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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한배 탄 사람들 운명을 좌우하는 자>의 줄거리:
라틴어에서 운명은 무슨 피할 수 없는 팔자 같은 것이 아니라 신에 의해서 '말하여 진 것'이라는 의미가 강합니다. 즉 신의 생각이 겉으로 '이야기 된 것'이지요. 같은 상황을 공유해야 하도록 한배를 타고 있는 사람들 전부에 대한 하나님의 생각을 좌우하는 한 사람이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자기 자신에 대한 하나님의 생각을 시시각각 받는 사람입니다.
한배 탄 사람들 운명을 좌우하는 자
(사도행전 27:23~44)
42. 군인들은 죄수가 헤엄쳐서 도망할까 하여 그들을 죽이는 것이 좋다 하였으나
43. 백부장이 바울을 구원하려 하여 그들의 뜻을 막고 헤엄칠 줄 아는 사람들을 명하여 물에 뛰어내려 먼저 육지에 나가게 하고
44. 그 남은 사람들은 널조각 혹은 배 물건에 의지하여 나가게 하니 마침내 사람들이 다 상륙하여 구조되니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한배 탄 사람들 운명을 좌우하는 자>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한배 탄 사람들 운명을 좌우하는 자’
본문은 사도 바울이 탄 배가 이주 이상의 표류 끝에 멜리데라는 작은 섬에 걸리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유라굴로 광풍 속에서 절체절명의 위기를 겪은 후 사도 바울에 대한 하나님의 섭리를 통하여 구원을 받은 이야기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오늘 제목에서 언급한 운명(運命)이라는 말은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일반적 의미와는 조금 다릅니다. 우리는 보통 사람의 힘과 의지로는 피할 수 없는 필연적 팔자와 같은 것을 운명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라틴어에서 운명을 의미하는 파툼(fātum)은 “말하다”라는 동사인 파리(fārī)의 수동분사형태입니다. 직역해보면 “말하여진 것” 혹은 “이야기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신앙적 관점에 대입해보자면 운명이란 하나님에 의해서 말하여진 하나님의 생각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운명은 하나님의 생각이고 하나님의 말씀이며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의 생각이 겉으로 드러나는 것이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이로부터 제목의 의미를 이해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한배 탄 사람들 운명을 좌우하는 자”라는 제목은 한배를 탄 사람들에 대한 하나님의 생각을 한 사람이 좌우한다는 의미입니다. 이 한 사람에 의해서 운명공동체에 속한 사람들의 생각이 결정됩니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들에 대한 하나님의 생각을 결정할 수 있다는 말은 다소 의아하게 들릴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가 지난 금요일에 다루었던 본문의 마지막을 다시 한번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23~24절을 보면 “내가 속한 바 곧 내가 섬기는 하나님의 사자가 어제 밤에 내 곁에 서서 말하되 / 바울아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항해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하였으니”라고 하였습니다. 바울은 이 말씀에 근거하여 26절에서 “그런즉 우리가 반드시 한 섬에 걸리리라 하더라”고 배에 탄 사람들에게 말하였습니다.
바울의 말대로 유라굴로 광풍에 속수무책으로 표류하던 배는 무려 800km나 서쪽으로 밀려와서 멜리데라는 작은 섬에 걸리게 됩니다. 드넓은 지중해에서 작은 섬에 걸릴 확률이란 기적과도 같은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섬에 상륙하는 과정에서 배가 다 파손되었고 모든 사람이 바다에 뛰어들어야 하는 상황이 벌어집니다. 헤엄을 칠 줄 아는 사람은 수영을 해서 육지에 도달해야 했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배의 파편들을 붙들고 육지에 도달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위급한 상황에서도 276명이 한 명도 목숨을 잃지 않고 육지에 도착하였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염두에 두어야 할 말씀은 24절의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항해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하였으니”라는 부분입니다. 사도 바울과 함께 배를 타고 있던 사람들을 바울에게 주셨다는 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일까요?
