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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 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땅은 비축장소 하늘은 저축장소>의 줄거리 :
하나님 주권으로만 살아지는 낯설고 어색한 세상에서 사는 사람의 모습이 계속 묘사됩니다. 다른 사람에게 축복 받는 낮고 작은 자가 아니라, 모든 사람을 축복하는 높고 큰 자로서 삽니다. 이렇게 축복하기의 삶을 사는 큰 자에게 있어서 땅은 비축장소이고 하늘은 저축장소입니다. 땅은 비축한 것을 쓰는 장소이고 하늘은 소유하기 위하여 저축하는 장소입니다. 땅에서 저축하려는 모든 작고 낮은 자들은 결코 선민일 수 없습니다.
땅은 비축장소 하늘은 저축장소
(창세기 47:13~31)
23. 요셉이 백성에게 이르되 오늘 내가 바로를 위하여 너희 몸과 너희 토지를 샀노라 여기 종자가 있으니 너희는 그 땅에 뿌리라
24. 추수의 오분의 일을 바로에게 상납하고 오분의 사는 너희가 가져서 토지의 종자로도 삼고 너희의 양식으로도 삼고 너희 가족과 어린 아이의 양식으로도 삼으라
25. 그들이 이르되 주께서 우리를 살리셨사오니 우리가 주께 은혜를 입고 바로의 종이 되겠나이다
26. 요셉이 애굽 토지법을 세우매 그 오 분의 일이 바로에게 상납 되나 제사장의 토지는 바로의 소유가 되지 아니하여 오늘날까지 이르니라
27. 이스라엘 족속이 애굽 고센 땅에 거주하며 거기서 생업을 얻어 생육하고 번성하였더라
28. 야곱이 애굽 땅에 십칠 년을 거주하였으니 그의 나이가 백사십칠 세라
29. 이스라엘이 죽을 날이 가까우매 그의 아들 요셉을 불러 그에게 이르되 이제 내가 네게 은혜를 입었거든 청하노니 네 손을 내 허벅지 아래에 넣고 인애와 성실함으로 내게 행하여 애굽에 나를 장사하지 아니하도록 하라
30. 내가 조상들과 함께 눕거든 너는 나를 애굽에서 메어다가 조상의 묘지에 장사하라 요셉이 이르되 내가 아버지의 말씀대로 행하리이다
31. 야곱이 또 이르되 내게 맹세하라 하매 그가 맹세하니 이스라엘이 침상 머리에서 하나님께 경배하니라
저축이라는 단어는 쌓을 저(貯)에 모을 축(蓄)을 씁니다. 쌓기 위하여 모으는 것이 저축입니다. 한편 비축은 갖출 비(備)에 모을 축(蓄)을 씁니다. 예비하기 위해 모으는 것이 비축입니다. 저축은 쓰임을 생각하지 않고 쌓아 두기 위해 모으는 것에 목적을 둡니다. 쉽게 말해 소유하기 위해 모으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반면 비축은 제대로 쓰이도록 하기 위해 모아두는 것입니다. 이러한 의미를 염두에 둘 때 선민에게 땅은 비축하는 장소이고 하늘은 저축하는 장소입니다.
야곱은 요셉을 통해 마음에서 하나님을 일등이자 영광의 하나님으로 재발견했습니다. 그리고 이 땅에 빈틈없이 충만하게 임하여 살아서 꿈틀꿈틀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을 재발견했습니다. 이제 마음으로는 영광의 하나님을 바라보는 중에 몸이 사는 이 세상은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서만 살아지는 어색하고 낯선 세상 안으로 발을 들여놓습니다. 이로부터 고센 땅을 삶의 터전으로 얻고, 애굽의 궁정에서 바로를 축복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본문에서는 요셉의 기근 정책과 야곱의 매장지를 정하는 유언이 이어집니다.
