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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화가야자료실 스크랩 제4의 제국 가야 3부 - 철의 전쟁
남전南田 추천 0 조회 51 14.10.17 16:30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최인호의 역사추적 - 제4의 제국 가야

제3부 철의 전쟁

 

 

던져도 던져도 제자리에 돌아오는 부메랑처럼 대성동 고분은 가야 역사 추적에 있어 항상 돌아올 수밖에 없는 원점이다. 이번 역사추적에 첫 번째 열쇠가 중국의 오로도스와 부여로 이어지는 북방민족의 상징 동복이었다. 두 번째 열쇠는 오키나와 인도로 이어지는 남방 해양문화의 상징인 파형동기였다. 대성동 고분의 세 번째 비밀 왜 대성동 고분은 칼을 들어 가야금의 줄을 끊어 버리듯 갑자기 축조가 중단되는가? 동아시아 최강 고구려 오만 군대는 왜 한반도 최남단으로 진격했는가? 전쟁터로 변한 가야. 가야에서는 당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었는가?

 

대성동 고분 최대의 미스터리인 축조 중단의 비밀에 대한 단서는 뜻밖에도 미국에서부터 시작됐다. 당시 나는 전 세계의 심장부인 뉴욕의 타임스 캐어 광장을 거닐고 있었다. 맨해튼의 풍경은 신화 속에 나오는 바벨탑이었다. 하늘에 닿기 위해 쌓아 올리던 바벨탑은 신의 진노로 한 순간 무너졌으니 21세기의 바벨탑이여 신 로마제국이여 끝 갈 때를 모르는 인간의 욕망은 계속 날아오를 것인가. 내가 미국을 여행했던 것은 하버드 대학교의 마크 바잉턴 교수와 만나기 위해서였다. 그는 우리 고대사를 연구하는 사학자로 김수로왕이 부여국에서 내려온 사실을 확인했던 나는 그로부터 부여국의 관한 얘기를 듣고 싶었던 것이다.

 

“중부 만주의 부여에서 시작되어 한반도를 따라 내려가는 (기마민족의) 전통문화 간에는 강력한 연결 관계를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이것은 가야에서도 매우 뚜렷하게 보이고 있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기마 문화는 바다를 건너 일본에까지 전달되었습니다. 확실한 것은 당시 한반도 남부에 전쟁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적어도 모두에게 환영받지는 못했습니다. 고구려는 이를 공격의 구실로 이용하였는데 표면적인 이유는 신라로 접근하기 위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바로 침입자들(倭)이 있는 곳이었습니다. 그래서 광개토대왕은 남쪽으로 출병할 수 있었습니다. 성공적으로 왜를 무찌르고 장기적인 한반도 내의 정치적인 역학관계를 재편성 했습니다.”

 

부여를 전공하는 국내외 학자들이 많이 있지만 구지 바잉턴 교수를 찾아갔던 것은 국제적인 시선으로 본 부여의 객관적인 평가를 듣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나는 뜻밖의 사실을 전해 듣게 됐던 것이다. 즉 대성동 고분의 축조가 중단됐던 5세기 초반 한반도에서 대전쟁이 일어났다는 것이었다. 이 전쟁으로 광개토왕은 한반도의 정치 질서를 장기적으로 재편성했다는 것이었다.

 

바잉턴 교수가 말했듯 대전쟁에 대한 내용은 그로부터 내 마음속에 화두를 자리 잡게 됐다. 대성동 고분 최대의 미스터리는 다른 가야의 고분들과는 달리 5세기 초반에 돌연 축조를 중단하고 사람들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그렇다면 왕릉의 언덕이라고 불리우던 대성동 고분에 묻혔어야할 가야의 왕들은 어디로 사라졌단 말인가. 그것은 어쩌면 바잉턴 교수가 말했던 전쟁 때문이 아니었을까. 우리민족 영웅 광개토대왕은 왜 남쪽으로 출병해 정치 질서를 재편했던 것일까. 고분 축조 중단의 비밀을 밝혀내기 위해서는 광개토대왕이 전쟁을 일으켰던 5세기 초로 타임머신을 타고 돌아가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지난여름 나는 고구려의 두 번째 왕도였던 국내성으로 찾아갔다. 1987년 나는 왕도의 비밀을 취재하던 도중 체포돼 강제추방 당하기도 했으므로 이번엔 6미리 카메라를 들고 관광객의 신분으로 여행을 떠났던 것이다. 그러므로 카메라가 흔들리는 것을 이해해 주길 바란다. 처음으로 만난 것은 장군총. 동양의 피라미드라 불리우는 이 장군총은 장수왕의 무덤으로 10년 전 보다 무덤을 지탱하는 기석들이 파손돼 한 눈에도 많이 퇴락돼 있었다. 그러나 내 목적지는 광개토대왕의 석비. 높이 6.4m로 동양최대의 능비는 장수왕이 414년 아버지의 위업을 기리기 위해 만든 공적비다. 우리민족 국보 1호인 광개토왕의 석비를 다시 본 순간 내 가슴은 형용할 수 없는 감동으로 물결치고 있었다.

