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새 시대를 향해(사 65:17-19)
* 광주항쟁은 38주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진행형이라는 생각이 든다. 38년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발포 최종 책임자가 명확히 들어나지 않는 등 진상이 제대로 규명되지 않고 있으며, 학살의 주범이 분명한 전두환이 여전히 제대로 처벌받지 않고 호의호식하는 가운데 이전에 밝혀지지 않은 부분들이 계속 조금씩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다. 올해의 가장 큰 특징은 미투의 영향 덕분에 피해여성들의 증언이 두드러지고 있다는 점이다.
* 5·18 가두방송의 주인공 차명숙 씨나 전춘심 씨가 고문당한 이야기를 비롯해 석방 직전 성폭행 당한 여성, 귀가하다 집단성폭행 당한 여고생, 다른 여성들과 집단으로 납치되어 성폭행했다가 승려가 된 여성 등의 이야기가 연이어 폭로되고 있다. 이 모든 사연들이 가슴 아프지만 전남도청 안내방송을 담당하다 체포된 김선옥씨의 사연은 실명과 현재 모습까지 보도되면서 더욱 가슴을 아리게 만든다.
* 운동권 학생도 아니었던 김선옥 씨는 당시 전남대 음악교육과 4학년이었는데, 5월22일 책을 사러 시내에 나갔다가 학생수습대책위원회를 맡아 도청에 들어갔다. 그리고 상황실에서 출입증, 유류보급증, 야간통행증, 무기회수 등의 업무와 안내 방송을 했다. 계엄군이 광주 무력진압을 시작한 27일 새벽 도청을 빠져나와 잠시 몸을 피했다가 창평중학교에 교생실습을 나가기도 했는데 7월3일 학교에서 계엄사 합수부 수사관들에게 체포됐다.
* 9월5일까지 꼬박 65일 동안 구금됐던 김선옥 씨는 기소유예로 풀려나기 하루 전 소령 계급을 달고 계장으로 불리던 수사관에게 성폭행을 당했다. 석방된 후 방황하면서 만난 남자와의 사이에서 딸을 임신했지만 수면제를 먹고 자살을 시도하기도 했다. 김씨의 엄마는 충격을 받은 뒤 급성간암으로 세상을 떴고, 초등학교 교사였던 아버지도 교직에서 쫓겨났다. 1981년 겨울 첫눈 오는 날 혼자 딸을 출산했다.
* 그 후 김선옥씨는 교육청에 진정서를 내 1983년 중학교 음악교사로 발령을 받았고, 5·18의 ‘5’ 자도 꺼내지 않고 숨어 살았다. 정권이 바뀐 후 후배로부터 5·18 민주유공자 보상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나중에 후배가 가져온 신청서에 이렇게 적었다. “내 인생을 보상한다고요? 얼마를 주실 건데요? 무엇으로, 어떻게 내 인생을 보상하려고요? 뭘?” 그리고 그녀는 보상금으로 2000만원을 받았다.
* 물론 김선옥 씨의 경우가 가장 처참하지는 않을 것이다. 5·18 때 학살당한 사람은 물론이고 살아남은 사람들 중에도 김선옥 씨보다 더 혹독한 시련을 겪었고 비참한 삶을 살았던 사람들도 많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김선옥 씨가 당했던 고통보다 더하거나 덜했던 간에 그런 비극의 희생자가 너무 많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들이 당한 고통은 여전히 아물거나 치유되지 않고 여전히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 그래서 마음이 아프지만 더 혹독하게 이중의 고통을 당해야 했던 여성들의 피해가 더 소상히 밝혀지길 바란다. 특히는 광주항쟁 당시 여성들에 대한 성폭력이 군에 의해 집단적으로, 상습적으로 벌어졌을 수도 있다는 의혹이 제기되는 만큼, 이들이 당한 피해가 단순 성폭력이 아니라 국가폭력에 의한 것으로 규정하고 당시 여성들의 성폭력 피해에 대한 별도의 진상조사가 필요할 것이다.
