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한산이씨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후손들 원문보기 글쓴이: 기라성
임청각은 우리나라에서 현존하는 살림집 중에서 가장 큰 규모로 500여년 간의 유구한 역사를 지닌 안동 고성이씨의 대종택이다. 세칭 99칸 기와집으로 알려진 이 집은 안채, 중채, 사랑채, 사당, 행랑채는 물론 아담한 별당(君子亭 ..보물 제182호)과 정원까지 조성된 전형적인 양반주택이다. 일제시대 중앙선 철도부설로 50여칸의 행랑채와 부속건물이 철거당하였다.
임금만이 100칸짜리 집을 지을 수 있었기에, 민간 가옥은 99칸을 최대로 지을 수있었다. 임청각도 원래는 99칸이었다. 1칸이란, 방이 1개 있다는 말이 아니라 기둥이 4개 있으면, 그 기둥이 이루는 사각형이 한 칸이라는 말이다. 그러니 99칸이라면 요즈음으로 치면 약 176평이 된다는 의미이다.
조선시절 세종 때 영의정을 지낸 이원(李原)의 여섯째 아들인 영산현감 이증(李增)이 이곳의 아름다움에 매료되어 여기에 자리를 잡음으로써 입향조가 되었다. 그리고 이증의 셋째 아들로 중종시절 형조좌랑을 지낸 이명(李? )이 지은정자가 보물 제182호로 지정된 군자정이다.
임청각(임청각)이라는 당호는 도연명(陶淵明)의 귀거래사(歸去來辭) 구절에서 따온 것인데, " 동쪽 언덕에 올라 길게 휘파람 불고, 맑은 시냇가에서 詩를 짓기도 하노라 "라는 구절에서 임(臨)자와 청(淸)자를 취한것이다. 8세기 경 詩, 書, 畵, 樂에 일가를 이룬 허주 이종악(虛舟 李宗岳. 1726~1773)이 임청각의 주인이었고, 특히 한말 둑립운동가 9분이 이 집에서 출생한 충절의 집이다. 특히 석주 이상룡(석주 이상룡)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령(國務領 .. 지금의 국가원수)을 역임한 분으로 그는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하기 위하여 이 집을 팔았다.
임청각(臨淸閣)이라는 당호는 도연명(陶淵明)이 지은 귀거래사(歸去來辭)의 " 맑은 물가에서 詩를 지으리 "라는 귀절에서 취한 것이다. 그 전문은....
富貴非吾願 帝鄕不可期 懷良辰以孤往 或植杖而 登東 而舒嘯 臨淸流而賦詩 饒乘化以歸盡 樂夫天命復奚疑
부귀는 내가 원하는 바가 아니며, 극락왕생도 바라지 않네 좋을 때 홀로 거닐다 때로는 지팡이 세워두고 김도 매고 동쪽 언덕에 올라 길게 휘파람 불고 맑은 시냇가에서 시를 지으리 살다 때가 되면 그 곳으로 돌아가 기꺼이 천명을 받으리라
집을 짓는데 있어서 그 평면의 구성을보면 일, 월, 길(日,月,吉) 등의 글자를 취하여 지으면 좋다고 하는 풍수지리의 이론이 있는데, 임청각의 평면구성을 보면 日, 月 그리고 그 합형(合形)인 용(用)자형으로 되어 있다. 이 일형과 월형은 하늘의 日月을 지상으로 불러서, 천지의 정기를 화합시켜 生氣를 받으려는 의미를 가진다고 한다.
임청각은 영남산 기슭의 비탈진 경사면을 이용하여 계단식으로 기단을 쌓아 안채, 중채, 사랑채, 행랑채 등의 건물을 배치하여 채광효과를 높였으며, 각 건물 사이에는 크고 작은 5개의 마당을 두어 공간의 활용도를 높였다. 대문을 열고 들어서면 좌측에 정침(正寢)이 있고, 그 우측에는 담장을 사이에 두고 君子亭이 위치하며, 군자정의 바로 옆에는 方形의 연못이 있고, 그 연못 옆 언덕 위에는 사당이 자리잡고 있다. 정침이란? 거처하는 곳이 아니라 주로 일을 보는 곳으로 사용하는 몸채의 방을 말한다.
양반집인 임청각은 살림채, 사당, 별당 등으로 구분되고, 살림채는 또 안채, 중채, 사랑채, 행랑채로 나뉘어지는데, 이 복잡한 구성과 기능을 유기적으로 연결시키는 마당의 운용이 탁월하다. 다른 대갓집에서 느끼던 숨막힐 듯한 답답함이 없다.
