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계정씨 대제학공파
[가문을 빛낸 선조]
정 선(鄭 僐) 1251(고종 38) ~ 1325 (충숙왕 12)
고려의 문신. 초명은 현좌(賢佐), 자는 거비(去非), 예부상서(禮部尙書) 배걸(倍傑)의 7대손.
1273년 원종14년 문과(文科)에 장원, 전주 사록(全州司錄)을 거쳐 충렬왕 때 이부총랑
(吏部摠郞) 병부총랑(兵部憁郞) 우상시(右常侍)를 역임,
충선왕 때 첨의평리(僉議評理)에 이르러 치사했다. 불교를 독신(篤信)했다.
정광계(鄭光繼) 고려때 상호군(上護軍)을 역임하였다.
정 인(鄭 絪) ? ~1358 (공민왕 7)
고려의 문신. 자는 맹순(孟淳), 시호는 양헌(良獻), 첨의 평리(僉議評理) 선(僐)의 손자.
1344년(충목왕 즉위) 대호군(大護軍)으로서 서연 시독관(書筵侍讀官)이 되고, 1347년 정치도감(整治都監)의 정치관(整治官)이 되었다.
1356년 (공민왕 5) 수사공 우복야(守司空右僕射), 강릉교주도 도지휘사를 지내고 판개성부사
(判開城府事)를 거쳐 밀직 제학(密直提學)에 이르러 팔천군(八川君)에 봉해졌다.
음률(音律)에 정통하고 예(禮)에 밝아 예관(禮官)및 후진들을 많이 가르쳤다.
정변함 (鄭變咸) 호(號)는 상천(上川), 조선 때 훈도(訓導)를 지냈다.
정백영 (鄭白永) 자(字)는 홍백(弘伯), 호(號)는 송담(松潭), 조선 때 효자였다.
정팔원 (鄭八元) 자(字)는 여일(汝一), 조선 때 부사정(副司正)을 역임.
정 편 (鄭 便) 조선조(朝鮮朝)에 통례문 봉례 (通禮門奉禮)를 지냈다.
정윤겸 (鄭允謙) 1463(세조 9) ~ 1536(중종 31) 조선의 무신(武臣).
자(字)는 익부(益夫), 시호는 장양(莊襄),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온(溫)의 아들.
1492년(성종 23) 무과(武科)에 급제, 훈련원(訓鍊院)에 보직되고, 1506년 중종반정(中宗反正)에
가담하여 정국공신(靖國功臣) 3등에 군기시 첨정(軍器寺僉正)으로 특진되었다.
1519년 회령부사(會寧府使)에 임명되어 청계군(淸溪君)에 봉해지고,
1522년 전라도 수군절도사로 부임, 병선(兵船)을 수리하고 해적을 소탕하여
왕으로부터 은(銀)을 하사받았다. 1526년 훈련원 도정(訓鍊院都正)으로 성절사(聖節使)가 되어
청나라에 다녀와 부총관(副摠管)에 이르렀다.
정 준(鄭 浚) 조선의 문신. 자는 대원(大源), 윤성(允誠)의 아들,
윤원형(尹元衡)의 첩 난정(蘭貞)의 오빠. 1533년(중종 28) 음보(蔭補)로 검열(檢閱)이 되고, 1540년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1544년에 이조 정랑(吏曺正郞)을 거쳐 1546년 병조 정랑으로 춘추관 기주관(春秋館記注官)을 겸임, 「중종실록(中宗實錄)」편찬에 참여하였다.
그 후 지평(持平) 정언(正言) 검상(檢詳) 장령(掌令)등을 역임,
1552년(명종 7) 전라도 암행어사로 나갔다가 이듬해 동부승지(同副承旨) 부제학(副提學)을 지내고 1554년 강원도 관찰사, 이듬해 호조참의(戶曺參議), 1556년 병조 참지(兵曺參知)를 거쳐
함경남도 병마절도사로 부임했다.1559년 충무위 행상호군(忠武衛行上護軍)이 되었다가
1559년 윤원형이 쫓겨나자 윤원형의 세력에 붙어 횡포를 자행했다는 탄핵을 받고 변방에 유배되었다.
