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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1. 여자아이. 잭 런던. 20세기 초. 미국 헌팅턴도서관.
유몽인이 쓴 <어우야담>은 임진왜란 때 최악의 기아난 속에서 아기를 훔쳐 삶아먹은 참혹한 얘기를 전한다.
"조카가 산에서 큰 딸 정아의 시신을 찾아내었다. 목이 반 넘게 잘린 채로 바위 사이에 넘어져 있었다. 차고 있었던 패도(작은 칼)가 그래로 있고 손이 평소와 똑같구나."
경남 함양에서 의병을 일으킨 선비 정경운(1556~1610)이 쓴 <고대일록>은 임진왜란의 참혹한 실상을 가감없이 적나라하게 기술하고 있다. 정경운은 정유재란의 난리통 속에서 맏딸을 잃는다. 1597년(선조 30) 8월 조선을 다시 침범한 왜군은 곧바로 함양 지방을 급습한다. 다음은 <고대일록>의 내용이다.
"다른 길로 몰래 다가온 왜적 10여 명이 갑자기 큰소리로 부르짖고 칼을 휘두르며 사방에서 쳐들어 왔다. 그러자 한꺼번에 달아나던 사람들이 산골짜기에서 넘어져서 굴렀다. 들고 온 재물도 버려두고 몸만 피한 자가 셀 수 없이 많았다. 날이 저물 무렵에 다시 모여 가족들을 찾아보니 큰 딸과 막내 딸, 노비 3명이 간 곳을 알 수 없었다."
왜적이 물러난 것을 기다려 정경운은 정신없이 딸들을 찾기 시작했다.
"혼자서 딸을 찾아서 백운산(함양과 전북 장수 사이에 있는 산)계곡을 돌아 다녔다. … (중략) … 막내딸 단아는 다행히 계집종의 도움으로 살아 있었다."
그러나 장녀 정아는 끝내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되고야 만다. 왜적에게 욕을 당할까 걱정해 아버지에게서 패도를 받은 이후로 한 번도 머리를 빗지 않고 얼굴도 씻지 않았던 딸이다. 왜적의 눈에 띄지 않도록 일부러 몰골을 추하게 했던 것이다.
정경운은 왜군에 무참히 살해당한 딸을 시신을 부여안고
"의복을 모조리 잃어 버렸으니 시신을 싸맬 천 조차도 없구나. 우리 딸이 불쌍해서 울음을 그칠 수가 없다"
라고 절규했다.
포로로 일본에 끌려 갔다가 천신만고 끝에 탈출에 성공해 조선으로 되돌아온 강항(1567~1618)도 아비규환의 참상을 낱낱이 보고한다. 강황은 서인의 사상적 원류인 우계 성혼의 제자로 전주에서 개최된 별시 문과에 급제해 전쟁 전 공조좌랑, 형조좌랑(정6품 관직)의 벼슬을 지냈다.
그가 쓴 <간양록>에 의하면, 강항은 재침한 왜군을 피해 식솔들을 이끌고 피난가던 중 왜선에 발각된다. 모두 왜군에 죽지 않기 물에 뛰어들었다. 그러다가 둘째 형과 자신의 자식 둘이 물에 빠져 죽는다.
<간양록>은 "어린 자식 용과 딸 애생이 밀려드는 파도에 휩쓸려 '으악, 으악, 칵, 칵-' 기막힌 울음소리를 내다가 그만 물 속에 삼켜지고 말았다"고 슬픔을 감추지 못했다.
사진2. 아이들. 잭 런던. 20세기 초. 미국 헌팅턴도서관.
아이들은 궁핍해 보이지만 해맑은 얼굴을 하고 있다.고금을 막론하고 전쟁의 최대 피해자는 어린이들이다
자식까지 잃은 강항은 체념했다. 체포된 직후 통역을 통해 적에게 "왜 죽이지 않는 것이냐"라고 다그쳤다. 그러자 왜군은 "사모(관모)를 쓰고 좋은 옷을 입고 있으니 관원이 아니더냐. 묶어서 일본으로 보낼 것"이라고 답했다.
일본으로 잡혀가는 과정도 비참하기 이를데 없었다. 겨우 여덟 살이었던 조카가 갈증이 나 바닷물을 들이켰다가 설사를 하자 왜군이 성가시다는 듯 아이를 바다에 집어 던져 버렸다. 조카는 바다 속에서 허우적 거리며 "아버지!, 아버지!"를 외치다 처참하게 죽어갔다.
탈출을 시도하다가 걸리면 극형에 처해졌다. 전라좌병영 우후(虞候·종3품의 무관) 역시 강항처럼 포로로 잡혀 일본으로 끌려갔다. <간양록>에 의하면, 우후는 병사 몇몇과 함께 배를 마련해 탈출을 기도했다.
