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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V. 풍류맥의 전승
1. 풍류의 정통맥
고대에 전세계를 망라하는 거대한 종교국가를 건설하여, 모든 민족을 다스리던 동이들의 풍류맥
은 소멸되고 말았는가? 지금은 동이의 종교로 다스려지는 나라조차 발견할 수 없는 실정이니,
동이의 맥은 끊어진 것 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종교는 쉽게 소멸되지 않으며, 특히 세계적인
종교로 발전했던 종교는 정치적 . 사회적인 지배력을 상실하는 경우는 있어도, 완전히 소멸되는
경우는 없고 민간신앙의 형태로라도 살아남는 것이 일반적인 경향이다.
수메르인들이 남긴 뛰어난 문화는 오늘날 서구문명의 뿌리를 이루고 있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검은 고양이가 앞을 가로질러 가면 그 길로 가지않고 다른 길로 돌아가는 서양인들의 미신적인
행동방식에까지 살아남아 있다고 한다. 하물며 그들이 만든 건조물들이 아직도 들판에 우뚝 서
있는, 동이인들의 뛰어난 진리체계가 완전히 소멸될 수는 없을것이다. 실제로 풍류의 영향은 전
세계 대다수 국가와 민족의 생활 전반을 지배하는 저변문화로 아직도 생생히 살아있다.
이는 풍류의 위대성을 반증해주는 반가운 일이기는 하지만, 풍류의 정통맥을 추적하는 입장에
서는 크나큰 장애가 되기도 한다. 왜냐하면 풍류의 정통맥은 관점을 어떻게 설정하느냐에 따라
다른 결론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들면 정치적으로는 법률에 따른 합의제 정치형태와, 군주를 정점으로 하고 제후들을 책봉
하여 다스리는 봉건제가 모두 풍류에서 유래한 정치형태이다. 경제적으로는 화폐경제와 교역
제도, 산업적으로는 농경(농업)과 금속제련(공업)이 모두 풍류의 유산이다.
종교적으로도 유일신 사상과 정령숭배의 범신론은 물론이요, 인간의 완전성을 신앙하는 인신
(人神)숭배와 무신론까지도 풍류의 종교사상이다. 거의 모든 종교적 의례의 뿌리가 풍류에서
유래하였음은 말할 필요도 없다.
그러므로 어느 특정한 요소를 기준으로 삼아 풍류의 정통을 주장하려면, 모든 민족과 모든 종교
가 풍류의 정통임을 주장할 수 있게 된다. 지역적으로는 4대 문명의 발상지가 모두 풍류의 정통을
주장할 수 있고, 종교적으로는 바티칸 교황청과 아프리카 오지의 식인종이 꼭같은 자격으로 풍류
의 정통을 주장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풍류의 정통을 논의하려면 풍류의 종합적 측면
을 온전히 보존한 집단을 가려내어야 한다.
풍류의 원형은 지금까지 설명된 내용을 종합해서 기본이 되는 요소를 간추리면 얻을 수 있는데,
대표적인 요소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먼저 부각된다.
① 태양신 신앙
② 삼한사상
③ 삼신산 성지사상
④ 우상(음양합일신) 숭배사상
⑤ 혈통중시 및 조상숭배사상
⑥ 신인동일시(神人同一視)사상
⑦ 제정일치의 사회제도
⑧ 거인국의 역사기록 보유
⑨ 풍류의 진리체계 보유
이런 요소들을 모두 충족시키고 있는 지역 및 종족집단은 지금 세상에는 없다고 보아야 할 것이
다. 한겨레도 조선의 멸망과 함께 제정일치의 사회제도가 폐지되었기 때문이다. 제정일치를 유지
하던 티벳도 얼마전에 중국(중화인민공화국)에 의해 정치권을 박탈당하였다. 그러므로 이제는
위의 요소들을 가장 많이 보유한 곳을 찾아야 하는데, 그곳은 멀리서 찾을 것도 없이 한겨레의
나라인 대한민국이다. 다른 지역과 민족들은 어느 한 부분씩은 고도로 발전되어 있으나 다른
요소들이 없어져서, 전체적으로는 자격이 미달됨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불교는 혈통중시나
조상숭배가 없고, 기독교는 우상숭배와 신인동일시 사상이 교리적으로 부정되고 있으며, 유교는
대부분의 요소를 갖추고 있으면서도 모든 요소가 부정되고 있는 양면성을 보이고 있다.
유교가 이와같은 양면성을 보이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풍류를 동경하여 모방해 왔으면서도,
풍류를 부정하려고 애써온 그들의 자세가 여기서도 발견되기 때문이다. 유교가 풍류의 정통맥이
되지 못하는 이유는 많은 요소를 보유하고 있으면서도, 그 원천이 되는 동이족 자체를 부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니, 그들이 동이가 아님을 그들의 경전에 기록하므로써 스스로 동이의 정통맥
을 포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동이족의 혈통은, 그들이 세계국가를 목표로 적극적인 혼혈정책을 실시하면서도 내부적으로는
혼혈정책과 정반대되는 근친혼으로 지키려고 했던 그 위대한 혈통은, 지금 인류학자들이 몽고
인종으로 분류하는 혈통이다. 즉 몽골인종(몽골리안)이 동이족의 혈통인 것이다.
이 사실은 옛 거인국의 자취를 따라 분포하고 있는 인종이 몽고족이라는 사실만 보더라도 확인
된다. 발해 - 황하 - 중앙아시아 - 서남아시아(이스라엘) - 터키 - 이집트 까지가 옛 거인국의
중심무대였다. 그리고 근대 유럽인들에 의해 신대륙이라고 불리는 남북아메리카 대륙까지도
인디언, 한자로 나타내자면 은지인(殷地人)들의 태양신 숭배와 피라밋, 각종 축제 등의 풍습을
통해 볼 때 모두 동이의 후예로 보아야 한다. 한마디로 세계는 동이족 풍류의 세상인 것이다.
이 지도에 표시된 모든 지역이 동이의 강역이었다. 이 지도는 중국의 한대(漢代)에 해당하는데,
먼저 흉노는 중국인들이[하나]를 미워하여 붙인 이름이다. 월지(月 )나 대월지 등도 동이족의
지황을 가리키던 이름이었다. 서쪽의 파르티아도 [밝터]를 부르는 이름이다.
몽고족에서 퍼져나간 방계인종은 지나족, 아리안족, 아랍족이다. 지나족은 진한족(秦漢族)인데,
이 이름이 진한(辰韓)을 모방한 것임은 어렵지 않게 알수 있다. 그들이 진한을 모방한 이유는
그래야만 왕실의 정통성을 인정받아 민중의 반란을 예방할 수 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아리안족은 [알이난(卵生)족]이다. 히틀러가 그렇게 자부심을 가진 아리안 인종은 동이족의
피가 섞였음을 자랑하는 혈통이었던 것이다.
