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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호루 현판 기문 산책
이원걸(문학박사)
1) 이색 찬서[李穡讚序] 이색李穡
지정至正 신축년[1361] 겨울에 조정이 남쪽으로 복주에 파천했다가 군사를 출동시켜 북쪽으로 몽고군을 토벌하고 이듬해 서울에서 도적들을 섬멸하였다. 이에 복주를 안동대도호부로 올렸으니 이는 그 옛날을 회복함이며 기쁨을 기록한다.
병오년[1366] 겨울에 공민왕께서 서연書筵에 계시다가 ‘영호루’ 세 글자를 크게 써서 정순대부正順大夫 상호군上護君 신臣 흥경興慶에게 교지를 전하도록 명하셨고 봉익대부奉翊大夫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 신臣 사복思復을 불러 그에게 대면하여 글씨를 하사하셨다.
당시 안동의 판관 조봉랑朝奉郞 신臣 자전子展이 아전들과 의논하여 누대의 제도가 소박하여 임금님의 하사품을 벌여놓지 못할까 두렵다고 하고 이에 날을 정하여 강물 가까이에다 더욱 넓히니 그 제도가 더욱 크고 전망이 확 트였다.
신 사복은 신에게 그 까닭을 갖추어 말하고 또한 기문을 써달라고 청하였다. 신은 말하기를 “영호루의 기문을 쓰는데 글재주는 없지만 나 스스로 느낀 바가 있다. 주상께서 복주에 계실 때 일찍이 이 누대에 납시었는데 신은 모시는 신하로 실제로 따라갔다. 그러나 당시처럼 경계하던 마음은 게을러지고 또 잊혀진 지 오래되었다. 아, 임금님께서 안동을 못 잊어 돌아보심이 여기에까지 이르셨는데 신이 어찌 마음에 부끄럽지 않겠는가?” 이에 고루함을 잊고 손을 올려 절하고 머리 숙여 절하며 찬한다.
저 신령스런 은하수
성인께서 법칙을 지으셨네.
마음과 글자의 획이
한결같이 바르고 곧았도다.
붓이 손에서 움직이니
문장이 하늘로부터 이루어졌네.
신의 변화와 묘한 조화
그러한 이치를 알지 못하겠네.
산 섶의 가지가 꺾여지니
저 학자들이 곤궁해졌네.
엎드려서 감탄하고 놀라니
구슬 같은 땀이 흘러내리네.
오직 이 안동 땅은
우리 모두 다시 흥한 곳일세.
세 큰 글자를 쓰니
거나라를 잊지 말아야 함을 보이심일세.
햇볕이 가운데 있으니
용이 와서 둘렀네.
하늘을 오르고 내리고
물새가 여기에 비치네.
구름과 산천이 경관을 고쳤으니
산과 시냇물 한 층 더 수려하네.
부로들이 머리를 조아리며
만세수를 올리네.
평안함과 위태함은
환난 생각하면 필경 번창하리라.
복주 사람을 사사로이 하지 말지니
세상의 상도를 지켰도다.
세상을 지킬 뿐만 아니라
나라에 충성하길 권했다네.
신이 절하옵고 찬을 지어
신하들에게 아뢰겠나이다.
이색의 부친은 찬성사 이곡이다. 그는 명문가 후손으로 당대 명문 이제현의 문인이다. 그는 원·명 교체기 때 천명이 명나라로 돌아갔다고 보고 친명정책을 지지하였다. 또 고려 말 신유학이 수용되고 척불론이 대두되는 상황에서 유교의 입장을 견지하여 불교를 이해하고자 하였다. 불교를 하나의 역사적 소산으로 보고 유·불의 융합을 통한 태조 왕건 때의 중흥을 주장했다. 불교의 폐단을 시정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척불론을 강조하였다.
이색의 문하에서 고려왕조에 충절을 지킨 명사와 조선왕조 창업에 공헌한 사대부들이 많이 배출되었다. 정몽주·길재·이숭인 등 제자들은 고려왕조에 충절을 다하였으며, 정도전·하륜·윤소종·권근 등 제자들은 조선왕조 창업에 큰 역할을 하였다. 이색·정몽주·
길재의 학문을 계승한 김종직·변계량 등은 조선 초기 성리학의 주축을 이뤘다.