 

광개토대왕비.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많이 영토를 확장한 한국의 알렉산더 광개토대왕의 기념비. 그러나 10년 만에 찾아간 석비는 이전과는 달리 사면에 두터운 유리로 보호막을 치고 있었다. 나는 바잉턴이 말했던 광개토대왕의 출병 기록이 비문 어딘가에 있는가를 주의 깊게 살펴봤다. 그러나 광선의 굴절과 천년 세월의 마모로 간신히 흔적만 남아 있을 뿐 글씨는 판독할 수 없었다. 눈이 내리는 정원을 바라보면서 나는 지난여름에 쓰라렸던 기억을 떠올렸다. 그렇다면 내 역사추적은 여기에서 중지되는 것일까. 아니다. 실제의 광개토대왕비에서 출병의 기록을 확인할 수 없다면 제2의 대안을 강구해야 할 것이다. 그것은 국립중앙박물관을 찾아가는 길이었다.

 

 

다행스럽게도 중앙박물관에는 실물크기의 광개토대왕비의 탁본이 전시돼 있었던 것이다. 탁본을 확인하기에 앞서 나는 광개토대왕과 관련된 중요한 유물을 먼저 답사했다. 그 유물은 경주에 호우총에서 발굴된 것으로 상국 고구려가 신라에게 내려준 하사품일 가능성이 높다. 이 청동호우 밑받침에는 ‘을묘년 국강상 광개토지호태왕 호우십’이라는 돋을새김한 글자가 새겨져 있다. 을묘년은 광개토대왕이 죽은 3년 후 장수왕에 의해서 만들어진 제기인데 놀랍게도 광개토대왕 비문을 쓴 글씨체와 똑같다. 나는 마침내 탁본 앞에 섰다. 광개토대왕비는 사면에 모두 글씨를 새긴 사면석비. 따라서 탁본은 모두 거대한 실물크기의 넉장이었다. 길이가 6m가 넘는 것이었으므로 그 글자를 한자 한자 확인하는 것은 마치 난해한 암호를 해독하는 일처럼 어려운 일이었다.

 

천천히 제2면의 탁본으로 시선을 옮겼을 때 수많은 비문 중에서 유독 몇 자의 글씨가 내 눈을 강하게 잡아당기는 것을 느꼈다. 나는 숨을 멈추고 그 글자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있었다. 나는 숨조차 쉴 수 없는 긴장감을 느꼈다. 과연 있었다. 그곳에는 광개토대왕의 출병기록을 새긴 사실이 이렇게 새겨져 있었다. ‘십년경자교견보기오만1)왕구신라’. 나는 드디어 광개토대왕이 신라를 도와 출병했던 역사적 사실을 비문을 통해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이다. 비문을 통한 전쟁의 기록은 이렇게 이어진다. 신라의 구원요청을 받은 대왕은 사백년 군사 오만 명을 보냈다. 배후로부터 추격해 임나가라의 종발성에 이르렀다.2) 왜군이 크게 무너지며 도망했다. 404년 왜가 백제와 화통하여 대방에 침입하니3) 적의 길을 뚫고서 휩쓸어 버리듯 공격하니 왜군이 궤멸하였다. 비문의 기록을 요약해 정리한 내용을 보면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된다. 그렇다. 400년과 404년. 2차에 걸쳐 일어난 대 전쟁은 고구려와 신라의 대륙연합군과 백제, 가야 그리고 왜의 해양 동맹군이 한반도의 세력판도를 놓고 맞서 싸운 우리나라 최초의 세기의 대전이었던 것이다.

 

 

임나가라. 비문은 가야를 임나가라라고 부르고 있다. 그리고 고구려 군은 추격해 임나가라의 종발성에 이르렀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 종발성의 위치가 어디인가는 아직 확인되진 않았지만 나는 지금도 남아 있는 김해의 가야식 산성인 분산성에 올라가 금관가야의 옛 왕도를 바라봤다. 그렇다면 나는 금관가야의 도성을 굽어보면서 생각했다. 광개토대왕의 오만대군은 당시 만에도 천하를 호령하던 무적의 정예군들이었다. 비록 패하긴 했지만 고구려 대군에 맞선 가야의 군사들 역시 막강한 세력이 아니었을까?

