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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원대도의 종자가 종로교당에서 송천동으로 그리고 장위동에 뿌리 내린지 어언 50 여년.
송천교당은 수 많은 분들의 혈심혈성으로 발전해 왔고, 그 원동력에는 앞서 이끈 교도회장들이 계셨다.
1대 박경국회장으로부터 8대 현 이성택회장까지 정신.육신. 물질로 송천교당이 성장 할 수 있도록 오롯한 신성으로 힘써주신 그 노고에 감사하며 그 분들의 공덕과 활동를 살펴 본다.
1대 박경국(원기 53.7.10-54.6)
박경국회장은 송천교당 초기에 중책을 맡아 교당의 신축과 그 토대를 만들기 위해 온 정성을 다 하였다.
출장소에서 지소로 승격되며 제1대 박성석교무가 부임 하였고 박경국교도는 53 년 7월 교도회장에 피선 되었다.
당장 발등에 떨어진 불은 교당 신축 이었다. 전세의 설움이 그렇듯 우리만의 공간이 절실 하였다. 비록 재임 기간은 1년으로 짧았지만 이를 위해 열정을 불태웠다. 박성석 교무와 미아리 일대 기관을 누비며 권선 하였고 어디든 불사를 위한 길이라면 마다 하지 않았다. 또한 권선 중 불쾌한 거절과 어려움을 당하면서도 오직 교당 신축을 위한 일념 하나로 인욕 하였다.
그렇게 애쓰던 중 권도인 교도의 재능과 능력 그리고 남다른 교당 신축에 대한 열망을 파악 하시고, 본인은 뒤로 물러나 조력자로 남아 아낌없이 후원 하였다.
회장 퇴임 후 56 일만에 교당 신축 기공식이 거행 되니 그때의 벅찬 감정은 교무, 교도와 더불어 형언조차 어려웠다.
그밖의 재임 기간의 일로는 원기 54년 4월에 어린회가 조직되었고 송원철교무를 모시고 교리강습을 가졌다.
그리고 회장님의 선행으로 회갑을 맞아 교당 에서 원불교 예식으로 간결하게 치루어 절약된 비용 10만 원을 장학기금으로 희사했다. 그때 40kg 쌀 한가마니가 만원 정도였다고 전해진다.
2대 권도인 (원기 54.6.4-63.3 )
2대 권도인 회장은 송천교당 발전사의 가장 중요한 분이다. 일원대도의 종자가 뿌리를 내리고 꽃을 피울 수 있게 교당를 신축 하였고, 지소에서 지부로 승격되었으며 학생회,청년회.봉공회등이 조직되어 교화의 발판을 이루었다.
권도인회장은 교당 초기 신축의 필요성을 절감 하시고 준비를 해 오시다가 때가 되니 꼭 마법처럼 술술 풀어 내시듯 진행해 갔다. 교당 신축 부지를 미리 물색해 놓고 그 설계 도면을 완성해 놓았으며 신축 기금의 재원 마련 하는 방법까지 촘촘히 준비하였다. 물론 대부금으로 모자라 빚을 얻고 권선으로 일부 재원을 충당 하였지만 권회장의 리더쉽과 삼성이라는 굴지의 회사의 관리부장이 아니 였으면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 참고로 신축부지의 땅은 주택단지를 조성하기 위한 삼성 부지였다)
마침내 원기 54년 7월 30일 기공식과 11월 2일 봉불 낙성식이 거행 되니 원불교신문은 이렇게 전한다.
"원기 54년 7월 30일 신축 기공식
송천지소(교무 박성석) 교당 신축기공식이 지난 7월 30릴 하오 3시 종법사께서 임석한 가운데 거행되었다.
대산종법사께서는 '오늘의 기공식을 기하여 육신의 집은 물론이요 수명이 한이 없는 훌륭한 마음의 집도 마련해야 할 것'이라는 내용의 법설을 내려 주시고 손수 기념식수도 하시어 기공식에 참석한 대중의 마음을 한결 흐뭇하게 하였다.
한편 대지 101평에 건평 65평으로 기공된 동교당은 오는 10월 하순께 준공될 예정이다"
"<송천동> 원기 54.11.2 봉불 낙성식
이곳 봉불 낙성식은 11월2일 오후 2시 박장식 교정원장 이운권교령을 비롯해서 많은 교역자와 교도 그리고 일반 내빈등 400여 대중의 참석으로 성대히 거행되었다. 이태리식 건축양식으로 대지 101평에 건평 75.4평 규모의 한 폭 그림처럼 아름다운 새 법당.