영호루 역사를 개관하면서 공민왕의 몽진과 금빛 게판 하사와 중수 과정과 기문 작성 동기를 설명하였다. 공민왕을 후대한 안동 고을 인심의 후덕함과 안동대도호부의 영광스럽던 과거를 회상하면서 그러한 정신을 후세에 이어가길 축원하였다.
2) 김종직 기[金宗直記]
영호루는 영가의 이름난 누대로 주변 강과 산의 경관이 뛰어나다. 규모는 진주의 촉석루나 밀양의 영남루에 양보해야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낙동강에 세워진 상산의 관수루나 일선의 월파정은 이 영호루와는 우위를 다툴 수 없다.
고려 공민왕이 홍건적을 피해 남쪽으로 가시다가 안동 고을에서 어가를 멈추어 이 누대에 노닐면서 즐기다가 환도하신 뒤에 서연에 납시어 손수 누대의 현액으로 큰 글씨 세 글자를 써서 하사하셨다. 이 고을 사람인 통판 신자전이 누대의 제도를 더 크게 하여 현액을 걸었는데 현재까지 지붕과 마룻대 사이에서 빛을 발하고 있다.
이는 촉석루나 영남루에는 없는 것으로 신자전이 누대를 지은 지 이제 백여 년이 넘는다. 그동안 수령들이 영호루의 기둥과 서까래, 마룻장과 헌함의 썩고 흔들리는 것이나 지붕의 기와와 계단의 벽돌 떨어진 것, 뚫어진 것을 여러 번 수리했다.
그러나 사람의 마음은 한결같지 않다. 인사를 곡진하게 닦는 체하는 자는 윗사람에게 뇌물을 바치고 문안을 드리기에 급급하고 한갖 규모만 지키는 자는 장부와 문서, 회계를 다루느라 겨를이 없다.
나와 동갑인 제안후 김질이 어사중승으로부터 이 고을의 수령으로 오더니, 두어 해가 채 못되어 정치는 밝게 드러나고 사람들은 화합하며 해마다 풍년이 들었다. 토지와 노비에 대한 소송은 온 도내의 사람들이 감사에게 진정서를 내어 김질에게 가서 판결받기를 원하였다.
뒤에 매번 양편을 판결할 때에는 아침 일찍부터 밤늦게까지 신중히 따져보고 결정하니 승소한 자나 패소한 자 모두 만족해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판결료로 받은 돈과 베가 창고에 차고 넘쳤다. 이에 김질이 아전과 백성들에게 의논하여 이 누대를 중수하기로 결정하였다.
드디어 무신년 3월 모일에 일없이 놀고 있는 사람들을 불러 모으고, 이방과 호방에게 교대로 감독케 하였다. 터는 옛 그 자리에 잡고 면적의 척수는 다소 더하거나 감한 것이 있다. 높이와 넓이는 종래의 것보다 3분의 1을 더하였다. 붉고 희게 장식하는 것과 금빛을 올린 현액은 빛나고 밝아서 모양을 바꾸었다. 두어 달을 넘어 공사가 완성되니 온 고을 백성들은 늙은이나 어린이 할 것 없이 모두 쳐다보며 놀라워하고 기뻐했다.
이듬해에 김질이 나에게 편지를 보내 ‘기문을 작성해 주시기 원합니다.’라고 하였다. 나는 역량을 스스로 헤아리지 않고 담암 백문보, 목은 이색 두 분 노 선생이 지은 기문 사이에 이름을 나란히 남기게 된 것을 기뻐하여 붓을 잡고 감탄하여 말하기를, “김후의 정치는 청렴하고 공명하며 까다롭지 아니하고 법도로써 모든 일을 처리한다. 인사를 곡진하게 하는 체하는 자는 개나 돼지처럼 비열하며 규모만을 지키는 자는 사환처럼 하는데 비해 김질은 아전과 백성을 사랑하고 공경한 것이 하며 중국 한 나라의 명관으로 발해 태수 역임한 공수龔遂나 와 중국 한 나라의 명관으로 영천 태수 역임한 황패黃覇를 천백 년 뒤에 다시 만나는 것 같다.