안 마당, 사랑채 마당, 행랑채 마당, 대문 진입마당 그리고 헛간 마당 등 다섯이다. 이 마당들은 각기 자기 기능에 알맞은 크기를 가졌을 뿐만 아니라 레벨을 몇 단으로 나누어서 대문진입 마당과 사랑채 마당 사이에는 2.5m정도의 차이가 나고 있다.
이로 인하여 외용상의 권위를 포기하지 않으면서 한옥의 온화한 정취도 함께 살려내는데 성공하였다. 같은 대갓집이면서도 경주 양동마을의 여강이씨 향단이 사랑채, 안채, 행랑채를 한 몸체로 엮어서 여백의 묘를 살려주지 못 한 것을 생각할 때 임청각의 마당 운용은 더욱 돋보이는 것이다.
도깨비가 세운 집
우리나라에서 가장오래된 건물이 봉정사 극락전이라면, 임청각은 안동에서 가장 오래된 민가(民家)이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살림집이라면 고려말 최영장군이 태어난 "맹사성 고택"이다.
최영장군의 생가. 후일 맹사성이 최영의 사위가 되고, 맹사성 은퇴후 이곳에서 살고 학문을 연마하여 맹사성 고택이라고 부른다.
안동댐 진입로 입구 왼쪽편에 "용"자형 평면을 가진 웅장한 건물이 임청각이다. 영남산 동쪽 기슭에 자리한 임청각은 낙동강이 안고 흘러 문자 그대로 배산임수(背山臨水)하고, 그 옆에 반변천(半邊川)이 合水되며, 동쪽 안대(眼帶)에는 무협(巫狹)이 정답고 남쪽으로 강 건너 저편에는 갈래당 문필봉과 낙타산 연봉이 둘러 그 명미하고 수려한 풍광은 안동팔경의 하나로 임청각고시수(臨淸閣古詩愁)라고 하였다. 건물의 규모가 워낙 방대하여 도깨비가 세운 집이다..라는 전설이 내려 오고 있다. 즉, 한달 만에 낙동강 안(岸)에 큰 집이 우뚝서자 사람들은 도깨비가 하룻만에 지은 집이라고 한 것이다.
가장 오래된 民家
건축 전문가들에 의하면 임청각은 임진왜란 이전에 지은 집이다. 임진왜란 이전에 지은 집과 이후에 지은 집은 차이가 있다고 한다. 우선 건축자재인 목재의 질이 다르다. 임란 이전에는 시간을 두고 충분히 말린 목재를 사용했고, 이후에는 사회가 어수선해서 대충대충 말린 목재를 사용한 경향이 있었다.
또 하나는 건축 기술자의 문제이다. 임란 이후에는 목수와 도공을 비롯한 기술자들이 귀했다. 기술자들을 왜군이 포로로 많이 잡아가서 이었다. 임란 이후의 집들은 이전에 비하여 기술이 떨어진다. 기술자도 부족하고, 전후 복구의 어수선한 상황이라서 빨리빨리 대충대충 지을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임청각은 임진왜란 이전에 지은 집이라 목재도 제대로 말린 것을 사용했고, 일급 기술자들이 시공했다는 측면에서 고건축 전문가들의 주목을 받고 있다. 또한 이색적인 부분은 단청이다. 군자정의 천장을 자세히 살펴보면 희미하게 단청의 흔적이 남아있다. 조선시대에 민가에서 단청은 금지된 것으로 알려졌다. 예외적으로 임란 이전에는 민가 주택에도 일시적으로 단청이 유행하였던 적이 있었다고 한다. 그때 지은 것이 임청각의 군자정이라는 것이다. 우리나라 민가에서 단청의 흔적이 남아있는 사례는 군자정이 유일하다.
最古, 最大, 最異의 집
이 옛집은 최고, 최대일뿐만 아니라 전통가옥에 기생한 풍수문화를 간직한 문화재적 가치 또한 괄목할 만하다. 주택 풍수에서 세 명의 정승을 낳을 뿐 아니라, 죽어가는 사람을 옮겨 누이면 목숨이 연장되는 연수(延壽)가 예언된 가상(家相)으로 소문난 집이다. 그래서 이 집에는 三相(영의정,우의정,좌의정)을 낳는다는 영실(靈室)이 한구석에 있고, 안마당 한쪽에 불사방(不死房)이 있다. 이 집은 용(用)자형으로 사방이 건물로 돼 있으며, 안에 4개의 내정(內庭)이 들어 있다. 주택 풍수에 일(日)과 월(月)이 융합되면 음양합일로 길(吉)하다 하여 이를 합쳐 불가분하게 한 글자형이 용(用)자형인 것이다.
