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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하루, 또 하루, 그리고 일주일 >
얼마 전 친한 후배에게서 화분을 하나 선물 받았다. 졸업식이나 발표회에서 꽃을 받아본 적이 있었지만 뿌리가 있고, 생명이 느껴지는 이런 선물은 사뭇 낯 선 경험이었다. 처음 받아 본 감동이랄까, 아니면 생명의 동경이랄까. 난 이젠 한 식구가 된 갈색 토병에 든 파란 잎파리를 어떻게 처리할까 망설여졌다. 전에 강아지나 고양이를 키워 본 적이 있었기에 생명이 있는 이 친구를 어떻게 관리해야 할지 난감해지는 것이었다. 후배에게 전화까지 걸어 어떻게 키워야 하나 물어봤지만, 후배는 그냥 햇빛 잘 드는 곳에 두라는 말뿐이었고, 인터넷을 검색해 봐도 그저 그런 것뿐 나를 안심시킬 내용은 전혀 없었다.
“햇빛, 햇빛이라...”
작고 볼품없는 내 방에 햇빛이라곤 구석에 있는 알람시계 자리였다. 얼마 전 결혼한 선배가 자기 총각시절 유품이라고 주고 간 시계였다.
“내방에 햇빛이라, 이것뿐이었던가,”
난 거침없이 시계를 발로 차 버리고 화분을 놓았다. 그리고 위로랍시고 시계를 보고 말했다.
“미안하다. 이젠 거기서 떠들어라.”
시계는 자리를 빼앗겨 원통한 듯 드러누운 채 흐느끼고 있었다. ‘삐리릿, 삐리릿...’ 난 발로 찬 것이 이내 미안해져서 일으켜 세워주곤 부엌으로 나가 물을 한 잔 떠와서 화분에게 주었다. ‘이 녀석 이름은... 이..녀석, 좋네.’
“네 이름은 이 녀석이다! ”
이렇게 이 녀석과의 동거는 시작되었다.
다음날 시계는 아직도 원통한지 아니면 삐친 것인지 아주 작은 소리로 흐느끼듯 울었다. 덕분에 난 회사에 지각을 할 뻔 했다. 시계의 약이 다 됐구나 싶어 난 약을 빼서 주머니에 넣었다. 아침 식사는 건너뛰고 회사에 갔다. 회사에 가서도 난 이 녀석 생각이 났다. 회사 동료에게도 이 녀석 이야기를 계속 했다.
“이봐, 벌써 10번째 그 화분 이야기야, 그거 비싼 거야?”
라고 묻는 동료에게 그냥 새 식구라고 얘기했다가 빨리 결혼이나 하라는 핀잔만 들었다. 퇴근길에 붕어빵을 팔고 있었다. 저녁으로 먹을 요량으로 붕어빵을 사서 하나 꺼내 물고는 집으로 향했다. 갑자기 목구멍으로 빵이 넘어가자 술 생각이 간절해졌다. 마침 슈퍼마켓이 눈에 들어왔다. ‘맥주 하나 살까?’
슈퍼마켓 앞에 작고 귀여운 눈을 가진 강아지 한 마리가 내가 오자 일어서서 꼬리를 흔들었다. 맥주를 사는 김에 소시지도 대여섯 개 샀다. 첨엔 강아지를 줄 요량이었는데, 사는 김에 먹고 싶어졌다. 강아지에게 소시지를 네 개 정도 허비하면서 놀자 슬슬 지겨워져 삐걱 삐걱 일어나 집으로 향했다. 아까 전엔 아직 해가 있어 어둡지 않았는데 이젠 완전히 해가 져서 어두워져 있었다. 방안은 눅눅했다. 사람 없는 집의 쓸쓸함이 묻어났다. 내가 해놓고 나간 그 모양대로 이부자락이 위로 솟아있었다. 검은 비닐봉지를 떨어뜨리듯 방에 놓고, 싱크대에서 유리컵을 꺼내려다 그냥 뒀다. 누가 보는 것도 아닌데... 영화 같은데 보면 병을 그냥 들고 먹던데. 다시 봉지에게 다가가 봉지와 대면하고 그 자리에 쓰러지듯 앉았다. 그리고 병맥주를 따서 한입, 한입 야금야금 먹기 시작했다. 맥주의 리드미컬한 맛은 목이 느끼는 것이다. 입으로 느끼는 것은 술이 아니다 라는 말을 누가 했더라. 누군가 했을 것이다. 난 병맥주 한 병에 취하고 말았다. 그리고 잠이 들었다.
