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youtu.be/Ss9PNRVZXXA
안녕하십니까 성도 여러분, 다시 한번 우리 성경의 어휘 연구를 해보겠습니다. 여러분들께서 이 단어 연구를 매우 넓게 광고해 주시고 시청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수많은 성도와 학생들이 이 어휘 연구에 참여하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오고 있습니다. 또 많은 질문도 있고 감사의 말씀도 전해와서 매우 감사한 마음으로 오늘 성경의 어휘 연구를 계속하게 되었습니다. 성경에는 많은 어휘가 있고 그 어휘는 때때로 한국말로 되어 있는 것도 있고, 성경의 원어로 된 것도 있고, 또 서양 언어로 된 것도 있습니다.
오늘은 히브리어 단어를 좀 공부하겠습니다. 구약을 기록한 언어가 히브리어입니다. 일부는 아람어이지만 아람어와 히브리어는 매우 비슷한 언어입니다. 지난 시간에도 중요한 동사 하나를 연구했는데, 히브리어 '야다(Yada)'에 대한 다양한 의미를 살펴보았습니다. 오늘은 일흔여덟 번째 시간으로 그 히브리어 '야다'와 관련이 있는 헬라어 문맥을 보면서, 헬라어에서 '알다'를 뜻하는 동사 세 개가 어떤 의미를 가졌는지 공부하겠습니다.
예수님의 생애와 가르침, 사도들의 편지, 그리고 요한계시록이 있는 신약성경이라는 아주 중요한 부분을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신약을 기록한 언어인 헬라어를 좀 친숙히 아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헬라어로 기록된 신약의 중요한 단어들을 아주 집중적으로 깊이 연구한 사전이 있습니다. 이것이 <신약 신학 사전>, 즉 영어로는 'TDNT(Theological Dictionary of the New Testament)'라고 부릅니다. 지난 시간에는 구약 신학 사전인 TDOT를 봤었죠. 이 TDNT는 총 10권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굉장히 방대한 분량의 한 질로 되어 있는데, 이것이 너무 방대하기 때문에 원래 독일어로 된 것을 제프리 브로밀리(Geoffrey W. Bromiley)라는 학자가 열 권의 핵심 내용을 단 한 권으로 축약해 놓았습니다. 파란색 표지는 열 권짜리 원서이고, 빨간색 표지는 한 권으로 압축한 축약본의 표지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연구하는 것이 참 좋습니다.
그다음에 또 다른 연구의 보조 수단으로는 윌리엄 바인(William E. Vine)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이 20세기에 아주 유명한 사전을 남겼는데, 성경에 나오는 여러 단어들의 비슷하고 같은 단어 간의 뜻 차이를 아주 섬세하게 연구한 책입니다. 이것을 보통 <바인의 신구약 단어 해설 사전(Vine's Expository Dictionary of New Testament Words)>이라고 부릅니다. 이 바인의 사전은 영어를 좀 읽을 수 있는 분들이라면 구하기가 매우 쉽고 아주 흔합니다. 이 책에는 비슷한 단어들이 어떻게 다르고 같은지를 잘 비교 설명해 놓았습니다. 제가 학생 때 이 책을 많이 이용하고 인용했습니다. 아주 유익합니다. 왜냐하면 헬라어는 우리의 모국어가 아니기 때문에 사소한 어감 차이를 우리가 쉽게 감지할 수 없는데, 그것을 다 짚어놓은 아주 유용한 교과서이자 참고서입니다.