이 집에는 퇴도문(退盜門)이라고 하여 다락문 아래로 문짝이 없는 문이 나있다. "장자(莊子)"에 이르듯이 큰 도둑이 들면 잡을 생각하지 말고, 도둑이 든 곳간문을 잠가 버리면 된다는 이치를 활용한 것이다. 사방에 門이 없고 오로지 이 좁은 문 하나만 틔어 있는지라 들어갔다가는 틀림없이 갇히게 될 것이라는 의구심으로 도둑을 물러가게 한다고 해서 퇴도문이다. 최고, 최대에 최이(最異)가 더한 집이다.
日帝에 의해 갈라진 임청각
원래는 99간 집으로, 양반 남자들의 공간인 사랑채, 양반 여자들의 공간인 안채, 노비 여자들의 공간인 안 행랑채, 노비 남자들의 공간인 바깥 행랑채 등으로 건물들이 남녀별, 계층별로 뚜렷한 구분을 이루고 있다. 또한 안채와 바깥채 기단의 높이 차이가 2m나 되어 건물의 위계 질서를 매우 엄격하게 하고 있다.
하지만 지금은 일제의 중국 침략이 본격화되었던 1930년대 후반, 그들이 태백산맥 인근의 지하자원과 삼림자원을 반출하여 대륙으로 수송하기 위한 목적으로 청량리와 경주를 연결하는 중앙선 철로(1936~1942)를 임청각을 통과하게 건설하면서 파괴되어 50여 간 밖에 남아 있지 않는다.
그나마 남아 있는 건물도 채 3m 정도의 간격 밖에 두지 않고 집 앞을 막고 선 대문보다 더 높은 중앙선 철로의 방음벽에 갇혀 쇠락해 가는 형편이다.
그런데 안동의 지형도를 펼쳐 중앙선 철도 노선을 자세히 살펴보면 북후면의 옹천역부터는 누가 보아도 국도 5호선을 따라 안동역으로 거의 직선에 가깝게 路線을 내는 것이 그 길이가 짧아 공사비용 등 여러 측면에서 훨씬 유리할 것 같은데도 굳이 우회하여 임청각 앞으로 나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일제가 우리의 문화를 말살하고 그들의 눈에 가시처럼 여겨졌을 독립운동가 이상룡의 생가를 파괴하기 위하여 일부러 신세동 7층 전탑과 임청각을 통과하도록 설계한 것이 분명하다. 일제는 이렇게 함으로써 山川의 정기를 끊기 위한 쇠말뚝보다 몇 백배 더 강한 안동의 주산인 영남산의 맥을 철도를 낸다는 구실로 쉽게 끊을 수 있어 이곳에서 다시는 독립운동가, 항일 운동가가 배출되니 않을 것이라는 메시지를 심어이곳 백성들의 민족정신을 말살하기 위한 다른 의도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1763년, 임청각의 11대 주인이었던 허주 이종악(虛舟 李宗岳)이 그린 임청각 모습. 화살표가 가리키는 것은 국보로 지정된 신세동 7층전탑이다.
허주 이종악 虛舟 李宗岳
임청각의 11대 종손이었던 허주 이종악 (虛舟 李宗岳. 1726~1773) ... 그의 예술적 기질은 "허주부군산수유첩(허주부군산수유첩)"에서 여실히 볼 수있다. 250년 전인 1764년 4월 화창한 봄날 허주 이종악은 자신이 살고 있는 임청각 앞에서 뜻이 맞는 집안 친척, 지인들과 함께 배를 띄웠다. 뱃놀이를 하기 위해서...
그의 호(號)도 허주(虛舟)라고 했던 것처럼, 허주 이종악은 평소 뱃놀이를 즐겼다. 그 코스는 임청각에서 시작하여 낙산(樂山)의 선찰(禪刹)에 이르는 왕복 60km에 달하는 반변천 주변의 절경들이었고, 뱃놀이를하면서 마음먹고 그린 산수화첩이 바로 허주부군산수유첩이다.
이 산수유첩은 그동안 묻혀 있다가 2003년에야 비로소 세상에 공개되었다. 이를 보면 허주 이종악은 반변천 주변의 아름다운 풍경 12곳을 배로 통과하면서 그때마다 그 장면들을 그림으로 남겼던 것이다. 이종악이 船遊를 시작한 날자는 1763년 4월 4일이며, 이로부터 5일이 지난 4월 8일 반구정(伴鷗亭)에서 선유를 마감하였다.