다음 날 아침, 잎파리가 한 장 떨어져 있었다. 난 얼른 잎을 화분 흙 속으로 숨기듯 손가락 끝으로 눌러 넣어버렸다. ‘내가 어제 물을 너무 많이 줬구나,’ 그리고는 밥을 먹으면서 숟가락으로 물을 줬다. 퇴근 후 친구를 만났다. 술을 못하는 친구이기에 우린 PC방에 가서 게임을 하고 놀았다. 난 게임에 지고 말았다. 그리고 우린 평소보다 빨리 헤어지고 집으로 향했다. 역시 평소처럼 집은 눅눅했다. ‘제길 개라도 키울걸.’ 그러나 난 개를 키우지 못한다. 돌봐 줄 시간적, 물질적 역량이 부족하다. 그래서 전에 새끼부터 키우던 강아지도 다른 사람에게 넘긴지 오래다. 정이 너무 들어서 마음으로 울면서 보냈다. 지금은 뉴질랜드에서 호의호식한다는 소문만 들려오고, 녀석이 날 보면 알아볼까?
다음 날, 오늘은 토요일이다. 쉬는 날이라 상쾌하군. 기지개를 피던 나에게 눈에 들어온 것은 이 녀석이었다. 파란 잎파리 옆으로 작고 앙증맞은 연두 빛 몽우리가 생겨있었다. 어제 아침까진 없던 건데, 언제 생겼을까. 난 츄리닝을 입고 슈퍼로 시장을 보러 나갔다. 반찬을 사러가긴 한거지만, 오늘은 왠지 느낌이 좋다.
“아저씨, 로또 한 장 주세요. 아니 두 게임 주세요.”
만원 한 장을 아낌없이 소비했다. 10원짜리 고스톱도 눈에 불을 켜고 하는 나에게 이럴 때 만원은 매우 작은 돈이다. 이런 나도 참 아이러니하지만 어쨌든 기분이 좋으면 전 재산 털어 넣는 것도 인간의 본성으로 알고 행동하는 것도 ‘나’라는 인간이다. 이런 걸 보고 만원의 작은 행복이라고 하는 게 아닐까. 하루 동안 로또의 환상에 젖어있었다. 되면 뭐하지, 일년 동안 해외여행이나 갔다 와야지. 그냥 외국에 나가 사는 것도 나쁘진 않은데. 늦은 아침과 더 늦은 점심을 먹으면서 밀린 빨래와 밀린 집안일을 해치우면서 난 그 생각에 절로 행복해졌다. 역시 개를 키워야지, 크고 튼튼한 그 뭐라 하드라 말라뮤트라는 개 좋던데. 그러나 늦은 저녁을 먹으면서 TV에서 방송하는 로또 당첨번호는 나의 번호와 하나도 같지 않았다. 하지만 나의 허상은 지워지지 않고 다시 한번이라고 외치고 있었다. 하여간 인간의 호기심과 역시 ‘나’라는 인간의 본성을 교묘하게 연결시킨 게임이다 로또는... 재미는 있는데 왜 이렇게 허무하게 하는지.