자, 이 헬라어에서 '알다'를 뜻하는 단어가 세 개 있다고 말씀드렸는데 먼저 처음 두 개를 여러분에게 소개합니다. 하나는 '기노스코(Ginosko)'라는 동사이고, 또 하나는 '오이다(Oida)'입니다. 둘 다 우리말 성경에는 '알다', '안다'로 똑같이 번역해 놓았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말도 비슷한 단어들 사이에 미묘한 차이가 있지 않습니까? 그 차이를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기노스코'는 알다, 혹은 이제 알기 시작하다, 즉 알아가는 과정에 있다는 뜻입니다. 아직 완전한 앎에 이르지 못한 상태에서 대략적으로 아는 것을 뜻합니다. 그래서 배워서 알아가게 된다는 과정의 뜻이 있고, 누구나 다 객관적으로 아는 사실을 안다고 할 때 기노스코를 씁니다.
그러나 이와는 대조적으로, 그냥 알기 시작하는 단계를 넘어 온전히 깊이 안다는 뜻을 가진 단어가 '오이다'입니다. 오이다는 기노스코보다 훨씬 더 온전하고 명확하게 잘 아는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 우리 일흔일곱 번째 교과에서 공부한 대로, 히브리어 '야다'는 친숙히 알고 파악하며 심지어 가장 깊은 부부 관계의 성관계를 뜻하기까지 깊어진다고 말씀드렸죠. 이렇듯 온전히 깊이 안다는 뜻이 야다에 있듯이, 야다와 오이다는 발음도 아주 비슷합니다. 히브리어 야다와 헬라어 오이다(오이다의 어원인 에이도)는 언어학적으로 아주 깊은 공통 요소를 지니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히브리어나 헬라어나 거슬러 올라가면 결국 바벨탑에서 만나기 때문입니다. 그때부터 갈라져 내려온 단어들이라 어떤 단어들은 아주 비슷하게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이 오이다는 히브리어 야다의 깊은 개념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자세히 충분히 안다, 마음속으로 깊이 안다, 즉 내적이고 직관적인 지식을 뜻합니다. 반면에 기노스코는 배워서 아는 객관적 지식입니다. 내가 직접 깊이 체험하여 확실하게 아는 것은 오이다입니다. 객관적으로 "아, 아무개의 이름은 무엇이다"라고 아는 것은 누구나 다 알며 기노스코라 할 수 있지만, 그 사람이 어떤 성격과 자질과 능력을 가졌는지 깊이 파악하는 것은 오이다라고 할 수 있는 사람만 아는 것입니다. 이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말 성경에는 전부 알다로만 번역해 놓았기 때문에 그 깊은 의미를 구별하기가 힘듭니다.
자, 예를 들겠습니다. 요한복음 8장 55절을 보면 예수님이 유대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그를 알지 못하되 나는 아노니 만일 내가 알지 못한다 하면 나도 너희 같이 거짓말쟁이가 되리라 나는 그를 알고 또 그의 말씀을 지키노라"
여기서 "너희는 그를 알지 못하되"라고 할 때의 알다에는 '기노스코'가 쓰였습니다. 즉, 너희들은 하나님을 제대로 배워서 알기 시작하지도 못했다는 뜻입니다. 반면에 "나는 아노니"와 "나는 그를 알고"라고 예수님이 자신을 지칭하실 때는 '오이다'를 쓰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직관적으로 깊이, 완전히 알고 계신다는 의미입니다. 만일 내가 하나님을 알지(오이다) 못한다고 하면 나도 너희처럼 거짓말쟁이가 될 것이라 하십니다. 이 구절을 풀어서 설명하면, 너희들은 하나님을 올바르게 알아가는 단계(기노스코)조차 이르지 못했으나, 나는 하나님을 온전히 마음속 깊이 직관적으로 다 알고(오이다) 있다는 뜻입니다. 이 두 단어가 한 절에 명확히 구별되어 쓰였는데, 우리말 성경은 둘 다 '알지 못하나', '아노니'라고 똑같이 알다로 번역했기 때문에 그 어감의 차이를 우리는 느끼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간단하지만 기노스코와 오이다의 차이를 안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아직 올바로 배우지도 못하는 상태일지라도 예수님은 하나님을 깊숙이 온전히 아시는구나 하고 본문을 깊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또 요한복음 13장 7절을 보면 베드로의 발을 씻기실 때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하는 것을 네가 지금은 알지 못하나 이후에는 알리라"
여기서 "네가 지금은 알지 못하나"라고 할 때의 알다에는 '오이다'가 쓰였습니다. 즉, 내가 세족 예식을 행하는 이 깊은 대속적 영적 의미를 네가 지금은 온전히 깊이 깨닫지(오이다) 못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이후에는 알리라"고 하실 때는 '기노스코'를 쓰셨습니다. 이후에는 성령의 가르침을 통해 점차적으로 배워서 알게 될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네가 지금은 확실하게 직관적으로 다 알지 못하지만, 이후에는 과정을 거쳐 배워서 이해하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기노스코는 점차적으로 알아가는 과정을 내포합니다. 한 절에 오이다와 기노스코가 같이 쓰여 있고 우리말로는 똑같이 알다이지만, 그 앎의 성격과 과정이 다른 것입니다. 오늘 바로 이런 차이를 소개해 드리는 것입니다.
