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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주西周시대 ① 봉건, 북망산을 가다, 성강지치, 도로이목, 방민지구 심어방천
드디어 천하는 주周나라 몫이 되었고, 발은 천자로 등극하게 된다. 무왕武王(발)이 무척 바빠졌다. 먼저 하나라의 시조 우임금 때 천자의 상징으로 만들었다는 구정九鼎부터 챙겼다. 왜? 이제부터 자기가 천자 노릇하려고. 신적 존재를 뜻하는 ‘제帝’라는 임금의 칭호도 버렸다. 이제 제법 똑똑해진 백성들이 임금은 신이 아니라는 사실을 다 알고 있었으니까. 다음으로 수도를 호경鎬京(지금의 시안西安-서안)으로 천도하고, 선친 창昌에게 문왕文王이라는 시호를 부여했으며, 그 다음 차례가 개국공신들과 형제, 일가친척들에게 논공행상이었다.
일등공신 강태공에게는 비옥한 산동山東(산뚱) 지역을 주어 다스리게 했으니 제齊나라가 된다. 달기를 동양의 헬레네로 교육시켜 주왕의 몰락을 도모했던 동생 단旦에게는 노魯나라를 주어 다스리게 했다. 그 동생 소공에게는 연燕나라 땅을 주었으며, 숙선에게는 관管나라, 차례차례 다른 동생들에게는 채蔡나라, 위衛나라를 주어 다스리게 했다. 상(은)나라 주왕紂王의 자손들에게도 송宋나라를 주어 불만세력을 원천적으로 차단하고자 했다. “형님들 어디 계셔?” 하고는 집 나간 형들까지 수소문하여 변방 오랑캐 땅에 오吳나라를 세웠음을 알고 제후국으로 삼았다.
이처럼 수하의 땅을 갈라 여러 공신들에게 나누어 다스리게 하고 각 나라로부터 공물과 군사력을 거두는 통치시스템을 우리는 ‘봉건제도封建制度’라 한다. 중앙정부가 직접 행정관을 파견하여 지방을 통치하는 중앙집권적인 군현제와 달리, 수도와 일부 요충지만 직접 통치하고 다른 지방에는 제후나 영주를 임명하여 세습하여 다스리게 하는 제도인 것이다.
본디 ‘봉封’이란 흙을 돋운 둑이란 말이니 봉건이란 곧 여러 개의 둑을 쌓는 뜻이 된다. 그런데 이 ‘봉건封建’이란 말이 근대에 와서 ‘신분이나 지위 등의 상하관계에 따른 질서만을 중히 여기어 개인의 자유나 권리를 존중하지 않는 낡은 제도’라는 다른 뜻으로도 쓰이게 된다. 주나라 이전부터 존재했던 수많은 크고 작은 제후국에서 볼 수 있었듯이 예전부터 봉건제도와 유사한 형태의 체제는 있었지만, 주나라 때 비로소 정치·사회 제도로서 정비되어 실시된 것이다.
주나라 봉건제 하에서는 각 나라의 제후들을 왕王이 아닌 공公이라 했으며, 공의 아들은 태자太子가 아니라 공자公子라 불렀다. 무왕은 여러 제후국 공들 중 제나라의 강태공을 호경에 두고 정사를 논의했는데, 특히 무왕의 동생이자 노나라 공인 단을 소중하게 여기어 훗날 사료가들은 제후국 이름 대신 천자의 나라 이름을 넣어 ‘주공周公’이라 했다.
아시다시피 봉건제封建制가 중국에서만 존재했던 제도는 아니다. 유럽에서도 오랜 기간 봉건제가 시행된 적이 있었다. 다만 고대중국과 중세유럽의 봉건제도가 일부 공통점이 있지만 대체로 서로 상이하다. 한자문화권에서 유럽에서 시행되었던 Feudalism을 중국의 봉건 제도로 번역함으로써 같은 용어로 사용하고 있을 뿐이다.
혈연에 기초한 종법 질서를 중심으로 통제력을 유지했던 중국의 봉건제와 달리 유럽의 봉건제는 혈연이 아닌 쌍무적 계약 관계로 통제력을 확보했다. 주군은 보호를 제공하고 가신은 충성을 제공한다는 상호간의 의무를 기초로 계약을 맺는 것으로, 농노와 영주 사이의 관계가 이에 해당했다. 쌍무적 계약이었으므로 의무가 지켜지는 한 영주의 거취는 자유로웠으며, 혼인과 상속을 통해 다수의 봉토를 획득함으로써 여러 상위 영주를 가지게 되는 경우도 많았다.