* 광주항쟁의 진상이 아직도 명명백백하게 밝혀지지 않는 것을 보면 이제 4주년이 지난 세월호 참사에 대한 진상은 언제나 밝혀질지 답답하기도 하지만, 우리가 그토록 되풀이했던 “잊지 않겠습니다”라는 다짐을 잊지 않는다면 두 사건을 비롯한 현대사의 비극에 대한 진상이 모두 밝혀질 날이 언젠가는 오고야 말 것이다. 우리는 이런 믿음을 성경의 수많은 증언에서 발견할 수 있다.
* 요즘 수요일에 공부하는 ‘성경의 숨겨진 지혜’라는 책을 보면 유대인들은 가장 최악의 순간들로 자신들의 종교를 형성했다고 설명한다. 그들은 평안하고 안락한 현실들만이 아니라 끔찍한 현실들 앞에서도 오직 하나님과 더불어 버티고 견디어내는 놀라운 힘을 보유했다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선민이라는 믿음에 기반해 세운 왕국의 멸망은 물론 분단과 유배, 성전 파괴, 대학살 등 그들의 역사는 우리의 역사보다 더 참혹한 일들이 많았음을 알게 된다.
* 그럼에도 그들은 우리가 그랬던 것처럼 자신들이 희망하는 메시야왕국 또는 하나님나라가 언젠가는 실현될 것이라는 믿음을 잃지 않았다. 오늘 본문은 제3이사야의 마지막 부분에 해당하는데 바로 그런 믿음/희망을 반영하고 있다. 그런데 이 시기 아주 중요한 일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그것은 무너진 성전의 재건이었다. 그런데 제3이사야는 이 성전 재건에 대해 회의적/비판적인 태도를 취한다.
*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기원전 586년 바벨론에 의해 멸망하고 지배계층 다수가 포로로 끌려간다. 60년 가까운 유배기간 동안 남유다에는 새로운 지배층이 형성되었고, 이후 유배 갔던 이들이 돌아오면서 주도권을 둘러싼 갈등이 표면화되었다. 두 세력은 그런 사회적 혼란이 ‘하나님 현존의 가시적 표징인 성전’의 붕괴 때문이라고 주장하면서 성전 재건만이 안정과 행복의 관건이라고 백성들을 선동했다.
* 제3이사야가 ‘성전재건 열광주의’에 비판적이었던 이유는 제2이사야부터 시작된 신관의 변화 때문이었다. 제2이사야는 야훼가 이스라엘만의 신이라고 여겼던 유대인들은 바벨론 유배를 통해 우주의 창조주라는 개념과 ‘만민구원사상’을 받아들였는데, 제3이사야는 이를 계승해 야훼 하나님이 성전이라는 공간에 갇히는 분이 아니라 온 우주에 존재하시는 창조주라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 당시 ‘성전재건 열광주의자들’은 성전이 재건되는 날 하나님이 도래하시고 이스라엘이 구원될 것이라고 주장하며 그렇게 믿고 있었다. 그러나 이후 성전이 재건된 후에도 그들이 주장하고 원했던 이스라엘의 정치적 독립, 경제적 안정은 이뤄지지 않았다. 그런 상황에서 제3이사야는 이스라엘의 구원이 지연되는 이유가 지도자들의 나태와 타락, 탐욕과 이기적 무절제 그리고 그로 인한 백성들의 궁핍과 고통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 오늘 본문은 그런 문제들이 해결된 후 이루어질 세상에 대한 희망을 전하고 있다. 먼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할 것”이라고 전제한 후, “예루살렘을 기쁨이 가득 찬 도성으로 창조하고, 그 주민을 행복을 누리는 백성으로 창조하겠다”는 약속이 이어진다. 그리고 “예루살렘은 나의 기쁨이 되고, 거기에 사는 백성은 나의 즐거움이 될 것”이며 “그 안에서 다시는 울음 소리와 울부짖는 소리가 들리지 않을 것”이라는 약속이 계속된다. (20-25절)
* 그러나 이런 약속은 바로 실현되지 않았다. 바벨론에서 돌아온 유대인들은 다시 그리스와 로마의 침략을 받아야 했다. 알렉산더는 주전333년에 마케도냐에 주둔하고 있던 Persia 군대를 격퇴하고 대륙을 제패했지만, 유대인들에게 종교의 자유를 허락했다. 그러나 기원전 166-63년 그리스의 박해가 심해져 성전에 제우스 신상을 세우고, 돼지피를 희생제로 쓰기도 했다. 이에 마카비형제가 반기를 들어 독립시대를 이루었고 성전을 깨끗이 정화시켰다.