 

가야의 막강한 군사력을 엿볼 수 있는 증거는 오늘날에도 남아 있는 각종 무기와 무구들이다. 무기는 전투 시 상대방을 공격하기 위한 칼, 창, 도끼, 활과 화살로 대표되며 무구는 상대방의 공격으로부터 신체를 방어하는 갑옷과 투구 등으로 대표된다. 특히 가야의 투구와 갑옷은 명품이다. 그 뛰어난 제철기술로 인해 가야의 무구들은 다른 삼국의 그것들을 압도한다. 갑옷에도 새 모양의 장식을 달아 주술적이며 장식적인 요소를 가미 뛰어난 철기 제작기술을 마음껏 뽐내고 있다. 그뿐인가 군사가 입는 갑옷은 물론 말의 신체를 보호하는 갑옷과 투구도 제작되었음은 가야의 철기가 얼마나 풍부했는가를 보여주고 있다. 중무장한 말은 오늘날의 장갑차 구실을 했을 것이다. 이와 같이 가야는 철을 만들고 철제품을 만드는데 있어 타에 추종을 불허했던 철의 왕국이었던 것이다.

 

 

대성동 고분에서도 엄청난 양의 철제 갑주류와 환두대도, 철도끼와 같은 무기 그리고 마구들이 출토됐다. 이러한 갑주류는 북방유목민족들의 기승용 무구에 계보를 잇는 것으로 가야 지역에 북방의 기마민족 문화가 유입됐음을 증명해주고 있는 유물인 것이다. 가야가 철의 왕국으로 불리울만큼 고도의 철문명을 보유했던 국가라면 과연 가야 지역에서는 질 좋은 철광석이 나오는 광산이 있어야 할 것이다. 나는 김해 대동면에 있는 김해 철광을 찾아가보기로 했다.

 

“쇠를 만들고 옛날 어른들이 손으로 다 캐냈습니다. 전부 광산입니다. 여기저기 전부 다 파냈습니다.”

 

할머니의 말처럼 산기슭에는 수많은 폐광이 있었다. 일제 강점기까지만 해도 철을 캤다고 하는 광산 안에는 어둡고 캄캄했다. 과연 광산의 천장은 자철석을 함유한 단단한 석류석으로 이루어졌다. 나는 그 석류석을 손으로 더듬어 보았다. 순간 손끝에서 전류가 흘렀다. 철광석을 채취하던 천년의 가야인의 손길과 마주 닿은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이무렵 김해시 진영읍 여래리에서는 가야 역사상 중요한 유적이 발굴 조사되고 있었다. 지금까지 가야는 철의 왕국이란 대명사로 불리울 만큼 고도의 철기문명을 자랑하고 있었지만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뚜렷한 제철유적을 발굴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여래리에서 제철유적이 발견됐던 것이다.

 

 

철을 만들어내는 송풍관과 단열호 그리고 중요한 광석 중에 하나인 자철광석, 제철을 할 때 나오는 불순물의 잔재인 슬래그와 더불어 탄요가 나왔던 것이다. 특히 탄요(숯가마)는 제철관련 부속용으로 철광석을 녹이기 위한 숯을 굽는 가마다. 체계화되고 분업화된 제철집단이 존재하고 있었음을 증명하는 김해지역에서는 처음으로 확인된 제철유적이었던 것이다.

 

손명조 제주박물관장

“대규모 철 생산량의 기지로 김해가 알려져 와 있습니다. 그러나 정작 이것을 알 수 있는 실질적인 철 생산 유적이라든지 철과 관련된 철기제작 관련 유적과 같은 이런 유적들이 아직까지 확인된 바 없습니다. 그런 와중에 이번 여래리 유적은 그런 제철과 관련된 유적이 다량으로 확보되었다고 그와 관련된 각종의 슬래그라든지 손풍관 이런 것들이 나와 주었기 때문에 이 지역의 철 생산, 철기제작을 알 수 있는 아주 중요한 유적들이 출토된 아주 중요한 유적입니다.”

 

그렇다면 옛 가야인들은 어떠한 방법으로 철을 생산했던 것일까? 예나 지금이나 제철기술은 문명의 척도. 다른 삼국보다 어째서 가야가 철의 왕국으로 불리는 만큼 고도의 생산기술을 보여하고 있었던 것일까? 나는 전통적인 방식으로 철을 제작하고 있는 곳을 찾았다. 그곳에선 직접 점토로 용광로를 설치하고 거기에 참숯만을 넣어 가야의 제철현장을 재현했다.

