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와 줄래? 버드. 우린 서로에게 필요한 인간일지도 몰라.” 105
“버드, 공포심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그 대상을 정확히 한정함으로써 공포심을 고립시켜야만 하는 거야” 143
“그렇지, 버드. 넌 이번 일이 시작되고부터 아직 아무에게서도 위로를 받지 못했었잖아? 그건 좋지 않아, 버드. 이럴 때, 한번쯤 과도할 만큼 위로를 받아두지 않으면 용맹심을 발휘해서 혼돈으로부터 벗어나야만 할 때, 텅 빈 껍데기만 남아 있게 되거든.” 149
“언젠가 나간다 하더라도 아직은 나가지 마, 버드.” 222
첫댓글 ‘로캉탱의 육아일기’라고 해두어도 좋을 이 작품에서 눈에 띄는 것은, (일본 근대 사소설의 전통적 요소라 할 수 있는) 소유할 수 없기에 극진히 욕망할 수 있는 여성성과, 일체의 고난과 불행으로부터의 구원과 위로를 약속/선사하는 종교적인 상징으로서의 여성성이 습합하는 지점에서 발생하는 ‘히미코’의 모습이다. 그녀는 한 마디로, 聖과 性의 일치라고 하는 일본 특유의 정신세계의 단편인 셈인데, ‘성(性)의 전문가/달인’이 聖人이 되고야마는 이 작품 속 풍경을 응시하고 있노라면, 일본 문학의 과거와 미래가 강에 비친 천개의 달과 같이 담겨있음을 알 수 있다.
몹시 ‘일본적’인 이 작품이 획득한 기묘한 보편성을 생각해보면, 혼종성으로서의 근대성이 일본의 어떠함과 언제나처럼 말끔히 맞아 떨어지는 순간 증명되는 그네들의 ‘무정체성의 정체성’을 다시 한 번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은 지금-이곳의 아무 것도 아님이 됨을 선택하여 지금-이곳의 전부가 되어버린 것! 이것이 살신성인/멸사봉공의 일단을 품고 있기도 하지만, 동시에, '아서라 세상사'에 지나지 않는 그 흔한 '유행'의 알짬이기도 함을 어찌 잊을 수 있을까. 세속의 표피, 특히 표피 그 자체로서 본질을 드러내는 근대적 세속의 표피가 형이상학으로 승화하는 과정은 서양의 모모한 국가보다 차라리 일본을 고향으로 삼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