상황만 보면 사도 바울 때문에 다른 사람들도 살아났다는 느낌이 들 것입니다. 이제 정확하게 어떤 식으로 하나님의 뜻이 작용하는지에 대해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평생의 모든 순간에 대해 하나님은 살아서 알아서 사랑해서 앞서서 생각을 갖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생각하지 않는 사람은 세상에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생각을 받아서 사는 사람도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생각을 받으려면 시시각각 내 안에서 떠오르는 나의 생각을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죽여야 합니다. 그런데 십자가 생활화를 한다는 우리들 자신을 살펴보아도 온전하다고는 말하기 어려울 때가 많습니다. 어느새 삶의 문제들을 생각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언제나 생각의 파도에 휩싸여 있는데 이로부터 나타나는 문제가 있습니다. 나를 향해 갖고 계신 하나님의 생각이 나의 인격을 통과하면서 이 땅으로 내려오지 못한 채 막히고 방해받고 무산되어 버립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의 주권이 포기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주권은 나를 향하신 창조적 생각을 이루시려는 것 대신에 하나님의 생각을 받아서 사는 사람이 되도록 교정하는 형태로 나타나게 됩니다. 간단히 말해 나를 깎고 다듬어 가시게 됩니다. 더더욱 하나님께서 포기하시지 않는 선민이라면 깎고 다듬는 아픈 과정은 계속될 것입니다.
예를 들어 삶의 현장에서 모든 순간에 쉬지 않고 기도하면서 시시각각 삶에 대한 하나님의 생각을 받아서 살아가는 사람이 있다고 해보겠습니다. 이 사람은 구체적으로 어떠한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일까요? 이 사람이 계속해서 하나님의 생각을 받아들일 때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을 향해 갖고 계신 독특한 방식이 있습니다. 이것이 본문에서 이야기하는 바입니다.
하나님의 뜻과 생각을 받아서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 사람과 운명공동체인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필연적으로 맺어진 관계에 속한 모든 사람들을 이 한 사람에 대한 계획 속에 포함시키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생각을 받아들이는 사람을 발견하셨을 때에 주권을 행사하시는 방식입니다. 24절에 “…너와 함께 항해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라는 말에는 바로 이러한 의미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사도 바울에게 한배를 타고 있던 나머지 275명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본문에 기록된 멜리데 섬에 도착하여 모든 사람이 생존하게 되는 사건은 바로 이러한 하나님의 방식이 구체적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십자가 작정을 이루기 위해 몸부림치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생각만을 받기 위하여 쉬지 않고 기도하는 동안에 자기 생각은 죽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사도 바울을 로마의 황제 앞까지 인도하시려는 생각을 갖고 계셨습니다. 여기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사도 바울과 한배를 탄 275명의 사람들입니다. 물론 이들 중에는 사도 바울처럼 시시각각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생각을 받아들이고자 했던 사람은 없었습니다. 동행하고 있던 누가와 데살로니가 사람 아리스다고를 제외한다고 할지라도 나머지 273명 중에 하나님의 생각을 받아서 살려고 했던 사람은 없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바울과 한배를 탔다는 이유에서 모두 생존합니다. 로마까지 사도 바울을 이끄시려는 하나님의 생각 속에 275명이 모두 포함되었던 것입니다. 앞서 운명이란 하나님 속에서 이야기된 것이고 하나님께서 드러내 말씀하신 것으로서 즉 하나님의 생각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사도 바울을 로마로 인도하시려는 하나님의 생각 속에 275명에 대한 하나님의 생각도 포함되었던 것입니다. 