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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세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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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 작품 1 | 바람도 덜어내고 |
대표 작품 2 | 갈채 |
수상연도 | 2008년 |
수상횟수 | 제27회 |
출생지 | |
[수상 작품]
목포 앞바다 / 오세윤
KTX 목포역 도착 2시 53분, 서울을 떠날 때의 계획은 우선 유달산부터 올라 다도해와 바다의 낙조를 차분하게 감상한 다음 그곳 산장호텔에 묵으며 보석처럼 아름답다는 목포의 야경을 오붓하게 즐길 참이었다. 하지만 다음날 가볼 섬을 알아보기 위해 찾은 역 구내 관광 안내소에서 ‘사랑의 섬 외달도 관광안내’란 팜플렛을 보자 생각이 달라졌다.
‘외달도’라는 섬 이름도, ‘사랑의 섬’이라는 별명도 하나같이 깜직하고 장난스럽게 느껴졌다. 정말 사랑처럼 작고 예쁘고, 조용하고 뜨겁고, 수줍고 은밀할까. 10년 전 폐교된 분교가 지금은 민박집으로 쓰이고 있다고 했다. 섬의 분교란 어떤 느낌일까.
멀지도 않았다. 뱃길 시오리, 50분 항해, 막배는 4시 반에 뜬다고 했다. 해안선 총 길이 4.1km, 면적 0.42㎢, 상주인구 79명 총 가구 수 30. 조갑지처럼 앙증맞은, 동화책에나 나올법한 요런 섬은 어떤 섬일까. 계획을 바꾸어 외달도행 배를 먼저 타기로 했다. 섬에는 어떤 사람들이 살까.
여객선 터미널까지 천천히 걸어 20분, 부두가 가까워지자 물씬 갯냄새가 풍겨들었다. 짭조름한 고향냄새, 용당포 포구에서 태어난 나에게 부두의 비릿한 지린내는 고향의 냄새고 유년의 냄새고 어머니의 냄새였다. 오래 타관을 떠돌다 허기져 돌아온 늘그막의 고향처럼, 부두의 갯냄새가 나를 푸근하게 맞아줬다.
길 건너 노점상에서 귤 한 봉지를 사들고 대합실 옆 벤치에 앉았다. 선창너머 펼쳐진 푸른 바다, 배들이 가득 정박돼 있는 부두 너머로 크고 작은 섬들의 낮은 능선들이 겹겹으로 이어져 해무 속에 아스라이 멀었다.
승선시간이 가까워 한 남자가 곁에 와 앉으며 인사를 건네 왔다. 50쯤으로 보이는 신중한 얼굴이 ‘류 ○○목사’ 라고 자기를 소개하며 명함을 내밀었다. 달섬 교회에서 목회를 맡고 있다고 했다. 초면의 낯선 여행객에게 댓바람으로 자기 소개부터 하는 게 뜨악하긴 했지만 몸에 밴 의례적인 전도 습성이려니 여겨 내미는 손을 시들먹 잡아줬다.
배는 정시에 출항했다. 류 목사의 뒤를 따라 상갑판을 통해 뒤편 후갑판으로 갔다. 제법 널찍한 후갑판 로비에는 너댓 개의 이동용 플라스틱 의자와 탁자들이 어질더분하게 놓여 있었다. 의자에 앉으려던 목사가 되돌쳐 항해사실로 들어가더니 커피 두 잔을 타가지고 나왔다.
부두를 빠져나온 배는 90도로 방향을 틀어 유달산을 오른쪽으로 끼고 돌아 다도해의 올망졸망한 섬들이 흩어져 떠있는 바깥바다를 향해 항로를 잡았다.