이러한 사건들은 어색하고도 낯선 세상에 들어가기 시작한 선민들에게서 일어나는 일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선민은 마음으로는 영광의 하나님만을 집중하여 바라보고, 몸은 오직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서만 살아지는 이상한 세상을 사는 자들입니다. 본문에 기록된 일들은 그 삶의 구성성분이 어떤 것인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일들은 단순히 역사적인 기록이 아닙니다. 모세는 영적인 의미를 전달하기 위해 이 일들을 기록하였습니다. 지난 시간에 살펴보았던 두 사건과 본문의 두 사건은 얼핏 별개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어색하고도 낯선 세상에서의 선민의 삶을 구성하는 요소들을 네 가지로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도 살펴보았듯이 히브리서 7장 7절을 보면 “논란의 여지 없이 낮은 자가 높은 자에게서 축복을 받느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을 반대로 풀어보면 높은 자가 낮은 자에게 축복을 해준다는 뜻이 됩니다. 이 말씀이 야곱에게서 일어났습니다. 야곱이 세상 모든 좋은 것을 갖고 있는 바로를 축복한 것으로부터 우리는 정말 큰 자가 누구냐에 대해 생각할 수 있었습니다. 마음의 만족과 기쁨을 위하여 이 세상 것을 필요로 하지 않을수록 큰 자입니다.
거지 나사로는 알렉산더나 칭기즈칸과 비교할 수 없는 위치에 있습니다. 그러나 영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거지 나사로가 훨씬 더 큰 자입니다. 얼마나 마음이 채워지지 않으면 그렇게까지 많은 땅을 정복해야만 했느냐는 질문을 하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중소기업에 다니는 김 과장님과 재벌 회장님을 비교하면 어떨까요? 김 과장님이 적은 수입으로 행복하게 살 수 있다면 재벌 회장님보다도 훨씬 큰 자입니다. 얼마나 작은 자이기에 그렇게 많은 돈을 긁어모아도 만족이 안 되는가를 묻게 됩니다.
이 어색하고 낯선 세상은 오직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서만 살아지는 세상입니다. 그러한 세상에 들어가 사는 선민의 가치관은 절대로 이 세상 사람들의 가치관과 같아서는 안 됩니다. 큰 자가 누군가를 분명히 구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머리 둘 곳 없이 사셨음에도 이 세상의 것이라고는 하나도 구하지 않으셨기에 큰 자이십니다. 마음의 만족과 기쁨을 위하여 세상 것을 필요로 하지 않을수록 더 큰 자가 됩니다.
한편 이러한 내용이 제시된 이후에 요셉의 기근 정책에 대한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우리가 읽지 않은 부분에서 이 기근 정책이 어떻게 전개되는지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제 애굽의 백성들이 총리에게 와서 곡식을 사느라 가진 돈을 다 쓰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아직도 기근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제 백성들이 가축 떼를 곡식과 바꾸기 시작했습니다. 요셉은 물물교환을 통해 얻은 돈과 가축들을 바로의 소유로 돌립니다. 그런데 백성들이 가축을 다 팔았는데도 기근은 끝나지 않고 요셉에게 와서 이제 죽게 생겼다고 탄원하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기근의 끝 무렵에 이르러 백성들은 토지와 몸을 바로의 소유로 바칠 것을 약속하며 식량을 요구합니다. 이에 요셉은 그들의 요구를 들어 곡식을 주며 식량으로 삼고 다음 해의 종자로도 삼을 것을 명령하며, 다만 거둔 것의 오 분의 일은 바로에게 돌릴 것을 요구합니다.
이러한 기근 정책의 결과 애굽 백성의 모든 물질적인 소유가 하나도 예외 없이 바로에게 귀속되었습니다. 먼저 돈이 바로의 것이 되었고, 가축이 바로의 것이 되었으며, 토지가 바로의 것이 되었습니다. 마지막으로 몸까지 바로의 것이 되었습니다. 이제 애굽 백성들은 바로가 준 곡식으로 종자를 삼아 농사를 짓고, 바로에게 속한 몸으로 밥을 먹고 물을 마시고, 바로의 밭에서 얻은 수확물은 다시 바로에게 오 분의 일을 바치고, 나머지 오 분의 사로 바로에게 속한 자신과 가족들의 생명을 유지하는 일에 썼습니다. 요즘의 사회학적, 경제학적, 정치학적 관점에서 보면 수탈로 보입니다. 그러나 애굽 백성들은 이렇게 바로에게 귀속되는 상황을 너무나 감사하게 여겼습니다.