이날 권도인 박경국 지부장과 유수안 오명주행 김화경 김정인 정원명 이삼중햏 김귀법화씨가 표창장을, 최창호 김우춘 박성규 백승호씨가 감사장을 받았다"
권도인회장은 9년여의 임기를 마치고 교당 고문으로 추대되어 신앙생활에 전념 하다가 원기 69.5.6일 효산이란 법호를 받는다. 송천교당이 생기고 처음으로 권도인회장외 5인의 법호인이 탄생하니 공부하는 송천교당으로 일신하는 계기가 된다.
그후 부인 김화경교도의 건강 악화로 요양차 온양에 머무르니 그 소식과 권도인회장 의 삶의 행적을 원불교신문은 이렇게 전한다.
"[621호] 1990년 11월 09일 (금)
원불교신문 webmaster@wonnews.co.kr
다행히 남 먼저 대도정법에 입문하여 30여년 간을 한결같은 정성으로 수행정진하며 대구 서울을 거쳐 온양 땅에 안착, 칠순의 노구에도 불구하고 청년 못지 않는 정열로 교당 일에 전력하고 있는 효산 권도인 교도님(73).
권 교도가 원불교와 인연을 맺게 된 것은 대구에서 생활하고 있을 때인 원기 46년 6월에 부인인 김화경 교도의 연원으로 입교하게 되었다. 입교 후 故향타원 이경순 종사의 지도로 교리 체계와 함께 신앙의 뿌리를 튼튼히 다졌다.
그 후 사업관계로 대구에서 서울로 이사하게 되었다. 서울에서 초기엔 원남 교당에 다녔으나 송천교당이 신설되면서 회장직을 수행하는 등 창립 주로서 적극적인 협력자가 되엇다.
『당시 송천 교당은 초창기라서 전세 집을 전전하며 떠돌아 다니는 신세였습니다. 목탁소리, 성가소리가 시끄럽다고 주위의 항의 때문에 몇 개월 간격으로 이삿짐을 싸야 할 형편이었지요, 한번은 리어카에 이삿짐을 싣고 가다 모시고 가던 일원상이 땅에 떨어지게 되었어요. 그러자 교무님께서 눈물을 보이셨어요, 그 때 교당을 마련해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되었지요.』고 밝혔다.
권 교도는 당시 대기업의 살림을 관리하는 일을 맡고 있어서 땅을 외상으로 살 수 있었고, 건축업자도 쉽게 선정할 수 있었다.
한참 신축 중에 있을 때 대산 종법사를 대면 할 기회가 왔었다.
『종교지도자하면 근엄하고 권위주의적인 모습을 그리게 되는데 대산 종법사님은 자상한 시골 할아버지 같은 느낌을 주어서 한마디로 반해버렸지요, 그 후로 시간만 있으면 찾아뵙게 되었고, 이런 인연으로 대산종법사님께서는 기공식에도 참석해 주셨으며, 기념식수는 물론 머릿돌에 친필휘호까지 내려주시는 뜻하지 않은 은혜를 입었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운명은 알 수 없어서 집안에 뜻하지 않는 풍파가 찾아왔다. 부인인 김교도가 중풍으로 눕게된 것이다. 온양 땅에 오게 된 이유도 온천물이 있는 곳에서 살다보면 건강에 차도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6년 전에 온양으로 오게 되었다.
『금년으로 꼭 15년째 수발을 들고 있습니다. 저에게 신앙의 힘이 없었다면 견딜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특히 인과의 이치를 알고 있었기에 전생에 진 빚을 이생에 갚고 있다는 생각을 하면 짜증이 나다가도 홀가분한 마음으로 이왕에 갚을 빚 남김없이 갚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지요』
칠순이면서도 청소년 교화의 발판을 마련하기 위해서 실시한 한문 서당 일은 홍보에서 진행에 이르기까지 도맡아 하며 교무의 손발이 되는 등 교화의 열정이 남다르다.
또한 백일기도를 올리는 등 개인수행은 물론이고, 교도들간의 화합 등 모든 심법에서도 법도가 있다. 권 교도의 『교당 일에 적극 협력하는 일이 내 생에 있어서 마지막 봉사라는 신념으로 온 맘 온 몸으로 불사에 전념하고 싶고, 좀 더 큰 교당을 건축하는 일이 과제』라고 밝히는 모습에서 교당과 집이 둘이 아닌 모습을 읽었다."
3대 권오인 (원기 63.3-80.12)
송천교당은 어언 창립 10주년을 맞는다. 이제 태동기를 지나 중흥기로 도약하는 시기에 새로 장혜성교무가 부임하고 권오인회장이 선출이 된다. 새로운 체제 아래 발전과 변화의 기회가 주어지며 교당 안밖의 살림이 커져 중형 교당으로 면모 또한 지니게 된다.
이때 송천교당이 추진한 일들과 활동은 다음과 같다.