아랍족은 [알 아비 난(卵父生)족]이다. 아랍족과 피터지게 싸우던 히브리족은 해부루족과
소리가 같은 것으로 보아, 본래는 동이족이었던 것으로 보여진다. 모세가 이집트에서 탈출할 때
특별한 접신체험을 하면서 십계명을 만들기 이전의 히브리족은, 여와의 정통임을 자랑하던
동이족의 한 갈래였던 것으로 보는 것이 옳다.
그러면 동이족의 정통은 어떤 나라의 어떤 민족이 이어받았는가? 이 책에서는 동이의 정통을
한겨레가 이어받았다는 전제하에, 그 사실을 입증하는 사실들을 제시하는 방식으로 풍류맥의
전승을 검토해 보기로 한다. 이와같은 방식이 문제가 많은 것은 사실이나, 최소한 동이의 정통
맥 중에 중심 줄기가 한겨레라는 결론은 얻을 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한겨레가 풍류의 정통맥임을 밝힌다고 하여, 다른 민족이 풍류의 정통맥일 가능성을
완전히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여기서 얻어지는 결론은 다른 결정적인 증거가 있으면 부정될
수 있는 가설일 뿐이다.
2. 한겨레와 풍류맥
우리 한겨레가 풍류의 정통맥을 이었다는 사실은 민족의 이름부터가 한겨레이고, 전통문화에
붙은 이름들이 한글 . 한복 . 한옥 . 한식 등, [한]으로 통일되어 있는 점에서부터 나타난다.
[한]이 태양과 밝음을 나타낸다는 사실은 여러 선배들이 밝힌 내용으로 이 책에서도 이미 여러
차례 설명되었다. 이는 곧 태양신 숭배사상이 한겨레의 기본 정서로 정착해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따라서 한겨레는 풍류맥의 첫 번째 기준을 충족시킨다.
두 번째 기준인 삼한사상은 삼신일체, <삼일신고>, 삼한관경, 삼일운동 등으로 한겨레의 역사
와 뗄수 없는 관계를 맺고 있다. 세 번째 요소인 삼신산 성지는 중국인이 쓴 우리역사에 명기
되어 있는 [소도]로 나타나 있다. 네 번째 요소인 우상숭배는 장승(벅수)을 통해 확인된다. 지금
남아있는 다른 종교의 신상들은 남녀가 따로따로 있음에 반해, 장승은 반드시 천하대장군과
지하여장군이 한쌍을 이루고 있다.
다섯 번째 요소인 혈통중시와 조상숭배는 그 열성이 지나쳐 사회문제까지 되었던 요소이니, 더
거론할 필요도 없다. 여섯 번째 요소인 신인동일시 사상은 신에 대한 존칭인 [님]을 일상생활에서
사람에 대한 존칭으로 사용하고 있는 점만 보더라도 확인된다. 햇님 . 달님 . 별님은 신칭이고,
아버님 . 어머님 . 마님 . 아드님 . 따님은 곧 우리들 개개인이 하늘나라의 주민임을 증명해주는
언어 습관들이다.
일곱 번째 기준인 제정일치의 사회제도는 백년전까지만 하더라도 우리 사회제도의 기본 골격
이었다. 정치와 교화를 구별할수 없다고 생각했던 우리 조상들은, 비록 교화의 중점을 풍류 .
불교 . 유교로 바꾸어 오기는 했으나, 정치와 종교를 분리해야 한다는 미개한 발상은 한 번도
하지 않았었다. 이는 이승(異生)과 저승( 生)을 구별할수 없었던 풍류의 체제에서 유래한 것일
것이다.
여덟 번째 기준인 거인국의 역사기록 보유는 한겨레만이 충족시키고 있다. <삼국유사>는 말할
것도 없고, <삼국사기>도 고조선과 삼한을 분명히 기록하고 있다. 풍류에 대한 가장 오랜 기록인
[난랑비서]도 <삼국사기>에 기록된 것이다. 이런 기록들의 진실성이 의심받았던 적도 있으나,
<환단고기>등 여러 고대역사 기록들이 발굴되면서 그 내용들이 실제 역사임이 밝혀져 가고 있다.
새로 발굴된 고대의 역사서들이 거인국의 역사기록이라는 사실은 앞의 인용문에서 밝힌 사실이며,
학계의 깊은 관심이 필요한 부분이다.
아홉 번째 기준인 거인국의 진리체계도 한겨레 만의 자랑이다. 한겨레에게는 다른 어느 민족도
가지지 못한 풍류의 최고 경전인 <천부경> . <삼일신고> . <참전계경>이 있기 때문이다. 이 책
들이 풍류의 진리체계라는 사실이 인정받기 까지는 앞으로도 많은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여러 학자들의 뛰어난 연구로 기본적인 내용은 모두 밝혀졌으니, 이 내용들을 다른 분야
와 접목시키는 연구활동만 활발해 진다면 그 시간은 얼마든지 단축할 수 있다.
3. 삼신 할머니
풍류의 기원은 한겨레의 국조삼신에게서 찾아진다. 우리의 국조삼신은 우리에게는 조상신
이지만, 한겨레 이외의 인류에게는 우주의 최고신으로 알려진 분들이다. 그리고 그들의 신으로
서의 칭호는 앞에서 소개한 바 있다.
그런데 한겨레의 언어습관에서는 특이하게도 국조삼신과 대응하는 삼신 할머니가 있다.
이 삼신 할머니와 국조삼신의 관계를 밝히지 않고서는 풍류의 맥을 올바로 찾았다고 하기는
어렵다. [삼신 할머니]라는 칭호는 두가지 칭호로 분할될 수 있으니, [삼신]과 [할머니]이다.
이 중에서 [삼신]에 대해서는 [삼신(三神)]으로 보는 입장과 [산신(産神)]으로 보는 입장이
있다.
[삼신 할머니]가 국조삼신에서 유래했다고 보는 것이 [삼신(三神)]으로 보는 입장이다. 둘째
관점에서의 [산신(産神)]이란 옥황상제의 명을 받아 인간세상에서 아기의 많고 적음과 있고
없음, 그리고 해산(解産)을 주관하는 신이라고 한다.
[산신]이 [삼신 할머니]로 불리게 된 것은 [태(胎)]의 우리말이 [삼]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한편으로는 [산신(産神)]이 "인간제물을 받았던 무서운 엄마인 태모(太母)"라고 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관점들은 부분적으로는 맞는 면도 있지만, 핵심을 벗어난 느낌이 있다. 왜냐하면
이 [산신]도 또한 국조삼신의 한분인 지황(地皇)의 다른 칭호이기 때문이다. 이 사실은 [삼신]
의 뒤에 붙은 [할머니]에서 밝혀진다.
