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좋은 강의에 대한 보답으로, 모자란 글이지만 용기를 내어 올려 봅니다.♣
행복한 시간여행, 내 고향 울산
울산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강의라니, 흥미가 떨어지는 주제라고 생각한 나를 비웃듯 선사시대, 신석기, 청동기, 고려, 조선, 일제 강점기까지 시대별로 출토된 문화유적을 중심으로 강의가 진행되면서 내 삶과 연관된 지명들이 나타나고, 그와 더불어 희미하거나 명징한 기억들이 빠르게 눈앞에서 사라졌다 나타나기를 반복하였다.
통일신라시대 조성된 율리 영축사지에서 출토된 고려시대의 청동시루, 청동향로, 연화문 수막새 등을 보면서 나는 폐사지 인근 마을에서 서당훈장을 하던 오라버니의 어깨너머로 언문을 깨우치고, 지금은 없어진 ‘아래아’, ‘순경음 비읍’ 등이 남아있는 옛 소설들, 구운동, 숙영낭자전, 장화홍련전 등 열댓 권의 언문소설과 한문이 섞인 1권의 내훈을 필사하는 한 소녀를 떠올렸다. 가을이면 산그늘이 길게 내려와 일찍 해가 졌다고 말하던 그 산이 영축산이었음을 그때는 알지 못했다. 4인 가마를 타고 시집오신 할머니의 애장품이던 거칠거칠한 한지에 세로로 써 내려간 그 필사본들은 오동나무 궤짝 속에 담겨 있다가 당시 마을을 뻔질나게 찾아다니던 골동품상에게 넘어갔다.
삼한 이래 일제강점기까지 중요한 철광산으로 삼국시대 국가건설의 기반이 되었으며, 경주 황성동 유적의 철기와 비소 함량이 같고 현재는 쇠부리 축제라는 이름으로 그 명목을 이어오고 있다는 달천철장 이야기에서 부모님의 손을 잡고 외갓집을 찾아가는 어린 형제들을 보았다. 달천은 울산의 북쪽 지역으로 남쪽이던 우리 동네에 비해 훨씬 더 추워서 할머니는 외갓집에 가는 우리들에게 장갑이며 목도리며, 얼라(아이들)들이 춥지 않도록 몸단도리를 했지만, 한 겨울바람은 옷 틈을 비집고 들었다. 역에서 내려 동글한 자갈밭이 지천인 넓은 냉천(동천의 지류) 거랑(내)을 건널 때면 어머니는 늘 소학교 다닐 때 큰비로 냇물이 넘칠 때마다 어린 동생을 업고 건네주었던 오빠 얘기를 했다. 메마른 겨울 산 중턱에 빛바랜 함석으로 된 높다란 광산이 저만치 보이면 우리는 발걸음을 더 빨리 했다. 외갓집이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이다.
임진왜란 때 일본 장수 가또 기요마사가 지었고 16세기 일본의 축성기술이 고스란히 드러난다는 서생왜성은 집에서 십여 리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성으로 초등학교 봄소풍 장소였다. 회야강 하류에 있는 다리를 건너 성으로 올라가는 좁은 농로의 풀밭을 제법 헤친 뒤에야 넓은 성곽길이 나왔는데 올라가는 길은 꽤 가팔라서 우리는 중간쯤에서 명선도와 진하해수욕장, 옹기종기한 해안가 마을과, 성곽에 기대어 펼쳐진 논밭들을 보면서 한참을 쉬었다가 성에 들어갔다. 성문 안으로 들어가면 공터를 가로막은 성벽들이 여러 방향에서 비죽거리며 앞을 막아 숨바꼭질하듯 다녔다. 흐드러진 벚꽃 아래 활짝 웃던 친구들도 나처럼 늙어가겠지? 오래된 흑백사진들이 눈앞에서 명멸하였다.
학성(울산왜성)은 울산시 주최 문화행사가 자주 열렸고, 여고시절 소풍장소이기도 했다. 학성동에서 오르는 정돈된 곳과 달리 반대편 중턱에는 허물어져 가는 성터 너머로 논과 밭, 지붕 낮은 집들이 점점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정상에는 커다란 소나무 가지에 밧줄이 굵은 그네가 달려 우리는 가끔 춘향이 흉내를 내었다.
고모네 시댁은 외고산 옹기마을에 있었다. 유복자인 막내아들 등 2남 1녀를 남기고 고모부는 6.25 동란 중에 전사하셨다. 스물몇에 혼자된 마음씨 고운 고모는 할머니의 아픈 손가락이었다. 친정 근처에 전답을 내어 보살피다가 큰댁의 옹기 사업이 번성하면서 시댁으로 들어가 손위 동서와 함께 일꾼들의 식사 등을 거들었다. 음식 솜씨가 좋고 부지런하여 시댁의 귀여움을 받았지만 항상 일이 많아 친정나들이가 어려워 할머니가 애타 하던 생각이 난다.