교당의 모든 수입과 지출, 사업계획추진이 교도에게 이양 되었고, 안으로는 백일수행 정진기도와 교리강습, 월요법회, 수요법회, 연화회, 교우회 등이 발족되어 내실을 기하고 밖으로는 교화활동에 박차를 가해 64년6.1-7.26일까지 연원달기 특별기간을 설정하여 총 88명을 입교 시키기도 했다. 또한 인천 부개동에 상가를 7천 만원에 매입 현 부개교당의 연원교당이 됬고 강원도 양구군 동면 팔랑리에 부지를 매입하여 후에 백년성업회에 희사(1억2천오백)하게 된다. 그밖의 활동으로 교도 친목 도모를 위한 야유회, 요리강습, 노래자랑, 문화법회 등 다양한 행사를 가졌다.
권오인회장은 재임기간이 18년으로 장기간 활동을 하셨다. 50세의 젊은 나이에 선출된 이유도 있었지만 학식과 재력을 고루 갖춘 덕분이기도 하였다. 그래서인지 대외 활동에도 많이 참가하여 서울교구 원덕회 회장, 서울교구 청운회 회장, 서울회관추진위원 등 묵직한 자리에 올라 큰 활동을 많이 하셨다.
이런활동의 원동력에는 부인 김정인 교도의 내조가 큰 역할을 하였다. 1976년 10월 10일 원불교신문은 이렇게 전한다.
"『이제 보은의 뜻을 펴보고 싶은 것입니다. 항상 사은의 은혜를 깊이 느끼고 교당이 없는 곳에 교당을 세우고 싶었습니다.』서울특별시 도봉구 수유리에 새 교당의 터전을 닦고 있는 김정인 주무(현 송천교도)는 19세 때에 진영에서 입교한 이래 30여년을 한결같이 신앙으로 일관해 온 믿음의 주인공. 『행복이란 창조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여학교시절 인생에 대한 회의를 느끼면서 마음의 창을 활짝 열어줄 등불을 갈망했을 때 친구로부터 원불교(당시 불법연구회)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희망을 얻었습니다.』이렇게 입교동기를 밝힌 김주무는 전무출신을 뜻했으나 부친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쉽다고, 결혼 후에는 생활전선에서 많은 고초를 격었지만 『역경을 당할 때는 신앙을 강하게 하고 순경에선 보은 일념』으로 신앙생활의 표준을 잡아왔다고 한다. 「뜻했던 전무출신을 못했기에 보은의 뜻으로 생전에 적어도 3개의 교당을 세우는 것이 바램」이라는 김주무는 부군 권오인씨(사업, 48)가 법열을 느끼며 적극후원을 하게 된 것이 커다란 기쁨이라고 한다. 수유리에 교단설립의 뜻을 세우고 부군과 우선 전세라도 교당마련을 상의했을 때 부군은 『처음부터 초라하게 시작할 수는 없다』면서 수유리 자택을 2층으로 증축, 2층에서 법회를 보도록 했다는 것이다. 김주무는 『젊었을 때의 정열은 사라졌지만 이제 마음이 환히 열려오면서 신앙의 참맛을 느끼게 된다』고 신앙의 체험을 토로하기도 한다. 슬하엔 3남1녀의 다복한 가정."
(하지만 김정인교도는 지병으로 일찍 열반에 들었다. 그러나 그 서원과 염원은 다음 생에 꼭 이루리라 믿는다.)
권오인 회장의 후반기 일로 가장 중요한 부분은 교도 수가 증가하여 교당 신축의 필요성이 제기되었다는 점이다. 그리하여 원기 73년 김의선 교무의 주관하에 교당 신축을 위한 천일기도 결제가 이루어 졌고 1000여명이나 참가 했다.
원기 54년 교당 신축을 하고 19년 만의 일이니 그동안 송천교도들의 서원과 신심의 결정체가 교화의 결실로 이루어져, 제2의 신축불사의 뜻을 모으니 자랑스럽기 이를 데 없었다.
그리고 5년 후 원기 78년 양정리교무의 주관 아래 교당 신축을 위한 2차 천일기도 결제가 이루어져 신축에 대한 열망과 바램이 가득하였고 훗날 교당 신축의 밑거름이 되었다. 권오인 회장은 안팎으로 여러 일을 일구어 내시며 80년 5대 희타원 유경희 교무 부임하던 해 사임을 한다. 그리고 그 다음 해 원기 81년 안타깝게도 건강 악화로 열반에 드시니 세수 67세. 다음은 원불교 신문의 부고란에 실린 내용이다.
"[867호] 1996년 03월 01일 (금)
원불교신문 webmaster@wonnews.co.kr
송천교당 권오인 교도회장
서울교구 송천교당 무산 권오인 교도회장이 지난 14일 병환으로 서울대학병원에서 열반했다. 향년67세.
경북 안동이 교향인 권 회장은 서울고와 연세대를 졸업한 후 혜화여자중고 교장을 역임했다.