[할머니]는 [한어머니]가 줄어서 된 말이다. [한어머니]는 [한]과 [어머니]의 합성어로서,
[어머니 한]과 같은 말이다. 한자로 나타내면 [모한(母韓)]으로서, [마한(馬韓)]이나 [모한
(牟韓)] 또는 [무한(巫韓)]과 같은 말인 것이다. 이점은 [할머니]의 한자인 [파(婆)]를 분석하면
보다 확실해진다.
[파(婆)]가 들어가는 말은 의외로 풍류와 깊은 관련을 맺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는데, [노파
(老婆)] . [매파(媒婆)] . [산파(産婆)] . [탑파(塔婆)] . [바라문(婆羅門)] 등이 그것이다. 먼저
[노파(老婆)]는 지금은 단순히 [늙은 여자]라는 뜻으로 쓰이지만, [노(老)]의 본래 뜻을 생각
하면 고대에는 [지황]이나 [곡신(谷神)]의 뜻으로 쓰였던 것으로 보인다.
[老]의 글자모습은 지금까지 [늙은 사람이 지팡이를 짚고 서있는 모습이라고 해석해 왔으나,
3,000년 전의 상형문자는 누가 보더라도 대지(大地)를 상징하는 평평한 관을 쓰고 무당의
상징인 지팡이를 든 임금의 모습이다.
따라서 [老]는 [지황]이며, 이는 이 글자의 중국음이 [라오]라는 사실에서도 짐작된다.
[라(Ra)]는 태양신의 칭호로 널리 알려진 말이고, [老婆]를 거꾸로 쓰면 [婆老]가 되는데 이는
[파라오]로 읽힌다. [파라오]는 태양신을 자처하던 이집트의 왕의 이름인데, [이집트(Eyzipt)]가
[이(夷) 집 터]나 [아이 집 터]로 읽힐 수 있다면 노파와 파라오와 지황이 동일한 신의 다른 이름
으로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노파가 곧 산파이며, [산파(産婆)]는 [아이 낳는 것을 도와
주던 사람]이니, 이는 누구도 침범하지 못했던 지황의 고유권한이다.
[매파(媒婆)]는 앞에서 설명된대로 인황의 직능이다. 그런데 인황은 천계(天界)와 지계(地界)를
이어주던 중매쟁이였고, 지황은 지계에서 결혼할 자격을 갖춘 신녀를 선발하고 천계에서 온
신랑감과 신부감인 신녀의 신방을 꾸며주던 매파이기도 하였다. [매파]에 [婆]가 붙은 이유는
이런 측면에서 이해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된다.
마지막으로 [탑파(塔婆)]는 인도의 신전인 [스투파(Stupa)]를 음역한 것으로서, 박용숙 선생이
[소도]와 같은 것이라고 밝힌바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용례들 중에서 실제로 [늙은 여자]를
나타내는 경우는 [노파] 뿐이고, 그나마 다른 뜻으로 해석될 여지가 있다. 그러므로 [婆]에는
어떤 다른 뜻이 있고, 그 뜻이 풍류와 관련이 있을 수 있다. 이제 그 뜻을 분석해 보자.
[婆]는 뜻을 나타내는 [계집 女]와 소리를 나타내는 [물결 波]로 분해되는데, 이 두 글자의
어디에도 [婆]가 할머니의 뜻을 가져야 할 근거가 없다. 그러나 이를 우리말로 옮겨놓으면
지황의 뜻과 곧바로 연결된다.
[물결]은 발음만을 생각하면 [물길]로 바꿀수 있는 말이다. [물길]은 [물길(勿吉)]로서 전한과
후한 시대에는 [읍루(邑婁)]로 불리고, 남북조 시대에는 [물길], 수 . 당 시대에는 [말갈]로
불리다가, 발해가 망한 후 말갈족의 중심세력인 흑수말갈(黑水靺鞨)이 거란에 복속하여 [여진
(女眞)]이라고 하였다. 즉 여진족의 뿌리가 [물길]인데 이는 [여신전과 통하는 신도(神道)]임을
이미 설명하였고, 결국 지황의 신전인 우물의 연장이라고 해석된다.
이렇게하여 [婆]가 지황과 연결되면, [산신(産神)]의 상반되는 이미지가 아무런 마찰을 일으키
지 않는다. 지황은 땅의 지배권을 가지고 생산을 주관하던 달님인 서왕모로서, 서왕모는 저승
(저生)을 다스리면서 동자(童子)생산을 담당하였고, 동자의 비밀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인신공희
라는 살인멸구까지도 서슴지 않았던 무서운 어머니였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지황은 삼신의 한분이었고, 삼신의 은덕은 동이족의 지배를 통해 모든 종족에게
차별없이 베풀어졌으며, 지황이 통솔하던 선군(仙軍)들은 영토 내에서의 정의를 수호하던 천병
(天兵)이었을 뿐 아니라, 지계에서 만든 여러 기물(器物)들은 사람들의 생활에 말할수 없이 큰
도움을 주었으니, 자비로운 어머니의 이미지도 함께 가지게 된 것이다.
이제는 [삼신 할머니]가 풍류의 맥과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가 있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 있을
것이다. [단군 할아버지]는 역사에 기록되어 있으면서 그 왕후는 역사에 나타나지 않는 이유도
이 [삼신 할머니]가 쥐고 있다. [단군]은 특정한 임금이 아니라 [신전의 주인]이라는 뜻이며,
이는 곧 천지인 삼계의 주인이란 뜻임을 이미 밝힌 바 있다. 그 배우자 또한 특정화된 여신이
아니라, [檀君(단군)]의 본래뜻인 [三神(삼신)]의 부인이란 뜻으로 불렀을 것이고, 그 이름이
[삼신 할머니]인 것이다. 따라서 [삼신 할머니]는 동이족의 시고(始姑)이다. 지금도 쓰이는
[시어머니]라는 말은 [첫(始) 어머니(母)]로서 이 [삼신 할머니]를 일컫는 이름인 것이다.
한겨레의 여인들, 우리들의 어머니들은 이 삼신 할머니를 끔직이도 섬겨왔다. 아이의 출생때
부터 성장할 때까지 삼수(三數)가 드는 날에는 어김없이 삼신 할머니에게 고하는 풍습을 이어
왔는데, 이는 그 옛날 신전에서 하던 풍습을 이은 것이라고 해석하지 않고서는 이해되지 않을
일이다.
이제 우리는 한겨레가 풍류의 중심신전인 삼신산의 두 주인인 단군 할아버지와 삼신 할머니를
시조신으로 모셔왔다는 사실을 확인한 셈이고, 이는 곧 한겨레가 풍류의 뿌리와 직결되는
혈통적 근거를 갖춘 민족이라는 유력한 증거가 되는 것이다.