그가 이 누대를 위해 공을 일으키는 것은 넉넉하지 않겠는가? 더구나 옛날부터 순후한 풍속을 지닌 고장으로 이 고을 만한 데가 없으니 주민들도 다스리기 쉬울 것이다. 이 누대를 중수한 것은 편안히 놀기 위함이나 후세의 칭송을 받기 위해 위함이 아니다. 옛 법도를 실추시킴을 지양하는 그 이상의 의미가 있다..
문득 나는 느낀 바가 있다. 옛날 성화成化 초년에 나는 몸이 군軍관계의 직무에 소속되어 두 해 동안 울산의 융막에 종사한 적이 있다. 일찍이 일이 있어 이 고을을 왕래한 것이 한두 번 아니었다. 오기만 하면 반드시 이 영호루 올라 노닐면서 멀리 바라보며 감상하였다.
동쪽 30리 떨어진 곳은 청송이다. 사록沙麓의 상서로운 구름이 왕성하게 하늘에 이어져 있으니 곧 주실周室 유태有邰의 경사로움처럼 청송 심씨의 집안에서 왕비가 배출되어 그 명성이 장구하리라.
북쪽 10리 떨어진 곳은 병산이다. 견훤의 1천 군사가 험한 곳을 점거하고 있었지만 결국 궤멸되어 달아났고 거짓 장수는 머리를 바쳤다. 왕건의 의기가 동남에 크게 떨치게 된 것은 이 싸움에서 징조가 드러났다.
서쪽으로 풍악을 바라보니 원봉이 먼저는 귀순하고 뒤에는 배반하여 6명의 태사와 더불어 공명을 누리지 못한 것을 슬퍼한다.
남쪽으로 갈라산을 바라보니 푸른 봉우리가 하늘을 떠받쳤다. 안개와 구름과 초목이 완연히 김생이 글씨 배울 적에 붓을 휘두르고 먹을 뿌리던 남은 기세를 띤 것 같다.
왕래하는 것이 싫증 나면 배를 띄우고 노에 맡겨서 굽어나온 땅과 굴곡진 물가를 거슬러 올라가다가 떠내려가곤 했다. 때로 밤이 되어 흥이 다할 무렵 돌아오곤 했다. 모든 누대의 좋은 경치는 왼쪽이나 오른쪽에서 만날 수 있어 감상하는 바가 많았다.
그로부터 이미 20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잊을 수 없는 추억이 가슴에 맴돈다. 김질의 임기가 차기 전에 내가 안동 고을로 가게 된다면 하인 한 사람과 말 한 필의 간편한 차림으로 다시 이 호수에서 노닐며 김질과 함께 누대에 올라가 옛일을 회상하며 시를 지어 고을 백성들의 좋아하는 칭송에 이을 수 있을 것이다.
영남사림파의 종장 김종필의 명문이다. 영호루가 규모상 촉석루와 영남루에 비해 조금 작지만 승경은 관수루와 월파정에 비교가 안 될 만큼 우월하다고 했다. 공민왕의 친필 하사, 신자전이 중수한 내력과 이후 여러 안동 고을 수령들이 보수하며 그 명맥을 이어온 내력을 언급했다.
김질이 이러한 영호루를 중수하고 나서 김종직에게 기문을 청하였고 김종긱 자신도 과가에 이 영호루에 올랐던 감회를 서술하였다. 동쪽으로 청송, 북쪽으로 병산, 서쪽으로 풍악산, 남쪽으로 갈라산까지 조망하면서 안동 고을의 번영과 순후한 인심이 이어지길 축원하였다.
3) 이집두 중수상량문[李集斗重修上樑文]
여기저기 산
강물은 출렁출렁
만 이랑 흰 물결 넘실거리네.
누대는 흔들흔들
땅은 넓고 넓어
백 년 만에 중수했다네.
맑은 물결에 배 띄우고
가벼운 누각의 단청 빛
물결 따라 흐르네.
좌우를 비춰주니
빈 누대엔 흰 기운 오르네.
이곳 고창의 옛 고을을 살펴보건대 본래 영남 좌도의 큰 고을로 일컬어진다, 태백산의 중간 가지가 구불구불 뻗어서 빽빽하게 용처럼 서려있다. 오륙백 리 낙동강 상류의 빼어난 경치가 벌집처럼 나열해 있다. 그리고 일만이천 호가 긴 숲을 안고 돌아서 호수를 이룬다. 맑은 물에 다다라서 은은하게 터가 보이는데, 텅 비고 맑은 물이 고여 거울 속에 만 가지 형상을 담아놓은 것 같다. 전망은 맑고 트였으며, 그림 속에 봉우리를 끌어들인 것 같다.