이어 서독무역공사 무역부장을 지내다 1965년 서울 무역주식회사를 설립, 30년간 발전시켜 왔다.
원기 51년 범타원 김지현교무의 연원으로 입교한 권 회장은 원기 63년부터 송천교당 교도회장직을 수행해 왔으며, 서울교구 원덕회장, 서울청운회장을 역임하는 등 교단 발전에 기여했다.
권 회장의 발인식은, 법위가 예비 법강항마위, 사업성적 준 1등, 원성적 정 2등으로 거진출진 2좌위에 해당되어 교회연합장으로 지난 16일 서울대학병원영안실에서 봉행됐다. 장지는 원불교 왕궁 영모묘원."
4대 명산 박대평 교도회장(원기 81년 - 87년, 7년)
5대 희타원 유경희교무가 부임하고 다음 해인 원기 81년에
교도회장으로 명산 박대평 교도가 선출되었다. 부회장으로는 서삼성, 전지완, 김종수 교도였다. 18년간 권오인 교도회장이 안팎으로 이름을 날리고 난 뒤였다. 법률사무소 사무장으로 일하고 있던 박대평 교도회장은 경제적으로 넉넉하지 않았던 터라 회장직을 사양했었다. 그러나 신심․ 공심‧ 공부 심으로는 따라갈 사람이 없었던 지라 부족한 부분은 교도들이 채우겠다고 걱정하지 말라며 등떠밀어 회장이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박회장은 집안일보다 교당일이 우선이었고, 교무님 말씀이라면 100% 수용하며, 교도들을 아끼고 살피는 마음이 한결 같았다. 승타원 송영봉 교무는 아영교당 첫 교무시절 청년 회원이었던 박회장을 보고 “그 때부터 남다르더니 회장 노릇을 저렇게 잘한다”며 칭찬하셨다 한다. 희타원 유경희 교무가 처음 부임할 때 허리가 아파서 3개월 늦게 부임하게 되었는데 허리를 쓰다듬으며 “어서어서 회복하시고 건강 찾으셔야 합니다”고 자상하고 인정스럽게 염려해 주시는 것은 물론 교무님을 피붙이 보다 더 위하여 교무님도 많이 의지가 되었다고 한다. 이 당시 교당을 둘러보시고 전기도 고치고, 못도 박고하면서 자질 구레한 일을 솔선수범으로 함께 하셨던 분이 혜산 최정욱 교도이다. 박회장과 한 몸이 되어 교당의 대소사를 다 하시고 남자,여자 교도 구분없이 김치죽을 나누어 먹으며 몸과 마음을 다 바치셨다. 무슨 일이든 자리를 채워주고 일구월심 교당을 위해 살으셨으나 일을 했다는 상이 없이 조용히 사라지는 공부인이기도 하여 원기 85년 법강항마위에 승급하셨다. 또한 이 시기에 기산 서삼성 부회장의 역할도 혁혁했다. 꽃시장이나 교도님 순교할 때나 본인 자가용으로 교무님을 모시고 다니면서 교당일이 곧 자신의 일처럼 했다. 신심덩어리요 공심덩어리인 서삼성 교도를 만난 것은 교무의 복이 아닐 수 없다고 희타원 교무님은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교당일이라 하면 앞장서서 하였고, 의로운 일에는 물불을 가리지 않고 적극적으로 나섰던 기산 서삼성 부회장은 원기 87년 6월 9일 영산성지순례 중 심장마비로 갑자기 열반에 들어 교무님과 교도들의 아픔과 상처는 송천교당의 아킬레스가 되어 한동안 성지순례를 나서지 못하기도 하였다.
박회장 재임 시 원기 81년 7월에는 교당 뒤 한옥 86평을 3억 5천만 원에 매입하여 청소년 법당을 신설하고 이후 부교무 들의 헌신적인 노력에 의해 청소년 교화가 매우 성행하는 시기였다. 그리고 봄가을 2회씩 총력법회를 시작함으로써 60개였던 좌복을 늘리고 신발장을 올리는 등의 변화를 갖게 되었다. 총력법회는 가족교화는 물론 주위인연들을 교화하는 동력이 되기도 하였다.
원기 83년 11월 8일에는 교당 창립 30주년 경축기념 대법회를 갖기도 하였다. 30년의 역사가 담긴 자료들을 모아 사진 전시를 하고 청소년 장기자랑과 젊은 교도들의 무용으로 기쁨을 함께 나누는 자축행사 이었다. 그러나 이 때 정리된 자료들은 50년사 편찬을 준비하는데 매우 중요한 부분이 되었다.