문제는 이 본문이 그런 관점에서 보라고 기록된 것이 아닙니다. 마음은 영광의 하나님만을 유일한 좋음으로 추구하는 삶, 몸은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서만 살아지는 삶, 이런 낯설고 이상한 세상에서는 절대로 걸리적거리면 안 되는 일이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서만 살려면 몸부터 시작해서 이 세상에서 내 이름 아래 주어져 있는 모든 물질들이 걸리적거리면 안 됩니다. 그 모든 물질 중에서 내 것이라는 의식이 생기면, 완전히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서만 살아지는 삶은 불가능합니다. 우리는 자연스럽게 내 것이라는 의식을 갖고 삽니다. 내 몸, 내 얼굴, 내 피부, 내 건강, 내 스타일, 내 돈, 내 집, 내 핸드폰, 내 차, 내 옷, 내 물건, 내 권리, 내 은행 계좌, 내 연금을 비롯하여 모든 대상에 대해 자연스럽게 내 것이라는 의식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의 주권으로만 살아지는 삶은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이란 말 그대로 하나님의 주인 된 권리입니다. 하나님의 주인 된 권리로만 살아지는 낯설고 이상한 세상에 들어왔다면 더 이상 내 몸, 내 물건, 내 집, 내 차를 이야기할 수는 없습니다. 내가 주인으로 소유하는 것들이 있으면 어떻게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서만 살아지는 삶이 가능하겠습니까? 우리는 교리적인 차원에서 내 몸은 내 것이 아니라고 쉽게 이야기하지만, 실제 삶의 현장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무의식에 내 것이라는 생각이 박혀있습니다. 내 몸이 아니라면 하나님 소유일 뿐입니다. 물론 내 얼굴이 하나님의 얼굴일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소유의 얼굴입니다. 피부가 내 피부가 아니라 하나님 소유의 피부입니다. 주머니에 돈이 있다면 내 돈이 아니라 하나님 소유의 돈입니다. 여러분의 집이 자가든 전세든 월세든 하나님 소유의 집입니다. 우리에게는 이 의식이 살아있어야만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서만 사는 삶이 가능합니다.
야곱이 이십 년간 요셉이 죽은 것으로 여기고 있을 때 요셉은 하나님의 주인 된 권리에 의해서만 살 수 있었습니다. 우리 또한 그렇게 살고자 한다면 내 것을 주장할 수 없습니다. 내 월급이란 없습니다. 하나님 소유의 월급입니다. 내 연급이란 없습니다. 하나님 소유의 연금입니다. 내 은행 계좌가 아닙니다. 하나님 소유의 은행 계좌입니다. 지구라는 물질세계에서 내가 소유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본문은 바로 그것을 이야기 해주기 위해서 요셉의 기근 정책을 언급하고 있는 것입니다.
애굽의 모든 사람의 돈과 가축과 몸과 토지까지도 바로에게 귀속되었다는 이야기는 상징적입니다. 낯설고 어색한 세상을 사는 선민에게는 육체로 사는 물질세계에서 내 것으로 소유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의식이 있어야만 합니다.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선민은 복의 근원이 되고 큰 자가 되고 축복할 수 있는 자가 됩니다. 이 세상에서 어떤 소유를 갖지 않아도 마음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영광의 하나님으로 봅니다. 이처럼 선민은 하나님을 마음에서 지켜내는 자들입니다. 그 하나님의 좋음을 느끼는 강도가 강하면 강할수록 이 세상이라는 물질세계에서는 내 것이라고 가져야 될 필요를 느끼는 대상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내 이름 아래에 여러 가지 세상 것들을 주신 것일까요? 이것은 저축이 아닌 비축입니다. 하나님이 쓰실 용도가 있기 때문에 비축해 두신 것입니다. 본문에서는 특이한 언급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26절을 보면 “요셉이 애굽 토지법을 세우매 그 오 분의 일이 바로에게 상납 되나 제사장의 토지는 바로의 소유가 되지 아니하여 오늘날까지 이르니라”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제사장이란 애굽의 태양신 ‘라’를 주신으로 섬기면서 그 외의 잡신들을 섬기던 자들입니다. 이들은 자기 땅을 갖고 있습니다. 이 또한 영적인 비유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사람이 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에 자기 소유라 생각할 수 있는 것들을 허락하심은 선민이 아닌 자들에게 행하시는 일입니다. 야곱이 요셉을 만나기 이전의 삶을 옛 세상 사람들에게 허락하십니다. 바로에게 귀속되지 않은 토지를 독립적으로 가졌던 제사장들이 의미하는 것은, 내 소유라는 생각을 갖고 살도록 하나님이 허락하셨다면 그는 선민이 아닌 이방 잡신에게 귀속된 자라는 것입니다.
