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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12. 02
영국의 다이애나 왕세자비가 BBC와 ‘솔직한’ 인터뷰를 해 세상을 충격에 빠뜨린 날이 1995년 11월이었으니 벌써 25주년이 되었다. 하지만 지금 영국은 BBC의 그 세기적 특종이 BBC 기자의 위조된 서류와 날조된 정보를 이용한 위계의 결과였다는 언론 보도로 시끄럽다. 23년 전인 1997년 36세의 아리따운 나이로 영면한 다이애나를 영국이 다시 불러낸 셈이다.
다이애나는 당시 BBC와의 인터뷰에서 찰스와의 결혼 생활에 대해 이런 말을 남겼다. “그런데, 우리 결혼은 세 명이 한 셈이어서 조금 인파가 많았어요.(Well, there were three of us in this marriage, so it was a bit crowded.)” 다이애나는 이 유명한 말로 파경 선언을 공개적으로 했다. 또 자신이 아들 윌리엄과 해리의 승마 교관이었던 제임스 휴이트를 사랑했었다는 폭탄 선언도 했다. 이 인터뷰로 찰스와의 결혼은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고, 결국 1년 뒤 둘은 이혼했다.
4년 차 무명기자가 따낸 대특종
당시 인터뷰는 영국에서만 2300만명이 실시간으로 시청해서 전무후무한 시청률 기록을 세운 대단한 사건이었다. 인터뷰를 만들어 내고 대담을 이끈 마틴 바시르 BBC 기자는 당시 방송 경력 4년 차의 무명이었다. 이런 큰 인터뷰를 해본 경험이 전혀 없었다. 그런 바시르가 오프라 윈프리 같은 세계적 대담 프로그램 사회자들도 실패한 다이애나와의 인터뷰를 따낸 것이다. 당시 BBC는 물론 세계 방송계에서 ‘바시르가 도대체 누군데 저런 특종을 해냈느냐’는 폭풍 같은 의문이 일었다. 무명의 바시르는 이 인터뷰 하나로 세계적인 대담 프로그램의 사회자가 돼 이후 마이클 잭슨과의 인터뷰도 따내는 등 벼락 출세를 하게 된다.
바시르 특종의 검은 내막이 세기적 인터뷰 25주년을 맞아 채널4, ITV, 데일리메일 등의 취재로 하나둘씩 드러나고 있다. 해당 언론들의 보도에 의하면 바시르가 날조된 각종 거짓말과 위조된 은행 계좌 내역서를 이용해 다이애나를 속이고 협박해서 인터뷰를 따냈다고 한다. 이 사실에 대해서는 다이애나의 남동생 스펜서 백작이 증언하고 있다. 더욱이 BBC는 무명의 바시르가 세기적인 인터뷰를 따낸 배경에는 이런 술수가 있었음을 내부 조사를 통해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문제 삼지 않고 덮었을 뿐만 아니라 바시르에게 상까지 줬다는 사실도 언론들의 정보 공개 요청으로 드러났다.
곤경에 빠진 BBC는 전직 대법관을 위원장으로 한 독립조사위원회를 구성해서 진상을 밝히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런데 사건을 흥미롭게 하는 가려진 사실이 있다. 이 폭로성 보도가 영국 언론 라이벌들 사이의 피 튀는 복수혈전 양상을 띠고 있다는 점이다. 다이애나 인터뷰 방영 시 다른 방송들은 사실 파리를 날릴 정도로 참패를 당했다. 그 쓰라린 기억이 있은 지 25주년을 맞아 경쟁 언론사들이 마음먹고 취재를 해서 특종을 한 것이다.
이번 폭로 보도가 영국인들에게는 ‘도저히 용서 못 할 BBC의 죄’로 비치는 게 사실이다. 영국인의 가슴속에 지금도 살아 있는, 불쌍하게 죽은 애잔한 다이애나를 영국 최대이자 유일의 공영방송인 BBC가 속이고 협박해서 인터뷰를 따낸 것과 다름없기 때문이다. 이를 민간 언론들이 국민들에게 일러바치는 식이 되어 버렸다. 더군다나 BBC는 시청률에 연연해서는 안 되는 공영언론이다. 국민의 시청료로 운영되는 공영방송임에도 불구하고 그런 술수를 썼다는 비난을 피해가기 힘들다. 채널4, ITV, 데일리메일 등의 상업언론들은 묵은 구원을 풀 수 있는 때를 만난 것처럼 BBC에 달려드는 모습이다.
