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주 상당산
2024년 03월 24일(일요일)
산행코스 : 현암삼거리(08:15) - 404봉(08:45) - 것대산(09:05) - 봉수대(09:15) - 상봉재(10:20) - 출렁다리(10:30) - 산당산성 남문(10:50) - 상당산(11:25) - 제승당(11:55) - 망산(12:10) - 우암생태터널(12:50) - 용화사(13:50) - 청주향교(14:20)
산행거리 : 16km
현암삼거리
것대산(봉수대) 2.4km, 임도
선도산 3.1km, 것대산 1.6km
저멀리 상당산이 보입니다.
404.7 삼각점
선도산 3.5km, 것대산(봉수대) 1.2km
저멀리 낙가산이 보입니다.
것대산 정상이 보입니다.
활공장이 있는 것대산 정상
낙가산 정상 1.4km, 선도산(한남금북정맥) 4.8km, 상당산성 자연마당 2.9km
것대산 활공장에서 바라본 우암산 방향 파노라마
청주시내
우암산
봉수대, 상당산성 갈림길
봉수대, 상봉재, 상당산성방향, 산성동 방향, 낙가산, 선도산 방향
것대산 봉수대(충청북도 문화재자료)
청주 것대산 봉수는 1895년 봉수제가 페지되면서 사라졌습니다, 이후 문화재의 원형을 찾으려는 시민들의 노력 끝에 2009년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하였습니다.
평택종주산악회 시산제
뒤돌아본 봉수대
상봉재
옹달샘 0.1km, 것대마을 1.5km, 낙가산 2.4km, 상당산성 1.1km
상당구 산성동 것대에서 것대산을 끼고 명암동으로 넘어가는 고개입니다.
상당산성 갈림길
우암어린이회관 2.7km, 낙가산 정상 2.5km, 상봉재 70m, 상당산성 1.1km
산성고개 출렁다리
길이 43m, 폭 1.5m, 높이 15m
것대산 2.7km, 산성서문 1.2km, 산성남문 0.6km
상당산성이 보입니다.
상당산성 1호 치성(서남 치성)
상당산선은 남쪽 성벽이 직선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남쪽 성벽의 방어를 위해 3곳에 치성을 쌓았습니다. 1호 치성은 남문(공남문)에서 서쪽으로 340m 정도 떨어진 곳에 있으며, 형태는 위에서 보면 직사각형, 정면에서 보면 사다리꼴입니다. 이곳은 상당산성의 서남 암문과 인접한 곳에 위치하여, 서남 암문 주변을 경계하기에 유리합니다.
상당산성 서남 암문
서남 암문(안쪽)
서남 암문은 "남암문" 또는 "남화문"으로도 불렸으며, 남족으로 1.7km 정도 떨어진 것대산 봉수대와 이어집니다. 이곳은 남문 밖에 모여든 적의 뒤쪽으로 돌아가 포위하거나, 산성 남쪽으로 통하는 교통로 주변을 관찰하기 좋은 중요한 위치입니다.
암문은 원래 문짝이 있었으나 현재는 없어졌고, 문 안쪽에 빗장을 걸었던 네모만 구멍만 남아 있습니다. 암문 안쪽에는 침투하는 적을 수월하게 방어하기 위하여 좌우측에 벽을 쌓았습니다.
치성에서 바라본 우암산
치성에서 바라본 지나온 등산로
2호치성(남치성)
상당산성 남문(공남문) 안쪽
상당산성 남문(공남문) (控南門)
공남문은 상당산성 3개의 출입문에서 남쪽에 위치하며 정문으로 사용되는 문입니다.
비교적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고, 성문은 무사석으로 조영된 내외홍예문으로, 너비는 420cm, 높이 350cm의 규모입니다.
*무사석 : 네모반듯하게 다음어 성벽이나 담벼락에 높이 쌓아 올린돌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된것은 조선시대로, 선조 29년( 1596) 임진왜란 중 원균이 산성을 급히 고쳐 쌓았으며, 숙종 42년(1716) 부터 영조 23년(1747)까지 대대적인 수리와 복원이 진행되었습니다. 청주읍성에는 충청도의 군사책임자인 병마절도사가 머물고, 상당산성에는 종3풍의 무관 병마우후 (兵馬虞候) 가 3,500여 명의 병사와 함께 머물려 청주읍성의 배후를 방어하였습니다.
상당산선은 영호남과 서울로 통하는 통로를 방어하는 군사적 요충지로 중요한 의미가 있으며, 통일신라이후 석축산성 문화의 기술적 총체를 보여주는 문화재입니다.
청주 구룡사 사적비(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이 사적비는 상당산성 성내에 있었던 구룡사의 내력을 기록한 비석으로, 영조 40년(1764) 은재거사가 비문을 짓고 글을 썼습니다. 본래 상당산성 서남 암문 안쪽에 있었는데, 1970년대 현재 위치로 옮겨졌습니다.