또 하나 보겠습니다. 고린도전서 8장 1절에 바울이 쓴 내용입니다.
"우상의 제물에 대하여는 우리가 다 지식이 있는 줄을 아나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
여기서 '지식'은 '그노시스(Gnosis)'인데, 이는 '기노스코'에서 파생된 명사입니다. 즉, 배워서 터득한 객관적 지식을 말하며, 아직 온전한 지식은 아니라고 볼 수 있습니다. 반면에 "줄을 아나"라고 할 때의 아나에는 '오이다'가 쓰였습니다. 이를 엄격히 구별하여 해석해 보면, 우상의 제물에 대해서 너희들이 배워서 얻은 단편적인 지식(그노시스)을 가지고 있다는 그 사실을 내가 확실하게 다 알고(오이다) 있다는 뜻입니다. 너희가 부분적인 지식을 가지고 뽐내고 있다는 사실을 나는 명확히 알지만, 그 지식은 사람을 교만하게 할 뿐이라고 짚어주는 것입니다. 오이다가 가진 확실하게 안다는 의미를 가미하여 해석하면 문맥의 뜻이 아주 선명해집니다.
히브리서 8장 11절도 보겠습니다. 새 언약을 설명하는 구절입니다.
"또 각각 자기 나라 사람과 각각 자기 형제를 가르쳐 이르기를 주를 알라 하지 아니할 것은 그들이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앎이라"
여기서 앞의 "주를 알라"고 할 때의 알라는 '기노스코'입니다. 배워서 알아가라는 뜻이죠. 반면 뒤의 "다 나를 앎이라"의 앎은 '오이다'에서 파생된 형태(에이도)입니다. 즉, 장차 새 언약의 시대가 온전히 임할 때에는 이웃에게 주님을 배워서 알아가라(기노스코)고 전도하거나 가르칠 필요가 없을 것인데, 왜냐하면 그때는 아주 작은 자부터 큰 자까지 영적으로 이미 주님을 확실하고 온전하게 다 알고(오이다) 있을 것이기 때문이라는 뜻입니다. 같은 '알다'라는 단어가 두 번 쓰였지만, 함축된 의미가 이렇듯 서로 다르기 때문에 헬라어 원문은 다른 단어를 배치한 것입니다. 참 흥미롭고 재미있습니다.
여기에 덧붙여서 '알다'를 뜻하는 동사가 하나 더 있습니다. 앞서 배운 '기노스코' 앞에 헬라어 전치사 '에피(Epi)'를 붙인 단어입니다. 에피는 '~위에', '~에 대하여'라는 강조의 뜻을 지닌 전치사입니다. 그래서 탄생한 단어가 '에피기노스코(Epiginosko)'입니다.
