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은 하늘에 비행기를 띄우지 못하고 있다. 우리가 공군력을 키운다면 조국의 독립에 이바지할 수 있을 것이다.”
일제 치하 강력한 일본의 군대에 맞서 우위에 서기 위해서는 하늘을 지배해야 한다고 판단하고 어려운 환경과 여건 속에서도 그 뜻을 펼치고자 한 사람이 있었다.
그는 바로 이역만리 타국에서 나라 잃은 서러움 속에 일본의 압제에 맞서기 위해 비행장을 세우고 우리나라 최초로 공군을 길러내고자 조직적인 독립운동을 전개한 계원(桂園) 노백린(盧伯麟) 장군이다.
황해도 송해 출신으로 소싯적부터 기골이 장대하고 힘이 세 장군감으로 큰 주목을 받아온 그는 1895년 대한제국 일본 관비 유학생으로 선발돼 이갑, 유동렬, 윤치성 등과 일본으로 건너가 신학문을 배웠다.
일본에서 점차 탁월한 군사력으로 강성한 제국주의로 변모해 가는 일본을 지켜보면서 노 장군은 일본의 신식 군사학을 배워 조국에 알려야 한다는 신념하에 대한제국의 유학생 신분으로 일본육군사관학교 11기생으로 입학하게 된다.
무인의 기질을 타고난 그는 학업에 정진하여 근대적인 군사훈련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난 후 1900년 귀국해 어담, 윤치성 등과 육군참위에 임관되고 한국무관학교 교관 직을 맡아 후진양성에 힘썼다.
1905년 을사조약의 체결, 1907년 한국군대의 강제해산이 진행되자 노 장군은 미국에서 귀국한 안창호 선생을 비롯해 전덕기, 이갑, 양기탁, 신채호 등과 함께 신민회를 조직하고 구국운동을 전개해 나갔다.
하지만 1910년 8월 29일 한일 병합 조약으로 일제에 의해 국권이 침탈되는 것을 지켜본 그는 독립 운동가들을 색출해 처형하는 데 혈안이 된 일제의 표적이 돼 1914년 중국 상해를 통해 미국으로 망명했다.
하와이 주에 머문 그는 미군 오아후 가할루지방에서 박용만 등과 국민군단(國民軍團)을 창설해 별동대 주임으로 독립군 300여 명을 양성했다.
이후 그는 1916년 샌프란시스코로 이동해 ‘태평양시보(太平洋時報)’를 창간하고 대한제국이 처한 실상을 만천하에 알려 독립운동에 대한 열망을 고취시켰다.
평소 선견지명으로 하늘을 지배하는 자가 전쟁에 승자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 그는 1919년 1월 20일 샌프란시스코 북방의 월로우스에 기지를 건설하고, 1920년 2월 20일에 비행사 양성소를 설립했다.
초기에는 비행기 2대, 미국인 기술자 1인과 비행사 6명을 교관으로 시작한 비행학교는 1920년 7월 제1회 졸업생 25명, 1922년 6월에는 학생이 41명에 달하고, 1923년에는 11명의 졸업생을 배출했다. 이후 비행기도 5대로 늘어나고 통신장비까지 갖추게 됐다. 임시정부는 이 같은 노 장군의 활약에 매료돼 그를 제2대 군무총장으로 선임했다.
이후 독립군 비행사 양성소는 1923년까지 77명을 배출했으나, 당시 미국의 경제가 악화돼 자금줄이었던 현지 한인들의 경제적 파탄으로 결국 월로우스 독립군단과 비행학교는 해체되고 말았다.
노 장군은 1922년 6월 임시정부 이승만 대통령의 지명으로 국무총리 서리에, 1923년 1월에 정식 국무총리에 추대됐다. 이후 1924년 12월 16일 박은식 내각의 임시정부 군무총장 겸 교통총장에 임명됐다가 1925년 3월에 박은식 대통령의 지명으로 국무총리에 임명되고, 교통총장 겸 군무총장직을 겸직하면서 임시정부를 이끌었다.
하지만 1926년 1월 22일 상해에서 앓아 오던 심장질환의 병세가 악화돼 5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정부에서는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