4. 움직이는 산
풍류의 중심신전인 삼신산은 풍류맥의 전승을 판단하는 중요한 기준이 된다. 그런데 이 삼신산
은 어느 한 장소에 붙박혀 있던 산이 아니라, 여러 곳으로 옮겨 다니던 산이었음이 학자들의
연구결과 밝혀졌다. 박용숙 선생은 신화시대의 기록들을 조사하여, 고대에 산이 움직였다는
전설이 실제로는 신전의 이동이었음을 밝히고, 특히 간보(干寶)의 <수신기>에서 삼신산이 하
(夏)나라 때로부터 진(秦)나라에 이르는 기간동안 네 번이나 자리를 옮겼으며, 그 옮긴 지명들이
모두 현재의 중국땅에 있는 지역들의 이름이라고 밝히고 있다.
이런 연구결과들은 풍류의 발원지가 지금 동이족이 차지하고 있는 한반도나 요동 . 만주 . 몽고
지역이어야 할 아무런 이유가 없으며, 오히려 동이족의 이동경로를 되짚어 찾아내어야 할 장소임
을 말해주는 것이다.
아무튼 삼신산의 이동은 곧 동이족의 이동이기도 한데, 동이족들은 이동하면서 풍류와 관련된
지명을 신전이 세워졌던 지역에 남겨왔다고 한다. 동이족이 남긴 지명 중에서 가장 쉽게 찾아낼
수 있는 것은 [한]과 [박]이다. [한]은 [한]으로만 남아있는 것이 아니라 [한]과 같은 음의 다른
글자나, 뜻이 같은 다른 글자로 표기되는 경우도 많으므로 실제로는 세계전역에서 찾을 수 있다.
[한]에서 갈라져 나간 말은 [韓 . 漢 . 安 . 黃 . 凰 . 華 . 咸] 등과 [天 . 大 . 太 . 泰 . 台] 등으로서,
중국땅에서 이런 글자가 들어간 지명은 대부분 동이족의 신전이 있었던 땅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박]은 [明 . 陽 . 白 . 海 . 靑 . 璞 . 北 . 福] 등으로 바뀔수 있으니, 이런 글자들이 있는 곳도 일단
풍류와 관계가 있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우리나라의 지명들 중에서 이들 글자가 들어가는 산과 물과 도시는 헤아릴 수도 없을 정도이고,
세계적으로도 이런 소리들의 지명은 무수히 많다. 히말라야 산맥 . 티벳 고원 . 힌두쿠시 산맥 .
한가이 산맥 . 천산산맥 . 돈황 . 황하 . 함양 등은 [한] 계열에 포함될 수 있고, 바이칼 호 .
발하시 호 . 볼가강 . 바쿠 . 박트리아 . 발칸 반도 . 함부르크 . 볼고그라드 . 청해 . 청도 . 상해 .
북경 등은 [박]계열에 포함시킬 수 있다. 이들 지명들의 분포지는 최남선 선생이 <불함문화론>
에서 "발칸반도에서 일본열도까지가 불함문화(발문화)의 영역" 이라고 말한 사실과 일치하는
지명분포이다.
주장하는 초점은 다르지만 지중해 유역의 첫 문명인 수메르 문명이 한겨레와 밀접한 연관이
있다는 연구결과들은, 동이족의 활동영역에 대한 간접적인 지원자료들이 된다. 최남선 선생은
<아시조선>에서 "중앙아시아의 파미르 고지에서 아시아의 여러 종족들이 퍼져나갔다"고 했으며,
이정기 선생은 <민족정통사상과 연구>에서 현재의 중동지역에서 살고있는 종족들의 조상인
수메르인들이 파미르 고원에서 갈라져 나간 종족의 일부라고 하였다고 한다.
안창범 선생은 <한민족의 신선도와 불교>에서 수메르인과 우리민족의 동일성을, 15가지에
이르는 근거항목을 제시하면서 주장하고 있다.
1) 수메르인은 머리털이 검고 곧으며,
2) 키가 땅딸막하다.
3) 후두부가 평평하다.
4) 교착어를 쓴다.
5) 가야와 신라 황족의 원조인 소호금천씨의 문화와 동일하다.
6) 그들의 장례법은 순장인데, 이는 고조선인들과 동일하다.
7) 고조선인과 같은 회도를 사용하였다.
8) 고조선의 갑골문자와 같은 설형문자를 사용하였다.
9) 동방에 있는 어머니 나라, 즉 근국(根國; 天皇國)의 지시를 받았다는 기록이 있다.
10) 고조선의 천제단의식(天祭壇儀式)과 수메르의 천제단의식이 같다.
11) 그들의 종교기록 중에는 우리의 <천부경>과 유사한 기도문들이 있다.
12) 고조선의 천부사상(天父思想)과 유사한 종교사상들이 있었다(점토명판).
13) 오행(五行)과 육갑(六甲)과 360도(度)의 개념으로 정치 . 종교 . 점성과학 등 사회문화가 발달
되었다(고조선과 같음).
14) 수메르의 언어가 고대 조선계 언어와 동일한 경우가 많았다.
15) 고조선과 국가체제에서의 제도가 같다 (김정권, [허상과 실상], 한배달, 1989. pp. 119-120).
수메르인들이 어디에선가 메소포타미아 지역으로 이동해왔고, 또 어디론지 이동해간 사실은
동이족의 이동을 말해주는 최초의 예이기도 하다. 아무튼 동이족의 중심신전인 삼신산이 수
차례에 걸쳐 이동했던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고, 그 이동의 흔적이 지명에 반영되어 있는 것도
인정할 수 있다. 그렇지만 그 이동의 원인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확실히 밝혀진 바가 없다.
그 이유는 아마도 동이족의 이동원인을 일률적으로 이야기 할 수 없기 때문인 듯 하다. 무슨
말인가 하면, 동이족의 이동은 급격한 지각운동에 따른 황폐화, 번한세력(봉건군주)들의 세력
강화에 따른 반발과 그로인한 갈등, 지부신전에서의 새로운 종교지도자에 의한 새 종교의 제창과
그 신흥종교의 급격한 세력팽창 등이 복잡하게 얽혀 신전의 이동이 일어났다고 보여진다는
뜻이다.
그러면 이 신전의 이동은 동이족의 강역 밖으로 단행된 것일까, 아니면 동이의 영토 안에서
옮겨다닌 것일까? 이 문제는 아직까지 논의의 대상이 되었던 적 조차도 없는 것 같다. 그런만큼
이 문제는 여기서 본격적으로 다룰 수 없는 문제이지만, 동이의 강역과 관련되는 문제이므로
하나의 가설을 세워 연구의 동기를 제공한다고 생각하고 글쓴이의 견해를 밝히자면, 동이의 중심
신전은 동이의 강역 안에서 옮겨다녔다고 생각된다.
이렇게 본다면 동이의 강역은 최남선 선생이 밝힌 [발칸반도에서 일본열도까지]보다 더 넓은
유라시아 대륙 전체와 이집트까지라고 볼수 있다. 즉 박용숙 선생이 주장하는 바와 같이 지중해
연안의 고대문명까지도 거인국인 동이족의 영토였던 것이다.