또 본문에서 특이한 점은 오 분의 일을 바로에게 바치게 했다는 것입니다. 바로에게 바친다고 해도 바로가 그것을 다 먹었던 것은 아닙니다. 여기서 비축의 의미가 발견됩니다. 결국 바로에게 바친 오 분의 일은 백성들에게 문제가 생겼을 때를 위한 비축분으로 사용됩니다. 그리고 백성들은 오 분의 사를 식량으로 삼기도 하고 종자로도 삼기도 하며 가족과 함께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이것을 우리에게 적용해 본다면 내가 매달 벌어들이는 수입이 있을 것입니다. 내가 먹을 만큼 먹고 쓸 만큼 쓴 뒤에 남는 것은 하나님이 쓰실 용도를 위해 비축하라는 것입니다. 나를 위해 쌓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용도를 위해 준비해 두는 것입니다.
십자가 복음 방송을 들으시는 분들 중에 ‘저축과 연금 등은 죄악시 되어야 하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맞는 말입니다. 저축과 연금은 죄악시 되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다만 어떤 의미에서 죄악시 되어야 하는지 정확하게 이해해야 합니다. 내가 주체적으로 내 미래를 걱정하는 입장에서 저축을 하고 연금에 의지한다면 죄악시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는 연금이 있으니까 미래가 걱정 없다. 나는 저축을 해서 미래에 대비하겠다.’라는 발상은 죄악입니다. 이것은 어색하고 낯선 세상에 들어와 사는 선민이 아닙니다. 그러나 비축하는 것은 다릅니다. 하나님의 쓰심을 위하여 준비하는 의미에서 모아둘 수 있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큰 차이가 없게 느껴지실 수 있습니다. 내가 삶의 주체가 되어서 미래를 걱정하며 하는 저축이나, 어색하고 낯선 세상에 들어와서 하나님의 주권으로만 사는 자가 하나님의 용도를 위하여 비축하는 것이나 은행에 계좌를 만들고 돈을 넣는 겉모습은 같습니다. 그러나 믿음이란 결국 마음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이 세상에서 몸부터 시작해서 모든 것이 내 소유라고 여기는 것 없이 사는 선민이라면 하나님이 먹고 쓰도록 용도를 정해서 허락하신 것 외에 남는 것이 있다면 당연히 모아두어야 합니다. 저축이 아닌 비축의 의미에서 모아두는 것입니다. 내가 주인이 되어서 내 삶에 대하여 미래를 걱정하면서 하는 저축은 물질을 섬기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아둔 저금으로 사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지금 하나님과 더불어 살고 미래에는 또 미래에 만날 하나님과 더불어 살고 하나님으로부터 살아갈 뿐입니다. 결코 모아둔 돈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 사십 년을 모아둔 식량으로 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삶의 근원입니다. 하나님이 계시면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연결되면 하나님이 허락하신 타이밍까지는 죽지 않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할 일 다하고 하나님이 계획하신 일을 다 이루고 예수님처럼 ‘다 이루었다.’라는 말을 하고 죽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먹을 만큼 먹고 쓸 만큼 썼는데도 남게 주신다면 하나님이 그것으로 쓰실 용도가 있기 때문에 비축하게 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에게 바친 오 분의 일이 상징하는 바입니다. 본문의 이야기 속에서 바로는 비유적으로 하나님의 위치를 점하고 있습니다. 바로에게 바친다는 것은 먹고 쓰고 남는 부분을 비축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다만 사람마다 먹을 만큼 쓸 만큼의 기준이 다를 수 있습니다. 경험적으로는 십자가 생활화를 해서 하나님을 느끼는 정도가 강해질수록 내게 들어온 수입에서 내가 필요한 만큼 쓰게 되는 양이 점점 줄어듭니다. 내가 점점 더 큰 사람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는 곧 마음의 만족을 위하여 필요한 이 세상 것이 점점 작아짐을 가리킵니다. 수입은 똑같아도 십자가 생활화를 반복할수록 남아도는 돈이 점점 많습니다. 수입의 남는 부분은 여러분의 이름으로 저금을 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저축이 아닌 비축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 많지는 않지만 언제든지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위하여 제가 비축하는 돈이 쓰이길 바랍니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본문에서 바로에게 오 분의 일을 바치는 것이 의미하는 바입니다.