정종영 (鄭宗榮) 1513 (중종 8) ~ 1589 (선조 22)
조선의 문신. 자는 인길(仁吉), 호는 항재(恒齋), 시호는 정헌(靖憲),
현감(縣監) 숙(淑)의 아들. 김안국(金安國)의 문인.
1530년 (중종 25) 사마시(司馬試)를 거쳐 1543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이듬해 검열(檢閱)이 되고 1547년 (명종 2) 호조 정랑(戶曺正郞) 헌납(獻納)등을 거쳐
뒤에 부수찬(副修撰) 지평 교리 등을 역임했다. 1552년 청백리(淸白吏)에 녹선(錄選)되었고,
공조 참판(工曺參判) 강원도와 경상도의 관찰사를 지내고 팔계군(八溪君)을 습봉(襲封)했다.
1562년 경상도 관찰사로 부임, 윤원형(尹元衡)에 아부하여
불법행위를 자행하는 수령(守令)을 응징하고 요승(妖僧)을 제거했으며,
이듬해 평안도 관찰사로 전임, 평양에 서원(書院)을 세우고 학문발전에 공을 세웠다.
1567년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으로 진향사(進香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와서
6조(曺)의 판서를 역임하고 우찬성(右贊成)에 이르러 사직했다.
글씨에도 뛰어났다. 원주 칠봉서원(七峯書院)에 제향.
정 약 (鄭 鑰) 자(字)는 지이(止爾), 호(號)는 사유재(四留齋) 조선 때 목사(牧使)을 역임하였다.
정 흑 (鄭 흑) 자(字)는 회이(晦爾), 호(號)는 송포(松浦), 1594년(선조 27)문과에 급제한 후 이조 정랑(吏曺正郞)을 역임하고 암행어사(暗行御史) 예조 참의(禮曺參議)등을 지냈으며 동진사(東秦使)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예조 참의를 거쳐 강원도 관찰사(江原道觀察使)로 나갔다가 1608년(광해군 1) 때에는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에 올랐으나 조정이 어수선하여 벼슬을 사양하였다.
정기광 (鄭基廣) 자(字)는 자거(子居), 호(號)는 추재(追齋), 1608(선조 41)문과에 급제한 후 예조 병조 정랑(禮曺 兵曺正郞)을 지내다 광해군이 집권하여 정치가 어수선해지자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였다가, 1623년(인조 1)인조반정(仁祖反正) 후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에 올랐으며 암해어사로
해서(海西)에 나가 민정(民情)을 살폈다.
1624년 (인조 2) 이괄(李适)의 난을 평정하는데 공(功)을 세웠고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왕을 호종(扈從)하여 남한산성에 들어갔으며
이듬해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책록(策錄)되었고 팔천군(八川君)에 봉해졌다.
그 후 한성좌윤(漢城左尹)으로 도총부 도총관(都摠府都摠管)을 겸임하였고 1642년(인조 20)
철원 부사(鐵原府使)이 이르렀다.
정기성 (鄭基成) 자(字)는 공백(鞏伯) 호(號)는 산일(山逸) 조선 때 효자였음.
정기풍 (鄭基豊) 자는 형백(亨伯), 호는 옥곡(玉谷), 조선 때 좌승지(左承旨)를 역임하였다.
정기방 (鄭基磅) 자(字)는 자후(子厚), 호(號)는 행은(杏隱), 조선 때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
을 역임하였다.
정기숭 (鄭基崇) 자(字)는 계흠(季欽), 조선 때 부사(府使)를 지냈다.
정석문 (鄭錫文) 자(字)는 시경(時經), 조선 때 경력(經歷)을 지냈다.
정석형 (鄭錫衡) 자(字)는 평중(平仲), 조선 때 좌랑(佐郞)을 역임.
정 륜 (鄭 륜) 字는 극렴(克렴), 호(號)는 이우당(二憂堂), 조선 때 참판(參判)을 역임하였음.
정수명 (鄭洙明) 자(字)는 도원(道源), 조선 때 첨정(僉正)을 역임하였다.
정우주 (鄭宇柱) 자는 대경(大卿), 호는 삼순당(三荀堂), 조선 때 좌부승지를 역임하였다.