연원교당으로 부개교당을 낼 때에도 해야 된다는 사람과 하지 말자는 의견이 맞서 말이 많았으나 일구월심 교당을 위하는 박 회장의 기운으로 원기 84년 11월에는 부개교당 신설을 위한 법당, 불단, 생활관 공사를 착수하게 되었는데 설계 및 공사감독은 구산 박자경 교도가 전담하여 날마다 출퇴근을 하여 임무를 완수 하였다. 그리하여 원기 85년 3월 26일 연원교당으로 부개교당 신설 봉불식을 400여명이 참가한 가운데치를 수 있었다.
교당 신축불사에 대한 염원이 하늘을 뚫을 정도였고, 원기 86년에는 교당 신축기금을 위한 월 500만원의 62개월 적금을 시작하였는데 명타원 김효명 교도가 관리하는 수고로움을 더했다. 원기 87년 1월에는 교당신축 기금 조성을 위한 만인불사 기도를 시작하였는데 도타원 김상도 교도가 관리하는 일을 맡았다. 그리고 권선에 응한 분들에 대한 감사편지는 최상필 교도님이 담당하여 무려 1000여 통 이상의 편지를 보냈다 한다. 이렇게 7년간에 걸친 박회장의 활동은 희타원 유경희 교무에게 큰 힘이 되었다.
후에 편찮으시다고 해서 문병을 갔는데 암병동에 계셔서 너무 놀라 교무가 펑펑 울자 “나 못갑니다. 교무님 두고 못갑니다. 일어날 겁니다”라며 교무님을 달래던 박 회장은 췌장암을 이기지 못해 원기 89년 2월 27일 끝내 열반의 길을 떠나게 되었다. 7남매의 자녀 중 출가자가 나오길 간절히 염원하셨으나 그 뜻은 이루지 못하였고 큰딸과 둘째딸이 일산교당에서 주인노릇을 하고 있으며 아들들은 송천교당에서 4축2재에 참여하고 있다. 엄한 듯 다정다감하신 아버지로 집안에서도 법문을 기초로 해서 말씀해 주시면서 자녀들의 얘기에 귀를 기울여 주셨던 아버님의 모습이 늘 그립다고 하며 고축문을 읽는 목소리가 매우 좋아서 따라하고 싶은데 잘 안된다고 회고하는 큰 딸 화타원 박유은교도는 “아버님의 원불교 사랑은 최고였다”고 찬사를 아끼지 않고 있다.
5대 한산 전지완 교도회장(원기88년-원기90년, 3년)
앞에 나서기 싫어하는 조용한 성격이었지만 교무를 보필하는 차원에서 교도회장을 수락하신 분이 5대 한산 전지완 교도회장이다. 부회장으로는 연타원 김종수,
하산 신직환, 운산 김용언 교도였다. 연타원 김종수 부회장은 경제적으로, 하산 신직환부회장은 제반 서류검토에 함께 하였으며, 운산 김용언 교도는 교무님을 보필하여 순교하는 것으로 교화를 보조하였다. 이 때에는 교당 신축의 과업을 이루는 시기였다. 총력법회와 순교에 정성 다해 교화하는 희타원 유경희 교무 덕에 교당이 비좁아서 더 이상 신축을 미룰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교도회장단 중심으로 교당신축 추진위원회를 구성하고 공사를 추진하게 되었다. 교당건물이 있었던 자리에 건축을 하자니 축대가 높았고 주변에 뺑둘러 주택들이 있어서 애로가 많을 것으로 예상되어 다른 곳을 물색하기도 하였지만 돈이 부족해 결국 이전은 포기하고 어렵지만 교당있던 자리에 공사를 하기로 하였다.