▲ 1995년 11월 BBC 마틴 바시르 기자가 다이애나 왕세자비를 인터뷰하고 있다. 이 인터뷰 방송은 영국에서만 2300만명이 시청하는 대성공을 거뒀지만 최근 BBC 경쟁 언론사들이 인터뷰 성사까지의 검은 내막을 파헤치고 있다.
‘BBC 용서 못 한다’ 성난 여론
다이애나 인터뷰 음모 스캔들 뉴스는 공교롭게도 넷플릭스의 드라마 ‘더 크라운’ 시즌4 시작과 맞물려 불에 기름을 끼얹는 격이 되고 있다. 이 드라마는 다이애나가 영국 역사에 등장하는 1975년부터 1990년까지의 영국 왕실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2016년 11월 시즌1을 시작으로 세계적으로 히트를 치고 있는 작품이다. 시즌4에는 기존의 여주인공인 엘리자베스 2세 여왕 말고도 마거릿 대처 전 총리, 다이애나 등 영국 현대 역사상 가장 중요한 3명의 여주인공이 등장할 예정이어서 더욱 흥미를 끌고 있다.
영국 언론들의 폭로에 따르면, BBC 기자 바시르는 스펜서 백작에게 왕실이 다이애나를 배반하고 음모를 꾸미는 증거를 보여줬다고 한다. 다이애나를 모시는 직원들이 배반과 음모를 꾀한 사례가 32개에 달했는데, 이를 본 백작은 모든 내용을 그대로 믿고 바시르를 다이애나에게 소개해서 인터뷰가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바시르의 조작된 서류와 날조된 정보가 인터뷰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뜻이다.
BBC는 이제 기자 한 명이 아니라 조직 전체가 책임 추궁을 면할 수 없는 상황이 되어 버렸다. 당시 다이애나 측근들이 돈을 받고 다이애나에 관한 비밀을 팔려고 했다는 증거로 바시르는 조작된 은행 계좌 내역을 보여줬는데 이에 대한 스펜서 백작의 증언은 이번 폭로 기사에서 가장 중요한 대목이다. 바시르는 자신이 깊숙한 정보를 가지고 있다는 식으로 신임을 얻어 백작이 다이애나를 자신에게 소개하도록 만들었다. 또 바시르는 왕실의 요청에 의해 영국 정보부가 다이애나의 편지와 전화를 읽고 도청했으며, 차에는 추적장치를 비밀리에 부착해 다이애나의 행동 하나하나를 다 알고 있다는 식으로 속였다. 다이애나는 그 결과 피해망상증과 신경쇠약에 걸렸는데 바시르는 이를 이용해 다이애나를 꼼짝 못 하게 만들어 버렸다고 백작은 말한다. 이왕 밝혀질 것을 자진해서 먼저 터뜨리자고 다이애나를 꼬드겨 희대의 인터뷰를 얻어냈다는 주장이다. 백작은 이런 바시르의 술수를 BBC가 내부 조사로 찾아내고도 바시르를 처벌하지 않고 은폐했다고 BBC를 향해서도 비난의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BBC는 조작을 알면서도 덮었나?