따라서 이 화첩에는 5일간의 여정이 담겨져 있다고 할 수 있다. 화첩은 12명승을 그린 그림부분과 화첩의 말미에 첨부된 글씨부분으로 되어 있다. 각 그림에서 돛의 모양을 보면 상하행 여부를 쉽게 가늠할 수가 있다.
허주 이종악의 오벽 (五癖) 허주 이종악이 살았던 18세기 중반은 노론정권 시절이었다. 당시 경상도 南人들은 철저하게 정권에서 배제되었던 상황에서 南人 집안이었던 허주 이종악은 그 좌절과 울분을 오벽으로 승화시켰던 것이다. 허주의 오벽(五癖)은 고서벽(古書癖), 탄금벽(彈琴癖), 화훼벽(花卉癖), 서화벽(書畵癖) 그리고 주유벽(周遊癖)을 이르는 말이다.
영남 제일의 주택 주인이었던 허주 이종악은 책 모으기를 좋아 하였고, 거문고의 명인이기도 하였다. 자신이 애장하던 거문고 뒷면에다가 서금배(書琴背)를 써 놓았는데, 거기에는 " 네가 없었던들 나는 벌써 속물이 되었겠지... 내 마음을 알아 줄 이 네가 아니면 그 누구리 !!"라고 읊고 있다. 그만큼 이종악의 거문고 실력은 안동 일대에서 유명하였다. 또한 그는 꽃을 좋아 하였고, 그림과 글씨는 모으는 것을 좋아 하였다.
여기까지는 다른 사람도 할 수 있는 취미이지만, 다섯번 째 周遊癖은 다른 사람이 따라 히기 힘든 그만의 독보적인 취미이었다. 임청각의 위치는 낙동강과 반변천의 물줄기가 합해지는 지점이었다.그래서 집 앞에 바로 배를 듸울 수 있는 천혜의 조건을 갖출 수 있었다.
석주 이상룡 石州 李相龍
임청각이 유명한 것은 현존하는 민간 가옥 중 가장 규모가 큰 것임에도 있지만, 더더욱 돋보이게 하는것은 집의 규모때문이 아니라 바로 일제시대 때 수 많은 독립운동가를 배출한 집이기 때문일 것이다. 자그만치 아홉분의 독립운동가가 배출되었는데, 그 중에서도 서로군정서 독판 (西路軍政署 督瓣), 상해 임시정부의 국무령(國務領 ..지금의 국무총리) 등을 역임한 석주 이상룡의 활약이 단연 두드러졌으며, 이 집도 그때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하기 위하여 그가 매각하였다.
이상룡과 독립운동
이상룡이 임청각에서 서책을 벗삼아 지내던 청년기는 그의 일생에서 가장 순탄했던 시기이었다. 그가 독립운동에 처음 투신한 것은 1894년 청일전쟁이 일어난 이후 일어난 의병투쟁 때이었다. 그는한때 가야산을 근거지로 하여 대규모 항일전을 펼치고자, 거금 1만5천원을 군자금으로 투입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 계획은 실패로 끝났고 그로서는 처음으로 깊은 좌절을 맛보게 되었다.
무장투쟁의 한계를 절감한 그는 이후 새로운 방향으로 눈을 돌렸다. 계몽주의자로의 변신이 그것이었다. 때마침 유인식, 김동삼과 같은 안동지역 혁신 인사들이 협동학교를 세워 근대교육을통한 인재 양성에 힘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는 이러한 계몽 운동에 적극 동참하였다. 이후 그는 대한협회 안동지회를 설립, 지회장으로서 애국 강연이나 회보 발간 등 을 통한 자강 운동을 활발하게 펴쳐 나갔다.
그렇지만 1910년의 경술국치는 민족적 양심을 수호하려 노력한 그에게는 감당하기 어려운 충격이었다. 이를 계기로 그는 모든 기득권을 포기하고 조국 광복의 일념으로 國外 亡命을 결행하게 되었다. 34일간에 걸친 2,500리의 길고 긴 여정! 경북 안동에서 압록강 너머 서간도에 이르는 망명길은 참으로 형극의 길이자 고행의 연속이었다. 이상룡은 나라가 망한 경술년 이듬해인 1911년 설을 쇠자마자 장도에 올랐다. 떠나기 전날인 2우러2일 마을 잔치를 열어 친지들에게 작별을 고하고, 출발 당일 새벽에는 조상에게도 하직 인사를 드렸다. 그의 동생과 아들, 조카들을 미롯한 문중 인사들 그리고 그의 매부와 사위도 그를 따랐다. 추풍령과 서울을 거쳐 신의주에 당도한일행은 2월25일 마침내 압록강을 건넜다. 압록강을 건너면서 나라 잃은 설움, 망명길의 고통, 그리고 조국 광복을 위한 일념을 담아 詩 한 수를 읇조렸다.