* 예수 당시에는 다 아시는 것처럼 로마의 식민지배를 받고 있었고 유대인들은 이집트에서 노예로 살아야 했던 암흑의 시대를 떠올리며 독립을 갈망하고 있었다. 특히 예수가 활동한 주무대였던 갈릴리 일대는 ‘유대의 독립’을 꿈꾸는 ‘열심당’의 근거지였고, 시몬이나 갸롯 유다와 같은 예수의 제자들 중에도 열심당원이 있을 정도였다. 우리가 일제강점기 때 그랬던 것처럼, 당시 유대인들에게는 ‘무력 투쟁’이 일종의 시대적 요청이었다.
* 아마 그들이 원했던 세상은 이사야가 제시했던 이상적인 하나님나라가 아니라 이스라엘의 독립과 주권 회복이었을 것이다. 예수는 무력 투쟁을 전개했던 이들의 편에 서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친로마적인 태도를 고수하지도 않았다. 복음서는 예수가 회당에 들러 이사야서를 읽으며 자신의 소명을 재확인하곤 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예수가 원하고 지향했던 바는 이사야가 제시한 하나님나라와 비슷했을 것이다.
* 그리고 그가 선택했던 방법은 열심당원들의 ‘무력 투쟁’이 아니라 비폭력적 저항이었다. 그러나 그조차도 용인될 수 없었던 것인지, 아니면 그가 선택한 방법이 더 본질적이고 근본적인 변혁을 요구하는 것이었기에 더 위험하고 불온했기 때문인지, 그는 ‘무력 투쟁’을 벌였던 열심당원들과 똑같이 처참한 십자가형을 당해야 했다. 십자가형은 인류 구원과는 상관없는 로마의 잔인한 사형 방식이었고, 고상한 죽음과는 거리가 멀었다.
* <제국의 그림자 속에서>라는 책의 5장 ‘예수와 제국’을 쓴 리처드 호슬리의 설명에 따르면 희생자들은 장대나 대들보에 매달려 장시간 또는 여러 날 동안 서서히 고통당하면서 죽음에 이르게 되고 희생자들의 품위를 손상시키기 때문에 다른 어떤 사형 방법보다 잔혹하고 비인도적인 것이었다. 그래서 로마인들도 완강하게 저항하는 노예들, 자신들의 지배를 거부하는 속주의 반란자들을 처형할 때 이 방법을 사용했다.
* 계엄군이 광주항쟁 당시 여성들에게 저지른 성폭행 역시 본질적으로 이와 다르지 않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이는 치욕스럽고 희생자들의 인간성을 말살시키는 비인도적인 범죄였다. 안진 전남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5·18 때 여성에 대한 공격이 더 잔혹했던 이유는 시민들에게 공포를 조성하기 위해 더 효과적이라고 여겼기 때문일 것”이라면서 “계엄군이 여성에게 가한 만행은 성적 차별까지 동원된 것”이라고 지적했다.
