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자녀의 엄마이고 한 남자의 아내이기도 한 50살의 엘리스, 가정과 직장 일 어느 것 하나 소홀히 하지 못하고 바쁘다. 컬럼비아大 언어학과 교수로 명성을 날리지만, 어느 날 조깅을 하다가 갑자기 멍해지고 자기가 어디로 가야할지 모른다. 영화의 맨 끝 장면이 하얘지는 걸 보면 그녀는 그쪽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영화를 보면서 인상적인 장면이 세 개 있었다. 조깅을 하다가 자기가 지금 하는 일이 무엇인지 몰라서 당황하는 것이 영화를 처음 여는 장면이다. 두 번째로 내 눈을 파고 들어온 것은 치매가 심해졌을 때 살아갈 방법을 녹화하는 장면이다. 자신의 병이 조발성 알츠하이머라서 치매가 금방 닥쳐 올 것을 예상하고, 자신에게 말하는 형식으로 살아갈 방법을 미리 녹화해둔다. 나중에 보니 다른 의도가 있었다. 왜 그래야 했을까? 그리고 세 번째로 인상적인 것은 알츠하이머 환자와 가족, 그리고 의료진 앞에서 자신이 알츠하이머 환자라는 것을 고백하는 연설 장면이 있다. 알츠하이머 환자로 살겠다는 각오를 말하며 사회적 삶을 마지막으로 정리한다. 문장을 순서대로 읽을 수 없어서 노랑 형광펜으로 문장을 지워가며 원고를 읽는다. 그런 치밀함에도 불구하고 실수로 원고를 떨어뜨리지만, 당황하지 않고 원고를 주워 올리면서, “나는 좀 전의 일을 이미 잊었어요.”라고 조크를 해서 청중을 안심시킨다. 이 장면에서 웃을 수도 없고 불쌍해 할 수도 없다. 연설에서 “매일 상실의 기술을 배우고 있습니다.”라고 했던 것처럼 영화는 계속해서 정상(頂上)에 있던 인간이 기억을 잃으면서 무너져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영화는 전체적으로 슬픈 감정을 유발하지 않는다. 그러나 남편과 휴양지에서 안식년을 보내자면서, “내가 나일 수 있는 마지막 시간일 거야”라는 대사는 관객의 눈물샘을 자극한다.
영화 초반에 스토리를 웬만큼 상상할 수 있었다. 그래서 곧 우울하고 슬플 것 같았는데 의외로 어둡지 않고 밝았던 느낌이다. 남편과 가족의 보살핌, 그리고 엘리스 자신의 의지로 볼 때 쉽게 주저앉지 않을 거라는 믿음은 있었다. 그렇지만 영화를 보는 내내 의문이 들었다. 엔딩 크레딧을 보면서 우울하지 않았던 것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보았다. 리처드 글랫저 감독이 루게릭병을 앓으면서 이 영화 제작에 참여했다고 한다. 그의 경험과 의지가 영화를 슬프고 동정하는 쪽으로 흘러가지 않게 붙잡았던 것은 아닐까, 짐작을 했다. 그런데 어떤 방법이었을까? 음향이나 화면 영상의 톤에 미세한 기교가 있었는지 모른다. 그것을 포착하지 못하는 내 안목이 아쉽다. 여과 기술의 미세한 차이에 따라 물맛이 달라지는 것처럼 영화도 그런 것이 있지 않을까?
영화를 보는 관객 모두 마음속으로 엘리스의 병이 멈추기를 바란다. 그렇지만 그녀가 좋아하는 조깅처럼 알츠하이머 치매는 질주한다. 그리고 기억을 잃는 것은 한 인간이 사라지는 것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후반부에 자살 실패 장면이 나온다. 그것을 놓치지 않으면 이 영화는 제대로 본 것이다.
영화를 보면서 20년전, 모교의 교수님이 영화처럼 치매에 걸렸던 것이 생각났다. 교수님이 치매 때문에 학교를 그만두었는데 총장실에 찾아가서 봉급 내놓으라고 난동을 부렸다고 한다. 그런 일 때문에 졸업한지 한참된 나에게까지 그 소문이 들렸으리라. 그분도 조깅을 좋아했었다. 술 담배를 전혀 하지 않고 운동을 좋아했던 분이다. 그러니까 치매는 그런 것과 무관한가보다.
최근에 나도 자주 단어가 기억나지 않는다. 전에 알고 있던 나무의 이름이 생각나지 않을 때가 많다. 얼마전 닥스라는 상표명과 위성류라는 나무 이름이 생각나지 않아서 그걸 떠올리려 애를 먹었다. 닥스 상표명은 다른 사람에게 물어서 간신히 알아냈다. 영화를 보면서 은근히 내가 걱정 된다. 그리고 어떤 분의 시어머니는 약한 치매가 걸렸는데 총각을 좋아한다고 했다. 집안의 재산을 팔아 주려고 해서 걱정이라는 말을 들었다. 주변에 흔한 것이 치매고 그 증상이 심각하다. 영화에서 주인공 엘리스는 차라리 암에 걸렸으면 동정이라도 받지 않을까라며 한탄한다. 이 영화는 특별한 남 얘기가 아니다. 2015년 11월 11일
<참고> 노인성 치매는 주로 노인일 때 발생하고 진행이 느리다. 공부와 운동으로 발생을 줄일 수 있다고도 한다. 초기에 약물치료로 진행을 늦춘다. 주변의 노인들에게서 흔하게 나타나는 치매다. 반면 알츠하이머성 치매는 조발성 치매로 진행이 빠르다. 약물, 유전, 뇌충격에 의하여 발생하며 대책이 거의 없다. 영화 속 주인공은 알츠하이머성, 조발성, 유전성 치매였다. 60세 이전에 드물게 발생하는 치매가 대부분 알츠하이머성 치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