그 결과 유라굴로 광풍이 대작하는 가운데 한 사람도 죽지 않고 다 살아남아 로마에 도착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이끄시는 방식을 응용해보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홍길동이라는 청년이 대기업에 말단 직원으로 입사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대기업에는 회장님으로부터 시작하여 로비의 안내 직원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없습니다. 신입사원 홍길동 말고는 하나님의 생각을 시시각각 받으며 살아가고자 하는 사람이 없는 상태인 것입니다. 한편 하나님께서는 홍길동을 이 회사에서 20년간 일하게 하시려는 계획을 갖고 계십니다. 이제 이 회사는 20년간 신입사원 홍길동과 운명공동체가 된 것입니다. 홍길동을 이 회사에서 20년간 일하게 하고자 하셨으니 앞으로 이 회사는 하나님의 주권 안에 20년간은 절대로 망하지 않고 이끌려가게 됩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하나님께서 누구보다 우선하시는 대상이 바로 홍길동이라는 한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주권을 행사하실 때에는 하나님의 생각을 받아들이는 한 사람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회장도 전무도 상무도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지 않는 상태이기에, 신입사원 홍길동이 하나님의 뜻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는 홍길동이라는 한 사람에 대한 생각 속에 회사 전체에 대한 생각을 포함시키게 됩니다. 믿지 않는 회장이나 전무나 상무를 위해서 회사를 이끌어 가시는 것이 아닙니다. 홍길동이라는 신입사원 한 사람 때문에 회사 전체를 이끌어 가시는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광경이 사도 바울이 탄 배에서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배 안에는 여러 직급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직급으로 따지자면 사도 바울은 구금된 채로 호송되고 있는 미결수로 준 죄인이었습니다. 배 안에서 일어나는 어떠한 일에도 결정권을 가질 수 없는 가장 낮은 직급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 한 사람이 하나님의 생각을 받아들였고 누가와 아리스다고를 제외하고서라도 나머지 273명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사도 바울과 한배를 탄 273명은 운명공동체로써 사도 바울에 대한 하나님의 생각 속에 끌려가게 되었던 것입니다.
성경에서 이러한 모습을 보여준 대표적 예는 요셉입니다. 요셉은 야곱의 열한 번째 아들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야곱과 열두 아들을 애굽으로 이주시키려는 계획을 갖고 계셨습니다. 애굽을 울타리로 삼아서 야곱의 열두 아들로부터 시작되는 이스라엘을 어엿한 민족으로 번성시키고자 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러한 계획을 이루시고자 하실 때 중심이 된 것은 열한 번째 아들 요셉이었습니다. 요셉이 꿈을 꾸었다는 것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생각을 궁금해하고 하나님의 생각을 받는 자였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요셉을 선택하셔서 애굽으로 보내십니다. 그리고 요셉은 바로의 신임을 얻어 애굽의 총리자리까지 이르게 됩니다. 창세기 41장 40절을 보면 “너는 내 집을 다스리라 내 백성이 다 네 명령에 복종하리니 내가 너보다 높은 것은 내 왕좌뿐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요셉이 애굽으로 왔을 때 보디발 장군의 집에서와 마찬가지로 당시의 초강대국이었던 애굽에서 하나님의 생각을 시시각각 받아들이던 사람은 요셉 한 사람뿐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요셉 한 사람을 통해서 이스라엘을 하나의 민족으로 번성하게 하시려는 계획을 갖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그 계획 속에서 애굽이 포함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때가 되자 모세를 통하여 애굽을 빠져나오게 하시는 출애굽의 역사를 일으키십니다. 하나님께서 사도 바울에게 275명을 주셨다면 요셉에게는 애굽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이끄시는 방식이 이와 같습니다.