이처럼 여러분의 이름으로 하는 저금은 저축이 아닌 비축이 되어야 합니다. 믿음은 마음의 작용이고 의식의 작용입니다. 어떤 마음으로 내 이름의 계좌를 열어놓고 쓰고 남은 것을 모아두고 있느냐가 저축인지 비축인지를 결정합니다. 비축이 되어야 하는 이유는 물질세계에서는 내가 마음대로 소유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야곱이 자기의 죽음에 대해 유언하는 장면이 이어집니다. 야곱은 자기 시신을 가나안 땅 막벨라 굴에 매장하라는 유언을 남깁니다. 사실 나중에 보면 야곱은 열두 아들을 다 축복한 후에 다시 유언을 반복합니다. 시신을 애굽에 묻지 말고 가나안 땅의 막벨라 굴로 가져가서 할아버지 아브라함과 할머니 사라, 아버지 이삭과 어머니 리브가, 자기 아내 레아가 묻힌 곳에 함께 묻어달라 이야기합니다. 이 이야기가 먼저 등장한 이유는 야곱의 마음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본문은 야곱의 유언을 통해 하나님의 주권으로만 살아지는 어색하고 낯선 세상 안에 들어온 자가 어떻게 하늘에 저축하는가를 보여줍니다.
야곱은 백사십칠 세에 죽기까지 십칠 년을 애굽에서 삽니다. 칠십칠 세까지는 아버지 이삭과 어머니 리브가와 함께 살았고, 형의 위협을 피해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이십 년을 살았습니다. 거기에서 아내들을 얻었고 열한 명의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리고 라헬은 벧엘로 올라가는 길에서 베냐민을 낳다가 죽었습니다. 야곱은 그렇게 해서 이십 년을 살던 라반의 집에서 나와 독립적으로 가나안 땅에서 삼십삼 년을 살았습니다. 다 합치면 백삼십 년 세월입니다. 이제 애굽에서 나머지 십칠 년을 사는데 야곱 입장에서는 이 시기가 백사십칠 년 세월 중에 가장 안정적이고 가장 영예롭고 가장 풍족한 삶의 구간입니다. 이제 야곱의 마음에는 애굽의 풍요로움이 전혀 스며들지 않습니다. 옛날 같았으면 애굽의 풍요로움에 마음이 빨려 들어가 난리가 났을 것입니다. 그런데 야곱은 이십 년 동안 죽었다고 여긴 하나님 주권의 상징이요 증거인 요셉을 끌어안고 영광의 하나님을 재발견하였습니다. 또한 이 땅을 향한 하나님의 주권을 재발견했습니다. 그렇게 들어간 낯선 세상에서 애굽의 풍요로움은 더는 마음에 와닿지를 않습니다. 그 증거가 계속 죽음을 생각함으로 나타납니다.