삭풍은 칼보다 날카로와 나의 살을 에이는데 살은 깎이어도 오히려 참을만 하고 창자는 끊어져도 차라리 슬프지 않다. 이미 내 집과 토지 다 빼앗기고 내 처자도 넘보는데 이 머리 잘릴지언정 무릎 꿇어 종이 될 수는 없다.
서간도에서의 이동 여정은 참으로 혹독했다. 실을 도려내는 듯한 모진 추위와 극심한 굶주림이 가장 큰고통이었다. 만주벌판을 거세게 몰아치는 눈보라에 갇혀 마차 안에서 뜬 눈으로 밤을 지새는가 하면, 식량이 없어 끼니를 거르는 일이 다반사이었다. 이러한 고통 속에서 옛 고구려인의 기상을 담고 흐르는 혼강(渾江)을 따라 계속해서 북상한 끝에 3월7일 드디어 회인현(懷仁縣) 항도촌(恒道村)에 도착하게 되었다.
이상룡의 망명에는 처남 김대락(金大洛)을 최고 어른으로 한 의성김씨 문중, 황호(黃濩)를 원로로하는 평해 사동리의 평해황씨 문중 인사들도 함께 하였다. 이들의 일행은 수십 명에 달했다. 일행 가운데는 만삭이던 김대락의 손부와 손녀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들의 망명 의지가 어떠했는가를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이상룡은 망명지 서간도에서 한인사회를 이끌면서 "독립전쟁론"을 실천하기 위한 갖가지 노력을 기울였다. 독립전쟁론이란 ? 우리 민족이 힘을 길러 일제와 전면전을 벌여 승리할 때에만 독립이 실현된다는 이론이었다. 해외 각지에 독립운동의 근거지를 건설하는 일, 한인사회를 영도할 자치기구를 조직하는 일, 언론과 교육을 통해 항일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일, 그리고 독립전쟁을 선도할 정예와 사관을 양성하는 일 등이 이를 위한 주요 과업으로 설정되었다.
이상룡도 동지들과 더불어 경학사(耕學社)라는 자치단체를 조직하고, 신흥학교(신흥학교)의 설립을 통해 독립군 간부를 양성하고자 전력을 기울였다. 1919년 3.1운동을 계기로 만주에서도 마침내 독립전쟁이 활발하게 펼쳐졌다. 그는 이때 서간도 독립군의 영수가 되어 무장 항일전쟁을 이끌었다.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의 총수인 독판(督瓣)에 임명된 것이다. 이상룡의 진면목은 무엇보다도 복잡다기한 독립운동 세력 간의 대동 단결을 위해 부단히 노력한 점에 있다. 그는 1920년 초, 북경에서 조직된 군사통일축성회에 참가하여 박용만 등과 함께 통의부(統義府)를 조직했으며, 23년의 국미대표회의에서도 어려운 운동 노선의 통합에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이러한 노력 덕분에 그는 대통령 이승만이 탄핵당한 1925년 9월 이후 일시적으로 어랴움에 처한 임시정부의 최고 책임자로 선임될 수있었다. 내각책임제 형태인 국무령(國務令)제 하의 초대 국무령에 취임한 것이다. 그렇지만 여러가지 난관에 봉착해 있던 임시정부라는 제한된 공간 속에서, 자신의 이상과 포부를 실현하기에는 수많은 문제들이 산적해 ㅣㅆ었다. 이러한 난관들을 혼자의 힘으로 극복하기 아렵다고 판단한 그는 주저없이 임시정부의 국무령직을 사임하고 만주로 되돌아 갔다.
만주로 돌아간 이후에도 그는 그곳에서 다양한 독립운동 세력을 하나로 통합하는 일에 전심전력을 다하였다. 그러나 지역과 인물에 따라 독립운동의 조건과 노선이 서로 다른 상황에서 전선의 통합과 통일은 실현이 불가능한 과제이었다. 그는 이러한 문제들의 해소하는 과제를 未完으로 남겨둔 채 결국 74세를 일기로 1932년 5월 12일 지린성 서란현 소성자에서 파란만장한 일생을 마감하였다.
