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초고] 시민 참여 없는 개혁은 위장된 개혁이다 ㅡ시민 참여와 숙의로 민주주의 수준 높여야
이현종 (여수촛불 공동대표)
당돌하게 질문부터 던져보겠다.
“현 국회에서 정상적인 헌법 개정이 가능할까?”
“현 국회에서 국가보안법 폐지가 가능할까?”
“현 국회에서 선거법 개정과 차별금지법 제정이 가능할까?”
질문을 더 던지는 것이 무의미할 정도다. 아마 대다수의 답은 “불가능하다”거나 “매우 어렵다”일 것이다.
헌법 개정은 국회 재적의원 3분의 2 이상의 찬성이 필요하기에, 지금 같은 적대적 정치 구도에서는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다. 그렇다면 과반 의석만으로 처리가 가능한 보안법 폐지나 선거법 개정 등은 어떨까? 21대 국회부터 과반이 훨씬 넘는 민주당 의석만으로도 이론적으로는 충분했다. 헌법 제49조에 따라 국회는 일반 의결 정족수만으로도 안건을 처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방송3법이나 검찰개혁안이 그런 과정을 거쳤다.
그러나 보안법 폐지나 차별금지법 제정안은 상임위에서 발의만 되었을 뿐, 본회의 문턱조차 제대로 밟지 못했다. 비단 이뿐만이 아니다. 국회의원들이 9명의 보좌진을 거느리고 막대한 세비를 받아가며 발의한 법안들 상당수가 본회의 상정은커녕 상임위 검토조차 거치지 못한 채 폐기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 놀랄 것이다.
21대 국회(2020~2024)의 총 발의 건수 25,910건 중 가결률은 고작 11.4%에 불과했다. 19대(15.7%), 20대(13.2%)를 거치며 가결률은 계속 낮아지고 폐기율은 높아지고 있다. 국회가 점점 '입법 불능'이라는 비효율의 늪에 빠지고 있는 것이다.
국민 혈세로 세비를 받으면서도 정작 법안 대다수를 상정도 안 한 채 폐기하는 국회를 정상이라 보기 어렵다. 더욱 씁쓸한 것은 전세사기 특별법, 한부모가족지원법(위기임산부 지원법), 구하라법(양육 의무를 저버린 부모의 상속권 상실) 등 시급한 민생 법안들마저 정쟁의 인질이 되어 사라졌다는 점이다.
언제까지 이런 비효율적 국회 운영을 지켜보아야 하는가? 기다리면 변하기는 할까? 그럴 것 같지가 않다. 지금과 같은 적대적 양당 구도 속에서는 못해도 제1야당이 되고, 상대방이 더 못하면 여당이 되는 '꽃놀이패'를 누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수는 묘수가 아니라 국민을 우롱하는 꼼수다. 선거법만 개정해도 사표를 줄이고 국민의 뜻을 훨씬 정확하게 반영할 수 있는데도, 굳이 선거법 개정 요구를 외면하며 기득권을 즐기고 있으니 꼼수가 아니고 무엇인가? 이유는 자명하다. 국회의원에 한 번 당선되면 기득권자가 되어 어떻게든 그 권력을 지키고 싶어 진정한 개혁에는 눈을 감아버리기 때문이다.
국민은 민주주의를 훼손하는 권력을 세 번이나 끌어내린 저력이 있다. 수많은 이들이 민주주의를 위해 희생했음에도, 대의기구인 국회는 시대적 과제를 해결할 의지도 능력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이제는 대안이 필요하다. 바로 시민이 직접 나서는 것이다.
그동안 한국 정치는 선거를 제외하면 국민의 참정권이 극히 제한된 '반쪽짜리 민주주의'였다. 국회는 검찰·사법·언론 개혁을 외치면서도 정작 주권자인 시민의 참정권 강화에는 인색했다. 루소는 “주권은 국민 전체에 있으며 대표에게 양도될 수 없다”고 했다. 국회의원이 ‘국가 이익을 우선하여 양심에 따라 직무를 행한다’는 헌법 제46조의 명령을 저버린다면, 그 권력은 정당성을 잃는다.
최근의 법원조직법 개정안만 봐도 그렇다. 대법관 수를 늘리는 것에만 치중했을 뿐, 정권의 성향에 따라 사법부가 휘둘리는 근본적인 임용 방식의 개선은 빠져 있다. 이는 권력을 시민에게 돌려주기보다 특정 엘리트 집단이 독점하려는 과두정치적 욕심을 보여주는 사례다.
진일보한 개혁안을 찾는다면 차라리 지난해 개정한 방송3법 정도다. 공영방송 이사를 21명으로 늘리고 추천 권한을 학회, 시청자위원회 등으로 분산하여 시민 참여의 기회를 조금이나마 확대했기 때문이다. 만일 과방위원장이 한 때 고민했다는 인구통계학적 비율에 맞춰 100명을 무작위 추첨하고 그들이 이사를 추천하는 방식이었다면 훨씬 좋았을 것이다.
국회가 진정으로 국민을 위해 일하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다면 답은 명확하다. 헌법에 보장된 국민주권을 강화할 수 있는 제도를 입법화하는 것이다. ‘추첨제 시민의회’의 입법화는 그 좋은 방안이 될 수 있다.
국회를 없애자는 것이 아니다. 선출직 의원들이 이해관계와 정쟁에 가로막혀 해결하지 못하는 난제들, 그러나 반드시 해결해야 할 과제들—보안법, 선거법, 차별금지법 등—을 시민의 손에 맡기자는 것이다.
인구통계학적으로 선발된 시민들이 숙의를 통해 결론을 내린다면, 그 결정은 어떤 정당의 당론보다 강력한 민주적 정당성을 가질 것이다. 헌법 개정도 마찬가지다. 안 되는 핑계만 대지 말고 되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헌법개정절차법을 제정하여 지역·연령·성별·소득별 인구비례에 맞춰 추첨된 시민들이 숙의를 거쳐 개정안을 만들어내도록 한다면 어떤 정당도 이를 거부하기 힘들 것이다.
현 정부는 국민주권정부를 표방하고 있다. “정치는 정치인이 하는 것 같지만, 사실 시민이 하는 것”이라는 이재명 대통령의 말처럼, 이제 대한민국은 명실상부하게 국민주권이 실재화된 국가로 도약해야 한다. 헌법에 명시된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조항이 장식용이어서는 안 된다. 군사 독재와 검찰 정치를 극복한 국민에게 이제는 직접 입법에 참여할 권리를 보장해야 한다. 국회는 스스로의 한계를 인정하고, 추첨제 시민의회를 통해 민주주의의 외연을 확장해야 할 시점을 맞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