그렇게 또 하루가 지났다. 오늘은 더 열심히 살아야지. 그리고 허비한 이 시간들은 다시 보충되듯이 나에게 돌아 올 거야. 오늘은 이 녀석을 돌아보지 않았다. 일부러 물도 주지 않았다. 왠지 내가 이 녀석에게 무엇인가 바라고 있다는 느낌이 너무 강하게 들었기 때문이다. 이 녀석은 식물인데 내가 무엇을 바란단 말인가. 식물은 죽은 사람처럼 위로해주고 제사지내듯 봐주면 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난 이 녀석에게 삐져있었다. 이 녀석은 내게 해 준 게 없어. 이 녀석은 무위도식만 하잖아. 내 방 유일한 햇빛을 혼자 점거하고, 물세도 안내면서 물을 내게 꾸준하게 떠오게 하는 녀석, 이 녀석...
오늘 하루 종일 회사에서 우울했다. 그래서인가, 오늘은 이상하게도 나에게 시비 거는 인간들이 안보였다. 하루에 두세 번은 있었는데... 그래도 나는 우울했다. 다시 아무도 없는 그 방으로 들어가는 것이 나는 너무나도 겁이 났다. 그리고 친구에게 전화를 거는 것도 비굴하게 느껴져 그것도 싫었다. 집으로 오는 골목을 허우적 끌다가 슈퍼 평상이 눈을 이끌었다. 소주 한 병을 사고, 안주를 고르려다 소시지를 탐내는 그늠과 눈이 마주쳤다. '또 달라고?' 저 녀석의 이름은 뭘까. 난 내 마음대로 '저 녀석'으로 짓기로 하고 저 녀석을 위해 큰맘 먹고 소시지를 샀다. 저 녀석을 위해 산 소시지이지만 저 녀석에게는 알리고 싶지 않아 일부러 외면하는 채하며 평상위에 앉아 종이컵에 소주를 한 잔 따르고, 소시지를 손에 쥐니 벌써 버릇처럼 평상 끝에 목을 괴고 오랜 친구처럼 물끄러미 바라본다. 갑자기 저 녀석을 놀려 주고 싶은 생각이 들어 모른 채하며 소시지를 한입 베어 야금야금 씹었다. 저 녀석은 처음에는 끈기를 발휘하려는 듯 따뜻한 시선을 내게 던졌지만 그것도 잠시 입가에 침을 흘리며 꼬리를 천천히 흔들었다. 또 한입 베어 이번에는 쩝쩝 소리까지 내며 저 녀석의 본능을 흔들어 보았다. 저 녀석은 참을 수 없다는 듯 평상 위로 뛰어 오를 태세를 취하며 왕왕 짖어 대기 시작 했다. '그래! 그래 알았다. 줄께 줄께.' 하며 나는 소시지를 입으로 크게 잘라 저 녀석에게 줄듯 말듯 내밀다가 멀리 휙 던졌다. 저 녀석의 고개가 날아가는 소시지를 향해 돌아갔다가 야비하다는 표정으로 다시 나를 향했다. '저기 던진 소시지 찾아오면 더 큰걸 주지.'라고 하며 날아간 소시지를 향해 손짓을 해 보였지만 저 녀석은 아랑곳 하지 않고 평상위로 뛰어 오르려다 종이컵에 따라 둔 나의 황금 같은 소주를 엎지르는 우를 범하고 말았다. '앗!!' 저 녀석도 만만치 않은 상대라는 것을 알았기에 소시지를 한입 크게 베어 저 녀석의 입에 물려주었다. 쓰러진 종이컵을 일으켜 다시 소주를 한잔 따르고 입에 갖다 댔다. 종이컵은 늘 탁하게 느껴진다. 유리컵처럼 따르는 소리도 없고, 하늘을 비춰주지도 않는다. 순 십간에 소시지를 삼켜 버린 저 녀석이 다시 나를 본다. 저 녀석을 보니 집에 있을 '이 녀석' 생각이 났다. 소주 한 병을 다 비우고 눅눅한 안개처럼 무거운 공기로 나를 기다리고 있는 방으로 돌아 왔다.