심지어 국왕조차도 이런 식의 혼인과 상속을 통해 직할령 혹은 직속 영주를 확대하는 정책을 취했다. 충성을 맹세한 상위 영주가 다수이다 보니 군사적 봉사를 제공할 때 어느 영주를 우선으로 두는지에 대한 계약 관계가 따로 존재하기도 했다. 중국에서는 제후국의 수장과 주요인사를 공公이라 했지만, 중세유럽에서는 귀족의 작위를 구분하여 각각 공작, 후작, 백작, 자작, 남작으로 호칭했다. 간단하게 이들의 신분이나 알고 넘어가자.
공작公爵[Duke]
라틴어 dux에서 나온 말이다. 로마 시대에는 지방군대의 지휘관을 의미하는 말이었지만, 로마 멸망 후 프랑크왕국에서 넓은 영토를 가진 사회적 지도자들의 호칭이었다. 공작이란 왕족이 갖는 작위라는 오해도 있지만, 1600년대까지만 해도 공작의 작위는 왕실과 직접적인 연관이 없었다.
후작侯爵[Marquess]
국경지대[marches]의 봉토를 소유한 백작을 의미하는 말이었다. 국경은 특별한 지역이었기에 주로 충성심이 높은 신하들에게 맡겨졌다. 백작은 하나 이상의 영지를 소유할 수 없다는 프랑크왕국 법으로부터 자유로운 직위였기 때문에 후작은 백작보다 한 단계 위로 취급되었다.
백작伯爵[Count]
라틴어 코메스comes에서 나왔다. 로마시대에 코메스는 황제를 측근에서 모시는 관리였으나, 프랑크 왕국에서는 지방사령관을 의미했다. 영국에서 백작을 뜻하는 단어 ‘얼Earl’은 노르만 어에서 지도자를 의미하는 ‘얄Jarl’에서 나왔다. 공작이나 후작보다 하위 작위라는 느낌이 강하지만, 세력이 강한 백작들은 공작과 세력을 겨누기도 했다. 가끔 백작이 공작으로 지위가 격상되는 일도 있었다. 백작이라는 단어에서 ‘나라[country]’ 라는 영어 단어가 파생되기도 했다.
자작子爵[Viscount]
본디 백작[count]의 보좌관을 의미하는 말이었다. 실제로 프랑크왕국의 vicecomites는 백작의 대리인이나 부관으로서 대신 영지를 관리하는 일을 맡았다. 백작처럼 자작의 작위 역시 세습되었으나, 작위 자체만으로는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나중에 자작 작위는 백작 지위를 상실한 사람들에게 부여되기도 했다.
남작男爵[Baron]
지금은 보통명사 ‘귀족’이라 번역되는 Baron은 프랑크왕국에서 평민을 의미하던 단어 baro에서 나왔다. 로마가 멸망한 후 중세 초기 혼란기에서 많은 평민들이 신변보호를 위해 권력자와 주종관계를 맺었는데, 이런 관계를 통해 큰 땅을 소유한 영지를 남작령[barony]라고 불렀고, 땅의 주인이 귀족일 경우 남작, 평민일 경우 남작령의 주인[seigneur de la baronnie]이라는 명칭을 갖게 되었다. 프랑스에서는 18세기 말까지도 남작 령을 자유롭게 매매할 수 있었으며, 이런 이유로 남작은 하위귀족의 작위라는 이미지로 굳어지게 되었다.
봉건제 이야기가 지나치게 길어졌다. 다시 주 왕실로 돌아가 보자. 대륙의 세 번째 왕조 주천자周天子였던 무왕, 반란과 창업이라는 많은 업무를 감당해내기 너무 힘들었던 탓일까? 권좌에 오른 지 딱 2년 만에 그만 세상을 하직하고 만다. 뒤를 이은 태자가 성왕成王이었는데 열세 살, 나이가 너무 어렸다. 숙부인 노나라 주공 단이 섭정을 하게 된다. 역사에서는 그를 주공 단이라 하지 않고 그냥 주공周公이라 한다. 주나라 대표 공이란 뜻으로.