석주 이상룡, 임청각을 팔아 독립운동
상해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을 지낸 이상룡은 고성이씨 임청각파의 17대 종손이며, 임청각의 소유주이었다. 누구보다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난 이상룡은 경제적 풍요와 종손으로의 권위를 보장받은 사람이었지만, 그는 고난의 길을 자처하였고, 일제의 국권 침탈에 대항하여 독립운동에 일생을 바친 실천적 지성이었다. 이곳 임청각도 주인과 운명을 같이 하여 하나의 유한공간으로만 머물지 않고, 우리의 독립운동사 뒤편에 새로운 이력 하나를 만들어 냈다.
1910년 치욕의 한일합병이 강행되었다. 비보를 접한 이상룡은 간도로 망명을 결심하고 조상의 사당에 나아가 사유를 고하였다. 분주한 망명이었지만, 그는 집안의 종들에게는 보상금을 지급하고 방면하였다. 안동 유가에서는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런 후 삭풍이 몰아치던 1911년 1월 5일 이상룡은 가족을 데리고 비장한 망명길에 오른다. " 공자, 맹자는 시렁 위에 얹어 두고 나라를 되찾은 뒤에 읽어도 늦지 않다 "는 것이 망명의 변이었고, 나라를 되찾기 전에는 돌아오지않겠다는 각오이었다.
이로부터 2년이 지난 1913년 이상룡의 외아들 이준형이 갑자기 귀국하였다. 임청각을 매매하기위해서였다.그는 이청각을팔아 독립운동 자금으로 충당하려 했던 것이다. 사진의 매매증서에 따르면 임청각이 매매된 날짜는 1913년 6월21일이고, 매매대금은 900원이었다. 한편 임청각에는 임청각 매매증서와 같은 날짜에 작성된 문서인 "택지급산판매매증서"가 있다. 이 문서는 임청각의 택지와 임청각 주변의 산판을 매매한 것인데, 매매대금은 100원이었다.
결국 이상룡은 임청각과 주변의 택지와 산판을 1,000원에 매매하여 독립자금으로 활용했던 것이다. 이상룡은 민족과 집안의 갈림길에서 민족과 나라를 택하였고, 그러한 의지는 임청각의 매도로 구현되었다. 비록 이상룡은 1932년 생을 마감함으로써 조국의 독립을 보지는 못하였지만, 이러한 그의 정신은 독립운동에 활력을 주기에 충분하였다.
임청각의 우물방
일제시대, 무라야마 지준(春山智順)이 지은 '조선의 풍수"에 임청각이 소개되어 있다. 3명이 재상을배출하는 영실(靈室)이 있고, 도적의 넋을 잃게 하는 남문(일명 退盜門)이 있고, 不死의 칸(間)이 있는 집으로 소개한 것이다. 영실이라면 신령한 방이다. 다른 말로 산실(産室)이라고 한다.
기운이 특별하기 때문에 이 방에서 신혼부부가 합궁을 해서 아이를 출산하면 비범한 인물이 나온다는 것이다. 경주 양동마을의 서백당에도 산실이 있고, 임청각 바로 곁의 의성김씨 대종택에도 산실이 있다. 이 방에는 외부인이 함부로 출입할 수 없다. 며느리들이 주로 사용한다.
임청각의 후손들은 세 명의 재상이 배출된다는 이 산실을 "우물방"이라고 부른다. 산실 바로 2m 앞 정도 지점에 우물이 있는 탓이다. 풍수적 관점에서 본다면 이 우물은 혈구(穴口)이다. 전설에 의하면 이 우물의 정기를 받으면 인물이 나온다는 것이다. 뒷산에서 내려온 지맥은 보통 혈구 앞에서 멈추기 마련이다. 지기(地氣)가 혈구를 지나칠 수 없으므로, 혈구 앞에는 지기가 뭉쳐져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영기가 어려 있는 터는 거의 그 앞에 우물이나 작은 연못과 혈구가 배치되기 마련이다.
우물방이 배출한 인물
임청각의 우물방은 혈구 코 앞에 자리잡고 있어 교과서적인 명당이다. 그렇다면 과연 이 우물방에서 인물이 태어났는가? 약봉 서성(藥峯 徐筬. 1558~1631)과 매산 류후조(梅山 柳厚祚. 1798~1876), 그리고 석주 이상룡(石州 李相龍. 1858~1932)을 포함한 아홉 명의 독립유공자를 꼽을 수있다.