 

이은철 씨

“광석이 충분해야지만 문명이 발달하는데 광석은 아무 곳에나 매장돼 있는 것이 아니고 어떤 특정한 지역에 매장이 돼 있는데 가야 지역에 경남, 경북지역에 많이 분포돼 있다. 김해 물금광산이 자철광이 나오고 그 다음에 석회성분. 칼슘 성분인데 그것은 석회석이나 자연에서 나오는 것은 이제 조개껍질이죠. 제철작업에서 쇠를 불순물 같은 것을 띄우기 위해서 조개 같은 칼슘성분이 함유된 것을 넣게 된다. 지금도 쓰고 있다.”

 

이은철 씨의 말처럼 조개 속에 들어 있는 석회성분은 송풍관으로 들어가는 끊임없는 바람과 어울려 비등점을 향해 치닿는 용광로 속에 뜨거운 화염에 의해 먼저 녹아내린다. 석회성분을 포함해 먼저 녹아내린 불순물을 슬래그라고 부른다. 이런 일련의 과정을 통해 최초의 철이 생산되는 것이다. 이는 괴련철이라 불리우는 아직 불순물이 많이 남아 있는 잡쇠 덩어리다. 잡쇠 덩어리는 다시 불에 넣고 달구고 두드리기를 반복해야만 비로소 단단한 강철로 거듭나는 것이다. 뛰어난 제철기술은 바로 이러한 제련기술과 차를 두르려 단련시키는 단야기술이 합쳐져야만 가능한 고도의 정밀작업인 것이다. 가야인들의 쇠를 다듬는 기술은 이와 같이 가히 천재적인 것이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철광석은 순도 100%의 결정체, 철정을 뿜어낸다. 철정 이것은 철광석의 보석이자 철의 다이아몬드인 것이다. 불. 희랍신화의 영웅 프로메테우스가 회양나무 줄기를 가지고 천상에 불을 붙여 몰래 지상에 내려와 인간에게 준 최고의 선물 불. 가야인들이야말로 타오르는 불 속에서 생애 불꽃을 창조했던 불의 예술가들이었던 것이다.

 

가야인들이 만든 쇠덩어리 철정은 왜를 비롯해 중국의 대외 창구인 낙랑과 대방에 두 곳으로 수출되던 가야 제1의 특산품이었다. 외국인들은 철정을 사들여 그것을 다시 녹여 원하는 제품을 가공할 수 있었다. 철정은 철제품의 소재나 화폐의 대용품으로 사용될 만큼 고역에 있어 큰 비중을 차지하던 중요한 재원이었다. 그래서 가야인들은 계산의 편의를 고려해 크기와 중량까지 규격화했다. 이처럼 활발한 교역으로 금관가야는 중국의 선진문물을 수입할 수 있었으며 또한 중계무역을 통해 강력한 경제대국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이다.4)

 

이러한 중계무역이 가능했던 것은 무엇보다 한반도의 남단, 왜와 연결되는 바닷가에 위치하고 있던 지정학적 요인도 컸다. 지금의 김해평야 일대는 가야시대에는 바다 물이 넘실거리는 바닷가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금관가야의 왕궁 터는 어디였을까? 아직까지 정확한 위치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학자들은 금관가야의 왕궁이 오늘날의 봉황동 유적지에 있었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이는 가락국기에 나오는 수로왕의 궁궐 축성 기록이 바로 봉황동 구릉일대의 지형과 일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이곳 일대에서 최근 토성의 유적이 나온 것은 그러한 추정에 신빙성을 더해주고 있다.

 

원래 수로왕은 가야를 건국한 후 임시 궁궐을 짓고 살았다. 그렇다 서기 43년 수로왕이 봉황동 일대를 궁궐터로 점재하고 축조를 시작했다. 1500보 둘레의 나성과 궁궐, 일반 관사 건물, 무기고와 식량창고를 지을 땅을 마련하고 1년 수개월 만에 궁성을 완공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금관가야는 태평성대를 누리게 된다. 특히 불을 다스리는데 최고의 명인이었던 가야인들은 뜨거운 온도의 불을 창조하는 첨단기술로써 고부가 가치의 덩이쇠를 생산할 수 있게 됐다. 가야가 철의 왕국임을 드러낸 암시는 곳곳에서 발견된다. 우선 대왕 金首露의 이름과 나라이름 金冠加耶 그리고 지명이름 金海에서의 金 즉 철이 일치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이는 왕과 나라와 땅이 모두 철에 있어 삼위일체를 이르고 있음을 드러내는 신비한 키워드인 것이다. 그러므로 금관가야는 가야제국의 종주국으로 부상할 수 있었으며 가야의 앞바다는 김해 즉 철의 바다로 번영을 누리게 된다. 그렇다. 가야국의 앞바다는 철의 바다였으며 철을 통해 중국과 왜의 중계무역을 연결하는 국제무역의 커다란 항이었던 것이다.