이러한 내용을 보면 하나님께서 특정한 사람을 편애하신다거나 불공평하다는 생각이 들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쓰임 받는 사람들을 빼놓고는 다 들러리에 불과한 것인가 하는 생각을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실상이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생각을 시시각각 들을 수 없다면 운명공동체로서의 들러리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것이 개인의 구원과는 별개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이 세상 안에서 하나님의 생각이 어떻게 적용되는지를 말씀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생각이 적용될 때에 같은 상황을 마주하는 운명공동체일 경우에 하나님께서는 스스로 생각하지 않고 하나님의 생각을 받아들이는 자를 운명공동체의 중심으로 삼으십니다. 그리고 같은 상황을 공유하는 가족이나 동료들을 비롯한 운명공동체적 관계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중심으로 삼으신 한 사람의 생각 속에 포함시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편애나 불공평이 아닙니다. 이 문제는 하나님께서도 어쩔 수가 없으십니다. 자발적으로 하나님의 생각을 받으려 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생각을 주실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보다 앞서 생각하고 계신다는 사실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상태에서는 언제나 나의 생각이 우선됩니다. 그리고 스스로 내린 결론을 성취시키기 위해 하나님을 찾습니다. 이것은 개신교나 천주교인이라고 할지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인정한다면 삶에 대한 나의 생각을 주장할 수는 없습니다. 살아서 알아서 사랑해서 앞서서 나를 생각하시는 하나님을 우선시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이 안중에 없습니다. 언제나 이미 생각 중인 나를 봅니다. 하나님께서 아무리 좋은 생각을 가지고 계실지라도 자신의 생각을 주장하는 동안에는 하나님의 생각은 무시됩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천신만고 끝에 나의 생각을 죽이고 하나님의 생각을 듣는 사람을 발견하신다면 그 사람을 사용하실 수밖에 없습니다. 그 사람과 관계된 모든 사람들과 일들을 그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생각에 포함시켜 이끌어가시게 됩니다.
사도 바울과 같은 배를 탄 275명은 우연히 유라굴로 광풍에 휩쓸린 것이 아닙니다. 이들은 사도 바울 한 사람에게 임하시는 하늘 바람에 휩쓸려 로마까지 함께 가게 됩니다. 이 275명은 진정한 의미에서 배가 아닌 사도 바울을 타고 있었습니다. 모든 사람은 세상에 가라앉는 배였으나 사도 바울만이 이 세상에 가라앉지 않는 배였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십자가 작정을 한 사람이었습니다. 십자가 작정은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운명공동체가 된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땅에 오셔서 버림당하시고 죽으신 예수님을 부활시키시고 승천시키시고 보좌 우편까지 이끄시는 계획을 갖고 계셨습니다. 마치 사도 바울을 로마의 황제 앞까지 이끄시고자 하셨던 것과 같습니다. 사도 바울은 바로 이 십자가를 붙잡고 예수님과 운명공동체가 되었습니다. 그럼으로써 예수님에 대한 하나님의 생각 속에 사도 바울이 포함되었습니다. 사도 바울과 한배를 탔던 사람들이 멜리데 섬에 올라갈 수 있었던 것처럼, 사도 바울의 마음은 예수님과 함께 하늘로 올라가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마음이 세상에 빠지지 않고 하늘로 올라가 구원을 받게 되는 비결입니다.
이 세상에서는 예수님 한 분만이 스스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선언하시고 아버지의 생각만으로 사셨습니다. 이 예수님과 운명공동체가 될 수 있는 길이 십자가입니다.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함께 죽었음을 고백함으로써 운명공동체가 되면 예수님에 대해 갖고 계신 하나님의 생각 속에 나도 포함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하늘 보좌 우편까지 가실 때에 나의 영인 마음도 함께 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구원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마음이 하늘로 올라간 사람이었습니다. 더 이상 이 세상에 대해서는 기쁨과 만족과 행복을 추구하고자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의 생각이 들리기 시작하였고 하나님의 생각만을 따라서 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운명을 좌우하는 사람이 됩니다.
대한민국의 운명을 쥐고 있는 것은 대통령도 아니고 국회의원도 아닙니다. 팔도의 도지사도 아니고 대법원의 판검사들도 아니고 검찰총장도 아닙니다. 재벌들도 아니고 대학교수들도 아닙니다. 그렇다면 민중들이야말로 대한민국의 운명을 쥐고 있는 것일까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어떤 민중의 힘으로도 대한민국의 운명을 좌우하지 못합니다. 노조의 힘으로도 안 됩니다. 그렇다면 개신교의 목사님이나 천주교의 신부님이나 불교의 스님 같은 종교인들이 대한민국의 운명을 쥐고 있을까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또는 미국이나 러시아나 중국 같은 강대국이 그럴 수 있을까요? 이 역시 틀렸습니다.