조선 시대 상당산성에는 성을 관리하는 승병들이 머무는 사찰이 구룡사을 포함하여 3곳 이상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현재는 모두 사라지고 사적비만 전해지고 있습니다. 비석에슨 구룡사의 창건 배경과 상당산성의 개축 사실 등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비문에 따르면 숙종 42년(1716)에 상당산성을 개축하고 삼남지역(충청도, 전라도, 경상도)의 요충지로 삼았으며, 구룡사는 숙종 46년(1720)에 도천이 창건하였다고 합니다.
청주 구룡사 사적비는 임진왜란 이후 상당산성의 개축과 산성유지 보수를 위해 성안에 사찰이 운영되었음을 알려주는 귀중한 문화재입니다.
상당산성 남문(공남문)에서 바라본 풍경
3호치성(동남치성)
성내방축
동문(진동문) 안쪽
동문과 서문은 무사석으로 조영된 평문 구조로, 너비는 280cm, 높이 270cm의 규모입니다.
동문(진동문) (鎭東門)
청주 상당산성의 성문은 3개소로 북쪽을 제외한 남문(공남문), 동문(진동문), 서문(미호문)이 있습니다.
이와 별도로 아군이 비밀통로로 사용하였던 암문이 동북쪽과 서남쪽에 있습니다.
성의 동쪽 출입구인 전동문은 동남쪽 해발 350m내외의 상대적으로 낮은 곳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1977년부터 1978년까지 보수공사가 이루어졌으며, 이때 문루도 함께 복원하였습니다.
진동문은 통로 양쪽에 벽을 쌓고 그 위에 길고 평평한 돌을 올려 마치 통로가 "ㅁ"자로 보이는 형태(평거형 성문)로 축조 되었습니다. 이런 형태의 성문은 평상시 통행이 많이 없는 성문에 주로 사용됩니다.
동문(진동문)에서 바라본 풍경
뒤돌아본 동문(진동문)
상당산성 동북 암문(안쪽)
동북 암눈은 동북 방향의 산줄기를 따라 이동할 수 있는 통로일 뿐만 아니라, 동문 밖 골짜기로 모여드는 적군의 뒤쪽으로 가서 포위할 수 있는 중요한 곳에 있습니다. 암문에는 원래 문짝이 있었으나 지금은 없어졌고, 문 안쪽에 빗장을 걸었던 네모난 구멍이 남아 있습니다.
한편 동북 암문의 안쪽 옆면에 "강희" 경자 오월(康熙 庚子 五月)이 새겨져 있는 것을 보면 암문이 숙종 46년(1720)에 축조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암문을 만든 책임자인 서세량(徐世良), 양덕부(梁德溥)의 이름이 새겨져 있는데, 그중 양덕부는 영종 4년(1728)에 발생한 이인좌의 난 때 성문을 열어 반란군에 가담했던 인물로 알려져 있습니다. 동북 암문에 새겨진 명문은 상당산성의 역사를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입니다.
강희 경자 오월(康熙 庚子 五月)
암문을 만든 책임자인 서세량(徐世良), 양덕부(梁德溥)
상당산성 동북 암문
상당산 정상이 보입니다.
상당산 정상
상당산성 "상당(上黨)"은 백제식 지명으로 "금강상류"뜻입니다.
상(上)은 한자훈인 위쪾을 뜻하고
당(黨)은 한자훈이 아닌 음차로 물(水)을 의미하고
당(黨)의 훈인 무리에서 "물"의 음으로 쓰는 것입니다.
청주는 금강의 상류이며, 광주가 "빛고을"이듯, 청주는 "물고을"이라하며 한자로 물맑을 청(淸)을 씁니다.
포루 터2는 포루 터 1에서 160m 정도 떨어진 산성의 정상부 평탄지에 있습니다. 포루 터 1보다 면적이 조금 더 넓으며, 주변을 관찰하기에 적합합니다. "상당산성도"에는 이곳을 공북정이라고 표기하였는데, 2014년 발굴 조사 결과 정면 4칸, 측면 2칸으로 추정되는 건물 터가 확인 되었습니다.
상당산성 3호 수구
3호 수구는 성벽의 중간 지점을 통과하는 형태로 만들어졌습니다. 성벽 안쪽에는 너비 250cm, 길이 210cm 크기의 타원형의 시설이 있는데, 이곳에 모인 물이 수구를 통해 밖으로 나가는 구조입니다.
상당산성 포루 터 1
영조 20년(1744) 영휴 스님이 쓴 "상당산성고금사적기"에 영조 1년(1725)에 포루 15곳을 지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영조40년(1764)에 그린 것으로 추정되는 "상당산성도"를 통해 포루 15개의 대략적인 위치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또한 포루의 형태가 2~3칸 규모의 작은 기와지붕 건물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포루 터 1은 공간이 협소하지만 높고 평탄하여 주변을 관찰하기에 적합한 곳입니다. 2002년 발굴 조사 결과 정면 2칸, 측면 1칸 규모의 건물 터가 확인되었고, 조선 후기의 기와 조각이 출토되었습니다.