설계는 가람건축에서 맡았고, 공사 시공은 메인 씨엔씨 건설회사에 낙찰되어 공사비 10억으로 계약하고, 원기 89년 5월 구교당 건물 철거 및 토목공사는 신종원교도(초타원 최만선교도 부군)가 맡아 착공하였다. 동년 6월 6일에는 이성택 서울교구장과 이선종 특별교구장 등 150여명의 내빈을 모시고 교당신축 기공식을 가졌다. 그러나 땅을 파놓고 빔을 박는 공사를 함에 있어서는 주변의 집들이 낡고 가까워서 몹시 걱정되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빔 박는 날을 관공서가 다 노는 일요일에 하기로 하고 교당관계자들은 일체 나타나지 않고 공사하는 분만 남겨두었다. 역시나 빔 박는 날에 동네가 떠나가게 시끄럽자 동네사람들이 나와서 경찰서, 구청, 소방서등으로 전화를 하는 등 소란이 벌어졌다. 그런 가운데 빔을 박는 작업은 완료를 하였지만 다음날 출동한 관공서들에서 민원에 대한 화답으로 공사중단 명령을 내렸다. 난감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희타원 교무님과 명타원 김효명 교도가 동네 유지를 찾아갔다. 그러나 문도 열어 주지 않고 냉대하는 분에게 오랫동안 문 앞에서 통사정을 하였더니 나중에 문을 열어주어 들어가서 싹싹 빌었다. 마침 천주교 다니던 분이라 종교시설이 인근에 들어오면 복 받는 일이지 않느냐며 설득하기도 하였다. 관공서도 찾아가 동네사람 달래보겠노라고 싹싹 빌어서 허가증을 받아와 다시 공사를 재개할 수 있었다. 그러나 교당을 하나 이루어내는 데는 대중이 많기 때문에 순간순간 조율해야 되고 헤쳐 나가야 하는 일이 많은 법이라 교당 외벽을 빨간 벽돌로 할 것인지, 대리석으로 할 것 인지부터 시작해서 하수구 구멍이 크니 작니 하는 등의 크고 작은 일등이 많았다. 특히 당시 「송천교당을 사랑하는 모임」을 하면서 교당 신축에 대한 다양한 의견을 제시했던 분들과의 조율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러나 전지완 회장은 그 어떤 이야기에도 “다 송천교당을 위해서 하는 말이다”고 긍정적으로 수용하면서 묵묵히 책임 있게 일을 해 냈다. 전회장이 운영했던 공장은 공장장등 직원들에게 맡기고 전 회장은 교당 신축에만 몰두하였던 것이다. 아침이면 박카스 사들고 공사현장을 찾아 일하시는 분들을 격려하고 현장을 지키면서 무사히 교당신축이 이루어지길 염원하는 순간 순간이었다. 특히나 축대 등 위험한 기초공사 기간인 두 달 정도는 교당에서 살다시피 하면서 일을 진행하였으며 염념불망 안전사고 없길 기도하였다.
교당 신축 기간 동안 활용할 법당으로는 여기 저기 건물을 빌리려 하였으나 1년도 안되는 6개월간 빌리는 일이 여의치 않아 번동2단지 복지관 지하 체육관을 빌려서 법회를 보았다. 교무님들 숙소는 두산아파트를 분양받은 이순정 교도의 아파트를 전세로 빌려 입주하였다. 교당 짐은 교무님 남동생집과 김창복 교도집 그리고 아파트에 나누어 보관하였다. 당시 건축과 관련한 일을 하는 훈산 장성훈 교도나 최일훈교도(삼타원 이중락 법사의 큰 아들)의 자문도 있었으며, 교도들의 술자리가 있을때면 집집마다 모셔다 드리는 역할을 감당하며 불평이나 힘들다는 말없이 감사한 마음으로 묵묵히 회장으로서의 책임을 다하였다.
이렇게 하여 3대 동타원 김의선 교무때 시작된 교당신축불사의 염원은 5대 유경희 교무때에 이르러 많은 우여곡절 끝에 결실을 보게 되었다. 대지면적 186.95평에 건축면적 11.41평, 연면적 585.14평으로 지하주차장,1층 소법당 등,2층 대법당, 3층 생활관 등 총 4층 건물로 지어진 송천교당의 총 공사비는 집기포함 12억 6천여 만원이었다. 공사 시작한 지 5개월 만인 11월 6일 소법당에서 첫법회를 보았고, 12월 19일에는 명절대제를 올렸다. 원기 90년 2월 16일 신축준공이 떨어지고 4월 3일 많은 분들의 축하와 격려속에 봉불식을 거행하게 되었으니 참으로 거룩한 불사가 아닐 수 없었다. 희타원 유경희 교무님과 한산 전지완 회장을 필두로 모든 교도들의 합심합력아래 이루어낸 금자탑이 아닐 수 없다.
6대 양산 서도승 교도회장(원기 91년-93년, 3년)
교당의 오랜 숙원사업이었던 신축불사와 봉불식까지 마친 다음해인 원기 91년에 6대 교도회장은 양산 서도승 교도였다. 아내 도타원 김상도 교도의 연원으로 원불교에 입문하여 사회 생활과는 달리 원불교에서는 늘 부족하다고 생각하여 교도회장을 고사하였으나 주위로부터의 추천을 떨치지 못하고 회장직을 수행했다. 김효명, 신직환, 김용언, 이은성 부회장들의 지원아래 수행하게 되었다.
이 시기에는 교당 신축불사가 끝나고 공부에 주력해야 할 때였다. 양산 서도승 회장님은 각 단 단장 중앙은 물론 모든 교도님들을 자상하게 챙기고 다독여주면서 교도들이 화합할 수 있도록 하는 역할을 주로 담당하였다. 그러던 중 원기 91년 3월 12일에 여성회 창립법회를 가져 초대회장으로 박유은 교도를 선출했다.