'파시...식'
깜빡 깜빡 켜질듯 힘겹게 불이 밝혀지자 어둠이 어느새 창 밖으로 숨어버렸다. 내 머리의 무게에 눌린 베개와 허물 같은 내 이부자리. 내일을 기약하며 습기 내음으로 더 눅눅하게, 무게마저 느껴지게 하는 허물 속으로 약간의 췻기를 느끼며 기어들어 갔다. '아! 이 녀석도 배가 많이 고플 텐데.'라는 생각에 이 녀석을 바라보니 아니나 다를까 연약한 척하며 축 늘어져 있었다. 부스스 일어나 주전자채로 물을 주었다. '네가 상전이다. 시계를 당당히 물리쳤으면 승전 군처럼 팔을 올리고 나팔을 불며 행진을 해야 할 거 아니냐.' 내숭 떠는 기집 애들처럼 축 늘어져 소리 없이 항거하면서 애간장을 끓게 만드는 영악한 녀석. 나는 이 녀석이 슈퍼 앞의 저 녀석처럼 꼬리도 흔들고 짖기도 하는 녀석이었으면 하는 욕심이 생길 뿐이었다. 괜히 투덜거리며 나의 허물을 찾아 들어 갔다. 왼편엔 라디오 오른편엔 재떨이 그리고 끈으로 길게 늘인 형광등 스위치 줄. 라디오를 켜고 줄을 당겼다. 창가에 턱을 괴고 있던 어둠이 방을 가득 채울 쯤 라디오에서 느리며 달콤하기까지 한 여자 DJ의 멘트와 노래가 빙빙 방을 맴 돌았다. 어둠에 익숙해지려거든 얼른 눈을 감아야 한다. '~~ 쎄드 무비 올 웨이스 멕미크라이~~' 입가로 따라 부르다 잠이 들었나보다. 어둠은 익숙하게 날 누르고 귓가에, 뺨에, 뒹굴던 음표들이 내 뒤척임에 깨어지는 비명소리가 들렸다. 약을 바꿔 끼운 시계가 원래의 자리로 되돌려 달라고 빽빽 소리를 질러 댄다. 시끄러워서 손으로 머리를 눌러 버렸다.
눈을 찌르는 듯한 아침 햇살에 부스스 눈을 떴다. 손바닥 밑에 쓰러져 있는 시계를 들어 올려 시간을 보니 9시다. 머리에서 괴음이 찡~하고 울렸다. 관객의 환호성 속에 멋진 프레이를 보여야 할 선수가 엉거주춤 한다. 허겁지겁 넥타이를 매고 어떻게 옷을 입었는지 모르겠다. 어제 들고 들어 온 가방을 그대로 다시 들고 집을 나오려는데 현관 앞의 묵직하고 야릇한 것을 밟고 말았다. 관객들은 미친 듯이 열광의 도가니 속에 빠져든다. 그것이 무엇인지 확인 할 틈이 내겐 없다. 다행히 버스 안은 평소보다 한산하다. 앞에 앉아 있는 튼튼해 보이는 아주머니가 빙그레 웃으며 툭툭 나를 친다. 가방을 받아 주려는 모양이다. 웃는 얼굴에 침 못 뱉지. 나 역시 미소로 답례하며 괜찮다고 했다. 아주머니는 또 툭툭 친다. 세계 어느 나라를 가 봐도 우리나라처럼 다정한 나라는 없을 것이다. 내 가방이 그렇게도 버거워 보였나? ‘아니, 괜찮습니다. ‘라고 다시 정중히 거절했다. 아주머니는 또 툭툭 친다. 이쯤 되면 나도 더 이상 거절 할 수 없지 싶어서 가방을 내려놓으려는데 "아~ 작크 열렸어~!!"
전초전부터 완전 패를 당한 나는 깽깽이 발로 사무실에 들어갔다.
하루 종일 비가 내린다. 황사 덕분에 비는 끈적거리는 진흙 비였다. 서울의 비는 그렇게 거칠었다. 저 먼 몽골의 사람들은 한국을 무지개의 나라라고 부른다고 했다. 하지만 난 정작 이 무지개의 나라에서 무지개를 본 적이 없었다. 아니 못 본 게 아니라, 내가 무지개를 외면했는지도 몰랐다. 내가 무지개를 잊은 후로 비는 깨끗하게 씻는 비가 아니라 고통의 비가 되었다. 나의 원죄를 벌하러 천둥과 번개를 가져온 비는 언제나 나를 괴롭히는 비가 되었다.