기노스코가 일반적으로 알아가다, 배워서 알게 되다, 혹은 단편적이고 불완전하게 알다라는 과정을 뜻한다면, 그 앞에 에피를 넣으면 뜻이 엄청나게 심화됩니다. '정확하고 자세하게 알다', '체험적으로 바르게 완전히 안다'라는 뜻이 됩니다. 거의 오이다의 경지처럼, 혹은 오이다보다도 더 확실하게 총체적으로 완전하게 집중적으로 숙지하여 아는 경지를 말할 때 에피기노스코를 씁니다.
이 단어의 실제 용례를 성경 구절에서 찾아보겠습니다.
먼저 대조를 위해 기노스코가 쓰인 마태복음 10장 26절을 봅니다.
"그런즉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은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느니라"
여기서 '알려지지'에 기노스코의 미래 수동태(그노스데세타이)가 쓰였습니다. 세상의 숨은 사실들이 일반적인 의미에서 다 대중에게 알려지게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누가복음 6장 44절도 봅니다.
"나무는 각각 그 열매로 아나니 사람이 가시나무에서 무화과를, 또는 찔레에서 포도를 따지 못하느니라"
여기서 열매로 나무를 '아나니' 역시 기노스코입니다. 열매를 보면 대충 그 나무가 사과나무인지 배나무인지 객관적으로 분별하여 알게 된다는 일반적인 의미입니다.
마태복음 1장 25절을 보면 "아들을 낳기까지 동침하지 아니하더니"가 나옵니다. 여기서 '동침하지'에 기노스코가 쓰였습니다. 우리가 지난 시간에 히브리어 '야다'가 육체적 결합인 동침을 뜻한다고 배웠는데, 헬라어 마태복음에서도 구약의 야다 개념을 그대로 가져와 기노스코를 동침하다라는 뜻으로 사용한 것입니다.
누가복음 1장 34절의 마리아 고백도 마찬가지입니다. "마리아가 천사에게 말하되 나는 남자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 여기서 '알지 못하니' 역시 기노스코입니다. 남자를 지식적으로 모른다는 게 아니라 남자를 가까이하여 잠자리를 같이한 적이 없다는 뜻으로, 구약 야다의 깊은 의미를 기노스코가 대변하고 있습니다.
이제 강조된 단어인 '에피기노스코'의 사례를 보겠습니다.
마태복음 11장 27절입니다.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
여기서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에 쓰인 알다 가 전부 '에피기노스코'입니다. 성부와 성자 사이의 그 완전하고 철저하며 명확한 상호 지식은 피조물의 일반적인 앎(기노스코) 수준이 아니라, 오직 에피기노스코의 완벽한 앎이라는 뜻입니다. 그런 완전한 앎을 가진 자가 오직 아들의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세상에 없다는 깊은 선언입니다.
로마서 1장 32절도 봅니다.
"그들이 이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한다고 하나님께서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런 일을 행하는 자들을 옳다 하느니라"
여기서 정하심을 '알고도' 역시 에피기노스코입니다. 하나님의 공의로운 법과 심판의 엄중함을 대충 아는 게 아니라, 아주 정확하고 확실하게 마음속으로 다 알면서도 고의로 악을 행하고 남까지 충동질한다는 뜻입니다. 확실하고 정확하게 안다는 의미로 에피기노스코가 배치되었습니다.
가장 아름다운 대조는 고린도전서 13장 12절에 나옵니다. 유명한 사랑장입니다.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이 한 구절에 기노스코와 에피기노스코가 다 들어있어 앎의 차이를 완벽히 보여줍니다.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라고 할 때의 아나에는 '기노스코'가 쓰였습니다. 지금 이 땅에서의 우리의 지식은 희미하고 단편적이며 불충분한 기노스코의 수준이라는 것입니다. 반면에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라고 할 때 주님이 나를 아시는 지식은 '에피기노스코'입니다. 주님은 나를 일점일획도 빠짐없이 철저하고 명확하게 다 꿰뚫어 알고 계십니다. 그리고 마침내 영광의 그때가 되면 "내가 온전히 알리라"고 선언하는데, 이때 '온전히 알리라'가 바로 '에피기노스코'입니다. 우리말 번역은 '온전히'라는 부사를 넣었지만 헬라어 원문에는 온전히라는 단어가 따로 없고, 에피기노스코라는 동사 단어 하나가 온전히 확실하게 충분히 안다는 뜻을 자체적으로 함축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이 나를 완벽히 아시는 것처럼 나도 주님을 완벽히 확실하게 알게 될 날이 온다는 장엄한 선포입니다.