그런데 지중해 연안의 고대문명은 풍류의 관점에서 본다면 변방문명이라고 할수 있는 것이니,
수메르 문명이 있었던 지금의 중동지역도 동이족의 중심이 아니라 주변문명권일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박용숙 선생은 풍류의 발원지를 지중해를 비롯한 중동지역으로 설정하고 있지만, 이책에서
살펴본 바에 따르면 우리의 역사가 소아시아의 고대사와 연결되는 이유가, 동이의 중심신전인
진한의 기록이 소실되고 변한의 기록만이 남아있기 때문에 나타난 현상이라고 볼수도 있는만큼,
동이족의 활동중심이 따로 있었을 가능성은 아직도 남아있고, 또 중동지역이 동이족의 변방지역
일 가능성도 없어지지 않는다.
그리고 동이의 중심지역을 함부로 단정할 수 없게 만드는 또 하나의 이유는 사막의 위치와
관련이 있다. 동이족의 활동지역이었던 곳 중의 상당부분이 사막을 끼고 있다는 사실은, <천부
경>의 진리가 시간을 포함한 4차원의 진리를 담고있을 뿐만 아니라, 최근에 밝혀진 핵물리학의
이론들과 너무나 흡사하다는 점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해 준다. 그 가능성은 동이족의 선대
문명이 사막화 현상을 일으킬수 있는 파멸적인 무기의 사용으로 붕괴했을 가능성이다.
5. 사막과 동이강역
세계지도를 펼쳐놓고 사막의 분포상태를 살펴보자. 먼저 중동에서 아프리카 북부 전역을 뒤덮
은 광활한 사막이 먼저 발견된다. 그리고 이 지역은 아득한 고대에 20세기 후반인 지금의 수준
보다 더 높은 수준의 과학문명이 있었다고 해석할 수 있는 여러 가지 흔적들이 남아있는 지역이
기도 하다.
동쪽으로 눈길을 돌리면 인더스 문명의 발상지인 인더스강의 동남쪽으로 원인을 알수 없는
타르사막이 발견된다. 그 북쪽에는 카스피해 - 아랄해 - 발하시호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이 카라
쿰 사막과 키질쿰 사막으로 덮여있다. 거기서 다시 동쪽으로는 티벳고원의 북부지역 전체,
파미르 고원에서 발해만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이 타클라마칸 사막과 고비사막으로 불모지를
이루고 있다. 이와같은 사막의 분포가 단지 우연한 자연현상일까?
<환단고기>에 수록된<삼성기>는 "우리 환의 건국은 세상에서 가장 오래되었는데, 한 신이
있어 시베리아의 하늘에서 홀로 변화한 신이되시니 밝은 빛은 온 우주를 비추고 큰 권화는
만물을 낳았다.(吾桓建國 最古 有一神在{斯白力}之天 爲獨化之神 光明照宇宙 權化生萬物)"라는
구절로 시작된다. 여기서 {斯白力}을 강조한 이유는 이 낱말이 [시베리아]가 아니라 [사하라]
라는 주장이 있기 때문이다.
박병식 선생은 <한국상고사>에서 [斯白力(사백력)]을 [시베리아]가 아니라 [사하라]로 앍어야
하고, 그 뜻은 [아주 밝은 하늘]이라고 한다. 이 주장을 전혀 무시할 수 없는 이유는 [사하라]라
는 지명이 실제로 있고, 그 지역의 하늘이 실제로 아주 밝으며, 그 주변지역에 풍류와 관련된
지명이 아주 많이 발견되기 때문이다. 그곳이 어디냐 하면, 바로 아프리카 대륙의 삼분의 이를
뒤덮고 있는 사하라(Sahara) 사막이다.
아프리카 대륙은 불경에 나오는 염부주(또는 섬부주)의 조건을 완벽하게 갖추고 있다. 염부주
(閻浮州)는 바다 가운데에 있고, 삼변이 비등한데 북은 넓고 남은 좁아 인면상(人面像)이며,
아뇩달지라는 못이 있어 거기서 4대하(四大河)가 사방으로 흐르고 있으며, 삼분의 이는 북쪽
으로서 땅은 넓고 사람은 드물며 흉노가 사는데 도에 힘쓰지 않고, 남쪽은 삼분의 일인데 삼면
이 바다에 닿았고, 사람은 많으나 마음이 맑고 성인의 교화를 잘 받은 대성도(大聖都)라고
하였다.
안창범 선생은 이 염부주가 백두산 천지라고 주장하는데, 그 주장도 일리가 있으나 백두산
보다는 아프리카의 입지조건에 더 들어맞는다. 아프리카 대륙은 특이하게도 사면이 모두 바다로
에워싸인 섬이 아닌 대륙이요, 아라비아 반도까지를 고려하면 삼변이 거의 같은 길이가 되는데
다가, 생긴 모습이 해골과 거의 같아서 인면상이라는 설명에도 부합하고, 북쪽은 면적으로는
삼분의 이를 차지하나 대부분이 사막으로 사람이 드물고, 남쪽은 삼면이 바다에 둘러싸여 있고
사람이 많이 산다.
또 킬리만자로 산을 동쪽으로 우러러보는 자리에 있는 빅토리아 호수는 적도상에 있는 지중
(地中)의 바다로서 모든 시름을 잊게하는 호수라는 아뇩달지의 이름이 썩 잘 어울리고, 킬리만
자로 산은 설산이라는 이름이 아주 잘 어울리는 산으로서, 맨 아래쪽은 열대 밀림지역이고 중간
은 온대 기후지역이며 꼭대기는 흰 눈으로 덮인 삼층구조를 이루고 있어, 설산의 삼층구조와
어울린다.
또 아뇩달지에서 사방으로 흐른다는 4대하는 북쪽으로 나일강, 서쪽으로 로이레 강, 남쪽으로
잼비지강의 지류, 동쪽으로 루아하 강이 있다. 더욱이 그 북쪽에 있다는 흉노는 원문에 훈윤( )
으로 되어 있는데, 글자로 미루어 볼 때 [검은 야만인]의 뜻이다. 실제로 아프리카 북부에는
바아바리(야만)라는 지역명이 있고, 그곳의 주민들은 흑인종이다. 이런 모든 점으로 볼 때
염부주는 아프리카일 가능성이 높다. 안창범 선생은 염부주가 진단(振旦) 또는 신주(神州)라는
사실을 근거로 이를 신시(神市)에 연관시키는데, 이런 관점을 수용하고 그 지역만 아프리카로
바꾸어 설정한다면, 동이족의 발원지는 아프리카의 빅토리아 호수에서 지중해에 이르는 지역
이었으나, 사하라 지역이 사막화 하면서 다른 곳으로 이동해 갔는지도 모른다는 가설도 세울수
있을 것이다.