강에 인접한 물가에 터를 잡고 급기야 영호루를 세워 먼 산으로부터 태양을 맞아들이니, 붉은 난간이 물에 거꾸로 비쳐 먼저 가까운 물에서 달을 찾게 된다. 비취색 기와는 물에 비쳐 흐르는 것과 같아 진주의 촉석루와 밀양의 영남루의 오묘한 자태보다는 못하지만, 상산의 관수루나 영천의 서봉루 역시 번화한 부분에 대해서는 이보다 못하다. 일 년 내내 풍경이 무궁하며 천년의 옛 유적들은 서술할 만하다.
공민왕께서 친히 하사하신 세 글자는 세월이 흘러가도 오래오래 남아 있으며, 좨주 우탁의 사운 맑은 시도 서까래와 함께 썩지 않았다. 수증기가 오르고 물결에 휩쓸려도 악양루의 높고 트인 것과 짝할 만한 누대가 없고, 만물이 바뀌고 세월이 흘러 등왕각이 세워지고 허물어진 게 그 몇 번이었던가?
목은 이색의 찬과 점필재 김종직의 기문에서 전후의 일이 매우 빛난다. 부사 신공이 세우고 맹공이 중수했는데, 그 가운데 누대가 흥하고 쇠해진 일이 역력히 드러난다.
불행하게도 현익년玄黓年[1792]에 대홍수에 휩쓸려 또 황학루가 스스로 쇠퇴해진 것처럼 되고 말았었다. 하늘을 뒤흔드는 흙탕물이 산을 무너뜨리는 기세로 덮쳐 터를 깎아버리는 형세를 막을 수 없었다. 그리고 땅의 거대한 돌마저 뽑혀지고 뒤집혀져서 몽땅 휩쓸어버리는 재앙을 만나 한 고을의 빼어난 경치가 일시에 사라지고 옛터만 남아서 지나가는 길손은 탄식만 한다.
당시에 내가 가까운 고을 수령으로 나갔다가 이 고을로 부임하자 강호에서 노니는 것과 조정의 일 둘 다 아득히 잊어버리고 감히 ‘천하를 위해 즐거움을 뒤로 하고, 천하를 위해 우선 수고한다.’고 다짐했다. 그러나 천석고황에 대한 일념으로 지나치다고 하면서도 때로는 뜻대로 했다.
세 번째 무신년에 중건했으니, 어찌 우연한 일이겠는가? 병자호란․임진왜란도 서로 기다린 것처럼 부합되었다. 급기야 장인들을 모으고 비용을 계산했다. 그리고 날을 정하고 기초를 닦아서 경영하고 계획하자, 소문을 듣고 남녀들이 서로 기뻐하며 여기저기에서 도끼질하고 톱질하여 기한을 따라 귀신처럼 옮기되 묵묵히 마음으로 경륜했다.
고을의 옛 누대 터에 임하여 증축했는데, 눈앞의 광경이 잘 드러나게 하였다. 호수를 마주한 작은 정자가 먼저 나타났고, 산은 더욱 높고 강물은 더욱 맑았다. 그래서 물색이 바꿔지지 않았다. 선비들은 ‘때에 맞다’고 했으며, 백성들은 ‘즐겁다’고 했다. 공사일에 다투어 와서 빠르기가 하루가 덜 되어 지어진 것 같았다.
그것을 바라다보면, 땅이 없이 서 있는 것 같고, 기둥이 물밑에 거꾸로 비친다. 단청 색깔이 거듭 새롭게 되었으며, 화려한 현판도 다시 처마 사이에 걸리자 모습이 옛날과 같게 되었다. 고기와 용이 출몰하여 흡사 용궁이 물에 빠져있는 것 같았다. 갈매기와 오리가 어지러이 날아올랐고 채색한 무지개가 물속에 잠겨있는 것 같아 놀라웠다.