마음속에서 자기 죽음을 생각하는 자에게는 이 세상의 그 어떤 좋음이나 풍요로움도 스며들 수 있는 여지가 없습니다. 죽음을 생각하는 마음은 세상의 좋음에 대한 방수층과도 같습니다. 물을 털어내듯이 세상의 좋음을 털어냅니다. 그렇다면 야곱이 마음에서 바라게 되었던 것은 무엇일까요? 모든 인간은 마음이 비어있기에 바랄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기에 야곱도 무엇인가를 바라야만 했습니다. 다만 세상의 풍요로움에 대해서는 죽음을 생각하며 잘라냈습니다. 우리가 십자가 생활화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세상에 대해 죽은 자의 의식을 갖는 이유는 이 세상에 좋다고 여겨지는 것들을 잘라내기 위해서입니다. 마음에 세상이 스며들지 못하게 방수 처리하는 것입니다. 야곱은 가나안 땅을 생각합니다. 가나안 땅은 하나님이 약속해 주신 땅입니다. 이제 야곱이 세상을 향해 바라는 것이 있다면 오직 하나님의 약속과 계획이 이루어지는 것뿐입니다.
야곱의 마음은 하나님만을 향해 있고 몸으로 사는 세상에 대해서는 죽음을 생각합니다. 우리가 십자가의 죽음을 생각하는 것처럼 야곱 또한 죽음을 생각합니다. 이 죽음을 생각하는 것 자체가 예수님 안에 들어와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래서 세상의 풍요로움이 스며들지 못하고 하나님만을 소망하게 되었습니다. 가나안 땅은 천국을 상징합니다. 야곱이 가나안 땅을 언급했다는 것은 하나님이 계신 천국을 소망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렇다면 이것을 저축이라고 말할 수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6장 19절에서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라고 말씀하셨고, 21절에서는 “네 보물 있는 그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서 하신 말씀이 24절의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보물을 재물이냐 하나님이냐 두 가지로 제시하셨습니다. 땅에 쌓아 두지 말라고 하신 것은 하늘의 하나님이 보물이기에 땅에 쌓을 수 있는 것을 보물로 여기지 말라는 뜻입니다. 문제는 어떻게 해야 내가 하늘에 보물을 쌓을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무한하십니다. 내가 그 무한하신 하나님을 나의 보물로 쌓는 방법은 내 마음이 하늘로 올라감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네 보물 있는 그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라고 말씀하신 바와 같습니다. 여러분에게 보물이 무엇입니까? 이 땅의 재물입니까? 하나님입니까? 하나님이 보물이라고 믿는 선민이라면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야만 합니다. 가령 제 마음이 백 개 올라갔고 여러분은 천 개 올라갔다고 해보겠습니다. 그럼 무한하신 하나님을 저는 백 개만큼 가진 것이고, 여러분은 천 개만큼 가진 것입니다. 마음이 하늘에 천 개 올라갔다면 보물인 하나님의 좋음을 하늘에 천 개만큼 쌓은 것이고, 마음이 하늘에 백 개밖에 올라가지 않았다면 보물인 하나님의 좋음을 백 개밖에 쌓지 못한 것입니다.
보물을 하늘에 쌓으라는 이야기는 결국 마음이 하나님이 계신 천국으로 올라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려면 마음에는 반드시 이 세상에 대한 죽음이 의식되어야만 합니다. 죽음이 의식되지 않는데, 마음이 하늘로 올라갈 수는 없습니다. 여전히 마음이 이 세상을 살고자 하는데 하늘로 올라갈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이로부터 십자가를 생활화해야 할 필요성이 생겨납니다. 어차피 이 세상은 내 마음이 관여하지 않고 내 주체성이 죽어도 하나님의 주권으로만 살아집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주권으로만 살기 위해서는 물질세계에 속한 것들이라면 내 몸으로부터 시작해서 내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삶의 현장에서 기억해야 합니다.