아무튼 주공이 성왕을 섭정하자 주위에서 조선조 세조처럼 조카를 밀어내고 왕권을 잡으려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가 많았다. 그의 동생인 관숙과 채숙이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한편 무왕은 상나라 주왕의 아들 무경武庚을 국론통일 차원에서 제거하지 않고 은후殷候라는 작위까지 주었는데도 호시탐탐 반란을 꾀하고 있었다. 그런 무경에게 관숙과 채숙이 헛바람을 불어넣었으니, 이들과 결탁한 무경은 옛 상나라 귀족들과 연합하여 대규모 반란을 일으켰다. 그러나 주공에 의해 제압됨으로써 관숙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채숙은 국외로 추방되었으며 무경은 사살되었다. 반란에 참여했던 상나라 사람들은 모두 새로운 도성을 만들어 그곳에 이주시키고 감시하게 하였는데, 새 도성 이름이 낙읍洛邑(뤄이-훗날의 낙양洛陽)이었다. 이로써 주나라는 두 개의 도성을 가지게 되었으며 서쪽의 수도 호경을 종주宗周라 했고 동쪽의 낙읍을 성주成周라고도 불렀다.
낙양 땅 십리 허에 높고 낮은 저 무덤은
영웅호걸이 몇몇이고 절세가인이 그 누구냐
…(하략)
우리 민요 <성주풀이>다. 낙양은 그 낙양이지만 성주풀이와 성주成周는 전혀 관련이 없다. 노래 제목 ‘성주’는 새로 집을 지었다는 뜻의 ‘성조造成’의 변음일 뿐이다. <성주풀이>는 새 집을 지은 다음, 벽사의 의미로 불렀던 노래였다. 그런데, 십리 허(하)에 높고 낮은 저 무덤들이 있는 곳은? 북망산北邙山이다. 낙양에서 북쪽으로 10리 쯤 떨어져 있어 그런 별명이 붙었다. 본이름은 그냥 망산邙山이다.
수천 년 동안 공동묘지로 사용되어 왔던 망산, 그래서 ‘북망산에 가다’라는 말은 곧 ‘죽다’로 이해된다. 마치 ‘요르단강을 건너는 것’처럼. 패망후 당나라로 끌려왔던 백제의 마지막 임금인 의자왕과 여러 왕자 그리고 백제부흥을 도모하다가 실패하고 당나라로 들어와서 관리로 지냈다는 흑치상지黑齒常之도 죽은 다음 여기에 묻혔다. 이건 ‘팩트’다. 공주에 있는 의자왕 무덤은 가묘일 뿐이다.
다시 돌아가자. 상기의 일들은 모두 주공의 섭정기간에 이루어진 것들이었다. 이뿐 아니었다. 주공은 강태공 등과 논의하여 일련의 법률과 제도를 정비, 조정의 통치체제를 완벽하게 구축해 놓았다. 성왕이 스무 살이 되자 주공은 7년 동안 가지고 있던 모든 정권을 그에게 물려주고 미련 없이 노나라로 돌아갔다. 성왕이 정치를 하기에는 조건이 매우 좋았다. 주공이 그 토대를 튼튼하게 구축해 놓았기 때문이다.
사실 강태공은 주나라가 탄생한 이후 크게 도움이 되지 못했다. 창업에는 강했지만 수성 작업에는 젬병이었다. 취미(낚시)까지 끊고 무왕을 보좌했지만, 제 마누라 앞에서 물동이를 깨던 성격 그대로 강성으로 일관했다. 그에 비해 주공 단은 노련했다. 어르고 달래는 재주와 함께 결정적일 때 매를 들 줄 아는 사람이었다. 주나라의 토대는 주공 혼자서 완성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훗날 유가儒家에서 그를 임금 그것도 무왕 정도의 반열에 올려놓고 그토록 추종해댄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주공 단의 노력으로 성왕의 뒤를 이은 그의 아들 강왕康王 대에도 마찬가지로 태평성대를 구가했다. 온나라 백성들이 평화와 풍요를 누렸고 천하가 안정되어 40여 년간 형구刑具를 사용하지 않았다고 하니 주나라 역사상 가장 강한 시기였다. 그래서 역사에서는 이 시기를 ‘성강지치成康之治’라 했다. 성왕과 강왕이 다스리던 시대, ‘태평성대太平聖代’라는 뜻이 된다.