아프리카 지역은 이집트의 피라밋을 제외하면 고고학적 발굴실적이 거의 없다고 할 수 있는
지역으로서, 무한한 가능성을 간직한 대륙이라 할수 있다. 특히 이집트의 고문서들 중에는 기원
전 3만년이나, 4만 8천년 부터 써온 고대 연대기가 있었다는 기록들도 있고 보면, 환인의 환국
의 연대를 "7세(世)에 전하여 역년 3,301년, 혹은 63,182년이라고 하는데 어느것이 맞는지 알수
없다" 고 기록된 것이 전혀 근거없는 기록이 아닐 가능성도 발견된다.
사하라 사막 주변의 지명들 중에서 풍류와 연결가능한 지명으로는 아비시니아 고원(아버지
神異 고원), 소말리아(속말), 우간다(牛干의 땅), 나일강(나리(川) 강), 말리(머리), 모리타니
(말탄 이 . 머리 딴 이), 모로코, 마라 산, 에미쿠시 산(어미 古示 산) 등 아주 많으나,
이는 글쓴이가 지금의 지명에 우리말을 억지로 갖다 붙여본 것이다. 그러나 이 이름들이 원주민
들이 옛날부터 불러온 이름들이라면, 풍류와 연결될 가능성은 무시할 수 없이 커질 것이다.
아무튼 사하라 사막이 풍류와 연결될 가능성은 <태백일사 . 삼한관경본기>의 [왕검성]에서도
찾아진다. 즉 "아사달은 삼신을 제사지내는 곳인데, 후인들은 왕검의 옛집이 아직 남아있기
때문에 왕검성이라 했다(阿斯達 三神所祭之地 後人稱王儉城 以王儉舊宅尙存故也)" 는 구절이
그것이다.
<태백일사>는 발해의 대야발이 쓴 것을 바탕으로 조선조 연산군과 중종때의 학자인 이맥이
편찬한 것인데, 발해때까지 남아있었던 [왕검의 구택(舊宅)]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아무
설명이 없어 확실하지 않으나, 발해시대까지 전해질수 있는 단군의 유적은 석조유물이어야 하고,
삼천년 이상된 석조유물은 이집트의 피라밋밖에 없으니, 이를 단군의 유적으로 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요즘 발굴되는 동아시아의 피라밋은 그때는 대부분 흙으로 덮여 있었다)
아시아의 동쪽 끝에서, 서쪽 끝에있는 피라밋이 조상의 유적이라고 말하는 것이 망발처럼 보일
수도 있으나, 이는 동이족의 세계국가를 모르기 때문일 뿐이다. 한반도와 이집트를 연결하는 두
번째 종족명인 동호(東胡)와 서융(西戎)을 검토해 보면, 아시아의 동쪽 끝과 서쪽 끝의 거리가
그렇게 멀지 않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들 지역도 사막을 따라 펼쳐져 있다는 점이
특징이기도 하다.
6. 동호와 서융
실증사학에 물든 일부 사대주의 사학자들이 우리 고대사의 강역을 축소하기 위해 몸부림쳐
왔음에도 불구하고, 객관적인 역사기록은 우리민족 고대사의 무대가 아시아 전체지역을 차지하
였음을 증명해주고 있다. 그 증거가 되는 단어가 [흉노(凶奴)]이다.
한겨레의 삼국시대를 종식시킨 당(唐)왕조 이후로, 아시아 지역의 주류사관(主流史觀)으로
성장한 중화사상(中華思想)에 의해 [흉측한 오랑캐]의 대명사로 사용되는 [흉노(凶奴)는 [하나]
의 중국식 표기였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凶]의 지금 중국식 발음은 [죵(xiong)]이지만, [凶奴]에서의 [凶]이 [한]의 표음이라는 사실은
흉노족의 서양식 표기가 [Hun(훈)]인데서 분명히 드러난다. 이 명칭의 유래는 동이족에 의해
당나라때까지 끊임없이 시달림을 받아온 중국인들이, 그들의 적개심을 호칭에 담아 표현한 것
이라고 보여진다.
이 [흉노]의 또 다른 표기가 [동호(東胡)]이며, 동호와 같은 시기에 한(漢)나라의 서쪽에 있던
동이족의 이름이 서융(西戎)이다. 그런데 이 [서융]이란 이름이 [서쪽의 흉노]라는 의미임은
쉽게 추측할 수 있다. 따라서 중국인들이 흉노 일족(一族), 정확히 말해서 [한겨레]를 자기들의
영토를 기준으로 동서로 나누어 부르던 이름이 [동호]와 [서융]이 되는 셈이다.
이런 추측은 근거가 없는 것이 아니고, 흉노의 본거지로 알려진 몽고고원 지역의 중요한 지명
들을 유력한 근거로 제시할 수 있는 추측이다. 몽고고원의 중심산맥은 [한가이 산맥]인데, 이는
[한겨레]의 고어인 [한가리]의 산맥이란 뜻으로 풀이된다. 그 동쪽에 있는 [바이칼 호]는 [밝
클 호]가 변해서 된 이름으로 보아도 무리가 없다.
[몽고(蒙古)]가 동이신전의 이름이라는 사실은 이미 밝힌바 있고, [투루판 분지]는 [두루 한],
다시말해 원둘레와 중심으로 상징되는 [세 한]분지로 바꾸어진다. [타림 분지]는 [태림(太臨
또는 太林) 분지]가 되어 [삼신이 임하는 숲]이라는 뜻을 담고있고, [돈황]은 [단황]으로 쉽게
바꾸어 진다.
그리고 보다 결정적인 증거는 위 지도에서 나타나는 [유연]이 바로 조선의 다른 이름이라는
사실이다. 이 사실을 연구한 송동건 선생의 다음 인용문은 우리들이 알고있는 한겨레의 상고사
가 얼마나 왜곡되어 있는지를 증명하고 있다.
미진한 채로 먼저번의 주제를 다시 보자. "샤릴", 즉 "아발스"에 관해서는 5-6세기에 중국사료
에서 말하는 芮芮(예예; rui rui) 즉 (유유; ruan ruan)으로 간주하며, 뻬리오는 "몽골족인 芮芮"
로 본다. 의 국명은 柔然(유연)이다. 무크리는 靺鞨(말갈) 혹은 勿吉(물길)로 봄은 이미
언급한 바와 같다.
