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미정은 화려한 스타선수들 틈에서 묵묵히 자신의 임무를 수행하는 선수였다. 조용했지만 중요한 순간에는 항상 그녀가 있었다. 그런 그녀가 현역 은퇴를 결정했다. 한국프로스포츠 사상 전무한 신한은행의 5년 연속 통합우승에 공헌했던 진미정은 “이 정도면 이제 농구인생에 후회는 없다”고 말했다.
쿨한 은퇴, 아쉬움은 없다
햇살 따사로운 어느 오후. 서울역 광장에서 진미정을 만났다. 은퇴 후 결혼할 남자친구와 함께 충남 아산에서 지내고 있는 진미정은 KTX를 타고 40분이나 걸려 서울에 왔다. 인터뷰를 위한 점프볼 취재진의 간곡한 부탁 때문이었다. “아이고, 그냥 대충 해도 되는데, 뭐 그리 대단한 거라고….” 진미정이 만나자마자 한 소리를 한다. 인터뷰는 적성에 맞지 않는다며 말이다. “이제 인터뷰 할 기회도 없어요.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하세요.” 필자가 핀잔을 주며 한마디를 한다. 워낙에 털털한 성격의 소유자다 보니 은퇴도 대수롭지 않아 보였다. 정말 아무런 미련이 없는 것일까? 지난 시즌이 끝난 직후 많은 선수들이 은퇴를 선언했다. 리그 최고참이었던 전주원을 비롯해 이종애, 김영옥, 장선형 등 여자농구를 풍미했던 스타들의 은퇴가 줄줄이 이어졌다. 이들과 함께 진미정도 은퇴를 택했다. 워낙 많은 선수들이 은퇴를 하는 상황이었기에 진미정의 은퇴는 비교적 조용했다. 그녀의 선수생활과 비슷했다. 진미정은 튀지 않는 선수였다. ‘레알’이라 불리는 화려한 신한은행 틈바구니 속에서 그녀는 화려함보다는 묵묵함으로 대변되는 선수였다. 특출난 면모는 없지만, 꼭 팀에 필요한 선수였다. 그리고 그녀는 선수 말년에 제대로 복을 누렸다. 소속팀의 통합 5연패에 기여하며 명예롭게 은퇴를 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진미정은 농구인생에 있어 미련이 없을법하다. “진짜 미련이 없어요. 우승은 정말 많이 했잖아요. 이 정도면 딱 적당한 것 같아요. 농구도 재밌지만, 지금도 정말 재밌게 살고 있어요. 농구선수로서의 생활은 정말 좋은 추억으로 남을 것 같아요.”
20년 만에 맛본 여유
진미정은 얼굴에 웃음꽃이 가득 피었다. 모처럼 여유로운 삶을 살고 있는 지금이 행복하다고 말한다. “지금은 마냥 좋아요. 집에서 쉬면서 산책도 하고, 영화도 보고, 책도 읽고요. 하루가 정말 짧아요.” 20년 넘도록 농구만 하면서 처음 느껴본 여유다. 그동안 너무나 치열하게 살아왔던 삶에서 벗어나 달콤한 휴식을 만끽하고 있다. “(최)희진이, (이)연화 등 동생들과 가끔 전화를 해요. 애들 훈련하는 이야기를 들어보면 ‘지금이 참 좋구나’하는 생각이 들죠. 동생들도 저를 참 부러워하더라고요.” 남자라면 이와 비슷한 기분을 느껴본 적이 있을 것이다. 바로 군대에서다. 군대에서는 전역을 하는 병장들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다. 진미정은 지금 전역을 한 병장과도 같은 마음이다. 신한은행은 훈련강도가 세기로 유명하다. 선수들은 차라리 경기를 뛰는 게 낫다고 할 정도로 훈련이 고되다. “광주 훈련 한번 같이 가 보세요. 저희 선수들은 정말 생각하기도 싫을 정도죠. 더운 여름에 산이랑 계단을 오르내리고, 에어컨도 없는 체육관에서 운동을 하니까요. 그런 걸 하는 선수들이 참 존경스러워요. 그런 팀에 제가 있었다는 것도 자랑스럽고요.”
원빈보다 멋진 진미정의 ‘아저씨’
얼마 전 원빈이 주연한 영화 ‘아저씨’는 폭발적인 반응을 보이며 흥행돌풍을 일으켰다. 영화에서 원빈은 카리스마 넘치는 매력으로 여성 팬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진미정에게도 그녀만의 아저씨가 있다. 바로 8년간 만남을 유지해온 남자친구다. “사실 우리 아저씨가 오늘도 가지 말라고 했는데….” 남자친구를 일컫는 그녀의 호칭이 엉뚱하다. 무슨 남자친구를 아저씨라고 부르냐고 묻자 “저는 그게 편하더라고요. 이름 부르면 싫어하고, ‘자기야’는 너무 닭살이고, 아저씨가 딱 좋은 것 같아요.” 일반적으로 5, 60대 아줌마, 할머니들이 남편을 부를 때 ‘아저씨’라는 표현을 쓴다. 근데 아직 결혼도 안 한 처녀가 남자친구를 아저씨라고 부르니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힐 일. 꼭 몇 십 년을 함께 산 부부의 느낌이다. 진미정과 아저씨와 러브스토리가 궁금했다. “저 20살 때부터 알았으니, 알고 지낸 지는 오래 됐죠. 원래 저희 선배의 팬이었어요. 선배 팬클럽 모임에 따라갔다 처음 만났죠.”