세월은 참 잘도 흘러간다. 300년이 지나는 동안 주나라는 열 번째 임금 려왕厲王을 맞게 된다. 이 양반은 본디 태자 시절부터 공부는 뒷전이었고 오로지 주색잡기와 돈 쓰기가 취미인인물이었다. 늘 쓸 돈이 부족하여 임금이 되면 양껏 돈을 써보리라 작정했는데, 막상 왕좌에 올라 나라 금고 뚜껑을 열고 살펴보니… 이런 ‘개실망’이 있을 수 있나! 나랏일은 다 제쳐두고 제가 쓰기에도 부족했다. 즉시 세금징수에 소질이 있는 인재를 하나 발탁했는데 하필이면 영이공榮夷公이라는 자였다.
작자의 성품부터 살펴보자. 그는 불의에 침묵하거나 참을 줄 알았고, 윗사람의 말을 곧 하늘님의 말씀으로 알아들었으며, 아랫사람은 모두 개돼지로 우대했다. 기름 짜는 일에 특히 발군의 기량을 보였는데 남들이 다 버리는 깻묵을 모아 얼마 남지 않은 기름을 짜내는 알뜰함까지 갖추고 있었다. 한마디로 백성들의 고혈을 빼내는 데에 관한 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재주를 가졌다는 말씀이다.
주나라 초기 무왕은 모든 백성들이 산과 강 호수를 공유하게 했다. 누구나 산에서 사냥을 하고 땔감을 조달했으며, 강이나 호수에서 물고기를 마음껏 잡을 수 있었다. 영이공은 바로 여기에 주목하여 모든 산림과 강, 호수를 국유화하고 허가 없이 사냥하거나 물고기를 잡으면 엄청난 세금을 징수했다. 감시도 모자라 행인들을 마구잡이로 불심검문하여 과실이나 사냥감, 물고기를 발견하면 다 회수하고 그것도 모자라 세금을 물렸다. 자연히 왕실 금고는 넘쳐났고 려왕의 영이공에 대한 신임은 더욱 두터워졌다. 비례하여 일반 백성들은 물론 귀족이나 대신들의 불만은 깊어만 갔다.
주왕실 종친 중에 소공召公이라는 제법 바른 사람이 있었다. 이 양반이 도성 사람들을 만나보니 하나같이 려왕의 실정과 폭정을 규탄하고 있었다. ‘어마뜨거라’ 하고는 잽싸게 돌아와 려왕을 알현하고는 도성 사정을 보고했다.
“지금 민심이 매우 흉흉합니다. 온 나라 백성들이 모이기만 하면 조정에 대한 불만을 토로하고 있습니다. 이러다가 난이라도 일어나지 않을까 심히 염려스럽습니다.”
“허어, 어디 임금이 백성들에게 욕을 먹어서야 쓰나. 과인이 어떻게 하든지 백성들의 불만이 나오지 않게 해 보리다.”
소공은 제 간언이 받아들여졌나 보다 하고는 기쁜 마음으로 궁을 나왔는데… 착각이었다. 언로를 통제하겠다는 뜻이었다.
바로 다음날부터 조정을 비난하는 자를 엄벌에 처한다는 방이 곳곳에 나붙었고, 불만을 표시하다가 잡혀 치도곤을 당하는 사람들도 부지기수였으며 심지어 참수형을 당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다보니 길거리에서 아는 사람을 만나도 간단하게 목례만 하고 서로 제 갈 길을 갈 뿐, 도성은 침묵에 휩싸이게 되었다.
이 같은 현상을 ‘도로이목道路以目’이라 했는데, 길거리에서 아는 이를 만나도 눈인사만 했다는 고사에서 나온 말이다. 숨은 뜻은 ‘정치적 탄압이나 통제가 심해 언론의 자유가 없는 상황’을 일컫는 표현이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또 한 신하가 려왕에게 “백성의 입을 막는 것은 강물을 막는 것보다 위험하옵니다[방민지구防民之口 심우방천 甚于防川].”라 고언을 했지만 마이동풍이었다. 이 관용구 역시 ‘언로言路의 중요성’을 가리키는 말로 지금까지 종종 인용되고 있으니 그게 다 려왕의 공로가 아니겠는가.
