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양은 화성지역의 옛 이름이다.
조선조 당시 남양은 행정과 사법권을 부여받은 종삼품의 도호부사가 다스리던 도호부가 있던 곳이다.
양반들을 제외한 신분이 천한 사람들은 남양부사의 재량권에 맡겨진 상황이었다.
대부분 이런 지역에서 무명 순교자들이 많이 배출되었다.
당시 천주교사상은 획기적인 교리로 조선사회를 뒤흔들었다.
반상의 계급 없는 평등한 세상을 알려주었다.
세례를 받음으로서 양반과 상놈 구별이 없어지고 모두 하느님 자녀로 평등하게 대우받았다.
곧 만인평등사상이 봉건적인 조선사회에 들어온 거다.
조정에서는 그야말로 큰 일이 난 거다.
이는 선민주의에 빠져있던 유대인들에게 다가온 예수님 복음말씀과 다를 바 없는 커다란 충격이었다.
양반들은 천주교서적을 통해서 천주교를 받아들였으며 상놈들은 양반들의 행동을 보고 천주를 받아들였던 거다.
실상 천주를 받아들인 계층은 부녀자와 상놈출신들이었다.
더욱이 글을 모르니 느낌으로 받아들였기에 순교현장에서 자신의 목을 아낌없이 내어놓았던 거다.
평생 상놈의 신분으로 사는 것보다는 단 하루를 살아도 사람 답게 살고 싶었던 그들의 울분이 천주교로 향했던 거다.
그래서 박해시대 무명 순교자들이 많이 나온 거다.
상놈이니 무슨 이름이 있겠는가.
호적도 없는 사람들이니 순교자의 수는 헤아릴 수조차 없었던 거다.
단 며칠이라도 사라대우 받고 살았던 것이 그들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게 하였던 동인일 거다.
남양도호부가 있던 곳이 바로 남양성모성지이다.
병인박해 때 수많은 사람들이 잡혀 와서 순교한 순교터이다.
치명일기와 증언록에 의하면 김 필립보와 박 마리아 부부의 순교가 여기서 이루어 진 것이다.
특히 남편이 포졸들에게 끌려가자
“ 남편을 따라가 함께 죽겠다” 다며 자원하여 순교의 형장으로 가서 함께 교수형으로 순교하였다.
병인박해 때 수많은 순교자들이 묵주기도를 바치며 성모님께 의탁하였던 거다.
‘순교자들의 모후’ 로 공경 받는 성모님을 통한 전구를 위해 남양순교 터는 성모성지로 선포되었다.
누구든지 찾아와서 묵주기도를 바치라고 부른다.
성모님께 의탁할 수 있도록 성모님께 봉헌된 순교터이다.
특별히 한복을 입고 비녀를 지른 한국의 성모님으로 성모상이 자리하고 있다.
성모칠고를 묵상하며 순교자들의 모후로 계신 성모님을 향한 구도의 길에 함께 하시기를 기도한다.
성모님이 우리와 늘 함께 해주실 것을 믿는다.
여기 들어와 있는 시간은 하느님과 예수님, 성모님이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의 시간이다.
전 세계 성모발현지에 봉헌된 성모님들이 함께 하실 거다.
포르투갈 파티마 성모님, 파리의 루르드성모님, 멕시코의 과달루페성모님 등이 함께 전구해주실 거다.
찬바람만이 휭하니 부는 남양성모성지에서 묵주기도의 길을 걸었다.
십자가 아래서 예수님의 죽음을 온몸으로 지켜내신 성모님을 묵상하며 찬바람 맞으며 남양성지를 마냥 걸었다.
한 걸음 뛸 때마다 주님의 은총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부부 순교자 박 마리아의 순교 고백이 귓전에 다가온다.
“남편 따라가 함께 죽겠다” 던 그 음성이 신앙의 채찍이 되어 영하의 바람결을 타고 가슴 속을 파고들었다.
추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다가왔지만 병인박해 순교를 생각하니 이는 믿음의 훈련장으로 다가온 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