곧바로 왜군이 뒤쫓아 왔고 더 이상 도망칠 곳이 없음을 깨닫는 순간 우후는 칼을 꺼내 자신의 배를 관통시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분이 풀리지 않은 왜군들은 죽은 우후와 그 일행을 데려와 모두 수레에 걸어 갈갈이 찢어 버렸다.
강항도 여섯 번이나 탈출을 시도해서 매번 목숨을 잃을 뻔했지만 그의 학문과 인품을 흠모한 일본 승려의 도움으로 가까스로 살아났다고 <간양록>은 회고한다. 강항은 일본에 억류돼 있는 동안 일본 주자학의 시조인 후지와라 세이카(藤原惺窩·1561~1619)에게 주자학을 전수해줬다.
설상가상 곳곳에서 전염병이 창궐했다. 전염병을 신분을 가리지 않았다. <고대일록>은 선조 26년(1593) 5월 경상도 관찰사 겸 순찰사를 맡아 동분서주하던 학봉 김성일(1538~1593)이 전염병에 걸려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고 기술했다.
"김성일이 진주에서 사망했다. 그는 강직하고 방정하며 정직해 권세에 맞서다가 뭇사람들에게 미움을 받기도 했다. … (중략) …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임금의 명령을 받들어 초유사가 되었다. 뿔뿔이 흩어진 병졸들을 불러모아 의병부대에 모일 것을 권장했다.
한 지방을 막고 흉악한 적 무리들의 칼끝을 차단 하니 여러 고을 사람들의 그에게 의지함이 실로 컸다. 그런 중 전염병에 걸려 진주에서 사망하니 사람들이 이 소식을 전해 듣고서는 탄식하며 모두 눈물을 흘렸다."
정경운은 자신의 딸도 전염병으로 잃었다. <고대일록>은
"막내 딸이 요절하였다. 전염병에 걸려 오한과 설사로 고생하다 죽으니 슬프기만 하구나"라고 써내려 갔다.
사진3. 강황의 선인도.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임진왜란 때 일본에 잡혀갔던 강항은 포로생활의 참상을 기록한 `간양록`을 남겼다.
오랫동안 농사를 짓지 못해 흉년이 되풀이 되면서 백성들은 최악의 기아에 허덕였다. 점잖은 체 하던 양반들이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구걸도 마다하지 않았다.
함양의 선비 정경운은 <고대일록>에서 "시장에서 양식을 구걸하였다. 얼굴이 이렇게나 두꺼울 수 있는 것인가. 부끄러워 마치 시장판에서 매를 맞는 것 같으니 곤궁함에 마음이 상하는구나"
라며 비통해했다. 배고픔 앞에서는 체면이고 뭐고 없었던 것이다.
결국,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는 일이 벌어지게 된다. <고대일록>은
"정사연을 만나 개령·김산(경북 김천)에서 난리를 겪고 있는 궁인(宮人) 등이 서로 잡아먹었다는 말을 들었다. 경악을 금치 못할 일"이라고 놀라면서 "오늘의 세상이 이러한 극한의 상황에 이르게 된 것이 과연 누구의 잘못인 지 혼자서 한탄하였다"고 넋두리를 했다.
임진왜란 수습을 총괄한 서애 유성룡(1542~1607)이 저술한 <징비록>의 기록도 다르지 않다. <징비록>은
"조선 전역이 굶주림에 허덕였고 전염병이 창궐해 살아남은 사람이 별로 없었고 힘이 있는 자들은 모두 도적이 됐다. 아버지와 아들이 서로 잡아먹고 남편과 아내가 서로 죽이는 지경에 이르러 길가에는 죽은 사람들의 뼈가 잡초처럼 흩어져 있었다"고 개탄했다.
유몽인(1559∼1623)의 <어우야담>도 전쟁이 길어지면서 식인 행위가 만연했다고 진술한다. 이에 따르면, 개성의 한 백성이 한 살배기 아이를 길가에 내려놓고 잠시 쉬는 사이 두 사람이 아이를 훔쳐 달아났다. 그들을 끝까지 쫓아가니 아이는 이미 끓는 물속에서 푹 삶아져 죽어 있었다.
범인들을 묶어 관아로 끌고 가 실상을 고하였다. 죄인들이 자백을 하지 않자 죽은 아이를 증거로 제시하려고 찾았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죽은 아이는 뼈만 남아 있었다. 기가 막히게도 나졸들이 배가 고파 죽음을 무릅쓰고 아이를 먹어치워 버린 것이었다.
[출처] : 배한철 매일경제신문 기자 :<배한철의 역사의 더께> - 31.잠시 한눈판 사이 뼈만 남은 아기시신 [임진왜란-아비규환1] / 매일경제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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