남녘바다의 그림 같은 정경이 꿈처럼 펼쳐졌다. 해무에 잠긴 흐릿한 먼 섬들, 이따금씩 지나가는 상선과 연안여객선, 무인 등대, 물위로 튀어오르는 고기들, 유유히 떠가는 흰 구름과 빛나는 햇살. 여유와 낭만의 가을바다에 나는 금세 취해 들었다. 출항하기 무섭게 류 목사가 조바심하듯 말을 걸어왔지만 배가 바깥 바다에 나오고도 한참이 지나서야 나는 그가 하는 말에 솔깃하게 귀를 세웠다. 일단 시작된 이야기는 쉼표도 없이 이어졌다. 기관소리가 시끄럽게 거슬렸다. 이야기가 거의 끝물에 들 무렵, 항해사가 커피를 들고 나와 우리 곁에 앉았다. 수인사도 없이 그는 묻지도 않는 말을 구면이듯 풀어냈다. 누가 귀동냥이 필요한가를 대번에 아는 예지에다 이야기꾼의 별난 친근성이라도 가진 듯 숫기가 좋았다.
“30년 전 처음 정기여객선으로 ‘유신호’가 생긴 때는 하루 한차례, 목포에서 아침에 섬에 들갔다 저녁에 나왔지라. 그 앞전엔 충무 동사무소 행정선이 닷새에 한번 꼴로 목포꺼정 운항해주곤 했어라. 그땐 외달도가 충무동에 속했었지야. 여느 땐 풍선배(돛배)로 목포를 오갔지. 여긴 물살이 쎄서 밀물과 썰물 때만 잘 맞추믕 배가 살같이 내달링께 하나도 어렵지 않았고마. 헌디–”
잠시 말을 끊고 슬쩍 내 눈치를 살피고 난 항해사가 만족한 듯 웃으며 말을 이었다.
“헌디 농업용수로 쓴다 함시로 저눔의 영산강둑을 막아버린 담 부텀 아래 위 물길이 막히고 유속이 떨어져 해양오염이 가속된 탓에 목포 앞바다엔 괴기 씨가 말라부렀지라. 그 땀시로 뭐 하나 잡을라믄 먼 바다로 한참 나가야 안하것소. 예전엔 배로 나주까지 올라갔지야. 물량수송 길이 막혔으니 목포경제가 살것소? 그나마 있던 기업과 공장들이 다 떠나뿔고 하나도 없당께로. 무안군 삼항면에 도청이 들어슴서 도시로 개발돼 농지로도 더 이상 용도가 없어져뿡게 뚝이 뭔 소용이다요. 하루라도 빨리 터뿌러야죠. 암 터야하구말구–. 그것만이 아니랑께. 저 건너 저기를 좀 보쇼.”
찌푸린 얼굴을 들어 항해사가 멀리 반대편 해안을 가리켰다. 뿌연 해무에 가려 내 눈엔 육지의 윤곽이 보이지도 않았다. 괘념하지 않고 그가 말을 계속했다.
“저게 금호방조젠디, 만 하나를 꽉 막아서 그 좋은 갯벌이 통째 사라져뿌렀소. 오염되고 썩어서 암것도 안나옹게 살 수가 없소. 젊은것들은 다 마을을 떠나뿔고 늙은이들만 하릴없이 썩은 갯벌을 헤적이며 시름시름 살지라.”
첫 기항지인 고하도 연안에 들어서서야 항해사는 제 자리로 돌아갔다. 다섯 사람이 내리고 두 사람이 새로 탔다. 고하도를 빠져나온 배가 다시 너른 바다로 나왔을 때, 소스라치듯 마주친 작은 고기잡이 배 한 척이 이제까지의 낭만적 상념들을 불시에 거둬갔다.