당시 BBC가 자체 조사를 한 것은 사실이다. 인터뷰가 공전의 히트를 치면서 방영 판권 판매로만 전대미문의 금액인 100만파운드를 벌어들이자 내부 견제 기능이 작동했다. BBC 내부에서는 무명기자인 바시르가 어떻게 해서 그런 특종을 따냈는지에 의문이 제기됐고, BBC 안팎에서 기자들 사이의 라이벌 의식으로 인해 인터뷰와 관련된 각종 소문이 나돌아 내부 조사를 할 수밖에 없었다. 이미 이때부터 바시르의 위계에 대한 소문이 BBC 내부에서 있었다는 뜻이다. 1996년 내부 조사는 나중에 BBC 사장이 된 당시 뉴스부장 토니 홀이 담당했다. 별로 길지 않았던 당시 조사의 결론은 바시르가 은행 계좌 서류 조작을 지시할 때 ‘진지한 고려를 하지 않았다(wasn’t thinking). 그는 비록 실수는 있었으나 그래도 정직하고 훌륭한 사람(even with his lapse, honest and honourable man)이다’였다. 보고서는 바시르가 다이애나를 ‘협박 설득(coerce)’하지 않았다고 결론지었다. 그리고 ‘잘못(wrongdoing)을 저지르지 않았다’고 분명하게 명시했다. 결국 BBC는 모든 정황을 알면서도 그 정도는 전혀 문제가 안 된다고 보았다.
사실 당시 영국 언론계의 도덕 기준과 관습, 사회 통념에 비춰 보면 BBC 내부 조사 결론은 전혀 문제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관례에 불과했다. 그래서 바시르도 견책은커녕 BBC 내부의 상은 물론 외부 상까지 받은 것이다. 또 그 덕분에 미국으로 진출해 ABC와 MSNBC에서 인기 시사 프로그램을 맡을 정도로 출세했다. 그러다가 2016년 BBC로 다시 돌아와 종교부 부장이 되었다. 현재는 지난 연초 코로나19 감염과 심장 수술로 유급 휴직 상태이다.
BBC의 입장에서 사안을 다시 한번 살펴보면 BBC로서는 진짜 억울할 수도 있다. 당시 영국 언론계의 관례상 위조나 위계는 물론 심지어 도청까지도 취재의 방식으로 용인되었던 게 사실이기 때문이다. 언론이 공공의 이익과 사회정의를 위한 진실 보도를 하기 위해 불법 취재 방식을 동원할 수도 있다는 통념이 통하던 시대였다. 기자들의 이런 취재 방식에 대해 경찰과 검찰도 관습으로 여겨 개의치 않았다. 심지어는 법원마저도 취재원 보호라는 대의명분하에 어떤 방식으로 해당 기사가 취재되었는지 법적 책임을 묻지 않았다. 독자들도 기자들이 어떤 방법으로 취재를 해서 폭로 기사를 썼는지 알려고 하지 않았고, 사회정의를 위한 언론의 폭로에 박수만 쳐댔다. 기자들이 도청 취재를 해서 다이애나의 연애설이나 찰스 왕세자의 현 부인 카밀라와의 불륜설을 특종 보도해도 언론사 내부는 물론 영국 전체에서 누구도 취재원을 캐묻지 않았다. 물론 지금은 영국에서도 이런 취재 관행이 용납되지 않는다. 불법 취재 관행을 소급해 처벌한 2012년 ‘레베슨 청문회’가 변화를 가져온 계기였다.
▲ (왼쪽부터) 다이애나비와의 인터뷰를 따낸 BBC 마틴 바시르 기자. 다이애나 인터뷰로 스타 기자 반열에 올랐지만 현재 코로나 감염 등으로 휴직 중이다. 다이애나 인터뷰의 내막을 파헤치고 있는 영국 신문 지면.
위험한 취재 관행들
당시 다이애나 인터뷰를 내보낸 BBC의 프로그램 ‘파노라마’는 1953년부터 시작된 세계 최장수, 영국 최고의 탐사 취재 뉴스프로그램이다. 30~60분 길이로 만들어지는데 사안에 따라 시간대를 바꿔가면서 제일 중요 시간대에 BBC1에서 방영된다. 영국 프리미어리그 감독들 사이에서 오고가는 검은돈 거래를 비롯해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깊숙한 탐사 보도는 독보적이라는 평을 듣는다. 그래서인지 파노라마 담당 기자들은 지금까지도 취재 방법의 도덕성을 고려하지 않아 종종 문제가 된다. 가장 최근의 경우는 세계적으로 화제가 된 2013년 북한 잠입 취재 탐사 보도이다. 독재정권 탐사 전문 고참기자인 존 스위니는 자신의 부인이 근무하던 런던정경대학교(LSE) 학생들의 북한 견학 그룹에 교직원으로 위장해 끼어들어가 북한을 몰래 촬영했다. 만일 북한에 발각됐으면 본인은 물론 10명의 무고한 학생들의 신변까지 위험해질 상황이었는데 당시 학생들도 스위니의 신분과 의도를 전혀 몰랐다. 오히려 지금도 의문시되는 점은 북한 당국의 태도이다. 인터넷에 스위니 이름만 쳐도 사진은 물론 수백 건의 기사가 나오는데 어떻게 비자를 내줬는지 영국인들은 아직도 신기해한다.