그리고 다음해인 원기 92년에는 12년간 송천교당에 계시면서 신축불사를 헌신하셨던 희타원 유경희 교무가 떠나고 6대 온타원 박인교 교무님을 맞이하였다. 새로 지어진 법당에서 기쁘게 공부하던 중 큰 경계에 봉착하게 된다. 그것은 다름아닌 희타원 유경희 교무가 최00 교도에게 빌려준 천 만원이 회수되지 않았음을 알게 된 00교도의 이의제기로 불거졌다. 18년간 교도회장을 역임하며 크게 기여했던 무산 권오인 교도회장님이 열반하시고 그 부인이 어려운 일에 처해 급히 돈을 빌려 달라 해서 어쩔 수 없이 빌려주고 받지 못한 채 전별하신 것이 화근이었다.
그 돈을 당장 회수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하는 00교도로 인해 난감한 입장에 처한 회장단은 각 2백 만원씩 부담하여 그 문제를 해결하였으나, 후에 그 소식을 접하게 된 희타원 교무님이 개인적으로 천 만원을 보내와 회장단에게 다시 돌려주는 일들을 겪게 된다. 그 과정에서 12년간 헌신적으로 송천교당에 계시면서 온갖 수고를 아끼지 않으셨던 교무님에게 드렸던 전별금을 다시 돌려받게 된 미안함과 송구스러움이 회장으로서 엄청난 심적 부담이었으리라 짐작이 간다. 그리하여 6대 교도회장이었던 양산 서도승님은 회장직을 물러나면서 교무님을 잘 모시지 못하고, 부회장들에게 미안하고, 교당 내부 일이 외부에 까지 알려진 부분에 대해 매우 죄송하다는 이임인사를 하기도 했다. 그리고 신축공사 이후 건물 여기저기에서 누수현상이 일어나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동분서주 하는 등 서회장의 3년 임기는 문제를 해결하는 역할로 자리매김 하였다.
7대 운산 김용언 교도회장(원기 94년-99년, 6년)
40대 중반부터 교도 부회장을 6년 해 왔던 운산 김용언 교도님이 7대 교도회장을 맡게 되었으니 원기 94년이었다. 93년부터 비전수립에 대한 설명을 듣고 고문 구산 박자경 교도의 지도아래 94년 3월 22일 비전을 수립하였으니
「교단 100주년 CJ 송천 100 × 3 = 300 하자 하자 하자」 였다.
그러나 비전 구호 선서식은 원기 97년 3월 11일에 이루어졌다.
「 SC 100 × 3 = YES 300 」
원기 95년 3월 7일부터 봉공회에서 교도자녀들을 위한 장학금 지급이 시작되었고, 송천교당에서 배출한 김대해 예비교역자가 간사근무를 마치고 수학과정에 들어가는 성과도 있었다. 원기 97년에는 4월 9일에는 교당 옥상을 비롯한 외벽 방수공사와 페인트 공사등을 하였으며 4월 24일에는 교화대불공을 이루기 위한 지역홍보가 이루어졌다. 대각개교절을 전후하여 교당을 중심으로 한 인근 아파트, 인구 이동이 많은 전철역 2개소를 선정하여 3개조로 편성하여 홍보지를 돌리는 노력을 하기도 하였다. 원기 98년에는 승강기를 유압식에서 로프식으로 교체하고 전기승압공사를 하였으며 10월에는 4층 생활관 도배 및 싱크대 교체 등 보수공사를 하였다. 이는 6대 온타원 박인교 교무님의 정년퇴임에 따라 새로운 교무를 맞이하기 위한 작업이기도 하였다. 운산 김용언 회장은 참으로 부지런하였고, 늘 교당을 내 집안처럼 드나들며 여기 저기를 살폈다. 때론 고치기도 하고, 때론 소리없이 장비를 사다가 설치를 하며 교당 살림을 했다. KT에 근무했던 경력이 바탕이 되어 교당의 인터넷 환경을 개선하거나 전화기를 고치거나 할 때에도 한결같은 모습으로 임했다. 그리고 모든 교도들에게 친절하고 자상한 모습으로 ‘우리 회장님’에 대한 신뢰도와 친밀도는 매우 높았다.
원기 99년에는 예타원 배현송 교무가 7대 주임교무로 부임하여 그동안 중단되었던 번동복지관 마음공부 법회와 청년회 재창립 법회를 가졌다. 국가적으로는 세월호 침몰 사건으로 인해 우리 사회의 만연한 안전불감증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우던 시기여서 우리 교당에도 위험요소가 없는지 돌아보게 되었다. 그리하여 오래된 차량을 정리하고 K3 차량을 새로 구입하였고, 정원의 축대 밑 보강 및 건물 옆에 생긴 씽크 홀을 채우는 등 안전을 위한 공사를 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양구군 동면 팔랑리 약 2,500평 땅을 교당교의회를 통해 100년성업회에 희사(1억 2천 5백만원)함으로써 우리교당에 배정되었던 100년 성업 성금의 부족분을 보충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그동안 진행되어 왔던 총력법회를 「초청대법회」로 명칭을 바꾸고 정성을 들인 결과 350여명이 참석하는 쾌거를 이루기도 하였다.