길이 10여 미터가 될까싶은 작은 배가 파도 너울대는 검푸른 물위에 낙엽처럼 흔들리며 조업을 하고 있었다. 육지는 아득히 멀었다. 두 다리를 벌려 뱃전에 앙버티고 서서 혼자 그물을 끌어올리는 남자의 볕에 그을린 깡마른 팔뚝이 땀에 젖어 번들번들 빛났다. 배안 한쪽에는 휴대용 가스버너와 냄비 따위가 되는 대로 흩어져 있고 이물의 좁은 갑판에는 빛바랜 자줏빛 이불이 후줄근하게 펼쳐져 있었다. 어부에게 바다는 다만 고단한 현실일 뿐이었다. 류 목사는 달리도에서 내렸다.
5시 20분, 배가 외달도 포구에 들어섰다. 선착장으로 들어서는 배의 상갑판에서 내려다본 마을은 아담하고 호젓했다. 삼태기처럼 오목 파인 작은 포구 뒤로 20호가 겨우 될 집들이 남향받이 낮은 둔덕에 옹기종기 집촌을 이루어 마을은 마치 쥘부채를 반쯤 옹그려 펴놓은 오종종한 형국이었다.
껑충하게 높은 블록 담 안쪽에 옴츠린 듯 숨은 지붕 낮은 작은 집들이 담 너머로 바튼 용마루를 얼핏설핏 기웃이 드러내 보이고 있었다. 슬레이트 지붕 위에는 둥글납작한 돌들이 그물쪼가리나 밧줄로 얼기설기 묶여 단단하게 고정돼 얹혀있었다. 사위는 저녁햇살에 가림 없이 드러난 마을이 마치 집에 돌아가기를 잊은 채 벌거벗고 물가를 뛰노는 바닷가 아이들처럼 제멋대로의 철없는 모습이었다. 배의 고물 너머, 흐릿하게 해무 피어오르는 수평선 위 한 길쯤 높이에 해가 멈칫거리고 있었다.
부두에는 누구 하나 마중 나와 있는 사람이 없었다. 내리는 사람은 단지 나 하나 뿐이었다. 어선 한 척 보이지 않았다. 포구 끝의 돌출부로 이어지는 자갈투성이의 좁은 모래톱에는 한낮 햇살에 나른해진 파도가 느릿느릿 밀려들며 가르랑가르랑 고양이 코고는 소리를 냈다. 섬은 한낮 내내 옅은 해무 속에 늘어지게 졸고 있은 듯만 보였다.
외달도․5 / 오세윤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나흘째, 목포로 회항하는 여객선의 상갑판에서 잠시 만났다 헤어진 초면의 종씨에게서 택배가 왔다. 지나가는 말처럼 그가 한 약속대로 30kg들이 천일염 한 포대를 잊지 않고 보내왔다. 자루 속에 든 새하얀 소금에서는 그의 성의와 신의가 잡티 하나 없이 깨끗하게 빛났다. 종씨를 처음 만난 율도의 연안 풍경이 눈앞에 선명하게 펼쳐졌다.
외달도를 출발한 배는 다음 기항지인 율도에 들러 관광차 왔다 떠나는 젊은이 둘과 내 나이또래의 넥타이차림 하나를 태웠다.
바로 상갑판에 올라온 넥타이는 다짜고짜 빈 의자 하나를 끌어다 내 곁에 놓더니 털썩 소리가 나게 주저앉으며 나를 보고 씩 하니 웃었다. 말쑥한 차림에 어울리지 않는 무무한 행동거지에 경계심이 일만도 했지만 험한 인상이 아니었다. 따라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 인사를 되돌렸다. 어쨌거나 나그네란 누구에게나 겸손해야 하는 법, 여행자는 언제 어디서나 허허롭고 너그러워야 하는 법, 더구나 여기는 낯선 타향인데다 따뜻한 남쪽바다가 아닌가.