어찌 다만 때로 나와서 보며, 수고롭고 편하기를 인색해 할 것인가? 아니면 또한 기생들과 음악을 준비하여 술잔치를 펼 것이다. 소호蘇湖의 맑은 물결과 성대한 치장은 온통 물과 하늘이 한 가지 색이요, 유주柳州의 푸른 산이 둘러쌓이고 맑은 물이 감돌아 흐름은 부끄럽게도 사람과 땅이 서로 만나지 못한다. 백발의 늙은 얼굴로 누가 태수의 즐거움을 알리오? 푸른 산과 물이 길이 이 누대의 명성을 전달함에 짧고 간략히 서술하여 대들보를 세우는데 일조하고자 한다.
들보를 동쪽으로 던짐이여,
난간 밖 동쪽에서
상서로운 기운 붉게 빛나네.
태양은 장안을 비춰
머리 돌리니 가깝고
봉래를 채색 구름 가운데서 만난 것 같구나.
들보를 서쪽으로 던짐이여,
물가의 난초 자란 언덕에
국화도 이슬에 흠뻑 젖었네.
누대 머리의 나그네 시름은
서늘한 물 같구나.
옥같은 누대에선
삼경에 꿈마저 아득하여라.
들보를 남쪽으로 던짐이여,
남극성은 달처럼
물속에 담겼고
이 몸은 잠 못 이룬 채
밤새도록 서성이네.
손 모아 절하며
아득히 만세 삼창하노라.
들보를 북쪽으로 던짐이여,
항상 북두칠성을 의지해
서울쪽 바라 보도다.
관기들은 노래 불러
임금님 은총에 감격하고
이 몸의 미미한 정성
성은을 칭송하도다.
들보를 위로 던짐이여,
구비치는 강물과 숲은
고운 자태 더욱 드러내네.
때때로 축하하는 제비는
가벼운 물결 차도다.
호수 그림자 누대까지 올라
서로 출렁거리네.
들보를 아래로 던짐이여,
난초 돛대가
강 가운데 흩날리네.
하늘 멀리 세모에
누굴 생각하는고?
호숫가 아가씨들
두약을 따는구나.
상량한 뒤로
백성들 풍속 순화되고
해마다 풍년 들었네.
부지런히 일하여
봄에 씨 뿌려 가을에 거둬들였네.
자기 땅을 일구고
집안 잘 다스렸다네.
남쪽은 병풍이요
북쪽은 견고하여라.
산 밖에 산이요
누대 밖에 누대 펼쳐졌네.
푸른 저고리에
붉은 치마 입은 미인들
즐거이 태평 시대 신곡을 부르고
붉은 깃발과 비취색 일산의 나라님
머물면서 풍화가 일어남을 보셨다네.
공손히 읍지에 보태어
성대한 유적을 길이 남기리.
빼어난 경치를 더해주느라
흐르는 강물 쉼 없으리.
이집두의 중수상량문이다. 영남 좌도의 큰 고을인 안동의 빼어난 자연 경관을 개요하면서 문학적 정감을 담아 사실적으로 표현하였다. 공민왕의 친필 하사와 역동의 게판시, 목은과 점필재의 명문 게판 내력과 1792년 대홍수로 영호루가 유실되고, 이후 다시 복원까지의 우여곡절을 기술하였다.
동쪽으로는 상서로운 구름이 빛나고 채색 구름 가운데서 봉래산을 만난 듯하며, 서쪽으로는 물가의 난초 자란 언덕과 국화는 나그네 시름을 덜어주고 고운 누대에서 잠들면 아늑한 꿈을 꿀 수 있을 것 같다.
남쪽으로는 남극성이 물속에 비쳐 나그네의 마음을 산란케 하여 잠을 설치게 하며, 북쪽으로는 북두칠성 반짝이며 한양의 그립게 하고 주상의 은총에 감동한다. 위로는 제비가 날고 강물 위에 숲과 누대가 아름답게 반사되며, 아래로는 강물 위 작은 배에서 두약을 따는 아가씨들의 정감 어린 모습이 비친다.
상량한 뒤로 이 고을 민심이 더욱 순화되고 해마다 풍년이 들어 모두가 행복한 대동의 세상이 열리리. 산과 누대와 강물이 아름다운 이곳에 태평성세를 축하하는 흥겨움이 그치지 않으리. 안동 고을을 적시며 흘러가는 저 강물처럼 복된 안동 고을에 행복과 평화가 끝없이 이어지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