정한주 (鄭漢柱) 자는 백기(白起), 호(號)는 시한당(是閑堂), 조선 때 좌랑을 역임하였다.
정운주 (鄭雲柱) 자는 계항(季抗), 호(號)는 남애(南涯), 조선 때 집의(執義)을 역임하였다.
정위주 (鄭緯柱) 자는 응오(應五), 조선 때 부정자(副正字)를 역임.
정희보 (鄭熙普) 자는 중욱(仲旭), 호는 퇴성헌(退省軒), 조선 때 우부승지(右副承旨)을 역임.
정희규 (鄭熙揆) 자는 숙첨(叔詹), 호는 농곡(農谷), 조선 때 헌납(獻納)을 역임하였다.
정진국 (鄭鎭國) 자는 용여(用汝), 조선 때 홍문관 정자(弘文館正字)를 역임.
정원선 (鄭元善) 자는 희인(希仁), 호는 호은(壺隱), 조선 때 사간(司諫)을 역임 하였다.
정홍관 (鄭鴻觀) 자는 주언(周彦), 조선 때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을 역임 하였다.
정홍경 (鄭鴻慶) 자는 치영(치永), 호는 운강(雲崗), 조선 때 필선(弼善)을 지냈다.
정홍순 (鄭鴻淳) 자는 임종(林宗), 호는 수루(水樓), 조선 때 정언(正言)을 지냈다.
정기화 (鄭琦和) 자는 남중(南仲), 호(號) 헐오재(歇五齋), 조선 때 필선(弼善)을 지냄.
정덕화 (鄭德和) 자는 이형(而亨), 호는 산초(汕憔), 조선 때 호조참판(戶曺參判)을 지냄.
정준화 (鄭駿和) 자는 문유(文有), 호(號)는 창하(蒼下) 조선 때 판서(判書)을 지냈다.
정현덕 (鄭顯德) 자(字)는 백순(伯純), 호는 우전(雨田), 1850년(철종 1) 문과에 급제한 후 1862년
(철종13) 서장관(書狀官)으로 청(淸)나라에 다녀왔으며 대원군(大院君)이 집권하자 그의 심복으로서 배일 운동(排日運動)에 앞장섰으나 대원군이 실각하자 벼슬에서 물러났다.
1882년(고종 19) 임오군란(壬午軍亂)으로 대원군이 다시 집권하자 형조 참판(刑曺參判)에 올랐다가
대원군이 다시 물러나자 유배(流配)되었으며 죽음이 내려졌으나 곧 사면(赦免)되었다.
정현석 (鄭顯奭) 자는 보가(保加), 호는 박원(璞園), 조선 때 호조 참판(戶曺參判)을 역임하였다.
정현영 (鄭顯英) 자는 경실(景實), 호는 유경(留耕), 조선 때 참의(參議)을 역임하였다.
정현유 (鄭顯裕) 자는 경세(景世), 호는 동산(東山), 조선 때 대사성(大司成)을 역임하였다.
정현오 (鄭顯五) 자는 경규(景奎), 호는 수산(壽山), 조선 때 교리(校理)를 역임하였다.
정현철 (鄭顯哲) 자는 도여(道汝), 호는 혜전(蕙田), 조선 때 감리(監理)를 역임.
정원시 (鄭元時) 자는 경천(景天), 조선 때 현감(縣監)을 지냈다.
정헌시 (鄭憲時) 자는 성장(聖章), 호는 강재(康齋), 조선 때 대사간(大司諫)을 역임하였다.
정창시 (鄭昌時) 자는 공기(公期), 호는 난옥(蘭屋), 조선 때 대사간(大司諫)을 역임하였다.
정봉시 (鄭鳳時) 자는 상성(聖韶), 호는 송리(松理), 조선 때 관찰사(觀察使)을 역임하였다.
정준시 (鄭駿時) 자는 성약(聖若), 호는 동곡(東谷), 조선 때 유수(留守)를 지냈다.
정호준 (鄭鎬駿) 자는 윤성(允聲), 호는 유당(有堂), 조선 때 군수(郡守)를 역임하였다
출처 : 자랑스런 나의족보/뿌리찾기운동본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