얼마 안 가 배는 달리도 근해에 들어가 섬의 연안을 지나치고 있었다. 물살이 머츰한 연안의 한 곳에는 고기잡이 작은 어선들 스무남은 척이 모여 조업을 하고 있었다. 지극히 평화로운 모습이었다. 듬성듬성 수상가옥들도 보였다. 뗏목집이라고나 할 익숙지 않은 주거형태였다. 민물낚시를 다닐 때 저수지에서나 보곤 하던 물위에 띄워놓은 천막숙소, 수십 개의 빈 드럼통을 엮은 위에 널빤지를 깔아 넓은 공간을 확보하고 그 위에 판자와 스티로폼과 비닐로 집을 만들어 대충 기거하게 만들었다. 나머지 공간은 작업장으로 마침했다. 궁금했다. 우리나라에도 수상가옥이 있던가. 옆에 앉은 넥타이에게 정황을 물었다. “저건 집인가요? 사람이 사나보죠?”
“그럼요, 사람이 살지요. 부부가 함께 조업(釣業)을 하면서 열두 달을 상주하다시피 해요. 작업장이지요. 혼자는 못 움직이고 배로 끌어다 적당한 곳에 고정시켜 놓지요.”
넥타이가 목소리를 높여 크게 대답했다. 햇볕에 그을린, 바닷바람처럼 거친 칼칼한 목소리였다. 또 물었다. 뭍에는 집이 없나요?
“아니지요, 뭍에도 집이 따로 있지요. 태풍이 온다던가 하면 험한 꼴을 당할 수도 있어 그런 때는 뭍으로 철수해 바람을 피하지요.”
나그네에게 자기가 아는 걸 일러주는 게 신이 난 사내가 그들의 생활을 줄줄이 늘어놓기 시작했다. 통성명 없이 우리는 바로 구면이 됐다. 여행지에서 초면인사란 쓰잘데 없는 허례일 뿐, 묻고 답하는 모든 것에 수식이나 절차 따위란 전혀 필요 없는 사족일 터.
“히라시잡이가 주업이지요. 작은 민물장어새끼를 히라시라고 해요. 실뱀장어죠. 우리나라 장어란 대만해역에서 부화해 실뱀장어로 자라면서 우리 쪽 연안으로 몰려와 월동을 하고 이듬해 2~4월에 민물을 따라 강으로 올라간답니다. 그놈들을 잡아 양식장에다 넘기는 거예요. 12월부터 3월말까지 입빠이(가득) 일을 하면 수입이 2~3천만 원을 넘긴다고 해요. 어떤 해는 5천만 원도 올린다고 합디다. 짭짤해요, 솔찮은 수입이지요.
헌데 그게 문제예요. 히라시그물은 그물코가 아주 촘촘해서 아무리 작은 고기라도 다 걸려요, 절대 빠져나가지 못하지요. 물론 불법이지요. 고기의 씨를 말리는 거나 한가지니까요. 한번 그물에 걸렸던 고기는 놔줘도 살질 못해요. 다 죽고 말아요. 치어 남획이라고 단속을 해보긴 하지만 신안 앞바다에만도 수백 척이니 손을 쓸 수가 없대요. 생존이 달린 문제라 모질게 단속도 못하는 게 실정이랍니다.”
넥타이가 잠시 숨을 고르는 사이 우리들을 내다보고 있던 항해사가 커피를 들고 나와 둘에게 한 잔씩 권하며 합석을 했다. 아침바닷바람에 마시는 공짜커피 맛이라니!
마침 궁금하던 걸 항해사에게 물었다. ‘달리도’라고는 한자로 어떻게 씁니까. 순 우리말 같기도 한데….
“지도 한자로는 워찌 쓰능가 잘 모르것구만이라. 듣다봉게 나도 순우리말이 아닐랑가 생각이 듭디다요. 좌우당간 눌도에서 바다로 달려나간다고 달리도라 한다는 말도 있고 슴이 반달처럼 생겨먹었다고 해서 달도라 부른다싸코–. 달도의 바깥에 있다고 ‘밖 달’(외달도)이라 한거슨 확실헌 거고.”
커피를 한 모금 마신 사내가 항해사의 말이 끝나기를 기다려 하던 말을 이었다. 배가 목적지에 닿기 전 모두를 이야기하려는 조바심하는 낌새였다.