대한민국의 운명을 쥐고 있는 사람들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십자가 생활화를 하는 여러분입니다. 여러분이 주부라고 해서 대한민국의 운명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한 사람은 전라도 여수에서, 한 사람은 경상도 창녕에서, 한 사람은 강원도 원주에서, 한 사람은 경기도 파주에서 오직 하나님의 생각만을 받기 위해 쉬지 않고 기도합니다. 그러면 그 네다섯 사람의 주부가 대한민국의 운명을 좌우하게 됩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께서 40~50년간 대한민국을 이끄시려고 결정하셨다면 이 기간에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주부 몇 명에 대한 하나님의 생각 속에 대한민국 전체가 포함되게 됩니다. 이 주부들에 대한 하나님의 생각이 이루어질 수 있는 환경을 만드시기 위하여 대통령이나 국회의원을 결정하실 것이고 재벌들과 기업들을 결정하실 것이고 나라의 모든 일들을 결정해나가실 것입니다. 이것이 믿어지지 않는다면 창조주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이고 하나님의 주권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생각하심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이 100명일지라도 각자에 대한 하나님의 독특한 생각이 있습니다. 이 100명이 속한 운명공동체 몇 번만 거치다 보면 관계의 영역이 대한민국 전체를 가득 메우게 됩니다. 100명 각자에 대한 하나님의 생각들이 조화를 이루는 것은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해나가실 것입니다. 거창하게 나라를 걱정하고 사회의 변혁을 주장하지 않더라도 삶의 문제에 대해 하나님의 생각만을 받기 위하여 십자가 작정을 하고 몸부림치며 살아갈 수 있으면 됩니다. 그러한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생각 속에는 공동체로 묶여 있는 주변 모든 사람들의 운명이 포함되어질 것입니다. 그 사람만이 세상이라는 바다에 가라앉지 않는 배의 역할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영이기에 마음이 세상을 떠나 하늘로 가는 것이 영의 구원입니다. 그리고 남은 삶을 하나님의 생각만을 받아서 살아가는 것이 육의 구원입니다. 세상에 가라앉지 않는 사람이기에 운명공동체로 묶인 모든 사람들을 끌고 갈 수 있습니다. 세상에 같이 가라앉아서는 꺼낼 수가 없습니다.
자기의 생각을 끊임없이 십자가에 못박고 오직 하나님의 생각만을 받아서 살려는 사람이 속한 운명공동체는 시쳇말로 대박이 난 것입니다. 한 사람으로 인해 영의 구원뿐만 아니라 육의 구원까지도 기회를 제공받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과 함께한 여정은 로마에 도착함으로써 끝나고 이들은 뿔뿔이 흩어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결국 사도 바울이 로마로 가서 말씀을 전함으로써 로마는 313년에 기독교 국가가 됩니다. 이들의 자손들이 그리스도인의 국가에서 태어나고 살게 되는 결과가 나타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작게는 가정으로부터 시작해서 소속과 단체, 크게는 대한민국이 여러분과 같은 배를 탄 운명공동체입니다. 이렇게 함께 묶여 있는 사람들을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고의 일은 개인적으로 당면한 일들에 대해 하나님의 생각만을 받는 것입니다. 이것을 위하여 사도 바울처럼 십자가 작정을 하고 나의 생각을 죽이기 위하여 몸부림칠 때 하나님의 생각이 전달될 것이며, 나와 운명공동체로 묶인 한배 탄 모든 사람들의 운명을 좌우하면서 구원의 기회를 제공하게 될 것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오늘도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운명공동체가 되기를 원합니다. 예수님을 향해 갖고 계시는 하나님의 생각 속에 나의 영이 포함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이 땅에서는 나와 운명공동체로 묶인 모든 사람들에게 영의 구원과 육의 구원을 위한 기회제공자들로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