거울을 통해 여러분의 몸을 보시기를 바랍니다. 거울에 비치는 얼굴이 내 얼굴이 아닙니다. 하나님 소유의 얼굴입니다. 거울에 비치는 피부가 내 피부가 아닙니다. 하나님 소유의 피부입니다. 내 것이라고 하는 죄악의 망발을 절대로 해서는 안 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쌓을 수 있을까요?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야 합니다. 마음이 하늘로 올라감이란 결국 마음이 하늘로 올라간 만큼 하나님의 좋음을 인정한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좋음을 인정하는 만큼 하나님을 갖게 됩니다. 결국 이 세상에 대한 죽음을 인정하고 마음이 하늘로 올라감을 통해 하나님의 좋음을 내 몫으로 저축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저축할 대상은 영이신 하나님의 좋음 외에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좋음만이 나의 소유가 될 수 있습니다. 무한하신 하나님의 좋음을 소유하는 것은 금광을 가진 것과 같습니다. 금광에서 금을 채굴하는 만큼 내 소유가 되듯이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는 만큼 하나님의 좋음은 내 것이 됩니다. 이것이 하늘에 보물 쌓기입니다. 이 땅은 내 소유를 쌓아 둘 저축의 장소가 아닙니다. 이 땅에 내 몸으로부터 시작하여 주어진 모든 것들은 하나님이 당신의 용도를 위하여 비축해 두신 것입니다. 내가 몸을 움직여 벌어들이는 수입이나 내가 먹을 만큼 먹고 쓸 만큼 쓰고 남은 모든 것들은 하나님이 쓰시도록 비축해 두는 것입니다. 내 것이 아닙니다.
애굽의 백성들은 바로의 소유가 되었습니다. 내 몸이 아닌 바로 소유의 몸으로 농사를 짓습니다. 바로 소유의 토지에서 나온 곡식을 먹습니다. 이렇게 나온 소출의 오 분의 일은 바로가 원하는 일에 쓸 수 있게 바쳤습니다. 몸으로부터 시작해서 모든 것이 바로의 소유로 귀속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바로에게 속한 몸을 움직이고, 바로의 땅에서 일하고, 바로의 것으로 먹고 살고, 바로의 쓰임을 위해 오 분의 일을 바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삶 전체는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렇기에 내가 하나님을 좋아하여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서 하나님의 좋음을 쌓아 두는 저축의 양이 많으면 많을수록 이 땅에서 내게 필요한 것은 작아집니다. 이 세상에서 내가 움직여서 얻은 수입에서 쓸 것과 필요한 것은 점점 작아져 가는 것입니다. 제가 아는 어떤 목사님은 사업을 병행하고 계시는데 얻은 대부분의 수익을 남을 위해 쓰십니다. 자신을 위해서는 양말 하나를 사도 만원에 스무 개씩 들어있는 싼 제품을 선택하십니다. 이분에게서 놀라운 말씀을 들었습니다. 십자가 복음 방송 가족들이 목사님이 하시는 일에 가세하게 되었는데, 사업의 주체이신 본인이 가장 적은 월급을 가져간다고 하십니다. 이처럼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서 하나님의 좋음을 내 것으로 삼는 저축의 양이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이 땅에서 내가 쓸 만큼, 내가 필요한 만큼이 점점 작아집니다. 이것이 실제로 일어나는 일입니다. 하늘에서 저축이 많아질수록 땅에 남는 것은 몸으로부터 시작해서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일을 위한 비축이 됩니다.
여러분의 명의로 은행 계좌를 만드시고, 여러분의 명의로 연금도 잘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그것은 저축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세상 사람들이 볼 때는 여러분의 명의로 저금하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하나님이 비축해 두신 것이 되어야 하며 우리도 자발적으로 하나님의 용도를 위하여 비축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저축하여 풍성함을 소유로 누릴 수 있는 곳은 하늘뿐입니다. 이 세상에서는 주님의 십자가에서 죽고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 하나님의 좋음을 소유로 누리시며 기뻐하시고 만족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땅은 저축의 장소가 아닌 비축의 장소입니다. 하나님의 계획을 위하여 준비하기 위해 모아두는 장소이고, 그 준비의 의미로 허락하여 두신 장소입니다. 오직 나의 소유로 허락된 좋음은 하늘에서만 저축될 수 있습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오늘도 주님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다니면서 세상에 대해 죽은 자가 되게 하여주시옵소서. 땅에서는 모든 것이 비축되는 것임을 알고, 나의 활동을 통하여 주어지는 수입도 남는 모든 부분을 비축하게 해주시옵소서. 저축은 오로지 하늘에서 하나님의 좋음만으로 이루어지게 해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