“그게 끝나면 그물코가 성긴 겉고기그물(삼강망)로 교체를 하지요. 12월까지 하면 보통 3천에서 5천만 원을 번다고 합니다. 큰 고기도 잡혀요. 농어와 민어 따위, 때로는 엄청 큰 돔이 잡히기도 하지요. 그런 일도 모두 부부가 함께 해야 되요. 사람을 쓰면 그 인건비를 당해낼 재간이 없답니다.”
사내는 식어버린 커피를 단숨에 마저 마시고나서 하던 말을 계속했다.
“그물은 군산에서 마쳐오는데 히라시그물은 80만 원, 겉 고기그물은 250만을 웃돈다죠, 아마. 쉬운 일이 아니지요. 들물과 썰물 때를 잘 맞춰 그물을 돌려놓아야 하는 작업이라 한시도 배를 떠날 수가 없어요. 한번은 국회의원 선거를 하는데 이곳은 인구가 적어서 한두 표가 당락을 좌우하기도 하잖습니까. 꼭 투표를 하도록 해야 할 자기 사람인데 어떻게 하겠어요? 백만 원을 주고 데려다 투표를 시켰대요. 덕분에 당선이 되긴 했다지만 서도–.”
궁금했다. 정치를 하는 사람인가? 직업을 물었다. 그제야 그는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 명함을 건네준다. ‘광산염전 대표 오○○’, 반가워라, 종씨라니. 본관을 물었다. 같은 해주였다. 무지 반갑다며 그가 새롭게 악수를 청해왔다. 통성명을 했다.
염전 사장이라, 어쩐지 말 품새에 짭짤하게 소금기가 배어난다 했더니 염전의 전주였구나. 화제를 바꿔 그가 하는 일에 관심을 나타내 물었다.
“지금도 소금을 만들기는 하는군요? 요즘은 소금을 먹어보면 쓰기만 해요, 중국산이 많아서 그런지…” 말꼬리를 헤무르며 그의 눈치를 살폈다.
“중국산이 아니더라도 가을소금은 써요. 봄이나 가을엔 아무래도 햇볕이 약해 4~5일이 넘게 걸려야 소금이 구워지니깐 알갱이들이 물에 잠겨있는 시간이 길어 자연 굳어지고 염도도 높아지지요. 소금은 6,7월 소금을 써야 해요. 하루나 이틀이면 구워지지요. 그걸 써야 음식도 모두 제 맛을 낸답니다. 장마 전후로 닷새 사이에 구워낸 놈이면 최상품이고요.
요즘 정치를 보면서 전 사람도 소금 같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때가 많아요. 남의 윗사람 노릇을 하려면 소금처럼 끊임없이 자기를 정제해 나가는 것도 중요하지만 어떤 음식에도 기본적으로, 절대적으로 필요한 게 소금인 것처럼 꼭 있어야할 사람이 되어야한다고 봐요. 자기를 녹여 간을 맞추어 맛을 내고도 고춧가루나 마늘, 파처럼 자기를 나타내 보이지 않는 겸손한 자세. 그렇지 않습니까?”
그가 진지한 어조로, 그러나 웃는 얼굴로 나에게 동의를 구했다. 나는 어물쩡 웃으면서 긍정도 부정도 아닌 어정쩡한 태도로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것이 어찌 정치인에만 한할까. 하지만 이 좋은 바다풍광에서 심각할 필요까지야 없겠다는 생각에 그에게 궁금한 상식을 물어 화제를 돌렸다. “중국산 소금하고 국내산은 어떻게 구별합니까?”
화제를 바꾸게 된 게 차라리 잘됐다는 듯 더 바싹 곁으로 다가앉으며 마치 친지에게나 하는 말투로 자세자세 설명을 되뇌어 했다.
