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이씨(慶州李氏) 안동시 서후면 금계리 금호공(琴湖公) 유적 이종준유허비(李宗準遺墟碑)
현재는 금계 마을에 월성이씨가 뚜렷이 집성촌을 이룬 데가 없으나 언젠가 그들 문중이 자리잡고 살았던 흔적을 확인케 하는 유적이 있다. 바로 이곳 금제에 남아 전하는 이종준유허비(李宗準遺墟碑)다. 또한 그의 아우 눌재(訥齋) 이용준(李容準)은 이 지역 경광서원(鏡光書院)에 배향된 인물이기도 했다.
경주이씨가 금계마을에 안동땅의 입향조로 정착한 것은 계유정난(癸酉靖難)에 고초를 당한 금호(琴湖) 이시민(李時敏, 1430~1473)이었는데, 그를 위하여 매월당 김시습이 정사(精舍)의 현판을 금호고사의 집(琴湖高士之軒)이라 했단다.
이시민은 월성군(月城君) 이지수(李之秀) 후손으로 대사헌(大司憲) 이승직(李繩直)의 아들인데, 계유정난(癸酉靖難)에 연좌되어 금고형을 받고서 모친 흥해배씨 백죽당(栢竹堂) 배상지(裵尙志)의 딸과 함께 한양에서 모친의 고향으로 온 것이라 한다.
이시민과 이웃마을인 안동권씨 복야공파의 현감 권계경(權啓經)의 딸 사이에 4남이 있었는데, 그 중에 둘째가 이종준(李宗準, 1454~1498)이고, 셋째가 눌재(訥齋) 이홍준(李弘準)이다.
이종준의 자는 중균(仲鈞), 호는 용재(慵齋), 용헌(慵軒), 부휴자(浮休子), 상우당(尙友堂), 태정일민(太庭逸民), 장륙거사(藏六居士)인데, 대사헌 승직의 손자, 이시민의 아들이며, 김종직의 문인. 1485년(성종16) 별시문과에 갑과로 급제, 의성현령으로서 경상도지도를 제작하였으며, 후에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와, 1492년(성종23) 사가독서(賜暇讀書)하고 사인(舍人)에 이르렀다. 1498년(연산군4) 무오사화(戊午士禍)에 부령(富寧)으로 유배되어 가던 중에 단천(端川) 마곡역(麻谷驛)에 이르러 벽에다 송나라 이사중(李師中)이 바른 말하다 귀양가는 당개를 송별하면서 지은 시gl라는 "孤忠自許人不與-나 홀로 외로운 충성 타인들은 함께하지 않는구나"를 써붙인 것이 불온하다는 혐의와 무풍정(茂豊正) 총(摠)을 무고했다는 죄로 서울에 압송, 이듬해 사형되었다. 시문(詩文), 서화(書畵)에 모두 능했다. 부제학(副提學)에 추증. 안동 경광서원(鏡光書院), 백록리사(栢麓里祠)에 제향(祭享)하였다.
경주이씨(慶州李氏) 월성군공파(月城君公派) 세보(世譜)에 실린 거기 비문 중 주요 내용을 번역하여 옮기면 대략 다음과 같았다.
……시민(時敏)은 호가 금호(琴湖)인데 재주가 특이하여 세상에서 신동(神童)으로 칭하고 강개하여 기질(氣節)이 있었는데 광릉(光陵:世祖의陵)이 왕위에 오르매 영가(永嘉)의 금계촌(琴溪村)으로 내려가서 김매월당(金梅月堂)이 금호고사琴湖高士)라는 액자를 써주었다.
금호공((琴湖公)이 4자를 두었으니 숭준(崇準)은 충순위(忠順衛)요 종준(宗準은 호가 용재(傭齋)인데 호당(湖堂)에 뽑혔고, 학문이 세상에 울리었는데 김점필재(金沾畢齋)의 문인으로 1498년(戊午) 사화(士禍)를 당했다. 다음은 홍준(弘準)이요 호가 눌재(訥齋)인데 성균진사(成均進士)로 또한 학행이 있었고, 자기의 묘지문(墓誌文)을 지어 세상에서 일컫게 되었고 형제가 같이 백록사(栢麓祠)에 배향되어 세상에서 쌍주(雙珠)라 칭하였다. 다음은 공준(公準)이니 훈도(訓導)라. 아! 공이 고려조에 세록(世祿)의 신하로 벼슬이 1품에 이르러 영광된 이름이 조야(朝野)에 가득하였고 손자와 증손에 이르러 공경(公卿)을 지낸 분이 손가락을 굽혀 셀 수 없이 많았다. 마땅히 국사(國史)와 가첩(家牒)에 기재하여 천지로 더불어 같이 전할 것인데 고려가 망함으로부터 문헌)이 유실된 자가 10에서 8~9분이나 되니 차마 말할 수가 있으리요.그러나 수 백년을 내려오면서 자손이 팔도에 분포하여 사는 자가 그 숫자를 세지 못하겠으니 덕이 두려우매 유파(流派)가 더욱 빛이 나므로 여기에서 공을 헤아릴 수가 있다. 사적이 전하지 못한 것이 공에게 무슨 가손(加損)이 있겠는가? 여러 후손들이 추모하고 보답하는 정성을 펼 곳이 없으므로 한을 삼아 급히 설단 하고 제사 지낼 것을 도모하여 비석의 명문(銘文)을 나에게 청하면서 이르기를, 『지금 세상에 병필가(秉筆家, 남의 글을짓는 큰 문학가)가 없으니, 자네가 동종(同宗)간이 되었은즉 행여나 모른 체하지 마오』한다. 저윽이 생각컨데 동의 세대가 요원하여 생졸의 연도와 배위까지도 모두 근거삼을 바가 없으니 어찌할까, 단소(壇所)는 후손(後孫)이 거주하는 고장 안동군(安東郡) 금계면(琴溪面) 사망리(仕望里)에 있고, 나를 찾아와 명문(銘文)을 청하는 자는 성호(成鎬). 재영(在英), 용준(龍濬)이요 처음부터 끋까지 일을 주선하는 자는 인호(寅鎬), 동호(東鎬), 태영(台永) 보(甫)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