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운대의 뿌리를 찾아서 - 재송마을 ②>
은진 송씨 장사랑공파(삼성공파) 문중을 찾아서
은진 송씨 집성촌 뒷골(後谷) 마을은 재송동에 있던 자연마을이다. 옛날 이곳은 장산 서북 기슭으로 소나무가 울창한 산고수려(山高秀麗)한 산촌으로 뒷골(後谷), 안골(內谷), 서당골(書堂谷)이라 불리어 온 세 계곡이 있었다. 지금의 해운대경찰서가 있는 지역이 뒷골이고, 북쪽 삼익아파트가 있는 지역이 안골이고, 송씨 문중 재실인 재송재(栽松齋)가 있는 자리가 서당골이다. 이 세 계곡을 통칭하여 뒷골이라 불러 왔다.
송대원(宋大原)을 시조로 하고, 회덕(懷德)에서 동래(東萊)로 입향한 세거 성씨다. 시조 송대원의 자(字)는 천지(川至)이고, 처음 이름은 송견(宋堅)이었다고 한다. 고려조에 판원사(判院事)를 지냈고, 은진군(恩津君)에 봉해졌다.
『여산 송씨 세보』에 은진 송씨(恩津宋氏)는 여산 송씨(礪山宋氏)와 근원이 같아, 여산 송씨의 시조 송유익(宋惟翊)의 아우 송천익(宋天翊)이 은진에 세거하였다고 되어 있다. 그러나 고증할 문헌이 없고, 송천익에서 송대원까지 몇 대인지도 알 수가 없어 후손 송대원을 시조로 삼고 본관을 은진으로 하였다.
은진 송씨가 부산에 입향한 가문은 11세손 송인수(宋仁壽) 계통이다.
입향 경위를 보면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송인수의 아들인 12세 송응지(宋應祉)[호(號) 삼성(三省)]가 충청도 회덕에서 동래{삼성대(三姓臺. 三姓:安·宋·玉)[지금의 지하철 동래역 부근]}에 들어와 입향조가 되었다. 이들이 장사랑공파의 후손이다. 16세기 후반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동래 삼성대에서 재송으로 가게 되었는데, 재송으로 입향한 사람은 송응지의 아들인 송종조(宋宗祚), 송수경(宋守卿)이다. 이 가운데 둘째아들 송수경의 후손들이 주로 재송동에 계속 거주하였다. 송수경은 증손인 송영민(宋永敏)과 송계민(宋繼敏)을 두었다. 송영민의 후손 중에는 동래부청, 무청에 출입하여 장관청 중군 등을 역임하였으며, 송계민의 아들 송초건(宋楚健)은 훈련원 판관으로 아들 넷을 두었는데 송준방(宋俊芳), 송준호(宋俊豪), 송준업(宋俊業), 송준평(宋俊枰)이다. 송준방은 동래 동면 재송동에, 송준호는 울산 검단리에, 송준업은 동래 북면 남산동으로, 송준평은 울산으로 이거하게 되었다. 동래 동면 재송동에 자리 잡은 후손들은 주로 동래부청, 무청에 출입하여 훈련원 판관, 장관청 중군, 교련청 교련관, 별군관청 대솔군관, 별기위청 영하 등이 배출되었다.
은진 송씨는 부산 시내 여러 곳에 세거지를 이루었다. 대표적으로 부산광역시 금정구 남산동·구서동·선동, 남구 대연동, 북구 만덕동, 기장군 정관읍 매학리 등지이다. 현재에도 이 가운데 여러 곳이 세거를 하고 있는 부산의 대표적인 명문 가문이다. 2000년도 통계청 자료에 의하면 은진 송씨는 부산에 총 6,611가구 2만 1,454명(남 1만 845명, 여 1만 609명)이 살고 있다고 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