넓은 로터리 가운데 위치한 공업탑은 특정공업지구로 지정된 울산의 상징이자 인근 학교 학생들의 졸업앨범 촬영 장소였다. 울산여고, 울산여상, 학성중, 학성고 등의 학생들은 공업탑으로 몰려가서 각자의 기념사진을 찍었다. 각 방향으로 향하는 버스들로 등하교 무렵의 공업탑 로터리는 언제나 학생들로 왁자지껄했고, 버스 정류장 가까이에서 호떡장사를 했던 사람은 몇 년 만에 인근에 4층짜리 건물을 지었다는 소문이 돌았다.
울산의 명물로 자리 잡은 태화강 십리대밭은 학생들의 출입금지구역이었다. 다듬어지지 않은 울창한 대숲은 대낮에도 어두컴컴하여 간혹 불량 청소년들의 아지트가 된다고 하였다.
12가지 맛이 난다는 고래고기는 비릿하고 물컹거렸다. 간혹 꼬들꼬들한 수육도 있었는데 그럴 때면 어머니는 부위가 좋은 고기를 사 왔다고 생색을 내셨다. 장날에 널린 게 고래고기이고 가격도 헐해서 장날이면 한 동안 빠지지 않은 물품이었다. 시로 승격되던 1962년 21만 명이던 울산 인구는 100만이 넘던 1997년 광역시로 승격되었는데, 토박이의 비율은 10퍼센트 정도라는 강의에 ‘울산에는 울산사람이 별로 없다더라’ 고 장에 갔던 어머니가 하신 말씀이 생각났다.
2017년 4월 국립민속박물관에서 열린 울산민속문화의 해의 헤드라인은 ‘나도 울산사람 아잉교, 수용과 포용의 도시, 울산’이었다. 향우회 총무로 일하는 친구의 권유로 개관식 날 참석한 나는 박물관 한쪽 벽에 걸려 있는 플래카드의 글자들이 배타적이라고 느꼈는데, 열 명중 9명을 새로이 울산사람으로 받아들이게 된 토박이들의 정서가 그 제목에 내포되어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천전리 각석과 반구대 암각화를 3년쯤 전에 보았다. 특히 반구대로 가는 길은 야트막하나 기운 있는 산, 무심하게 서 있는 습지의 나무들과 바위 하나에도 어떤 의미가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신석기와 청동기시대의 75종 300여 점의 그림들, 특히 46점이나 되는 고래, 다양한 자세의 사람들과 고래잡이 모습, 망원경을 통해서 희미하게 보이는 대곡천 건너편 바위그림의 정밀한 묘사는 수천 년 후의 사람들에게 그들이 열심히 살았다고 말을 거는 것 같았다.
근대화의 마중물이 되었던 울산의 경기가 조선업의 부진과 자동차의 내수 부진 등으로 예전 같지 않다 한다. 국내 소득 순위 상위를 달리던 울산의 부진은 고향에 남아 있거나, 고향을 떠나 있거나, 타지에서 유입되어 울산사람이 된 사람들 모두의 걱정거리다. 공업도시 울산의 성장 둔화 내지 감소는 지금의 우리나라 경제의 현주소를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마음 한편이 무거워졌다.
첫댓글 꿈소님 오래간만입니다 안녕하셨지요 울산에 대한 강의를 듣기전엔 울산은 귀족노동자들이 많은 공업도시이고 그래서 조금은 삭막한 느낌이었습니다 역사와 문화가 그처럼 풍성하고 다양한 곳 이라고는 생각해보지 못했습니다 꿈소님 글을 읽다가 그림처럼 그곳의 정경이 그려지는군요 덕분에 꿈소님의 고향이 울산이신것도 알았습니다 글 올려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다음달에 뵙겠습니다
울산에서 태어나고 자라서, 제 딴에는 울산을 많이 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별 기대하지 않았다가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속으로 함께 들어갔다 온 느낌입니다.
돌아오는 길에 여전히 고향을 지키고 계시는 여든 다섯의 어머니께 전화를 드렸습니다.
달천광산의 유래가 깊으며 꽤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고....제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럼 중요하고 말고, 칠,팔십년 전 그때 이미 광산에는 전깃불이 들어왔는 걸'
자부심 가득한 어머니의 대답이었습니다.
대략 알던 것을 더 자세하게, 모르던 것을 알게 해 주신 울산박물관장님과 강의를 들을 수 있게 해 주신
도광문화포럼에 감사를 드립니다^^
선생님의 글은 산문으로 읽는 또하나의 강좌인것 같습니다. 해당 박물관에서 좀더 일찍 선생님을 알았다면 전시나 연구가 더 풍성해졌을거란 생각이 듭니다. 장소 하나하나마다 체험의 추억이 서려있는 진솔한 이야기를 들으니, 저는 읽으면서 행복감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좋은글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강의중에 제가 선물받은 풍성한 추억을 말하고 싶었습니다. 울산의 변두리 제 고향도 많이 변했습니다. 논밭 뿐인 뒷 들판에 여러 개의 하청공장들이 성업을 이루더니 몇해 전부터 사람은 떠나고 빈 건물만 엉성하게 남아 있었습니다.
관장님 강의중에 어떤 사진을 가리키며 '그 당시에는 행사때마다 학생들을 동원하였다' ,
저는 무릎을 탁 쳤습니다. 정말로 그때에 각종 행사때마다 교복을 입거나 체육복, 혹은 교련복을 입은 우리들이 동원되었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