 

 

이곳 일대가 왕궁 터임을 입증하는 또 하나의 유적이 봉황동 외곽에 자리 잡고 있다. 그것은 패총이다. 패총은 고대인들이 조개를 잡아먹은 뒤 버린 껍데기가 쌓인 것을 말한다. 가락국기에 왕궁 터에 식량창고를 지었다는 기록이 있는 것을 보면 이 유적은 궁성에 사는 가야인들이 식량을 먹고 버린 음식쓰레기 매립지였던 것이다. 과연 5m가 넘는 엄청난 두께에 조개무지를 확인하는 순간 나는 문득 제철과정에 투입하는 조개껍질이야 말로 최고의 불순물 제거제라는 이은철의 말을 떠 올릴 수가 있었다. 가야가 차의 왕국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이처럼 무진장의 석회성분을 지닌 조개껍질 때문은 아니었을까? 또한 패총은 그 당시 가야인들의 생활을 엿볼 수 동물들의 뼈, 실을 뽑아내는 방추자 등 각종 생활용구들과 탄화미등이 출토됐던 보물창고인 것이다.

 

 

패총에서 발굴된 최고의 유물은 화천(貨泉). 이는 제작년도가 분명하며 1920년 이마니시리 류5)가 펴낸 보고서 속에도 그 사진이 실려 있다. 그러나 이 귀중한 유물은 사진 속에만 존재하고 있을 뿐 오늘날엔 행방불명이다. 화천이 실제로 통용된 것은 서기 14년부터 40년까지의 20여년 정도다. 수로왕이 가야를 건국한 것은 서기 42년. 그러므로 패총에서 발굴된 화천은 가야를 건립했을 무렵엔 벌써 이곳 일대가 국제무역의 중심지라는 사실을 여실히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없다. 패총에서 출토된 화천은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나는 행방불명이 돼 버린 실제 화천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화천을 중국에서 제작된 그 무렵 만국통용의 국제화폐. 나는 급히 중국의 심양으로 달려갔다. 심양의 박물관에서 마침 중국의 고대 화폐전이란 특별 전시회가 열리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했던 것이다. 과연 전시실 안에는 특별전답게 원시화폐였던 조개화폐에서부터 시작된 각종 화폐들이 진열돼 있었다. 연대별로 총망라된 각종 화폐들의 변천은 인류의 상업발달과 정확하게 정비례한다. 그러나 내 마음은 오직 하나 화천에만 집중돼 있었다. 내가 이곳에 온 것은 패총에서 출토됐던 화천을 확인하기 위함이 아니었던가. 과연 화천은 있었다. 겉쪽에 화와 천의 두 글자가 선명하게 새겨진 청동화폐인 화천은 분명히 그곳에 있었다. 화천이 처음으로 주조된 것은 서기 14년. 이 화폐은 전한 말의 정치가이자 신왕조의 건국자였던 왕망이 화폐제도를 개혁해 주조했던 화폐다.

 

 

왕망의 죽음과 신나라의 멸망으로 인해 이 화폐는 20여년 밖에 사용되지 않았던 수명이 짧은 화폐였다. 그 화천이 가야의 조개무지에서 출토됐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여기서 내 역사추적은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된다. 나는 서기 400년 오만의 고구려 군사가 가야, 백제, 왜의 연합군과 대회전을 벌였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 전투에서 패한 금관가야는 실질적으로 멸망하게 된다. 지금까지 나는 이 전쟁이 세력판도를 넓히려는 정치 전쟁이라고만 생각해 왔었다. 그러나 중국과 왜 사이에 중계무역을 상징하는 화천이 발견되므로 당시 가야의 경제적, 국제적 가치를 새삼 크게 느끼게 됐다. 그렇다. 이 대회전은 정치적인 전쟁이 아니라 바로 경제 전쟁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그 무렵의 왜는 어째서 그 경제 전쟁에 뛰어들어 참전할 수밖에 없었던 것일까. 나는 이 의문을 풀기 위해 화천을 쫓아 삼국지의 해로를 따라 새로운 추적을 시작했다.