남자친구는 진미정보다 2살 연하다. 처음엔 편한 누나동생으로 지냈던 이들은 시간이 흐르면서 자연스레 연인으로 발전했다. “중간에 제가 방황을 하던 시기가 있었는데, 그때 잠깐 연락이 안 됐었어요. 그런데 인연이 있었는지 다시 만나게 되더라고요.” 진미정을 사로잡은 아저씨의 매력은 뭘까? “약간 나쁜 남자 스타일이에요. 어떨 땐 까칠하다가 어떨 땐 다정다감하고 그렇죠. 제가 좀 칠칠맞은 편인데, 잘 챙겨줘요. 얼굴도 좀 노안이라서 같이 다니면 연하인줄 잘 모르죠. 하하.” 진미정은 이미 혼기가 꽉 찼지만 아직 결혼 계획이 없다고 한다. 이유가 또 그녀답다. “모르겠어요. 저는 그냥 결혼식이 귀찮아요. 그냥 뭔가 보여주려고 하는 그런 결혼식은 싫어요. 부모님은 빨리 하라고 하시는데, 때가 되면 하겠죠?” 하얀 웨딩드레스를 입고 팬들에게 결혼 소식을 알릴 진미정을 기대한다. 또한 그녀만의 아저씨와 평생토록 예쁜 사랑도 함께 말이다.
프랜차이즈 스타로서의 자부심
진미정은 한 팀에서만 15년을 뛰었다. 프랜차이즈의 개념이 점점 없어져 가는 최근 프로농구 추세에서 볼 때 흔치 않은 일이다. 그만큼 진미정은 팀에서 많은 신뢰를 받았음을 의미한다. “자부심이 있죠. 팀에서 저를 믿어줬으니까 오랫동안 있을 수 있지 않았나 싶어요. 운동하는 시간만큼은 정말 열심히 했던 것 같아요. 아파도 잘 안 쉬는 편이었어요. 아파도 아프다고 말 할 스타일도 아니었고요.” 진미정은 철저히 팀을 위해 자신을 희생했다. 진미정의 강점은 수비에서 잘 드러난다. 전문수비수로 명성을 떨친 진미정은 각 팀의 에이스들을 꽁꽁 묶으며 팀에 승리를 전달했다. “수비를 따로 연습한 건 아니에요. 공격을 못 하다 보니(웃음) 수비에 좀 더 치중하지 않았나 싶어요.” 인터뷰를 마무리하면서 진미정에게 지금까지의 농구인생을 평가해달라고 부탁했다. 진미정은 잠깐 생각에 잠긴 뒤 “저는 지금까지 농구를 하면서 큰 목표가 없었던 것 같아요. 보통 꿈이 뭐냐고 물어보면 ‘국가대표’라는 얘기를 많이 하는데, 저는 그냥 바로 앞만 보고 농구를 했던 것 같아요. ‘내 주제에 무슨 대표선수냐’며 말이죠. 만약 제가 꿈을 가지고 농구를 했다면 더 잘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해요.” 치열하게 농구를 해왔던 그녀에게는 어쩌면 당연한 삶이었는지도 모른다. 이제 진미정은 전투와도 같았던 농구와의 씨름을 접어두고, 평범한 여자로서의 삶으로 돌아간다. 결혼 후 평범한 가정주부로서의 삶을 준비하고 있는 진미정. 성공적인 농구인생에서처럼 앞으로의 삶 역시 희망과 행복이 깃들길 바란다.
진미정 농구인생 최고&최악의 순간최고의 순간
2005년 여름리그에서 우승했을 때가 가장 기억에 남아요. 그 전 시즌에 꼴찌를 했거든요. 사실 꼴찌 했을 때도 경기내용이 나쁘진 않았는데, 노련한 선수들이 부족해서 잘 하다가도 뒤집히는 경우가 많았죠. 가끔 동료들하고 그때 이야기를 하곤 해요. 꼴찌하고 나서 해병대 훈련도 다녀오고, 만반의 준비를 했죠. 그 시즌에 (전)주원 언니까지 복귀하면서 단숨에 우승을 했어요. 중·고등학교 때 우승 한 번 못 해보다가 처음 우승을 한 순간이었죠. 그 전까지 계속 준우승만 했거든요. 농구하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인 것 같아요.
최악의 순간
아마추어 때는 많이 힘들었던 것 같아요. 신한은행에서 힘들었던 건 아무것도 아니었죠. 저 뿐만 아니라 그 세대들은 다 힘들었던 것 같아요. 그 중에서도 현대가 해체됐을 때가 제일 힘들었어요. 숙소가 없어서 안산에 모텔에서 지냈죠. 해체된 다음에 월급도 못 받고, 카드회사에서 전화가 오기도 했어요. 휴가가 너무 길어서 ‘우리가 다시 모일 수나 있을까’하는 생각이 들었죠.
진미정은…1978년생인 진미정(173cm)은 전주 기전여고를 졸업하고, 1996년 현대건설 여자농구단에 입단했다. 비록 소속팀 현대가 2003년 신한은행에 인수돼 옷을 갈아입었지만, 명맥만 놓고 보면 시작과 끝을 한 팀에서 보낸 의미 있는 성과를 달성했다. 신한은행의 5년 연속 통합우승에 기여했으며, 2007년에는 아시아선수권대회 우승을 맛보았다. 2001년에는 WKBL 여름리그 우수후보선수상도 수상했다.
글 곽현 기자 사진 문복주 기자
2011-07-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