"오늘 퇴근 후엔 뭐 할 거예요?"
난 풀린 눈으로 말소리 쪽을 바라봤다. 이경씨였다. 성이 신씨였던가. 수개월간 같은 사무실에 있었지만 외운 건 이름뿐이다. 사실 말을 사적으로 붙인 것도 오늘이 처음이었다.
"왜요?"
난 경각심 없이 물었다.
"아니요, 퇴근하면 서둘러서 나가시는 것 같아서요. 퇴근하시면 뭐하시는지 궁금해서요."
그녀는 진지하게 묻는 것 같았다.
"글쎄요. 뭐 특별히 하는 건 없는데."
"애완동물이라도 키우세요."
"화분도 애완동물인가요."
난 그렇게 말하면서도 쑥스러웠다. 화분은 동물이 아닌데.
"생각보다 자상하신가 봐요. 화분 키우는 남자 분들은 별로 없는데,"
내가 알기론 화분 키우는 남자는 전혀 없다. 그리고 화분을 키운다고 특별히 자상한 사람도 없다. 농사 일 하시는 친구 어머니는 닭목 비트는 것은 예사이고 흑염소건 돼지건 잘 잡으신다. 그리고 나의 월세 집 주인은 화분을 수십 개나 키우지만 자상한 사람은 아니다. 더군다나 나는 선물 받은 걸 버리지 못해 가지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
"그렇구나. 저는 취미활동이라도 하시는 걸로 생각했는데."
"전 동적인 활동은 싫어하거든요."
"그렇죠. 퇴근하면 몸이 힘들잖아요. 그래서 운동은 생각도 못하겠어요. 혼자 하는 것도 싫고요."
여자들은 천성적으로 맞장구의 달인인지도 모른다. 여자들끼리 대화하는 것을 엿보면 서로 예쁘다고 한다. 남자들은 상상도 하지 못할 대화가 오간다. 그리고 그들의 대화를 연장하는 것은 순전히 맞장구였다. 이경씨와 나와의 대화도 그녀의 맞장구로 이어지고 있었다. 여자가 먼저 대화를 시작하면 특별한 상황이 아닌 한 끝내는 것도 여자였다. 하지만 오늘 이경씨는 나와의 대화를 끝내려 하지 않았다. 그 대화를 끝낸 것은 부장이었다. 그리고 퇴근하려 하던 나에게 이경씨는 다시 말을 걸어왔다.
"오늘 술 한 잔 해요."
그녀의 눈 안에서 난 무지개를 본 것 같았다.
이경씨와 술을 마시기 전에 난 수없이 많은 상상과 생각 속에서 즐거워하기도 했고, 슬퍼하기도 했으며, 심지어 그녀와 연인관계가 되기도 했으며, 결혼까지 했다. 그리고 그녀를 암에 걸려 죽이기도 했고, 난 비련의 주인공이 되어 영화 속 멋진 연상을 하기도 했지만, 막상 그녀와의 술자리는 그렇게 재미있는 것이 아니었다. 재미가 없기는 그녀도 마찬가지인지 그녀의 친구들까지 불러내 나를 3차까지 끌고 다녔다. 나는 여자와 술을 마시는 것이 얼마나 힘든 노동인가하고 생각했지만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나에게 전화한 친한 친구는 마냥 부러운 목소리로 자기는 왜 안 불렀냐고 타박했다.