다이애나를 아픈 손가락으로 여기는 영국 국민 정서나 현 영국의 사회정의에 비춰 보면 BBC는 변명은커녕 사과를 해도 모자랄 판이다. 그렇다고 경쟁사가 연일 쏟아내는 인민재판식 보도를 가만히 당하고 있을 BBC도 아니다. BBC가 누구인가? 산전수전은 물론 공중전, 수중전까지 치른 역전의 언론사 아닌가? 사면초가의 상황을 일거에 뒤집을 반전을 BBC는 준비하고 있었는데 바로 다이애나의 친필 메모다. 과거 내부 조사 보고서에는 ‘나는 조작된 은행 계좌 내역서를 본 적이 없고 또 그런 서류의 유무가 인터뷰 결정에 하등 영향을 끼친 바가 없다’는 다이애나의 자필 메모가 존재한다는 사실이 적시되어 있다. 보고서의 내용대로라면 BBC의 면책은 확실하다. 만일 다이애나의 인터뷰 결정에 은행 계좌 내역서가 영향을 끼치지 않았다면 도덕적으로는 문제가 될지언정 법적으로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거기다가 바시르가 다이애나를 속이고 협박했다는 물적 증거는 스펜서 백작의 발언 말고는 없다. 그러니 다이애나의 자필 메모는 BBC로 봐서는 정말 결정적인 스모킹건이다. BBC가 25년 뒤에 터질 문제를 예상이나 한 듯 어떻게 완벽히 면책이 되는 다이애나의 자필 메모를 받아놓았는지 모르겠다고 모두가 탄복을 한다.
BBC의 반전 카드, 다이애나 친필 메모
이 메모의 존재는 채널4, ITV와 데일리메일 등이 정보 공개 요청으로 얻은 BBC 내부 조사보고서를 통해 처음 알려졌었다. BBC를 협공하는 언론들은 계속 메모 원본을 공개하라고 요구했으나 그동안 BBC는 찾을 수 없다면서 내놓지 않았다. 그러다가 지난 11월15일 갑자기 찾았다고 발표했다. 어디서 어떻게 찾게 되었는지는 밝히지 않았고, 이를 추궁하는 기자들 질문에도 일절 대답하지 않았다. 결국 갖고 있다가 결정적 순간이 되어서야 꺼내든 셈이다. 물론 정보 공개법에 의해 공개를 요청한 다른 언론들에 ‘찾을 수 없다’고 거짓말을 한 것이면 차후 문제가 될 소지가 다분히 있다. 아마 BBC의 속셈은 회심의 반전 카드를 쉽게 내놓을 수 없다는 뜻이었을 텐데 어찌됐든 57쪽에 달하는 조사서는 공개하면서도 메모 원본이 없다고 발뺌을 하다가 정식 조사가 들어가자 갑자기 어디선가 메모 원본을 꺼내들었다. 특히 타사 기자들을 분노하게 만든 건 문제의 메모를 찾았다는 BBC 대변인의 발표문 서두였다. ‘독립조사위원회의 구성과 더불어(Following the announcement of the independent investigation) BBC는 조사서에 언급된 공주(다이애나)의 자필 노트 원본을 찾아냈다. 이를 독립조사단에 제출할 것이다’라는 대변인의 발표문 서두는 타사 기자들을 기가 차게 만들었다. 자신들이 그렇게 추궁해도 못 찾겠다던 그 중요한 메모가 독립조사위원회가 구성되자마자 기적처럼 어디선가 나타났으니 말이다. 만일 독립조사단이 구성되지 않았으면 자필 메모를 내놓지 않았을 것이냐는 지적도 나온다.