그런데 이 희귀한 자료의 기록자 자신은 전후의 두 아발스를 구별하면서, 557년에 동로마에
나타난 것은 위굴족이라고 명백히 밝힌 바 있다. 따라서 두 개의 위굴족을 구별하는 것이 무리
라면, 결국 이들은 모두 "위굴족"이란 뜻이다. 이렇게 갈래가 복잡하게 보이는 제(諸) 학설은
나름대로 일면의 진실을 갖고 있다. 소위 "芮芮" 또는 " "으로 알려진 종족은 A. D. 300년 말
경에 木骨閭(목골려)에서 시작하는, 그리고 그 음(音)이 변하여 郁久閭(욱구려)를 그들의 성(姓)
으로 했다는 종족으로, "芮芮"등은 별칭인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그들의 국호는 "柔然"이다.
그리고 "위굴"은 그들과 같이 있던 한 국가구성단위였다(<魏書>, <北史> 등). 따라서 "Muxri",
"Mukuri", "Mug-lig"는 오히려 이 "木骨閭" 쪽이 더 가까운 음사(音瀉)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
그러나 보다 분명히 지적해야 할 것은 柔然의 표기이다.
유연(柔然)은 "JUJAN(DjOu-DjAN")이다. <蒙語類解(몽어류해)> 朝鮮의 몽고독음(蒙古讀音)은
"쵸오한"이다. 어쨌든 柔然은 바로 木骨閭國이다. Mukuri, 또는 Mukri(Mokri, Mokori로도 쓰임)
는 고대의 고려(高麗) 또는 고구려가 중앙아세아에 알려진 국호이며, 朝鮮이나 柔然이 이렇게
음이 가까운 것이라면, 결국 이들 네가지 표기는 한자(漢字)에 의한 사실의 왜곡에 흔히 쓰이는
구체적인 한 예라고 봐야 할 것이다.
<說文建首字讀序(설문건수자독서)>는 모두에 이렇게 시작한다. "...... 先路가 늘 말하기를
高麗朝鮮(고려조선)에서 高와 朝는 疊韻(첩운)이요, 麗와 鮮도 첩운이다. 宋(송)의 吳才老
(오재노)의 <韻補(운보)>에 鮮은 四紙(韻)에 收合(수합)되어있는 것으로도 가히 증명이 된다."
두 쌍의 자는 가차(假借)가 가능하다는 뜻이며, 따라서 고려나 조선이나 같다는 뜻이다.
"東夷之國, 朝鮮爲大 .....(동이의 나라에서 조선이 가장 위대하니 ......)". 남조(南朝)인<梁書
(양서)> 동이전의 시작하는 文이다. A.D. 502 - 556년간의 梁의 존속시기에 조선국이 위대하기
는커녕 존재조차 문제될 법 하건만, 이런 표현이 엄연히 가능함은 바로 고려, 즉 고구려를 의미
할 수밖에 없다.
<魏書> 傳에는 族의 국호는 "柔然"이며, "漠北(막북)"에 위치했다. 그 판도는 지금의
내몽고와 산서성(山西省) 북부에서 감숙성(甘肅省) 북부와 신강성(新疆省)을 거쳐 쏘련의
키르키즈(Kyrghiz) 일대에 이르는 지역을 포함하고 있다. "柔然"의 독음은 "주젠(Jujen)" 즉 "朝鮮"
이다. 내몽고 남부와 산서성 북부, 그리고 河套(하투) 일대가 지금은 사막지로 되어 있지만,
1844 - 46년에 이곳을 여행한 프랑스 신부(神父) 육(Huc)의 관찰과 현지인의 증언에 의하면,
17세기 중엽까지도 이곳은 "고려부족의 소유지"로 관개가 잘 되있어 지금과는 달리 비옥했으며,
그 폐허가 여행당시인 19세기 중엽에도 곳곳에서 볼수 있었다.
그리고 다음 지도에서 유연은 남 . 서 . 북 흉노의 한가운데에 있다. 이는 흉노의 중앙정부가
유연이라는 뜻이다. 이 유연이 조선이라는 뜻이니, 흉노가 한겨레의 별칭임은 말할 것도 없다.
더구나 이 지도가 중국의 남북조 시대를 그린 것이므로 이때의 조선은 고구려가 분명하고,
고구려가 조선이라는 위 인용문은 틀림없는 진실이다.
아무튼 중국인들이 동이족의 지배를 거부하기 시작한 것은 춘추시대 부터이다. 그러나 이때까
지는 중국에 동이를 막기위한 장성이 축조되지 못했었다. 이는 동이의 지배가 중국 전역을
완전히 제압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전국시대에 오면서 연(燕) . 조(趙) . 위(魏) 등의 나라가 북방에 장성을 쌓는데, 이는 이때부터
중국이 풍류의 신정을 거부하고 자주독립을 외쳤다는 뜻이며, 처용이 당했던 것과 같은 곁다리
신세를 당하고 싶지 않다는 부권(夫權)선언이기도 한 셈이다. 그리고 이때까지는 중국인들이
동이의 강역에 대해서는 무관심하였고, 기껏해야 자기들의 사방을 에워싼 동이족의 명칭을
알고 있는 수준이었다.
그 당시 중국인의 지리학이 어느정도 수준이었는지는 모르므로 그들의 기록이 얼마나 정확
한지는 모르되, 동쪽의 산동반도에는 래이(萊夷), 그 남쪽으로 바닷가에는 회이(淮夷), 회이의
서쪽이면서 중국의 남쪽에는 초(楚), 서쪽에는 서융과 견융, 북쪽에는 적적과 백적등 동이족에
의해 완전히 둘러싸여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들이 동이족이라는 사실을 하나씩 살펴보기로
하자.
먼저 초(楚)는 도끼로 작은 나무를 베는 모양을 본뜬 글자로서, 염제신농 씨족의 파부지가(破斧
之歌)와 연결되므로써 동시에 초나라가 동이족의 나라였음을 암시한다. 또 적(狄)도 동이의 한
갈래임은 사이(四夷)가 동이(東夷), 서융(西戎), 남만(南蠻), 북적(北狄)이라는 사실만 보아도
알수 있다. 만(蠻)은 뱀을 신성시한 종족의 이름이니 사만(巳蠻), 즉 삼한 중에서 무당인 지황을
일컫는 이름이다. 융(戎)은 병장기의 총칭이니, 서왕모가 담당하던 서해용궁의 장인(匠人)집단
을 일컫는 이름이다. 적(狄)은 적(敵)으로도 부족하여 짐승으로 표현된 적(敵)이다.
그런데 이 적(敵)의 본래뜻을 찾아보면 뜻밖의 사실을 알게된다. [敵]의 본래 글자모양은 그림
과 같은데, 이 글자가 임금 제(帝)자의 몸 아래에 그릇을 받쳐둔 모습임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림
에서 보듯이 적(敵)의 옛 자형은 두가지가 있는데, 제(帝) 앞에 그릇을 받쳐둔 A형과 제(帝) 옆
에서 손으로 무엇인가를 하고있는 모습인 (B)형이 있다.