“가는 소금을 왼손바닥에 한 줌 올려놓고 오른손 검지로 밀어내보면 손바닥에 하얀 성에, 왜 그 냉동실에 끼는 성에 같은 거 말입니다요. 그런 게 가는 실처럼 남지요. 그게 바로 중국산이야요. 물에 넣어도 잘 풀어지지도 않고요. 대번에 알 수 있어요. 그리고 꼭 알아두셔야 할 게 하나 있는데….”
귀에다 입을 갖다대는 시늉을 하며 남이 들을세라 비법이란 걸 알려준다.
“가을소금이라도 소금포대를 밑으로 물이 흘러나가게 받쳐놓고 아가리를 풀어 벌린 다음 수돗물을 콩나물시루에 물 뿌리듯 살살 뿌려 흘러빠지게 하세요. 15분 간격으로 세 번만 하면 쓴 기가 가시고 소금 맛이 순해지지요. 내 현장에 돌아가는 대로 바로 한 포대 보내드릴 테니 시험 삼아 해 보세요.”
듣고 보니 비밀도 아니었다. 훌륭한 지혜일 뿐. 종씨는 장좌도에서 내렸다. 헤어지면서 그는 다음에 내려오면 꼭 들러달라며 나의 주소를 물어 수첩에 적고나서 급하게 계단을 내려갔다. 바쁜 듯 보였다. 방향을 돌려 선착장을 빠져나오는 배의 고물로 갈매기들이 어지럽게 날아들었다. 가을 한낮의 화창한 남녘바다가 한 폭 그림으로 펼쳐졌다.
[작가 프로필]
호 湛如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졸업. 소아과 전문의로 인천에서 개원‧은퇴.
<시와 산문>(2004, 여름)에 「가야금 산조」로 등단.
저서: 수필집 바람도 덜어내고(2003), 은빛 갈겨니(2005),
성장소설 슴베, 그 서툴게 끼인 자리, 수필집 갈채(2008)
제1회 선농사이버 문학상 대상(2005), <수필춘추> 현산문학상 수상.
[작품 심사평]
오세윤 수필이 좋은 이유 / 김우종
오세윤은 수필집 갈채에서 한국수필이 지향해야 할 주요한 조건들을 알차게 추구해 나간 것으로 보인다. 그 중 하나는 철학성이다. 피천득은 “수필은 심오한 지성을 내포한 문학이 아니요, 그저 수필가가 쓴 단순한 글이다”라고 했는데 오세윤의 수필은 이와 달리 지성인의 사상성이 주제를 이루고 있으며, 그저 쓴 단순한 글쟁이의 글이 아니라 이런 철학성을 통해서 심오한 지성의 표현을 시도하고 있으며 잘못 키워진 우리 문학의 병적 체질 개선에도 이바지하고 있는 문학이다.
둘째는 신변적 소재의 한계를 극복하고 있는 점이다. 신변적 소재 자체는 좋지만 그것을 보는 시야 자체가 신변적 울타리 안에만 갇혀 있으면 그것은 성년의 문학이 되기 어렵다. 어른이 되면 문밖으로 나가서 넓은 세상 속에서 ‘나’가 아닌 ‘우리’와도 함께 만나고 사회와 역사 속의 인간 존재에 대한 비판적 의식도 가져야 하기 때문이다. 그것을 떠난 개인이란 존재할 수 없는 것 아닌가?
셋째로 오세윤은 풍부한 언어를 동원해서 좋은 문장력을 갖추고 있다. 수필의 문학성 제고를 위해서는 더 시도해야 할 단계가 남아 있지만 풍부한 어휘 재고량과 좋은 문장은 모범적인 수준이다.
문학 작품의 평가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누인다.