* 그런데 왜 이런 사실이 널리 알려지지 않았을까? 윤청자 5월민주여성회 부회장은 “왜 그동안 여성들의 피해를 말하지 않았느냐”는 질문에 “새삼시럽다”고 대답했다. 그리고 “우리가 지금껏 말을 안 혔겄어. 전체 투쟁이 중요하다고 하니까 우리 얘기만 내세우질 못한 거지”라고 덧붙였다. 실제로 광주 청문회에서 당시 상황을 증언했던 한 여성은 가족들로부터 “가정주부가 살림이나 할 것이지 왜 나대느냐”는 비난을 듣기도 했다고 한다.
* 이처럼 보수적인 한국 사회에서 여성의 범죄 피해 사실을 ‘집안의 수치’로 여기는 분위기 때문에 1980년 5월에 벌어진 성폭력 피해를 적극적으로 공개하기는 극히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다. 이 부분의 피해 사례를 조사하던 사람들도 피해여성들의 2차 3차 피해를 우려해 깊이 파고들지를 못했다고 한다. 이런 이유들 때문에 ‘오월 광주’의 여성들은 그동안 항쟁에 대한 기여뿐 아니라 피해규모까지도 상당부분 가려져 왔다.
* 그런데 올 들어 미투 운동의 영향 덕분에 가능해진 피해 여성들의 적극적인 진술은 38년이라는 세월이 흘러 이뤄져 때늦은 감은 있지만 매우 고무적인 일이라 생각된다. 나는 신학을 공부하고 미국에서 한인사회 지역신문 기자 생활을 한 경험 때문인지 진술과 기록이 매우 중요하다고 여긴다. 그리고 그런 맥락에서 예수의 고난과 죽음도 이후의 진술과 기록이 없었다면 수많은 십자가 죽음 중의 하나로 끝날 수 있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 실제로 2천여 년 전 팔레스타인 땅에서 십자가형은 아주 특별한 것이 아니라 매우 빈번하게 이뤄졌다. 기원전 4년 헤롯이 죽었을 때 나사렛과 엠마오 등 주요 지역에서 반란이 일어났는데 당시 2천 명의 반란 지도자들이 십자가에 달려 죽음을 맞이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서기 66-70년에 일어난 폭동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로마군인들은 예루살렘에서 저항하는 반란자들을 겁주려고 수백 명의 저항자들을 정기적으로 십자가에 매달아 처형했다.
* 이렇게 수많은 십자가 처형이 이뤄졌는데 예수의 죽음만이 특별하게 기억되는 이유는 예수가 부활했기 때문이라고 간단히 대답하고 넘어갈 수 있지만, 깊이 생각해보면 비참하고 모욕적인 십자가형을 당한 스승의 죽음과 누구도 믿기 힘든 부활사건을 진술하고 기록한 사람들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불가능한 일일 수밖에 없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다른 현대사의 비극에 비해 광주항쟁에 대한 소식이 비교적 빨리 알려진 것도 마찬가지였다.
* 작년에 개봉한 영화 <택시운전사>의 주인공 ‘위르겐 힌츠페터’는 그런 의미에서 참으로 고맙고 존경할 만한 인물이다. 오는 17일에는 그에 대한 다큐멘터리 ‘5.18 힌츠페터 스토리’가 상영된다고 하는데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80년 5월 광주의 처절했던 항쟁 장면을 확인할 수 있다고 하니 관심을 갖고 관람해보시기 바란다. 한다. 그런데 예수에 대한 기록이 남성 중심적이었던 것처럼 광주에 대한 기록도 마찬가지였음을 부인할 수 없다.
* 이경순 전남대 명예교수는 “광주민주항쟁에서 여성의 역할이 과소평가됐던 것만큼이나 피해 사실도 축소돼왔다. 여성에게 순결을 강요하는 사회가 여성 피해자들도 5·18의 주변인으로 만들었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어떤 식으로든 축소되거나 가려졌던 기록의 부족한 점이 피해 여성들의 적극적인 진술로 채워질 수 있게 됐다는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예수의 죽음과 부활에 대해서도 다양한 진술과 기록이 존재하듯 광주에 대한 기록도 그래야한다.