매우 지치고 왠지 생각이 많아지는 하루다. 막 비가 그친 골목길은 그 가로등이 너무 밝아 애처로웠다. 개 한마리가 쓰레기 규격봉투 사이에 코를 박고는 킁킁거리고 있었다. 슈퍼마켓의 강아지였다. 밤에 강아지는 낮보다 더 커 보였다. 슈퍼에서 꽤 떨어진 거리인데도 이 강아지는 자기 집 마당인양 자유롭게 행동하고 있었다. 강아지의 반경은 이제부터 점점 커지겠지. 나중엔 더 이상 이 동네에서 못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강아지의 먼 조상이던 늑대의 성품을 이제 저 강아지는 찾아갈 테니까. 예전에 키우던 나의 개는 주인은 나인데 밥을 주는 사람은 여러 명이었고, 집에는 일주일에 한두 번 두 집 살림하는 남편마냥 찾아와도 내 얼굴만 확인하고 다시 길을 떠나기 십상이었다. 내가 부르면 달려와서 내 발밑에 엎드려 있다가도 이내 다시 집을 나가 어디론가 가버렸다. 그 놈이 어렸을 때, 내 발 주변에서 놀던 것이 어느 덧 내 시선에서 벗어나기 시작했을 때, 난 그 놈을 잡아 뒀어야 했다. 그러나 난 그러지 않았고, 그 놈은 점점 넓은 세상으로 떠나갔다. 몇 년 전부터 아주 먼 동네에서 보이던 녀석이 이내 아예 안보이기 시작했고, 내 상상력 안에서 그 놈은 휴전선이 없다면 지금쯤 중국 여행을 하고 있을 것이다. 그 놈은 유목민족처럼 여행하는 것을 좋아하는 것이 아니었을까. 내가 개 줄로 내 주변에 매어놓았다면 그 돌아다니는 것을 좋아하던, 그렇게 여러 사람에게 사랑받기를 원하던 그 놈은 나를 사랑했을까.
'뚜루루 뚜루루' 나의 목에 걸린 줄이 나를 흔들었다.
"여보세요."
"저예요. 신이경이요."
"아! 예, 이경씨,"
"오늘 즐거웠어요. 오늘 재밌었고요. 내일 뵈요."
"즐거웠다고요. 재미없지 않았어요?"
"말씀이 적으시기는 하지만, 표정이 풍부해서 친구들도 재밌었다고 하던데요. 그리고 무엇보다 매너가 좋으시다고요."
"그렇게 말씀하시면 저야 고맙죠. 아! 예 내일 뵙겠습니다."
그리고 전화를 끊었다. 전화가 울리는 소리에 한참 경계하던 강아지가 나를 알아보고 꼬리를 흔들며 다가왔다. 내가 몸을 숙여 만지려하자 피했다. 마치 '만지지는 말고 놀아줘'라는 것 같았다. 그것도 잠시 다시 고개를 돌려 자기가 원래 있던 그 규격쓰레기 봉투로 향했다. 몇 번 고개를 돌려 나를 봤지만 곧 나를 잊고 자기 하던 짓을 하는 것이었다.
방에 돌아와 난 오랜만에 책상에 앉았다. 그리고 노트 한권을 꺼내 놓고 열심히 오늘 있었던 일을 기록하기 시작했다. 이부자리 옆에 있는 ‘이 녀석‘을 돌아봤다. ‘이 녀석’은 아름다운 흰색 테두리에 갇혀있었다. 더군다나 주변은 반짝이는 분홍빛 유약으로 반들반들했다.
"넌 그 안에서 행복하니?"
‘이 녀석’은 고개를 숙이고 이미 죽어 땅 밑에 파묻힌 자신의 분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자기 영역 안에서 만족해하며 사는 나와 같았다.