학문적 연구는 내용만으로 전체적 평가가 가능하지만 문학은 내용과 함께 형식도 중요하다. 풍부한 영양가만으로는 문학이 되지 않는다. 형식의 성숙도도 필수적 조건이다. 형식은 내용을 전하는 수단이다. 수단이 미숙하면 감동이 따르지 못하며 감동되지 못한 문학은 배달되지 못하는 선물처럼 아무리 값나가는 보석이었다 해도 이를 받아야하는 사람에게는 의미가 없다.
위의 세 가지 중 마지막 것이 이 형식적 조건이다. 문학의 형식적 조건을 위한 가장 기본적 밑천은 풍부한 언어와 그 효과적 구사력이다. 이브를 유혹한 뱀처럼 혓바닥을 잘 놀려야 하는 것이 필수 조건이다. 문학은 언어예술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연주자에게는 우선 가장 좋은 악기가 있어야 하고 그걸 다룰 능력이 있어야 하는 경우처럼 문학에선 언어 창고가 꽉 차 있고 항상 이를 잘 써먹어야 한다.
언어에는 표준어 외에 사투리가 있다. 문학에선 이 두 가지가 모두 필요하다. 왜냐면 실제적으로 살아 있는 인간의 말은 사투리도 있고 쌍말도 있으며 표준어만 쓰는 사람은 추상적인 인물 즉 존재하지 않는 인물일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는 교과서나 신문이나 방송을 통해서 표준어에만 익숙해져 있다. 또 그것마저도 아주 많은 어휘를 잊고 살기 때문에 사물 표현의 정확도가 떨어지고 이것은 결국 언어예술로서의 문학성을 떨어뜨린다. 플로베르가 모파상을 지도하면서 서신을 통하여 말해준 일어설(一語說)의 원칙 같은 것이 실현되지 못하고 있는 셈이다.
오세윤은 풍부한 우리말의 창고를 간직하고 늘 넉넉하게 신선한 언어구사를 하는 편이며 사투리를 능숙하게 구사함으로써 그 인물과 그 지방의 토착적 이미지와 흙냄새 바다 냄새를 모두 잘 살려 내고 있다. 특히 남도 사투리는 그곳 출신이 아닌 수필가로선 매우 능숙한 편이다.
사투리는 그 지방 출신이 아니라면 특수한 재능이 있어서 자연 습득이 되었거나 따로 공부를 해야 된다. 그러므로 북쪽에서 온 실향민이며, 대천의 무의촌 근무 3년에, 그 후 인천 토박이로 살아 온 사람이면 이런 사투리는 언어예술로써 수필 장르에 대한 남다른 인식을 보여 준 것이라고 여겨진다.
그의 사투리는 물론 대화체에 나타난다. 수필은 일반적으로 설명적인 서술체가 쓰이기 때문에 이렇게 대화체는 많지 않으므로 오세윤 수필은 이런 면에서 남다른 개성을 보이고 있다. 사람은 그가 사용하는 언어 한 두 마디로 국적과 고향과 성격과 신분 등 거의 모든 것이 들어나므로 수필 역시 사람이 등장한다면 그는 대화체를 통해서 가장 확실한 형상화가 가능해진다. 다만 수필이 소설에서 특기로 삼는 대화체의 인물묘사에 대한 관심이 지나치면 자칫 허구적 사건까지 끼어들어서 수필 장르의 특성과 매력이 손상되는 수도 있는데 오세윤은 이를 잘 조절해 나간 것 같다.
그는 사투리만이 아니라 거덕치다 머츰하다 댕가리지다 갈밋하다 늘컹하다 이물스럽다. 우렁우렁 등 흔히 안 써서 잊혀져 가는 많은 언어들을 적절한 자리에서 활용하며 감각적 표현의 농도와 정확성을 높이고 있다. 화구상 여러 곳으로 남들이 잘 찾지 않는 색감을 구하러 다니는 화가처럼 오세윤은 그 자리에 꼭 맞는 단어를 찾아 쓰고 있다. 그리고 이런 어휘들이 동원된 문장이 매우 좋다.