* 여러 차례 광고를 했고 카톡에도 사진과 창립선언문을 올렸듯이 지난 10일 전남동부NCC가 출범했다. 아직 공식 결의된 것은 아니지만 올해 가장 주력할 행사는 여순사건 70주년을 기념하는 추모행사와 신학심포지엄이 될 예정이다. 노무현 정부 이후 제주4.3항쟁은 국가기념일로 지정되어 정부 차원의 기념행사가 치러지는데 그로 인해 발생한 여순사건은 피해자 조사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 광주항쟁 역시 자주 기사화되어 정치권에서는 물론 일반 시민들도 관심을 갖는 반면, 그보다 32년 전에 일어났고 희생자 수나 피해 규모도 더 컸을 여순사건에 대해서는 지역사회에서도 관심도가 의외로 낮은 것 같다. 그 이유는 피해자들의 적극적인 진술이나 기록이 이뤄지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가 민족의 아픈 상처 중 하나인 이 사건에 대해 관심을 갖는 이유는 그 상처의 치유가 새 시대로 가는 징검다리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 광주항쟁의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 없이 민주주의가 완성되었다고 말하기 힘들 듯 여순사건이나 거창사건 등 해방정국과 한국전쟁 당시 일어났던 수많은 민간인학살 사건에 대해 서도 철저한 조사와 진상 규명이 이뤄져야 참다운 사회정의가 이뤄졌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아우슈비츠의 비극에 대해서 침묵했던 독일교회들이 진실된 교회일 수 없듯, 광주항쟁과 세월호, 그리고 여순사건에 대해 침묵하는 교회들이 진실된 교회일 수 없다.
* 제3이사야는 하나님이 약속하신 “새 하늘과 새 땅의 창조”는 성전 재건이 아니라 지도자들의 나태와 타락, 탐욕과 이기적 무절제 그리고 그로 인한 백성들의 궁핍과 고통과 같은 문제들이 해결된 후 이뤄질 것이라고 선언했다. 마찬가지로 광주항쟁 희생자들이 꿈꾸었던 세상은 광주항쟁을 비롯해 현대사의 모든 비극에 대한 진상이 규명되고 가해자의 처벌과 피해자에 대한 치유 및 보상이 적절하게 이뤄질 때 이뤄질 것이다.
* 이미 남북의 정상이 만나 한반도 평화의 물꼬를 텄고, 북미 정상이 만나 한반도 비핵화에 대한 논의를 하는 등 평화와 통일의 기운이 어느 때보다 높아지고 있는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 중의 하나는 남북 갈등 못지않게 뿌리 깊은 남남갈등, 동서갈등, 좌우갈등 등 우리 안에 존재하는 분열의 장벽을 허무는 것이다. 그 일은 우리 사회에서 고통당하는 수많은 피해자들의 상처를 치유하고 아픔을 보듬어주려는 노력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 가족조차 수치로 여기며 쉬쉬했고 동지라 믿었던 남성들에게조차 지청구를 들어야 했던 여성피해자들에 대한 진상을 온전히 밝혀내는 일은 가장 대표적인 경우에 속할 것이다. 그리고 그런 노력을 기울이는 가운데, 우리 각자의 다름을 틀림으로 생각하지 않고 다양성으로 존중하는 열린 마음을 갖고 이해하고 배려하는 일도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것이다. 새 시대로 가는 문은 그런 배려와 존중 속에서 활짝 열릴 것이기 때문이다.
* 우리 하늘씨앗들이 일상 속에서 평화를 실천하며 나와 다른 타인의 생각을 너그럽게 받아주고 이해하며 배려하는 삶을 살기를 간절히 바란다. 보이지 않는 마음의 벽을 높이 쌓는 사람이 아니라 존재하는 벽을 허물고 다리를 놓기 위해 노력하는 삶을 살기를 간절히 바란다. 구시대에 안주하지 않고 새 시대를 향해 성큼성큼 발을 내딛으며 나아갈 수 있는 삶을 살기를 간절히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