 

 

삼국지 위지 왜인전6)은 이 무렵의 왜의 위치를 비교적 상세하게 기술(記述)하고 있다. 대방군에서 지금의 김해지역을 지난 왜에 이르는 해로가 바로 화천이 통용됐던 무역로임을 증언하고 있는 것이다. 가야에서 하나의 바다를 건너 대마국에 이르는데 다시 대마도에서 바다를 건너가면 오늘날의 이끼섬이 나온다. 이끼섬이 수평선 너머로 보이는 바닷가에는 가카라시마가 있다. 서기 462년 일본서기에 무령대왕의 탄생지로 기록된 유서 깊은 섬이다. 이 섬에 해안은 삐죽 바닷가로 튀어나온 작은 암초가 있다. 그 위를 성난 파도에 흰 분말이 넘실거리고 있다. 이 바위의 이름은 태반의 코. 영웅이 태어난 태반임을 암시하는 바위다. 실제로 섬 안엔 오비야란 포구가 있다. 오비는 고대 일본어로 여성의 허리띠를 가리킨다. 오비야엔 왕비가 허리띠를 풀고 무령대왕을 해산했다는 작은 동굴이 있고 태를 자르고 태어난 아이 몸을 씻었다는 신성한 샘물도 있다. 지금도 섬사람들은 동굴에 작은 신전을 만들고 무령대왕의 넋을 기리고 있다. 섬사람들은 이곳이 무령대왕의 탄생지라 해 주군의 섬 즉 주도라고 부르고 있다.

 

 

또다시 바다를 건너 천 여리를 가면 가라츠에 이른다고 한다. 가라츠는 당진(唐津)이다. 우리나라에도 있는 이 지명은 당 즉 대륙으로 가는 뱃길에 있는 중요한 항구임을 암시하고 있다. 말로국에서 다시 동쪽으로 가면 노국이 있다. 노국은 오늘날의 후쿠오카. 하카다만의 시카노시마에는 1784년 2월 한 농부가 밭갈이를 하다가 발견했다는 금인의 출토지가 기념공원으로 꾸며져 있다. 여기서 나온 금인은 처음엔 위조됐다는 소문도 있었지만 1981년 강서성에서 출토된 유물이 이 금인과 같은 공방에서 제작됐다는 사실이 밝혀지므로 논란은 종지부를 찍게 된다. 이로써 서기 57년 노국왕이 사신을 보내 황제로부터 금인을 받았다는 기록이 사실로 밝혀지게 됐으니 이 금인은 일본에 국보 중 국보로 손꼽히고 있다.

 

 

더욱 놀라운 것은 다른 유물이 전시된 진열장에서 내가 중국에서 본 화천이란 화폐를 발견한 것이었다. 그렇다면 내가 따라온 삼국지의 해로는 동일한 시기에 동일한 무역활동을 벌였던 바다의 실크로드라는 사실이 명확하게 밝혀지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나는 여전이 미궁에 빠져 있었다. 그것은 아직 왜의 실체를 꿰뚫어 보지 못한 이유 때문이었다. 과연 왜의 맹주는 어디였을까. 후쿠오카 공원에서 지도를 훑어보던 나는 한 지점에서 시선이 멎었다. 그것은 가야산이란 지명이었다. 가야산. 어째서 가야의 이름이 지도위에 명기돼 있는 것일까. 나는 그 이유를 오래 전부터 알고 지냈던 규슈대학교의 니시타니 타다시 교수에게 물어보기로 했다.

 

“규슈 지방에는 가야뿐만이 아니라 한국식 지명이 많습니다. 약간 남쪽에 시라기(新羅)도 있고, 가야산도 있고... 가야산의 양쪽에 고인돌이 있습니다. 일본의 고분시대, 즉 가야 시대입니다. 그 때 이도국이 있었던 지역을 발굴하면 수혈 주거지에서 5세기 중엽의 가마터, 부뚜막과 가야의 토기가 발견됩니다. 그래서 가야에서 대마도, 이키, 카라츠, 큐슈 본토로 이어지는 길에서 이도는 가야 교류의 거점이었습니다.”

 

가야산이 있는 이곳은 오늘날의 마에바루시를 중심으로 한 지역으로 왜인전엔 이도국으로 지칭하고 있다. 이곳엔 수많은 가야의 흔적이 남아 있다. 우선 가야산과 같은 지명에서부터 게야, 가후라, 가후리 등 가야에서 파생된 지명이 곳곳에 남아있다. 그뿐인가? 이도국엔 다른 지역과는 달리 남방식 고인돌이 수없이 산재돼 있다. 이미 김해의 구지봉에서부터 남방식 고인돌을 발견했던 나는 동일한 형태의 지석묘가 출현하고 있는 이도 지역을 본 순간 이곳이야 말로 내가 찾던 왜의 주체 금관가야가 가야제국의 맹주였듯 이도국이 30여개의 이르는 일본 고대국가의 종주이자 가야와 대방에 이르는 바다 실크로드의 전진기지임을 확신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일본학자들은 이 지석묘에서 출토된 여러 가지 유물을 추정해 볼 때 무덤의 주인공이 한반도에서 건너간 도래인에 틀림없다고 인정하고 있다.