임진왜란 때 宣祖를 업고 피난 간 서성과 흥선대우너군 집정 시 폐정 개혁의 선봉에 섰던 류후조는 모두 임청각의 외손들이었다. 이들의 어머니가 고성이씨로 친정인 우물방에 와서 해산을 하였으니, 우물방 영천(靈泉)의 정기를 받은 셈이다.
우물방은 근대에 들어와서 석주 이상룡을 비롯한 독립운동가 아홉 명을 낳은 방으로 더 유명하다. 명실상부한 독립운동가의 산실이다. 신돌석장군 휘하에서 의병운동을 시작한 이봉희(李鳳羲.1868~1937), 만주 서로군정서에서 활약한 이승화(李承和.1876~1927), 만주 유하현 경학사에서 활동하다가 1942년 일제의 팽창에 실망하여 자결한 이준형(李濬衡. 1875~1942), 신흥학교 군관 양성자금 조달과 비밀결사 신흥사에서 활약한 이형국(李衡國.1883~1931), 서로군정서 특파원을 지낸 이운형(李雲衡. 1892~1972), 재만 한족노동당 중앙집행위원을 지낸 이광민(李光民.1895~1946), 압록강 연안 일본 경찰 주재소와 세관을 무장 공격한 이병화(李炳華.1906~1952)가 모두 임청각의 후손들로서 우물방의 이 정기를 받고 독립운동에 뛰어든 사람들이다.
이 우물방에서 태어난다고 하는 세 사람의 정승 ... 이미 두 사람 즉, 좌의정 매산 류후조와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 석주 이상룡은 이미 태어났는데, 아직 한 사람이 더 태어날 수있다는 말이 전해온다. 그러나 영남산의 치명적인 훼손, 임청각의 국가 헌납 등으로 이제 더 이상 우물방에서 재상이 태어날 가능성을 희박하다고 해야 할듯...
사당 祠堂
군자정 옆 방지(方池)를 지나면 정면 3칸, 측면 2칸 크기의 사당이 언덕 위에 자리잡고 있다. 원래 이 사당에는 불처뉘와 더불어 4대 조상의 위패를 함께 봉안하였으나, 석주 이상룡이 한일합밥 이후 독립운동을 하기위하여 만주로 떠날 때 위패를 모두 장주(藏主)하여 현재는 봉안된 신위가 없다.
임청각의 여러 건물 중에서 군자정(君子亭)은 1963년 보물 제182호로 지정되었다. 이 건물은 조선시대 세종시절에 좌의정을 지낸 이원(李原. 1368~1429)의 여섰째 아들 영산현감 이증(李增)이 안동지방의 山水의 아름다움을 좋아하여 정착하였는데, 그의 셋째 아들 형조좌랑 "이명"이 세운 별당형 정자이다.
君子亭
정자를 군자정으로 이름지은 것은 후일의 일기는 하지만 아무래도 이종악(李宗岳.. 임청각의 11대 종손)이 주도한 문회계(文會契)에서 밝힌 바 있는, 논어의 " 君子란 글로써 친구와 만나고, 친구는 인(仁)으로써 서로를 북돋운다 ... 君子 以文會友 以友 輔仁 "이란 구절과 관계가 있는 것 같다. 이글 중 문회(文會)와 보인(輔仁)이라는 명제는 군자정의 역사적 기능과 이 집안 사람들의 행동양식에 감추어진 이정표로 볼 수 있다.
군자정의 평면은 "丁"자형의 누각으로 된 팔작지붕의 별당 건물로, 대청은 정면 2칸 측면 2칸이다. 남향으로 세웠고 서쪽에 접속하여 "丁"자형으로 온돌방을 두었는데, 그 내부는 4개의 방으로 구분되어 있다. 건물 주위에는 쪽마루를 돌려서 난간을 세웠고, 두 군데의 돌층계를 이용하여 출입할 수 있게 하였다.
군자정의 특징
안동에 있는 정자의 중요한 특징은 대부분의 정자가 숙박시설(방)을 갖추고 있는 점이다. 일반적으로 정자는 아름다운 자연경관을 조명하며 휴식과 친목, 놀이와 모임을 위한 풍류공간이어서 대개의 경우는 전망을 위하여 벽체를 없애고 기둥만 있는 개방형이며, 또 일시적으로 활용하고 돌아가는 비체류형 건물이다. 그러나 안동의 정자는 경북지방 산간 오지에 있어서 교통이 불편하므로 "함께 모여" 풍류를 즐길 수 없었다. 딸서 체류형 정자로 대체할 수 밖에 없었다.