베드로후서 2장 21절도 보겠습니다.
"의의 도를 안 후에 받은 거룩한 명령을 저버리는 것보다 알지 못하는 것이 도리어 그들에게 나으니라"
여기서 의의 도를 '안 후에'와 '알지 못하는' 두 군데 모두 '에피기노스코'가 쓰였습니다. 구원의 진리와 의의 도를 아주 확실하고 정확하게 온 마음으로 다 깨달아 안 다음에 고의로 타락하여 배반하는 것은, 차라리 진리를 철저하게 알지 못했던 상태보다 훨씬 더 영적으로 비참하고 나쁘다는 경고입니다. 그냥 대충 아는 기노스코가 아니라 에피기노스코로 확실히 알았음을 강조합니다.
에피기노스코의 명사형은 '에피그노시스(Epignosis)'입니다. 기노스코의 명사형이 그노시스(지식)라면, 에피기노스코의 명사형은 철저하고 확실하며 올바른 지식을 뜻하는 에피그노시스입니다.
로마서 10장 2절을 보면 바울이 유대인들을 두고 탄식합니다.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니라"
여기서 '올바른 지식'이 바로 '에피그노시스'입니다. 헬라어 원문에는 올바른이라는 형용사가 따로 없고, 에피그노시스라는 명사 자체가 지식 앞에 에피가 붙어 '확실하고 올바른 참된 지식'이라는 뜻을 냅니다. 유대인들이 율법적 열성은 대단했으나 하나님을 아는 올바른 지식(에피그노시스)을 결여했기에 그 열심이 도리어 해가 되었다는 분석입니다.
히브리서 10장 26절도 봅니다.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범한즉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
여기서 '진리를 아는 지식'의 지식이 역시 '에피그노시스'입니다. 진리를 대충 어설프게 아는 게 아니라 확실하고 정확한 참지식을 다 전수받아 확신해 놓고도, 그것을 고의로 거절하고 짓밟으며 죄를 범하면 다시는 속죄할 방법이 없다는 준엄한 말씀입니다.
에베소서 1장 17절에서 바울의 중보기도가 나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여기서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자리에 명사 '에피그노시스'가 쓰였습니다. 성도들이 하나님에 대한 단편적 지식을 넘어, 하나님을 확실하고 정확하게 대면하여 아는 참된 지식(에피그노시스)에 이르기를 간절히 기도하는 것입니다.
골로새서 2장 2절에서도 이 지식의 풍성함을 노래합니다.
"이는 그들로 마음에 위안을 받고 사랑 안에서 연합하여 확실한 이해의 모든 풍성함과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깨닫게 하려 함이니"
여기서 '확실한 이해'라고 번역된 단어가 역시 '에피그노시스'입니다. 에피가 지닌 명확하고 올바른 성격을 살려 확실한 이해라고 아주 번역을 잘해 놓았습니다.
오늘의 공부를 요약하겠습니다.