소공의 말이 딱 맞아떨어졌다. 참고 참았던 백성들의 분노가 봇물처럼 터져 나온 것이다. 처음에는 낫과 괭이를 든 농민들이 봉기했으나 곧 귀족들과 군사들까지 합세하여 궁궐을 공격해 왔다. 려왕은 체彘나라 땅으로 도망쳐 오랫동안 숨어 지냈지만 끝내 그곳에서 사망하고 만다. 태자 정靖은 소공의 집에 숨어 있었는데 소공이 반란군에게 아들과 태자를 바꿔치기하여 내줌으로써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았다. 그는 후일 왕위에 올라 선왕宣王이라는 시호를 받게 되지만, 소공의 아들은 태자로 오인되어 그 날 무참하게 살해되었다. 제 피붙이보다 천자의 아들이 소중했던 시절이었다.
서주西周시대 ② 천금매소, 일소실천하, 서리지탄
려왕이 체나라로 도주하여 몸을 숨긴 후 한동안 주나라 왕실에는 임금이 없었다. 대신들이 모여 회의한 결과, 당분간 왕족 소공을 중심으로 여러 대신들이 조정 일을 맡아 처리하기로 했던 것이다. 중국 역사상 최초이자 마지막인 공화제共和制가 실시된 셈인데 중국 역사는 이를 두고 ‘공화행정’이라 하지만, 무슨! 귀족들의 공동정부 형태로서 ‘과두정치寡頭政治’라고 하는 편이 옳다. 서구에서 발생한 Republic의 한자 번역어인 오늘날의 ‘공화정’은 시민들이 선출한 대표들이 공동으로 나라를 관리하는 시스템을 뜻한다. 그래서 우리나라는 민주공화국이다.
그러나 공화제든 과두정치이든 이때부터 제후국들의 마음이 주나라 왕실로부터 멀어지기 시작했다. 체나라에 숨어 있던 려왕이 죽었다는 소식이 소공에게 전해졌다. 공화제 체제로 이끌어오던 조정도 슬슬 분열 조짐을 보였다. 늙어감에 따라 공화정을 이끌어왔던 소공의 추진력이 떨어졌기 때문이다. 이미 20년이 지난 일이라 백성들 사이에서도 려왕에 대한 기억 점차 희미해지고 있을 때였다. 마침내 소공은 제가 키우고 있는 아들이 사실은 려왕의 태자 정이라는 사실을 밝혔다. 다행히 정을 임금으로 추대하자는 그의 주장에 토를 다는 이가 없었다. 그리하여 공화정 대신들에 의해 정이 왕좌에 올랐으니 그가 선왕宣王이었다.
아비의 말로를 제 눈으로 똑똑하게 확인한 선왕은 재위 46년이라는 긴 기간 동안 선정을 베풀기 위해 비교적 애를 많이 썼다. 그런데 서주의 운명은 이미 오래 전부터 예견된 일이었다. 재위 39년에 선왕이 변방을 침략한 오랑캐 융족戎族과 일전을 벌였다가 참패하고 돌아오던 중이었다. 길거리에서 다음과 같은 요언妖言을 듣게 되는데, 누가 들어도 주나라의 멸망을 예견하는 내용이었다.
달이 떠오르니
해는 지려하네.
산뽕나무로 만든 활과 쑥대로 만든 화살통이여
주나라도 장차 망하려 하는구나.
너무나 요망한 내용이어서 찜찜했지만 선왕 대까지는 아무 일이 없었다. 그러던 중 선왕이 죽고 태자 궁열宮涅이 권좌에 올랐으니 그가 요언을 실천하게 될 유왕幽王이다. 유왕은 정사를 보는 능력도 부족했지만 성품이 포악한데다가 여자라면 사족을 못 쓰는 위인이었다. 유왕은 신나라 제후 신후申候의 딸을 왕비로 맞아 의구宜臼라는 아들을 낳았으며 수많은 비를 거느렸지만 결코 만족하지 않았다.