8대 담산 이성택 교도회장
교당교의회에서는 아프리카에 일시 나가있던 담산 이성택 교도를 8대 교도회장으로 선출했다. 부회장으로는 훈산 장성훈, 창타원 윤영원, 매타원 송덕현 교도가 함께 했다. 때는 바야흐로 원기 100년을 맞이하는 순간이었다. 1월에는 교당에서 이루어지는 일들에 대해 정보를 공유하기 위해 교화요람과 교화달력이 제작되어 모든 교도들에게 배포되었다. 그리고 1월 18일 서울에서는 두 번째로 옥상에 햇빛발전소(12KW)가 설치되어 준공식을 가졌다. 바야흐로 에너지 자립 및 발전을 위한 첫 발걸음이었다. 또한 4월 대각개교절을 전후하여서는 은혜나눔 장학회를 설립하였으며 그 첫 재원은 초파일 관등비 전액을 기초자금으로 하기로 하였다. 원불교 100년을 맞이하여 교당이 지역사회에 어떻게 개방되고 어떻게 자리매김 할 것인지에 대한 깊은 토론과 논의 과정을 거쳐서 3월 10일 송천행복대학과 송천마음학교를 오전, 오후로 나누어 개설하였다. 물론 이를 위해 3층 대법당 음향설비 및 프로젝트를 교체하고 봉고차를 구입하는 등의 준비도 이루어졌다. 건물전체를 LED등으로 바꾸고 자가용 태양광을 벽면에 설치하고, 에너지 슈퍼마켓을 설치하는 등의 과정 속에 서울시 에너지 경진대회에서 우수상을 받기도 하였다. 건물 전체 LED등 교체 작업에는 정우현교도와 김신우 교도의 헌신적인 노력이 함께 했으며 이성택교도회장과 수산 김인수 교도등이 보조를 하기도 했다. 교무들이 교화에 전념할 수 있는 여건 조성을 위하여 재가교도들의 역할을 확대하면서 사무장 제도를 도입하는가 하면, 취업난으로 웃음을 잃고 사는 젊은 남녀를 위한 코믹 맞선 콘서트인 「최욱의 북콘서트」를 개최하여 청년교화의 가능성을 경험하기도 하였다.
10월에는 청운회 발대식도 가져 초대 회장으로 김인수 교도를 선출하였다. 12월 교당교의회에서는 원기 108년까지의 송천교당 중장기 계획을 수립하였다.
공양을 수월하게 하기 위해 주방환경 개선으로 식기세척기 및 소독기를 설치하였고 행복대학 운영과 관련 국고보조금 지원사업이 확정되어 2천만원의 지원을 받게 되었다. 이것은 교당개방사업의 일환으로 시작한 행복대학이 발전하는데 큰 밑거름이 되었다. 문화탐방이나 6070 행복나눔 콘서트, 은혜나눔 웃는얼굴 사진전등을 개최하여 보다 적극적으로 지역주민의 웃음과 행복을 확산하여 행복한 마을공동체를 만들어 가는데 크나큰 지원이 되었던 것이다. 아울러 지역주민들을 대상으로 명절음식 나누기, 복날맞이 삼계탕 공양하기, 은혜나눔 장학금 전달들을 하고 지역행사에 적극 참여하는 등 지역사회와의 소통을 통하여 교당이 주민들의 아름다운 이웃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특히 다른 사람 앞에서 노래한번 해본 적 없는 이성택 교도회장은 3년간 행복대학에 참석하여 노래도 하고, 문화탐방, 공연 등의 행사에 적극 참여하면서 행복대학을 키우는데 정성을 다해 왔다. 물론 안타깝게 올해 열반하신 수산 김인수, 최일형 교도들의 헌신적인 합력아래 가능했다. 한편으로는 영타원 송정심 교도와 매타원 송덕현 자매가 초창기 합력해준 준비과정이 있었고 배의진 사무장도 한 몫을 했다. 아울러 지금까지도 행복대학의 주축을 이루며 키워온 창타원 윤영원 부회장(행복대학 반장)과 김법전 교도(행복대학 총무)의 노력이 한데 모여 등록인원 300명, 평균출석 70-80명으로 성장해 왔다.
이렇듯 교도회장을 비롯한 회장단, 그리고 각 단체장 및 모든 교도들의 합력으로 신심 공심 공부심을 키우며 성장해온 송천교당의 50년 역사는 귀중한 자료가 되어 더욱 발전할 수 있는 밑거름이 되길 염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