서문(미호문) 안쪽
서문(미호문) (弭虎門)
상당산성의 성문은 총 5개로 남문, 동문, 서문과 동북 암문, 서남 암문이 있습니다. 이중 서문의 통핼로 천장은 동문과 마찬가지로 직사각형의 돌을 수평으로 걸쳐 만들었습니다. 문밖 양쪽으로는 성벽을 돌출시켜 방어에 유리하도록 하였습니다. 이러한 구조는 암문에서 볼 수 있는데, 이를 서문에 적용하여 건축 비용을 줄이고 전술적 효과를 높인 것으로 보입니다.
서문이 있는 곳의 지형은 호랑이가 뛰기 전 움츠린 모양과 닮았습니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호랑이가 떠나면 땅기눈이 다하므로 호랑이의 목에 해당하는 곳에 성문을 새웠다고 합니다.
이 때문에 서문을 "미호문"이라고도 불립니다.
문루는 1978년에 복원하였으나 지반 침하로 변형되어 2015년에 해체한 후 원형을 고증하여 복원하였습니다. 이때 문루에 사용된 수막새의 문양과 벽돌은 1995년 서장대 발굴 조사에서 출토된 유물을 참고하여 제작한 것입니다.
현재의 서문에서 북쪽으로 약40m 떨어진 곳에서는 지금의 서문보다 앞서 만들었던 서문터가 확인되었습니다. 이 서문터는 조선 숙종 대와 영조 대에 대대적으로 수축되기 이전의 상당산성 서문 모습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로서, 당시 발굴 조사 자료를 토대로 2003년에 정비하였습니다.
저멀리 청주공항이
우암산
태극삼거리
서문(미호문) 350m, 서장대(제승당) 200m, 남문(공남문) 900m
데크계단길을 내려가 생태육교 방향 진행합니다.
제승당이 보입니다.
상당산성 제승당(서장대)(制勝堂 西將臺)
장대(將臺)는 성이나 보 등에 있는 건물로, 장수가 지휘를 하던 곳을 말합니다. 영조 40년(1764)에 그린 것으로 추정되는 "상당산성도"에 장대 2곳이 표현되어 있어, 상당산성에는 장대가 서쪽과 동쪽 2곳에 설치되었던 것을 알수 있습니다.
서장대는 제승당(制勝堂)이라고도 부릅니다. 건물은 동쪽이 정면이며, 여기에서 동장대가 내려다 보입니다. 본래 이 건물은 소실되었는데, 1995년 발굴 조사를 하여 정면 3칸, 측면 2칸 크기의 건물 터를 확인하였습니다. 이는 조선 후기에 편찬한 "여지도서"에 서장대가 6칸 건물이라고 기록된 점과 일치합니다. 건물 바닥에는 벽돌을 깔았고, 지붕에 막새기와를 사용한 점으로 보아 매우 높은 등급의 건물로 짐작됩니다. 또한 조사 과정에서 "병신(丙申)"이라는 명문이 새겨진 기와가 출토되어 18세기 전반에 지은 건물임을 알 수 있습니다.
현재의 건물은 발굴 조사를 통해 확인되 기초석을 토대로 2014년에 복원한 것입니다. 기와는 이전에 사용된 막새기와가 산성의 남문 밖 기와가마에서 구원진 것으로 알려져, 이를 토대로 복원하였습니다.
태극삼거리
서문(미호문) 350m, 서장대(제승당) 200m, 남문(공남문) 900m
데크계단길을 내려가 생태육교 방향 진행합니다.
태극삼거리에서 바라본 상당산성
약수터
명암약수 1.0km, 나무호텔 0.8km, 상당산성 0.5km, 생태육교2.5km
망산
아무런 표시도 없습니다.
생태육교 1.8km, 명암동 0.4km, 상당산성 1.6km
상당산성 2.8km, 우암생태터널 0.6km
우암생태공원
청주랜드 0.5km, 상당산성 3.4km, 삼일공원 3.6km
우암산터널
용호사 용화보궁
대법왕궁
용화사 약사전
우암산걷기길, 매물통쉼터 0.1km
매물통 쉼터
과거 금광으로 추정되는 굴입니다.
돌탑쉼터
우암산걷기길(용호사) 청주향교, 명암저수지전망대 0.3km
명암저수지 0.3km, 우암산걷기길(국립청주박물관) 1.2km, 잣뫼쉼터 0.3km
잣뫼쉼터 0.3km, 국립청주박물관 1.2km
삼일공원 2.2km, 청주랜드 2.8km, 고씨샘터 0.6km, 부영아파트
심곡사 뒤로 지나갑니다.
봉담명암산성동주민센터 1.0km, 애기똥풀군락지 0.3km, 우암산정상 0.9km, 광덕사
광덕사
우암산걷기길, 우암산정상 1.4km, 청주향교 0.4km
청주향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