하루하루는 매일 매일 새롭지 않게 시작된다. 매일 같은 시간에 비슷한 모양으로 자고 비슷하게 일어나서 비슷한 모양으로 같은 자리의 갈라진 머리를 보면서 한 숨을 쉬며 시작하는 언제나 변함없는 모양의 나날. 허물을 벗듯 이부자리를 그대로 놔두고 사람이 매워 터지는 북새통의 전철 속에 낑겨 출근한다. 하루라도 나를 볶지 않으면 어딘가 허전하다는 듯한 직장상사에게 복종하려 내 자리를 찾는다. 내가 처음 군을 제대하고 취업했을 때, 나의 친구들과 가족들은 매우 기뻐했고, 나는 새로운 일상을 꿈꾸며 이 자리에 왔다. 그리고 새로운 미래를 설계하기 위해 나는 일을 한다고 생각했다. 1년이 지나고 다시 2년, 바뀐 것은 나의 머리에 내리는 눈 같은 새치의 숫자일 뿐, 학교를 다니던 것과 별반 다를 것 없는 일상의 연속. 내 통장의 매월 같은 날짜로 입금되는 내 월급의 숫자만이 유일한 희망이라고 해야 하나? 그것은 내 나이에 대한 보상일까. 그렇다면 너무 적은데.
오늘의 신문 내용은 매일 반복되는 기분 나쁜 소문이었다. 내가 직접 보지 않은 뉴스들은 그냥 소문에 불과했다. 누가 누굴 죽였고, 누가 누굴 속였으며, 누군가가 누군가를 가혹하게 두둘겨 그의 노동력을 빼앗았다는 소문들, 너는 당하지 말라는 것인지, 아니면 너도 당할 수 있다는 것인지, 함께 나서서 그들을 응징하자는 것인지. 아니면 겁을 먹어라. 너의 일탈은 서울역 광장에 있는 숱한 노숙자 속에 합류시켜 버릴 것이다 인지, 기분 나쁜 소문들은 매년, 매월, 매일 반복되면서도 그 해결방법은 전혀 비춰주지 않는다. 이 세상은 공포의 끊임없는 재생산 속에서 신종의 공포를 만드는 것 같다. 그리고 나는 내키지 않으면서도 그 공포 속에 나를 더욱 굳건하게 가두고 있었다.
점심시간 이경씨는 나와 점심을 먹는 것이 당연한 양, 나란히 나왔다. 나의 점심은 공원 벤치에서 다리를 꼬고 앉아 값싼 햄버거와 콜라를 먹으면서 향기 없는 사람들을 구경하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은 이경씨에게 그런 나의 매일을 보여 주기 싫었다. 나에게는 혼자만이 만끽 할 수 있는 평화의 순간일지라도 이경씨에게는 남자가 치사하게 벤치에서 햄버거 따위나 씹어대는 궁상으로 여겨 질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뭐 드실래요."
"아무 거나요."
"다른 분들하고는 같이 안가시나요. 원래 여자 분들끼리 식사하시잖아요."
나는 사실 궁금했다. 여자들끼리의 식탁이.
"남자 분들은 뭘 드시나 궁금해서요. 그렇다고 부장님하고 먹기는 싫고요. 음 평소엔 뭘 드세요."
"아무거나 먹죠. 가끔은 굶기도 하고요. 굶으면 그 날 그 돈으로 술 마시죠. 자주는 아니지만,"
"알뜰하시나 봐요. 돈도 꽤 모았겠네요."
"아니요. 돈하고는 거리가 멀어서."
우리는 식당을 찾아 30분이나 거리를 헤맸다. 그러나 둘이 들어갈 맛있는 식당은 찾을 수 없었다. 결국 우린 공원 벤치에서 김밥을 먹었다. 의외로 그녀는 매우 즐거워했다. 나의 매일이 그녀에게는 특별한 소풍이었을까?