이 두 글자를 별개의 글자로 생각할 것이 아니라, 용두질(Masterbation)을 나타내는 같은 글자
로 이해해야 정확하다. 이점은 손 대신에 계집 녀(女)를 붙인 [적(嫡)]이 [본처 . 아내]의 뜻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서 증명된다.
이 사실은 중국인들이 그토록 혐오했던 북적(北狄)의 정체가 동이족 이신(異神)임을 보여주는
확실한 증거이다. 결국 [사이(四夷)]라는 말 자체가 고대에 한겨레가 중국의 사방을 완전히
둘러싸고 있었다는 사실, 즉 지금의 한족(漢族)은 동이족의 작은 한 제후국에 불과했던 나라가
성장한 것이라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제 서융(西戎)을 살펴보자. 고대의 지도에서 서융의 영토는 흉노의 서쪽에서부터 시작하여,
파미르 고원의 서쪽까지 뻗어있고, 그 서쪽에는 대월지(大月支)국이 있는데 그 수도는 박트리아
이며, 그 서쪽에는 파르티아가 있다. 지금까지 민족사학계에서 조차 이 나라들이 우리 고대사의
강역이라는 사실을 주장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이 세 나라는 거인국인 진국(辰國)의 삼한 중 지황(달님)의 영토인 것이 그 이름에서부터
나타나고 있다. 서융은 고대 지도에서 서역(西域), 저( ), 강( ), 월지(月 )의 자리에 해당
하는데, 이는 고대 중국인들이 서융의 영토에 대해 확실히 알지 못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이제 이 국호들의 뜻을 풀어보자. 먼저 [서역]은 [인도]가 아니라 티벳고원 북부의 타클라마칸
사막지역이다. 여기에는 돈황 . 옥문관 . 쿠차 . 투르판 분지등 앞에서 몇번 거론되었던 중요지역
들이 망라되는 지역이다. 이 서역에 비해 인도는 [석씨서역(釋氏西域)]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웠
음을 박용숙 선생이 이미 <수경주>를 인용하여 밝히고 있다.
그런데 서역과 인도는 지도에서 남북으로 일직선상에 있고, 그 지역은 티벳고원의 서쪽사면을
포함한다. 이 사실은 쿠차에서 인도까지의 전 지역이 서역이었을 가능성도 제공한다. 아무튼
서역이 박용숙 선생의 지적대로 동이족의 서쪽지역을 다스리는 지황의 영토임은 확실하며,
글쓴이는 그 서역이 돈황에서 지중해에 이르는 지역 전부를 가리키는 것이 확실하다고 본다.
서역을 이렇게 볼수 있는 근거는 서역의 주변지역의 이름들이 풍류와 직결되기 때문이다. 먼저
저( )는 [이이]의 짝인 [저이( 夷)]의 이름일 것이다. 어차피 중국을 둘러싼 종족은 모두 사이
(四夷)이니, [저이]나 [강이( 夷)]들의 국호에 [이(夷)]를 꼭 표기해야할 이유도 없었을 것이다.
다음으로 옥문관 남쪽에는 [월지]가 있다. [월지(月支)]는 [달가지]요, 이는 [달가리]가 되어
[땅겨레]를 나타낸다. 즉 지황의 영역임을 나타내는 이름이 틀림없다. 이는 [대월지(大月支)]
국도 마찬가지이다. 대월지국의 수도는[박트리아]인데, 이 이름이 [박달] 또는 [밝터]임은
기본적인 상상력만 있어도 추리해 낼수 있다.
이같은 사정은 대월지국의 서쪽, 지금의 이란고원 지역을 차지하고 있는 [파르티아 왕국]에서
도 마찬가지이다. [파르티아]의 [파르]를 약하게 발음하면 [바르]가 되는데 이는 [밝]의 의미
이며, [티아]는 [타]가 되어 [터(基)]나 [토(土)]로 이해된다.
이제는 지황의 통치영역인 [서역], 삼한의 체계로 말하면 [마한]이 옥문관에서 지중해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이라는 사실을 인정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분명히 근거가 제시되어 있고 그 근거
에 무리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내용을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한국의 역사학은 일제 식민사관에 너무 깊이 중독되어 있고, 그래서 한국사는 아직도 한반도를
벗어나지 못한채 비틀거리고 있기 때문이다. 바로 그 때문에 도학의 자세를 고대사 앞에 두어
[선입관의 배제]를 요구했던 것이다.
언어와 문자와 역사를 [근원적 의문]을 해결하는 자세로 뿌리까지 파헤치면 이런 사실들이
밝혀지는데, 어지간히 열린 마음으로는 이렇게 밝혀놓은 사실도 받아들이기 힘든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난데없이 이런 말을 하는 이유는 아직도 놀랄 일이 더 많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그 놀랄 일이란 [진한]의 영역이 바로 흉노의 영토로 표시된 지역이라는 점이다. <사기>에는
[동호]와 [흉노]가 다른 나라처럼 표기되어 있으나, 이는 [한겨레]와 [배달겨레]를 다른 민족
이라고 억지쓰는 것이나 다름없는 짓이다. 사마천이 이렇게 흉노와 동호를 나누어 놓은 이유는
동족상잔을 일으켜 보려는 이이제이(以夷制夷)의 이간책이었을 뿐이다.
이 흉노(동호)의 강역은 동해에서부터 서역의 북부까지이다. 이와같은 흉노의 강역은 <후한서>
에서 "[한]에는 세 종류가 있으니 첫째는 마한이요, 둘째는 진한이요, 셋째는 변한이니 모두가
옛 진국이다. 진한은 동쪽에 있어 열두나라이며, 북으로 예맥을 접하고 있다. 변한은 그 남쪽에
있으며, 역시 열두나라로서 남쪽으로 왜와 접하고 있다. 마한은 서쪽에 있으니 쉬흔네 나라가
있으며, 남쪽으로는 왜를 접하고 북쪽으로는 낙랑과 접하고 있다(韓有三種 一曰馬韓 二曰辰韓
三曰弁韓 皆古之辰國也. 辰韓吊 有十二國北與穢貊接. 弁韓在其南 亦十二國 南與倭接. 馬韓在西
有五十四國 南與倭接 北與樂浪接)."고 한 기록이 정확함을 확인하게 된다.
즉 진한은 흉노의 강역이요, 마한은 그 서남쪽에 있게 되는 서역이요, 변한은 흉노의 남쪽 .
서역의 동쪽에 위치하는 중국대륙 전체가 되는 것이다. 결국 중국의 여러 제후국들이 모두 동이
족이 씨뿌려 세운 나라들이요, 곁다리 신세가 죽기보다 싫었던 봉건제후들이 아비를 부정하고
몰아낸 것이 중국의 역사이다.
고구려를 멸망시킨 당군(唐軍)은 그런 사실을 기록한 동이족의 역사기록, 즉 그들의 수치스런
족보를 없애기 위해 고구려와 백제의 문서창고를 남김없이 불태웠던 것이다.
(향일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