또 다른 특징은 퇴계 이황의 성리학 영향을 크게 받아서 처사적 도덕 함양과 선현에 대한 추념의 기능이 정자에 크게 반영되고 있는 점이다. 자연 경관에 대한 풍류 공간, 성리학적 도덕 함양을 위한 수행 공간, 교류와 모임을 이한 사교 공간, 선조나 산현에 대한 추념 공간, 내방객을 맞이하는 접빈 공간(별당의 기능) 등으로 기능이 다양화되거나 혹은 그 다양한 기능들이 공유하는 형태를 취하고 있다.
또 다른 특징은 대규모의 정자이면서 대청 규모에 맞게 숙박시설도 넉넉하게 마련하고, 정침인 임청각의 별당 형태로 있는 점이다. 따라서 군자정은 안동부의 지근 거리에 있으면서 교통과 물산의 내왕이 빈번한 길목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내방객이 많았을 뿐 아니라 모임의 장소로도 더 없이 좋은 위치이었다.
君子란?
군자(君子)는 유교에서 " 성품이 어질고 학식이 높은 지성인 "을 일컫는 말이다. 중국 춘추전국시대에는 높은 벼슬을 한 사람을 부르는 말로도 사용되었다. 또 아내가 남편을 일컫는 말로도 쓰였다. 예기(禮記) 곡례편(曲禮編)에 따르면, 군자는 " 많은 지식을 갖고 있으면서도 겸손하고, 선한 행동에 힘쓰면서 게으르지 않은 사람을 군자라고 한다 "고 하였다.
논어(論語) 이인편(里仁편)에서는 " 군자는 어떤 것이 옳은 일인지 잘 알고, 소인은 어떤 것이 이익인지 잘 안다. 군자는 어찌하면 훌륭한덕을 갖출까 생각하고, 소인은 어찌하면 편히 살 것인가를 생각한다 "는 말로 군자를 정의하였다.
군자의 길
조선의 저명한 명문가 집안으로 독립운동에 참여한 집안으로는 백사 이항복의 후손인 이회영 집안과 임청각의 이상룡 집안일 것이다 . 만주에서 경학사와 신흥무관학교 설립에 주도적으로 참여한 집안이 바로 이 두 집안이다. 명문가는 어떻게 보면 기득권을 가장 많이 가진 집안이라고 볼 수 있는데, 만주독립운동이란 그 기득권을모두 포기하는 행위이기도 하다.
안동지역의 많은 양반 집안 후손들이 독립운동에 참여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 보아야 한다. 임청각을 포함하여 의성김씨, 진성이씨, 전주유씨 등 안동의 명문 집안들은 예상외로 많은 후손들이 독립운동을 한다고 만주에 가서 풍찬노숙을 하는 고생을 했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 한마디로 자존심때문일 것이다.
제대로 된 양반들은 자존심을 먹고사는 인간이다. 천민은 자존심이 없다. 일제 아래에서는 그 자존심을 유지할 수 없다고 보았기 때문에 눈 내리는 만주로 간 것이다. 언뜻 생각할 때 인간은 빵문제만 해결되면 만사 해결될 것 같지만 그렇지도 않다. 명문 후손들의 만주행이 그 사실을 증명하고 있다. 지금도 만주 하얼빈 아성시에 살고있는 노인네들은 대부분 석주 이상룡과 같이 옯겨간 안동사람들의 후손이라고 한다.
그러나 명문가 집안 후손들의 독립운동이 의외로 일반에 알려지지 않은 편이다. 190년대에 이르러서야 겨우 알려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 이유는 이렇다. 항일운동을 한 사람들은 만주로 갔고, 만주에서 독립운동을하다 보면 대체로 사회주의 노선을 걷기 마련이다. 항일운동에서 사회주의로의 이행은 자연스러운 대세이었다. 그러나 양반출신 사회주의자들은 해방 이후 설 자리가 없었다.
이북의 김일성정권에서는 숙청 당하거나 소외당하고, 이남의 반공정권에서는 공산주의자로 내몰렸다. 양쪽에서 샌드위치가 된 것이다. 이북과 이남 양쪽에서 모두 소외되어 파묻혀버리는 상황이 계속되었다. 이게 주목받지 못한 이유이다.
출처 :여여법당(如如法堂) 원문보기▶ 글쓴이 : 이계묵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