‘이 녀석’에게 물을 주면서 ‘이 녀석’이 매우 불행해 보였다. 푸르던 잎파리가 햇빛을 먹고 진한 녹색으로 변해 있었다. 그리고 꽃잎 없는 이 녀석의 몸둥아리가 전보다 두꺼워져 있었지만 그 녀석 주변을 둘러싼 하얀선은 그 녀석을 묶은 포승줄로 보였다. ‘이 녀석’이 얼마나 자랄지는 모르겠지만 아니 더 이상 안 커질지라도 이 하얀 포승줄은 더 이상 늘어나지 않을 것이었다. 예전 서랍장에 장난으로 들어간 적이 있었다. 죽을 것 같은 좁은 공간 속에서 살아야 한다는 일념으로 발버둥치다가 서랍장이 넘어지고 그 소리에 의해 달려 온 가족들에 의해 구출 되었지만, 그 순간의 짧고도 긴 공포는 아직까지도 끝나지 않았다. 그 이후로 나는 좁은 공간을 상상 하는 것만으로도 심한 두통을 일으킨다. 나의 방안. 5평이던가. 공교롭게도 내 방도 하얀 벽지다. 갑자기 하얀 벽지가 꿈틀대더니 나를 향해 좁아져 왔다. 방안의 하얀 라인이 쭈삣 쭈삣 튀어 나와 나를 꼼짝 못하게 결박하고 콧속으로 귓속으로 뇌 속으로 기어 들어갔다. 발버둥을 치다가 쓰러졌나보다. 심한 갈증을 느끼며 눈을 떴다. 텅 빈 냉장고를 여니 쾌쾌한 냄새가 진동을 했다. 파자마 바람으로 그냥 집 밖으로 나갔다. 초여름이라 밤바람은 시원했다. 터벅거리면서 작은 골목길에서 벗어나자 사람들이 북적거렸다. 나는 늦은 시간에 큰 골목에 사람이 이렇게 많은 줄 처음 알았다. 평상에서 소주를 마시는 사람들과 슈퍼 앞에서 닭을 먹는 가족. 그 시간에도 안 자고 공을 차는 어린 꼬마들까지 여러 종류의 인간들이 무리지어 있었다. 커피자판기를 찾아 슈퍼까지 다가갔다. 그런데 커피자판기가 있어야 할 곳에 없었다.
'분명히 여기에 커피자판기가 있었는데, 이상하네.' 나는 여기저기 기웃거리다가 슈퍼 아줌마에게 물어보기로 했다.
"아줌마, 여기 커피자판기 어디 있어요?"
"여기 커피자판기 없는데,"
아줌마는 술병을 검은 봉투에 담으면서 건성으로 답했다.
"전에 있는 것 같았는데요."
"없었어. 내가 5년 간 가게 하면서 자판기를 안 들여 놓았는데,"
"그래요."
"캔 커피 먹어. 뜨거운 것도 있는데,"
나는 차가운 캔 커피를 골라 쥐고는 아줌마한테 돈을 지불하고 뚜껑을 따 단숨에 들이켜 버렸다. 아줌마의 의자 옆으로 개집이 눈에 띄었다. 강아지의 크기에 비해서 작아 보였지만 참 편해 보였다.
"오늘은 강아지가 안보이네요."
"그 놈이 바람났어. 매일 밤마다 나가서 아침에 들어 온다우. 아까 전에 나가선 소식도 없네."
"저기 저쪽 언덕에서 그제 봤는데, 혼자던데요."
"그래요. 멀리도 갔네. 아마 그쪽일걸. 그 놈이 껄떡대는 강아지가 있는 곳이"
난 천천히 파자마를 끌듯이 나와 다시 내방으로 향하면서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찾았지만 내 파자마에는 주머니가 없었다. 커피를 사고 남은 동전을 꼼지락거리면서 이경씨의 전화번호를 생각해 내려고 노력했다. 나에게도 이런 날이 올 줄이야 하면서...
2000년 여름 교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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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예전에 글쟁이 되려고 할 때는 글 좀 썼던 것 같은데 ...역시 오랜만에 하려하면 녹이 슬어서 영~ 그러네요. 이 단편은 2000년도에 쓴 것인데 2009년에 읽어보니 상당히 유치하군요.
재미있는 단편소설이네... 센스가 넘치고, 재치도 넘치고,,, 도중에 읽는 것을 그만두고 싶은 여늬글과는 냄새가 틀리네. 계속 함 살려봐요. 좋은 재능 아끼기말고,,,
아이코~ 과찬을....부끄((부끄(( 저 단순무식인거 아시죠? 하라면 진짠 줄 알고 합니당.^^;;;
정말 추천합니데이~ Simple is Best!라 카믄서~~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