수를 체포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상전의 명령에 불복종할 때 어떤 불이익을 당할지 알고 있으면서도 이들은 그냥 빈손으로 돌아온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의 말씀에 붙들린 자들의 공통된 모습입니다. 주님의 말씀에 붙들릴 때 나타나는 반응은 더 이상 손익계산을 하지 않는 자로 변화되어진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의 세계입니다. 더 이상 이 세상에 매이지 않는 자로 세워집니다. 말씀에 붙들린 새 피조물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행4:18-20절) 보면 “18 그들을 불러 경고하여 도무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 하니 19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여 이르되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20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하니”라고 말합니다.
말씀에 붙들리기 전 베드로와 요한은 종교 당국의 위협 앞에 두려워 다락방에 숨어 있었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성령이 임하고 주님의 말씀에 붙들린 자가 되었을 때 그들은 세상 어떤 권세도 두려워하지 않는 자들로 변화되었던 것입니다. 이들이 교회입니다. 이들은 그리스도의 음성만 따르는 자들입니다. 그래서 세상의 미움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하속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예수님의 가르침은 어떤 것이었을까요? 그때 그들이 들었던 예수님의 말씀은 그들이 지금까지 그 누구에게서도 들어보지 못했던 말씀이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었을까요?
지금까지 그들이 들어왔던 대제사장들이나 바리새인들의 가르침은 율법을 행함으로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있다는 가르침이었습니다. 이들의 가르침을 받고 있던 유대인들은 행함이라는 신앙생활의 늪에 빠질 수밖에 없었고, 그 결과 한 평생 마음의 쉼을 누리지 못하는 삶을 살아야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셔서 그러한 가르침이 구원의 길이 아닌 저주의 길로 인도하는 것임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마5:20절을 보면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즉 행함의 의로는 결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하속들은 이러한 가르침을 들어본 적이 없었습니다. 바리새인들로부터 늘 율법을 지키는 일에 힘쓰라는 가르침만 들어왔고, 그리고 율법을 지켜 행하는 경건한 삶의 본을 보이고 있는 바리새인들을 부러워하며 그렇게 살지 못하는 자신을 자책하며 살아왔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바리새인들의 의보다 더 나은 의를 소유하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게 된 것입니다.
하속들은 이러한 말을 지금까지 들어본 적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 안에서 자신들이 지금 예수를 체포해서 대제사장에게 끌고 가야 한다는 것이 더 이상 의미가 없어진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의 권세이고 하늘의 부르심의 능력입니다.
복음은 세상의 가르침과 하나도 겹치는 것이 없습니다. 복음이 말하는 것은 ‘하나님의 의’ 하나입니다. 복음의 세계에 ‘인간의 의’는 설 자리가 없습니다. 기독교 목사들의 입에서 이러한 복음이 선포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이 선포하는 복음의 가르침이나 바리새인들의 가르침이 하나도 달라 보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의’와 ‘인간의 의’가 공존하는 거짓복음을 선포합니다. 이것이 바로 십자가의 원수인 ‘다른 복음’ 입니다.
<갈1:7~10> 읽고 마침..
10절~사람을 기쁘게 하는 가르침이란 온갖 종교 행위로 ㅎ님을 섬기면 구원 받고 복도 받는다는 설교를 말 합니다. 그 결과는 저주(지옥 간다는 경고입니다.)
이처럼 사람의 행함에 가치와 의미를 부여해서 신자들의 충성 봉사를 부추기고 온갖 헌금을 유도하는 거짓 목사들의 헛된 교훈이 판을 치기에, 순수한 십자가 복음은 찾아보기 힘듭니다.
따라서 지금이야말로 ㅎ님의 심판의 때가 임박한 종말의 시간이기도 합니다.
이 절박한 때에 십자가 복음을 붙잡고, 주의 재림을 소망하며 사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소원 합니다.
...
*출처: 사랑과 복음교회 | - Daum 카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