유왕이 즉위한 지 딱 1년 만의 일이었다. 갑자기 주 왕국 주변에 큰 지진이 일어나 여러 제후국에서 집이 무너지고 강물이 말랐으며 수많은 사상자와 이재민이 발생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왕은 만만한 제후국들에게 공물을 바치라고 독려했다. 비교적 세력이 큰 나라는 듣는 둥 마는 둥 했지만, 포褒나라만큼은 그럴 수 없다. 너무 힘이 약하여 주왕조에 반항할 여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포나라의 포향褒珦이 나서서 지금은 그럴 형편이 못되니 참아달라고 하자 그를 소환하여 감옥에 가두어 버렸다.
포향은 포나라에서 가장 용모가 뛰어난 포사褒姒(바오쓰)라는 여인을 바치고 나서야 겨우 석방되었다. 그녀는 대단한 미인이었다. 포사를 보고 한눈에 반한 유왕은 포나라의 공물까지 잊어버렸다. 아니 이미 공물 그 이상의 것을 얻었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포사가 누구인가? 그녀의 과거를 제대로 알고 싶다면 귀찮지만 하나라 말기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하나라의 마지막 임금 걸왕 때였다. 어느 날 갑자기 용 한 마리가 궁중에 나타나 바닥에 침을 질질 흘리더니 사라져버렸다. 걸왕이 불길하게 여기어 그 침을 모아 튼튼한 상자 안에 넣어 봉인하고는 절대로 상자를 열지 말도록 지시했다. 그 상자는 하나라 멸망 후 전리품으로 상나라에 전해졌고, 다시 주나라 궁으로 옮겨져서 10대 려왕 대까지 잊혀진 채로 방치되어 있었다.
려왕 초기 때였다. 돈이 궁해진 왕이 창고에서 낡은 상자를 하나 발견하고서는 신하들에게 열어보라고 했다. 드디어 1천 년 만에 상자가 개봉되는 순간이었다. 웬걸, 돈은 고사하고 끈적끈적한 액체가 쏟아지더니 갑자기 도마뱀으로 변해서 사라지고 말았다. 도마뱀은 어디로 사라졌을까? 재수 없는 일곱 살짜리 궁녀의 사타구니 속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졸지에 해괴한 일을 당한 궁녀는 누구한테 털어놓기도 뭣 하고… 며칠 동안 근심했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자 이내 잊어버리고 만다.
그렇게 세월은 흘렀고, 어언 50여년이 지나서도 간택 한번 당하지 못한 채 처녀상궁으로 지내던 일곱 살짜리 그 궁녀가 환갑을 바라보던 어느 날이었다. 갑자기 배가 불러오더니 결국 아이를 낳게 되었는데 계집아이였단다. 남 보기 얼마나 창피했겠는가? 늙은 상궁이 숲속에 들어가서 몰래 아이를 버리고 왔는데, 마침 지나가던 포나라 봇짐장수 부부가 아이를 발견하고 데려다가 딸 삼아 기르게 되었다. 그런데 이 봇짐장수 부부의 거래품목이 무엇인지 아시는가? 산뽕나무로 만든 활과 쑥대로 만든 전통箭筩이었는데, 선왕이 길거리에서 들었다는 요언을 다들 기억하시리라 믿는다. 어쨌거나 주나라의 위기는 하나라 때부터 정해진 운명이었으며, 부부가 주워 키운 아이의 이름이 포사였던 것이다.
“나라가 망한다 폭싹 망한다. 산뽕나무 활, 쑥대나무 전통.”
성안 거리마다 아이들이 뜻도 모르고 이런 노래가 불러댔다. 선왕이 들었던 요언과 같은 내용이었다. <서동요>가 그랬듯이 옛날에는 은유적인 메시지가 담긴 노래를 의도적으로 만들어 아이들의 입에 올리게 하여 대중 여론을 조작하거나 이용하곤 했다. 가짜 뉴스는 그 시대에도 유효했다. 그러나 유왕은 물론이고 대신들까지 그 노래와 포사가 서로 관련이 있다는 사실을 전혀 알 리 없었다. 나라가 망한다는 구절 하나에 민감하게 반응하여 금지곡으로 지정한 것이 고작이었다.
