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극기는 휘날리는데~
"저 태극기는 저 자리에서 영원히 휘날려야 할 텐데…….”
국회 본관 앞 높은 깃대에서 태극기가 힘차게 휘날리고 있었다. 바람은 한결같았고 태극기도 변함이 없었다. 그러나 그 아래 서 있는 내 마음은 만감이 교차했다. 오늘 나는 태극기를 바라보며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고 애국가를 불렀다. 의식은 끝났지만 마음속에서는 또 하나의 맹세가 조용히 이어지고 있었다.
자유대한민국을 지키자. 그리고
내가 평생 마음에 간직하고 있는 육사를 지키자.
아침 일찍 집을 나섰다. 계룡역에서 KTX에 몸을 실었다. 함께 계룡에 사는 동기생과 여러 후배들의 얼굴이 보였다. 굳이 목적지를 묻지 않아도 서로 어디로 가는지 알고 있었다. 짧은 악수와 눈인사만으로도 마음은 충분히 전해졌다. 그러나 예전 같으면 많이 보였을 선배님들의 모습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그래, 우리가 벌써 선배가 되었구나.' 선배들의 뒤를 따르던 우리가 어느새 후배들의 앞에 서야 하는 세월을 살아온 것이다.(그러나 행사장에 도착해보니 우리보다 훨씬 선배기들도 많은 분들이 참석하여 변치 않는 애국심을 보여주셨다.)
여의도 국회의사당역에서 국회 본관으로 향하는 길에 들어서 보니, 간편한 복장에 각양각색의 모자를 쓴 백발의 동문들이 결연한 표정으로 꼬리를 이어가며 걸어가고 있었다. 감동적인 행렬을 바라보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사람은 늙어도 신념은 늙지 않는구나. 세월은 머리를 희게 만들 수는 있어도 가슴속에 품은 나라 사랑까지는 빼앗지 못하는 모양이구나.
행사가 시작되고 국기에 대한 경례가 이어졌다. 애국가를 4절까지 목청껏 불렀다. 마지막 절에 이르자 목이 메어왔다. 살아오면서 애국가를 수없이 불렀지만, 이날처럼 한 소절 한 소절을 가슴에 새기며 힘차게 불러본 적이 있었던가. 그리고 그 순간, 내 마음속에서는 또 하나의 노래가 조용히 울려 퍼졌다.
"동해수 굽이감아……."
우리 교가의 첫 소절이다. 행사의 성격상 함께 부를 수는 없었지만, 그 멜로디만 떠올려도 온몸에 전율이 흘렀다. 화랑대의 새벽 공기, 뜀걸음하던 발걸음, 생도 시절의 치열했던 나날, 그리고 평생 이어진 군인의 삶이 한순간에 되살아났다.
육사는 내게 학교 이상의 의미다. 청춘을 바친 곳이고, 군인의 길을 배우고 익힌 곳이며, 수십 년 군 생활을 흔들림 없이 버틸 수 있도록 나를 붙들어 준 정신의 뿌리다. 오늘 이 자리에 선 사람들 또한 저마다 살아온 길은 달랐지만, 마음속에 품은 화랑대의 의미만큼은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사실 우리 같은 연배들이 거리로 나설 일은 많지 않다. 이제는 후배들이 나라를 지키고 우리는 조용히 응원하며 살아가는 것이 자연스러운 순리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전국 각지에서 수많은 동문들이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서울로 향했다.
왜일까?
현역 장교와 생도들은 신분상 공개적으로 목소리를 내기 어렵다. 그렇다면 비교적 자유로운 예비역들이라도 우리의 생각을 전하는 것이 마지막 도리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반드시 해야 할 일이었다.
오늘 우리가 모인 이유는 단지 모교를 지키기 위해서만은 아니었다. 대한민국 장교를 길러내는 체계를 바꾸는 일이라면 무엇보다 충분한 연구와 검증, 그리고 국민적 공감 속에서 신중하게 결정되어야 한다는 믿음 때문이었다.
행사 내내 내 마음속에서는 한 가지 질문이 떠나지 않았다.
누가 국가를 더 위하는 것인가?
어느 길이 대한민국의 미래를 위한 길인가?
그 답은 사람마다 다를 수 있다. 그러나 적어도 자신의 양심 앞에서는 누구나 끝까지 정직하게 답해야 하지 않을까.
연단에서는 구호가 이어졌다. "중지하라", "원점에서 재검토하라." 우리도 함께 목청껏 외쳤다. 그때마다 목울대가 뜨거워졌다. 그것은 누군가를 향한 분노라기보다, 평생 지켜온 가치가 흔들릴지 모른다는 안타까움이었고, 나라를 걱정하는 참석자들의 절박한 마음이었다.
행사가 끝난 뒤 동기들이 남긴 글을 읽었다.
"오늘에서야 내가 육사를 이렇게 사랑하는 줄 알았다."
"목청껏 구호를 외치고 나니 조금은 마음이 풀렸다."
"중지하라를 외칠 때마다 목이 메었다."
짧은 글들이었지만, 그 안에는 우리가 미처 말로 다 표현하지 못한 마음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표현은 달라도 마음은 하나였다. 우리가 지키고 싶었던 것은 건물이나 교정만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오랜 세월 이어져 온 정신과 전통, 대한민국 장교단을 떠받쳐 온 가치, 그리고 자유대한민국을 위해 청춘을 바쳤던 우리의 자부심이었다.
문득 이런 바람이 생겼다. 오늘 같은 행사는 이번이 마지막이었으면 좋겠다. 대전에서, 부산에서, 계룡에서, 전국 곳곳에서 천리길을 달려와 같은 마음을 외치는 일이 더 이상 필요 없는 날이 하루빨리 왔으면 좋겠다.
무엇보다 정책을 만드는 사람들이 오늘 이 자리에 함께 서서 태극기를 바라보고, 참석자들의 눈빛을 읽고, 그 함성 속에 담긴 충정을 헤아렸기를 바랐지만, 아마 내 마음뿐이었겠지?
행사를 마치고 국회 본관 앞을 떠나며 올려다본 태극기는 여전히 바람을 품고 힘차게 휘날리고 있었다.
저 태극기는 저 자리에서 영원히 휘날려야 한다.
그 태극기 아래에서 우리가 지키고자 했던 자유와 신념, 화랑대의 정신, 그리고 사랑하는 대한민국이 오래도록 함께하기를 기원하며 조용히 발길을 돌렸다.
첫댓글 먼길 고생하셨습니다
좋은 글 감사하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