 

 

이러한 확신은 이도 박물관을 찾아 갔을 때 더 굳어졌다. 이도 국의 한 고분에서만 무려 총 마흔 개의 동경이 출토됐고 또한 일본 최대의 청동거울이 나온 것이다. 청동거울은 예로부터 강력한 왕권을 상징하는 신기중의 하나다. 그러므로 이도국이야말로 중국과 한반도 지역을 연결하는 외교의 창구였으며 실제로 외국에서 온 사신들은 항상 이도 국에 머물렀고 이도 국엔 이들 국빈을 대접하는 영빈시설까지 갖춰져 있었던 것이다. 내게 있어 더 큰 수확은 바로 이 이도 국에서 화천을 발견했다는 사실이었다. 한 두 점이 나오는 다른 지역과는 달리 이도 국에서는 화천이 대량으로 출토됐던 것이다. 찾았다. 나는 화천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나는 마침내 대방과 가야 그리고 이도 트라이앵글의 한 꼭지점인 이도 국에서 화천을 확인함으로 비문에 나오는 왜의 실체가 어디인가를 밝혀낼 수 있었던 것이다.

 

나시타니 타다시 규슈대학 명예교수

“또 하나의 중요한 문제가 있습니다. 이것도 큽니다만... 당시 일본은 철을 만들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가야에서 철을 수입해서 여러 가지 철기를 만들었습니다. 즉 철 원료를 수입해서 그 철로 철기를 만든 것입니다. 그런 제철, 철기 제작 기술은 가야에서 온 것입니다.”

 

니시타시 교수의 말처럼 일본은 가야에서 덩이쇠를 수입해서 여러 가지 철제품을 만들었을 것이다. 또한 가야의 선진기술을 받아들였을 할 것이다. 그리하여 일본은 세계적인 철의 왕국으로 성장할 수 있게 되었으니 1901년 용광로에 처음으로 불을 붙인 야하다 제철소는 바로 그러한 일본 근대화의 상징이다. 지금은 야하다에서 이름이 바뀌어 신일본제철로 명칭이 바뀐 이곳에서 2007년 가을 성대한 축제가 열렸다. 근대식으로 제철을 시작한 것은 2007년도를 기점으로 정확히 150년 전이었던 것이다. 150주년을 기념해 이곳에선 전통적인 방법으로 철을 제작하는 축제가 벌어진 것이었다.

 

점토로 만든 상자 모양에 낮은 화로에 사칠과 목탄을 넣고 송풍기를 통해 바람을 불어 넣어 철을 만들어내는 일본 고유의 제철기술. 그러나 이런 일본 고유의 제철기술은 결국 내가 여주에서 본 가야식 제철 기술에 아류에 불과했던 것이다. 다른 것이 있다면 일본에서는 이러한 방법을 타타라 제철공법이라고 부른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여기에서 사용하는 타타라라는 단어는 일본어로는 도저히 풀려지지 않는 수수께끼의 용어인 것이다. 결국 타타라는 불에 담근 쇠를 두드리고 두드려 강철을 만들 때 망치소리를 표현한 가야식 의성어라고 추정되고 있는 것이다.

 

사카이 히데타카 기타규슈 이노베이션센터 관장

“‘철은 국가를 이룬다’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철의 문화의 어머니라고 생각합니다. 철없이는 문화도 문명도 발전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철이 원점이 되어 지금의 문명이 탄생한 것이 아닐까요. 이 점을 생각하면 한국에서도 마찬가지로 타타라 제철에서부터 시작해 지금의 용광로를 중심으로 훌륭한 제철업이 지금 전개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는 한국에서 타타라라는 기술이 일본으로 전해져 그것을 바탕으로 지금의 용광로 방식으로 대성하게 된 것입니다.”

 

 

6세기 후반 가야의 제철 문명은 본격적으로 일본으로 전승된다. 일본의 외카야마 박물관에는 한반도에 제철기술에 필적하는 마구들이 국보로 지정돼 보관되고 있다. 복천동 고분에서 발굴된 가야식 마구의 백미라고 할 수 있는 말의 투구에 견줄만한 유물들이 쌍둥이처럼 일본에서도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일본에서 이전에 볼 수 없었던 우수한 제철기술은 어디에서 비롯됐을까. 그렇다. 바로 가야의 자리다. 가야의 장인이다. 가야의 제철 기술만이 이와 같이 우수한 갑옷을 만들 수 있는 것이다. 철의 무역로 화천의 무역로를 따라 건너온 가야의 장인이 만든 철기 제품들인 것이다.