포사는 실로 양파 같은 여자였다. 이미 두 전 왕조 멸망에 큰 역할을 했던 말희와 달기가 가진 매력에 더하여 방중술房中術까지 완벽하게 갖춘 여인이었다. 단 한순간도 마음이 떠날 수 없을 만큼 까면 깔수록 새로운 매력이 나타나는 여자였다. 포사를 만난 이후부터 유왕은 거의 ‘파자마’ 바람으로 나날을 보냈다. 포사의 단점이라면 단 하나 웃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유왕이 쉼 없이 ‘아재개그’를 개발하여 포사에게 날려보았지만 웃음에 관한 한 그녀는 철옹성이었다.
나도 웃지 않기로 유명한 여자, 아니 70대 할매 한 분을 잘 안다. 전라도 부안 출신 반남 박씨 양반 가문 할매다. 동네 할매들이 경로당에 모여 놀다가 다들 뒤집어질 정도로 웃긴 이바구를 해도 웃음기 한번 내보이지 않는 차가운 여인이다. “부안할매, 참말로 안 우습소? 양반은 우습지도 않는당가?” 누군가가 타박을 주면 이렇게 대답한다. “양반이라고 워찌 웃긴 게 안 우습겄소?” “근디 와 안 웃소?” “애낐다가 집에 가서 웃을라 그라제.” 그 할매가 집에 돌아가서 웃는지 어쩐지는 모르겠지만 보는 사람 입장에서는 참 답답하다.
나처럼 답답해진 유왕, 사는 목적이 바뀌었다. 통치는 이미 오래 전에 버린 삶의 목표였고 이젠 포사의 앵두 같은 입술 양끝을 살짝 올리는 데에 온통 목숨을 걸었다. 바로 성 안 곳곳에 방을 내걸었다. 포사를 웃게 하는 아이디어를 제공하는 자에게 황금 1천 냥을 주겠다는 내용이었다. 괵석부라는 간신이 유왕에게 다가오더니 은근한 말투로 귀뜸했다.
“제 말씀대로만 하신다면 틀림없을 것입니다.”
그의 계책이란 게 참으로 황당했으니, 봉화를 피워 제후들을 불러 모아 허탕치게 한다면 틀림없이 포사가 웃는다는 것이었다. 봉화가 무언가? 외적의 침입을 알리어 제후국들의 군사를 동원하는 비상 신호 아닌가? 그러나 한 여인의 웃음을 얻기 위해 허위로 국가의 위기를 알리자는 이 황당무계한 계획은 주저 없이 고민 한번 없이 실행에 옮겨졌다.
종주 호경에서 시작되는 봉화는 인근 려산麗山에 위치하고 있었다. 일찌감치 대규모의 가무단을 이끌고 려산에 오른 유왕과 포사는 해가지기 전까지 그곳에서 음주가무를 즐겼다. 해가 지고 어둑해지자 비로소 봉화에 불을 붙였다. 려산의 봉화가 불을 밝히자 가까운 곳에 설치된 봉화에서 불빛이 연이어 피어올랐고 이튿날 해가 뜨자 불빛은 연기로 바뀌어 계속 위급 신호를 보냈다.
오전 무렵이 되자 그제야 가장 가까운 제후국의 군사들부터 완전무장을 한 채 속속 호경에 도착했다. 가짜 신호에 속아 허겁지겁 도착한 군사들의 모습을 보고 포사의 입초리가 사알짝 올라가기 시작했다. 거짓 봉화였다는 사실을 알고 화를 내면서 돌아가는 제후국 장수들의 모습을 보고는 소리 내어 웃기까지 했다. 대성공이었다! 유왕이 비로소 한숨을 내쉬면서 괵석부의 아이디어에 만족했다. 묘책을 제공했던 괵석보는 황금 1천 냥을 받아 챙겼으니, 이를 통해 ‘천금매소’千金買笑‘라는 성어가 나왔다. ‘여자의 환심을 얻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어리석은 행동’을 비유하는 말이다.
