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테의 돈으로 세상 읽기 75
보험사기로 본 자화상
보험사기가 극성이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작년 보험사기로 적발된 사람이 무려 11만 명에 달한다. 돈으로는 1조원이 넘는 규모다. 드러나지 않은 암수를 고려하면 훨씬 많은 돈이 샌다. 보험사들 추산으론 한 해 4조~5조원 정도가 보험사기로 지출된다고 한다. 여기에 더해 보험 관련 범죄는 계속 늘어나고 있다.
보험사기도 급이 있다. 이른바 교통사고 ‘나이롱’ 환자는 너무 흔해 빠져 보험사기 축에 끼지 못한다. 조직을 만들어 법규 위반 차량을 골라 고의사고를 일으키는 정도가 되어야 보험기술자 소릴 듣는다. 이 같은 수법으로 100차례 가까이 범행을 저지른 전문사기범도 있다.
보험범죄에 대한 처벌은 관대하다. 보험금을 노리고 배우자나 친족을 살해한 범인들에게까지 얼굴을 가려준다. 유기징역은 20% 남짓으로 다른 범죄에 비해 턱없이 낮으며 대부분 벌금형에 그친다. 범죄자들로서는 거저먹는 수익사업이다. 보험사기만이 아니다. 보이스피싱을 비롯해 사기죄에 대해 법원의 판결이 지나치게 너그럽다는 비난이 있다. 늦었지만 대법원 양형위원회가 이들의 처벌을 강화하기 위해 양형기준을 손본다고 하니 엄정한 법 집행이 이뤄지길 바란다.
어려움에 부닥친 사람을 돕는 보험의 역사는 오래되었다. 선사시대에도 집단구성원이 병들거나 다쳤을 때 공동으로 도와주었다. 언젠가 자신이 같은 처지가 되면 보상받기 위해서다. BC3세기 경 그리스에서는 오늘날의 생명보험과 비슷한 에라노이(Eranoi)가 있었고 로마 제정시대에 조직된 콜레기아(Collegia Tenuiorum)는 하층민들의 상호부조 성격의 조합이었다고 한다. 사회적 보험의 기원이 상호부조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중세를 거쳐 근대적인 생명보험체계를 처음으로 만든 곳은 영국이다. 해양 문명의 중심이 된 영국은 1870년에 ‘생명보험주식회사법’을 제정하여 보험산업의 초석을 놓았다. 이때 설립한 에퀴타블(Equitable) 보험사는 오늘날 생명보험의 토대가 된 제도를 도입했다. 우리나라의 보험 역사도 짧지 않다. 여러 사람이 돈이나 곡식 등을 추렴하여 필요한 사람에게 모아주는 주는 계(契)는 삼한 시대부터 지금까지 이어져 온다. 카톡으로 배달되는 곗돈(부조금) 통지서는 까딱하면 잊어 낭패 보지만, 계원들이 둘러앉아 됫박질하고 돈을 거두는 계야말로 가장 듬직한 보험이었는지 모른다. 단지 복잡한 현대사회에서는 공정한 갹출과 보상을 대행하는 시스템이 필요했고 그 일을 보험회사가 하고 있다.
인간을 호모 프로스펙투스(Homo Prospectus)라고도 한다. 미래를 예측하는 능력이 있어야 지혜가 생긴다. 인간은 삶의 여정이 불확실의 연속이라는 인식, 내일 사냥을 하지 못해 굶을 수도 있다는 생각으로 문명을 건설했다. 하루 양식에 만족하는 원숭이는 미래란 단어를 모른다. 원숭이가 사는 약육강식의 밀림에서는 동족이 가장 강력한 적이 되기 일쑤다. 가능성에 대한 믿음으로 행동하는 인간은 사과나무를 심고 불신의 숲에 사는 원숭이는 어느 곳에 과일나무가 있는지를 기억한다.
우리는 보험이란 아이디어를 통해 위험을 대비한다. 여기에는 신뢰가 전제되어 있다. 내가 다른 사람을 도우면 그가 반드시 나를 도와준다는 믿음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종이에 불과한 지폐의 믿음만큼이나 보험은 신뢰의 산물이다. 만약 우리에게 타인과 공동체에 대한 신뢰가 없다면 인류는 아직도 산딸기를 찾아 숲을 헤매고 있을 것이다.
사기는 단순한 거짓말이나 속임수가 아니다. 크게 보면 문명을 파괴하는 범죄다. 보험사기의 경우 범죄수익은 고스란히 다른 사람에게 부담금으로 전가된다. 보험률이 올라가는 것은 물론 범죄를 막기 위해 들어간 불필요한 노력과 비용까지도 선량한 보험가입자가 내야 한다. 보험가입자만 피해 보는 건 아니다. 범죄를 적발하고 처벌하는데도 세금으로 유지되는 국가의 공권력이 소비된다. 저신용이 곧 비용인 것이다.
신뢰는 대표적 사회적 자본이다. 저신뢰 사회는 거래비용이 과다하게 발생하여 경제성장을 저해하고 공동체의 붕괴로까지 이어진다. 타인에 대한 신뢰도가 10%포인트 올라가면 경제성장률이 0.8%포인트 높아진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하지만 우리 사회의 신뢰는 바닥이다. 영국의 싱크탱크인 레가툼 연구소(Legatum Institute)의 발표자료에 따르면 ‘개인과 개인의 신뢰, 국가 제도에 대한 신뢰 정도 조사’에서 한국은 167개국 중 142위에 그쳤다. 일부 아프리카 국가들보다도 서로에 대한 믿음이 없다.
우리는 지금 거짓에 관대한 사회로 가고 있다. 보험사기만이 아니다. 국가지도자라는 사람들조차 얼굴에 철판을 깐다. 이제 웬만한 거짓부리는 애교가 되었다. 불신의 시대상을 사회지도층에서 보여준다는 건 국가적 문명파괴다. 하지만 그들에게 열광하는 사람일수록 악착같이 투표장에 간다. 거짓에 분노할 줄 모르면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지, 문명의 역류에 휩쓸리는 무지가 미래에 어떤 그림자를 남기는지 알려고도 하지 않는다. 오직 내 편이기만 하면 된다. 도덕 불감증이 도를 넘었다.
21세기에 無信不立을 들먹이는 것은 후진성의 고백이다. 공자는 제자 자공이 국가경영을 두고 묻자, 먹을 것을 풍족하게 하고 강한 군대를 만들고 백성의 믿음을 얻어야 한다고 답했다. 그중 부득이 한가지씩 버려야 하는 상황이라도 끝까지 지켜야 하는 것은 백성의 신뢰라고 했다. 신뢰를 잃으면 모든 것을 잃게 된다는 춘추시대의 통찰이다.
거짓말이 일상화된 사회를 정화하기 위해서는 법의 눈금에만 의지해서는 안 된다. 사회구성원들의 도덕심 회복과 거짓에 대한 사회적 처벌이 뒤따라야 한다. 특히 지도층의 거짓말에 해서는 패가망신의 본때를 보여줘야 사회질서가 잡힌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에 단호하고 관대해도 되는지 분별할 필요가 있다.
돈은 사과가 주렁주렁 매달린 곳에서 잘 구른다. 거짓의 그림자가 짙어질수록 사과나무는 꽃을 피우지 않는다. 정직하면 손해 본다는 말이 통용되는 사회에서는 아무도 사과나무를 심지 않는다. 대한민국, 원숭이 울부짖는 밀림이 저만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