 

 

나는 일본에서의 역사추적을 끝내고 바다에 나가 보았다. 나는 지금까지 비문에 나오는 왜의 실체를 밝히기 위해서 삼국지가 가르치는 해로를 따라 이곳까지 온 것이었다. 그리하여 나는 마침내 그 해로가 다름 아닌 철과 화천의 길이며 무역의 실크로드임을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 순간 나는 깨달았다. 광개토대왕은 이 국제무역항을 장악하기 위해 백제와 가야, 왜 삼국동맹의 고리가 되는 철의 무역로를 끊기 위해 오만의 대군을 보냈던 것이다. 대륙 간 봉쇄. 마치 영국을 고립시키기 위해서 나플레옹이 취했던 극단적인 처방처럼 가야와 백제 그리고 왜는 대륙으로부터 고립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 서기 400년 고구려와 신라의 대륙군과 백제, 가야, 왜의 해양군과의 대격돌은 생존을 위한 경제 전쟁이었으며 결국은 철의 전쟁이었던 것이다.

 

역사추적을 끝낸 나는 다시 대성동 고분을 찾았다. 한 겨울의 대성동 고분은 동면기에 접어들고 있었다. 드디어 나는 대성동 고분의 미스터리를 밝혀낼 수 있었다. 대성동 고분 최대의 미스터리는 바로 축조중단. 5세기 초반 돌연 중단되므로 제4의 제국 가야는 우리나라 역사 속에서 아틀란티스 대륙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나는 대성동 고분위에 서서 장엄하게 쓰러지는 태양을 보면 생각했다. 일찍이 괴테는 노래하지 않았던가. 삼천년 전의 역사에서 배울 것을 모르는 자는 아는 것이 없이 암흑 속에 누워있는 것과 같다. 그날 그날을 살아간다 하더라도...

 

괴테의 말은 진리다. 역사 속에서 배우지 못하는 사람은 사는 것도 아니고 죽은 것도 아닌 산송장의 미라인 것이다. 보라 21세기는 다가왔다. 또 다시 우리나라에 해양세력과 대륙세력의 대충돌이 벌어지고 있다. 이러할 때 우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 선택은 우리 자신에게 달려 있다.

 

* 저작권은 KBS 한국방송에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절대로 상업적인 용도로는 사용을 금함을 알려드립니다. 절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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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十年庚子敎遣步騎五萬 - 400년에 왕이 보병과 기병 5만을 보내(신라를 구원하게 하였다.)

2) 背急追至任那加羅從拔城

3) 四十年甲辰 而倭不軌 侵入帶方界...

4) 나라에서 철이 나와 한, 예, 왜, 낙랑, 대방에서 모두 가져간다. 철을 화폐처럼 사용한다.

5) 신라·백제 등 한국고대사를 연구했다. 1903년 도쿄제국대학[東京帝國大學] 사학과를 졸업하고 대학원에서 조선사를 연구했다. 1906년 한국에 건너와 신라의 고도(古都) 경주를 답사했다. 1914년 교토제국대학[京都帝國大學] 조교수를 거쳐 교수가 되었다. 그후 조선총독부 고적조사위원에 임명되어, 재직중에 〈단군설화 檀君說話〉·〈백제국도한산고 百濟國都漢山考〉 등 많은 논문을 발표했다. 특히 평안남도 용강군에 있는 점제현신사비를 발견하고 그에 관한 논문인 〈열·대·패 삼수고 洌帶浿三水考〉를 발표했다. 한편 한국 사서(史書)를 연구·조사하여 안정복(安鼎福)이 주석을 단 중종본(中宗本) 〈삼국사기〉를 발굴하기도 했다. 1922년 문학박사 학위를 받고 그후 2년간 중국에 유학, 베이징대학[北京大學]에서 조선사를 강의했다. 1925년 조선총독부 조선사편수회 위원으로 임명되었고, 1926년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가 설립되자 조선사 교수가 되었다. 저서로는 〈신라사연구〉·〈백제사연구〉·〈조선고사의 연구 朝鮮古史の硏究〉·〈조선사의 간 朝鮮史の?〉 등이 있다. (원문출처 : http://enc.daum.net/dic100/contents.do?query1=b17a3253a)

6) 진수가 쓴 삼국지의 일본에 대한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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