거짓 봉화는 이후로도 몇 번이나 올랐으며 그때마다 달려온 제후국 군사들의 실망은 커져만 갔다. 유왕은 이미 ‘양치기소년’이 되어 있었다. 각국 제후들은 앞으로는 봉화가 올라와도 군사를 동원하지 않기로 서로 약조했다. 그 와중에서도 포사에 푹 빠져버린 유왕은 앞뒤 가리지 않고 태자 의구를 폐하고 포사가 낳은 백복伯服을 태자로 옹립했다. 신申나라의 제후이자 의구의 외조부인 신후가 분노하여 오랑캐인 견융犬戎과 결탁하여 호경을 침공했다. 깜짝 놀란 유왕이 봉화에 불을 올리게 했지만 제후국들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속지 않겠다고 다짐했던 터였기 때문이었다. 결국 유왕과 태자 백복은 목숨을 잃었고 궁성은 순식간에 폐허로 변했다. 포사는? 죽었다는 소문 또는 견융 부락에 끌려갔다는 등의 떠도는 소문은 많았지만 믿을 만한 사료에는 더 이상 기록이 남아있지 않다.
한편, 신후는 후회막급이었다. 잠시 유왕을 혼내주기로 하고 견융의 손을 빌리고자 했는데 웬걸, 일이 커져도 한참 커졌다. 화려한 도읍 호경은 촌놈 견융 군사들의 눈을 뒤집기에 충분했다. 보는 대로 닥치는 대로 노략질을 하고 불을 질러댔다. 신후는 은밀하게 여러 제후국들과 연합군을 조직하여 겨우 오랑캐를 쫓아냈다. 난리를 수습한 후 신후는 신나라에 숨겨두었던 외손자 의구를 왕으로 모시니, 그는 서주시대의 마지막 임금이었던 평왕平王이었다. 그러나 호경은 이미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폐허화 되어 있었다.
처절할 정도로 황폐해진 수도 호경, 한번 단맛을 본 견융족은 뭐 먹을 게 남아있다고 그 후로도 여러 차례에 걸쳐 호경을 침략한다. 제후국을 통제할 능력까지 상실한 주 왕실이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은 천도뿐이었다. 기원전 1046년 무왕이 상나라를 멸하고 주나라 천자로 등극한 지 276년 만에 주 왕실은 천자의 자격을 잃은 채 낙읍으로 수도를 옮겼다. 주나라는 계속 존속하게 되지만 더 이상 옛 영화를 회복하지 못하게 되니 이를 서주시대의 멸망이라 한다.
여기서 잠깐, 서주周西는 무엇이며 동주東周는 또 무엇인가? BC 771년 즉 평왕이 동쪽 낙읍으로 천도하기 전까지의 시기를 서주라고 하며, 낙읍으로 옮긴 이후의 시기인 BC 770년부터는 동주라고 한다.
훗날 실없는 말하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서주 멸망의 책임을 또다시 여인인 포사에게 지운다. 말희와 달기에 이은 세 번째 희생양이었다. 그것도 모자라 포사의 웃음 하나 얻으려다가 천하를 잃은 유왕의 어리석음을 비유하여 ‘일소실천하一笑失天下’라는 성어를 만들어내는데 ‘미인을 얻으려 무리하다 인생을 망침’ 또는 ‘작은 욕망을 채우려다 큰 손실을 입음’의 뜻으로 사용된다.
그러거나 저러거나, 서주시대가 멸하고 낙읍으로 주 왕실을 옮김으로써 동주시대가 시작된 후였다. 한때 주 왕실에서 고위 관리로 일했던 선비가 옛 수도 호경을 지나다가 황폐해진 성안을 돌아보면서 <서리黍離>라는 시 한 수를 남겼다.
저기에 기장 이삭이 주렁주렁[피서리리彼黍離離]
저기에는 수수가 싹을 틔웠네[피직지묘彼稷之苗].
이리저리 비틀비틀 걸어보지만[행매미미行邁靡靡]
맘 둘 곳 없어라[중심요요中心搖搖].
(중략)
아득하게 먼 창공이여[悠悠蒼天]
그(유왕)는 도대체 어떤 사람이었는가[차하인재此何人哉]!
상나라가 멸한 후 기자가 지었다는 <맥수가>와 매우 유사하다. 훗날 누군가가 패러디한 작품일지도 모른다. 아무튼 이 시에서 유래한 성어가 ‘서리지탄黍離之嘆’이니 ‘세상사 성쇠盛衰(흥하고 멸함)의 무상함’을 비유하는 말이다. 그렇게 호경 땅이 저물어 갔다. 피를 부르는 춘추전국시대를 맞이할 때가 된 것이다.
첫댓글 해박한 지식에 감탄했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자주 읽기를 원합니다
주나라 역사 재미있게 잘 읽어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