일반적으로 사물을 안다고 할 때 널리 쓰이는 기본 단어는 '기노스코'입니다. "나 그 사람 알아", 혹은 "나 그 건물이 어디 있는지 알아"라고 철저함이나 깊이를 굳이 강조할 필요가 없을 때 편안하게 쓰는 단어입니다. 신약성경에 '알다'와 관련하여 기노스코, 오이다, 에피기노스코라는 세 단어가 배치되어 있습니다. 사실 일상 대화나 문맥에 따라서 말하는 이가 강조를 위해 혼용하기도 하므로 세 단어의 경계를 무 자르듯 완벽히 엄격하게 구분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대충 아는 상태에서도 강조를 위해 에피기노스코를 쓸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어원의 모양이 다르듯이 중심적인 성격의 차이는 존재합니다.
그 앎의 본질적 차이를 크게 분류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목표는 이 세상에서 그저 잠시 건강하고 부유하게 권세를 부리며 살아가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이 세상은 잠깐 지나가는 나그네 길인데, 거기서 잠시 무엇을 쥐어본들 영원한 관점에서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것은 우리의 궁극적 목표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진정한 목표는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에 관하여 확실하고 올바르게 아는 것, 바로 이 앎에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올바로 알아야 그분을 온전히 나의 구주로 받아들이고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세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주님을 아는 우리의 지식은 그저 객관적인 사실만을 수집하여 아는 '기노스코'의 단계에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아, 역사적으로 예수라는 성인이 계셨고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대"라는 지식은 세상 사람들도 다 아는 객관적 사실이자 기노스코의 수준입니다. 거기서 멈추면 아무런 구원의 능력이 없습니다. 우리는 그 객관적 사실을 넘어 "그 예수님이 바로 나를 살리시려고 나의 죄를 대신해 십자가에서 피 흘려 돌아가신 나의 구주이시다"라는 사실을 영혼 깊이 받아들이고 확신하는 '오이다'의 단계로 전진해야 합니다. 나아가 삶의 매 순간마다 그분을 인격적으로 체험하며 주님의 뜻을 정확하고 올바르게 분별하여 내 모든 삶을 주님께 온전히 헌신할 수 있는 철저하고 확신에 찬 '에피기노스코'의 경지까지 자라나야 마땅합니다.
이 세 단어의 관계를 벤 다이어그램 같은 그림으로 이해해 보면 좋습니다. 기노스코(성경에 222회)와 그 명사형 그노시스(29회), 오이다(280회), 그리고 에피기노스코(44회)와 그 명사형 에피그노시스(20회)는 각각 완전히 독립된 영역이 아닙니다. 이 세 단어는 서로 중복되고 겹쳐지는 공통 분모의 영역들을 널찍하게 가지고 있습니다. 엄격하게 칼로 자르듯 분리되는 단어가 아니라, 문맥과 저자의 수사학적 강조점에 따라 앎의 색채가 다채롭게 변주되는 프리즘과 같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굳이 신학자처럼 헬라어 원어를 다 유창하게 알아야 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그러나 성경을 기록한 원어인 헬라어의 동사들이 머금고 있는 의미의 Prism, 즉 그 다양한 색채의 스펙트럼을 조금이나마 이해하는 것은 성경 본문을 피상적으로 읽지 않고 훨씬 더 깊고 입체적으로 이해하는 데 커다란 영적 도움이 됩니다.
앞서 본문 요한복음에서 똑같이 우리말로 '알다'라고 번역되어 있을지라도, 앞에는 기노스코를 배치하고 뒤에는 오이다를 배치하여 인간의 불완전한 지식과 예수님의 완전한 신적 지식을 극적으로 대조하려 했던 성경 저자들의 심오한 필치를 원어의 뉘앙스를 통해 확인할 수 있지 않았습니까? 우리 성도님들께서 이러한 성경 어휘의 깊은 미를 조금이라도 깨닫고 누리시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오늘 헬라어로 알다를 뜻하는 세 동사의 뜻을 명쾌하게 설명해 드렸습니다. 다음 시간에 또 다른 귀한 성경의 어휘를 가지고 여러분을 찾아뵙겠습니다. 그때까지 주님의 은혜 안에서 평안히 계십시오. 안녕히 계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