하지만 BBC에 불리한 증거들도 계속 나오고 있다. 당시 바시르의 지시에 의해 문제의 은행 입출금 내역을 조작한 그래픽 디자이너를 BBC가 소리 소문도 없이 BBC는 물론 방송 업계에서 조용히 퇴출시켰다는 사실이 드러난 것이다. 해당 그래픽 디자이너는 당시 BBC 직원이었다. 동료인 바시르가 문제의 가짜 서류 작성에 도움을 청해서 도와주었고 자신은 그 서류가 뭔지, 또 무엇에 사용되는지 몰랐다고 했다. 디자이너는 다이애나 인터뷰가 방영된 후 얼마 안 돼 BBC를 그만두고 독립 사업체를 차렸다. 그러나 언제부턴가 BBC로부터 일감이 끊겼고 업계에 해당 디자이너가 BBC의 블랙리스트에 올랐다는 소문이 퍼져 다른 방송국으로부터도 일이 끊겨 결국 사업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디자이너의 말이 사실이라면 BBC가 주범인 바시르는 문제없다면서도 단순한 기술자에게만 책임을 물었다는 말이 된다. 이 디자이너는 “자신에게는 면담 조사 한 번 하지 않고 영구 블랙리스트에 올려 결국 일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고 BBC를 비판하는 중이다. 자신은 바시르가 2016년 종교 담당 기자로 다시 고용되어 BBC로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고는 소파에서 떨어질 정도로 놀랐다고도 했다. 결국 BBC는 바시르를 비롯해 누구도 잘못이 없다면서도 조작된 은행 계좌 내역서가 분명 잘못이라고 판단했고 그것이 나중에 문제가 되리라는 것도 분명 알고 있었다고 이 디자이너는 흥분한다. 그래서 다이애나에게 그런 메모를 요청해서 사전에 받아놓았을 것이라는 추측도 한다. 그러면서 이 디자이너는 더욱 놀라운 폭로도 했다. 자신의 집에 도둑이 들어 조작된 은행 계좌 내역서 파일이 담겨 있던 플로피디스크가 사라졌고, 조작 사실을 아는 사무실 동료 집에도 도둑이 들었다는 폭로였다.
보수당 정권과 시청자는 ‘불난 집 불구경’
물론 BBC를 협공하는 상업언론의 논조에 반대 의견을 펴는 여론도 만만찮다. 가디언을 비롯해 진보 쪽 언론과 칼럼니스트들은 스펜서 백작이 그 중요한 사실에 대해 오랜 세월 침묵을 지키다가 왜 이제서야 밝히느냐고 비판한다. 백작이 바시르가 보여준 자료와 정보를 그대로 믿지 않고 시간을 두고 조사해 봤으면 진실을 알게 되어 문제가 발생하지 않았을 터인데 왜 자신의 잘못은 뉘우치지 않고 바시르와 BBC만 비난하느냐는 것이다. 결국 백작의 뒤늦은 증언은 자신의 죄책감을 누군가에게 미루려는 희생양 찾기 아니냐는 비판이다.
어찌 되었건 지금 영국에서는 BBC의 잘못을 기정사실로 몰아가면서 마녀재판이 벌어지고 있다. 이 마녀재판의 주인공은 다이애나 인터뷰 25주년을 기념할 충격적 뉴스거리를 찾던 BBC의 숙적들이고 엑스트라는 스펜서 백작이다. 안 그래도 불쌍한 다이애나의 비극적인 죽음을 책임질 누군가를 만들어내야 속이 시원할 것 같던 다이애나 팬들은 옳다구나 하고 BBC와 바시르에게 삿대질을 하고 있다. 거기다가 보리스 존슨 보수당 정권도 자신들에게 비판적이던 BBC를 손보려고 벼르고 있던 참에 ‘옳다구나’ 하고 독립조사단이 BBC 책임을 묻는 보고서를 기다리는 중이다. 매년 인상돼 현재 157.50파운드(23만6500원)에 이르는 BBC 시청료가 아깝던 시청자들도 남의 집 불구경을 흥미진진하게 지켜보고 있다.
권석하 / 재영칼럼니스트
출처 : 주간조선(http://weekly.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