나는 리어카 아낙이 건네주는 김 두 톳을 들고 얼른 그 자리를 떴다. 정오를 설핏 넘긴 가을볕이 목덜미에 따갑게 내려 쪼였다. 햇살이라도 발라 잰 듯 자르르 윤기 흐르는 김에서는 달콤 짭조롬한 바다 냄새가 났다.
매우 섬세한 감각적 표현이 살아 있는 문장이다.
그런데 이런 표현기법의 우수성은 어디까지나 형식적 조건이지 내용이 아니다. 곱고 비싼 명품으로만 칭칭 감고 내용이 비어 있으면 무용지물이다. 그 내용물이 천하일색이라 해도 골이 비어 있으면 깊은 사랑은 받기 어렵다. 문학의 표현기교는 결국 의미 전달을 위한 수단이고 방편인데 오세윤은 이것을 통해서 푸짐한 영양가를 전해준다. 그 영양가는 복합적인 것이지만 가장 주된 성분은 오랜 인생 경험에 대한 결산서처럼 내려진 바 헛된 욕망에 매이지 않는 무소유의 철학 정신이다. 인사동에서 만난 검은 승복의 사내 모습을 바라보며 그렇게 한동안 발을 떼지 못하고 있었던 것도 거기서 발견한 무소유의 경지 때문이며, 「목포 앞바다」의 외달도를 찾아간 다섯 편의 연작 수필도 무소유의 삶을 추상적 이론이 아니라 실제적 구체적 현상으로 확인하고 보여주려 한 작업이고 작품이다. 육지로부터 멀리 떨어진 외딴 섬에 사는 두 부부의 모습이 그런 ‘무소유’의 실체를 작자에게 감동적으로 입증해준 사람들이다. 아니 그보다는 무소유의 의미를 독자에게 전하기 위해서 작자는 설명적 언어 대신 이들을 그림으로 보여 주고 우리 스스로 작자의 의도에 따르게 하는 방법을 쓰고 있다고 봐도 좋다. 그리고 배에서 만난 류목사와 소금장수등이 모두 그런 인물이다.
“할 수 있는 한 간결하게 살고 싶어. 욕망에 묶이는 게 이젠 정말 힘들어.”
이렇게 말하면서 그는 문단에서도 권위의식과 자만과 타성과 독선으로부터 항상 자유로울 수 있는 신인으로 남고 싶다고 한다.
모든 허세를 버리고 과욕을 버리고 마음의 짐을 덜며 자유롭게 남은 인생을 아내와의 정으로 살아가겠다고 말하는 그의 문학세계에서는 그 동안 살아 온 우리 사회에 대한 실망감 때문일 것 같다. 이것이 자주 은근하게 내비쳐지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그의 시야는 신변적 울타리의 문을 열고 나와 우리 사회와 역사를 보고 비판하며 우리 모두가 다 함께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삶의 철학을 제시하고 있다. 그리고 진리를 찾아 나서는 순례자처럼 그런 삶의 실체를 찾아 나선 작품이 「목포 앞바다」의 외달도 시리즈다. 그가 멀리 외딴 섬에 나가 사는 두 부부의 모습을 보고 돌아오고, 인사동에서 그 달마도 그림의 스님을 보고 오래 머무는 것은 이 같은 실망적인 사회적 역사적 현실에 대한 필연적 결론이라고 볼 수 있다. 다만 그런 비판적 의식이 은연중 내비쳐지거나 그 내용이 새롭지는 않은 이유는 역시 수필은 조용한 주택가나 오솔길이나 난이나 학이나 청자연적 같은 것이어야 그 격과 품위가 유지된다는 인식에서 크게 거리를 두지 않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더라도 그의 시야는 안으로만이 아니라 밖으로도 많이 열려 있다는 것이 중요하다. 그런 의미에서 오세윤의 수필은 우리 수필 문단에서 소중한 자리를 확보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