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도쿄에서 1917년 12월 30일 북간도 지신진 명동촌에서 태어나서 1945년 2월 26일 후꾸오까감옥에서 27세 나이로 사망한
윤동주 시인이 42년에 다녔던 도쿄 릿교대학교를 조목사님의 안내로 돌아 보았다. 그러나 그곳에서는 시비를 발견하지 못하였다.
며칠 후 교토의 도시샤대학교를 방문하여 채플실과 윤동주와 정지용의 시비를 보았다.
운이 좋게도 오랫동안 도쿄의 릿교대학에서 교목으로 활동하시며 도쿄에서 윤동주 붐을 일으킨 유신부님의 자상한 안내를 받았다. 유신부님은 후에 한국인으로서 최초로 오사카 가와구치 성공회 주교좌성당의 신부로 발령을 받았고 윤동주가 처음 입학했던 동경 릿교대학에 윤동주를 알려서 억울한 죽음을 당한 시인을 기리도록 촉구하였다. 그리고 교또와 윤동주가 갇혔던 감옥의 도시, 후쿠오까 사람들과 함께 매달 윤동주를 시를 낭송하고 있다. 유신부님은 윤동주의 죽음의 의미를 제삼세계가 당하고 있는 억울한 고난과 연결시켜서 대학교가 윤동주 장학금을 만들어서 한국 유학생 뿐만 아니라 가난한 아시아, 아프리카 나라에서 유학을 오는 학생들에게까지 제공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고 하였다.
어째튼 도시샤대학교 시비와 우지강변에 세워진 시비를 하루에 볼 수 있었던 것은 우지강변의 시비를 세우는 일에 깊이 관여를 하신 유신부님 덕분이었다. 산천경개가 용정과 비숫한 우지강변에서 친구들과 함께 노닐며 윤동주가 무슨 생각을 하였을까를 생각하며 명동을 떠올렸다. 작은 언덕 아래 교회가 있고 그 뒤에 우물이 있고 우물 옆에 집이 있고, 집 아래 과수원이 있고 과수원 옆에 육도하가 흐르는 모습이 구름처럼 떠올랐다.
우지강변의 시비는 고즈넉한 곳에 자리잡았고 그나마 풍광에 묻혀서 눈에 잘 띄지 않았다.
시비에는 "새로운 길" 이라는 연희전문학교 시절에 쓴 시가 적혀 있는데
돌판이 두 개로 나뉘어 있었고 나뉜 돌 맨 위 가운데에 원통형의 돌이 세로로 누워있었다.
두 개는 나뉘어진 남과 북을 의미하고 사이에서 두 돌판을 연결하는 검정돌은 윤동주를 의미하며 더 나아가서는 이념을 넘어서서남북의 평화와 통일를 위해 중간자 역할을 감당해야 하는 디아스포라 재일동포를 의미하기도 한다고 하였다.
식민지 청년의 억울한 죽음과 고난이 우리 모두의 가슴에서 겨자씨처럼 자라나길 기도하며 돌아왔다.
시비 앞 가장 가까이에 있는 도시샤대학교의 채플실, 윤동주 시인 재학시절에 있었던 건물로 현재도 채플실로 사용되고 있다.
도시샤대학교의 창립정신 “양심”이 새겨진 기념비(미국의 회중교회가 세운 대학이다.)
1875년에 “양심”이라는 모토로 설립된 도시샤대학교 임을 알리는 안내문
교토부를 지나서 오사카로 들어가는 우지강 위에 세워진 “아마가세 다리”. 윤동주가 여름방학 귀가를 앞두고 영문과 친구들과 함께 놀러 갔던 곳이다.
그는 우지강 다리에서 그의 생애 마지막 사진으로 알려진 사진을 도사샤 영문과 친구들과 함께 찍었다.
다리 좌측에서 좌회전을 하면 윤동주 시비가 보인다.
우지강은 그에게 고향의 육도하와 용정의 해란강을 떠올리게 하였을 것이다.
시비의 뒷면. 윤동주의 생애가 간략하게 적혀 있다.
연희전문학교 시절에 쓴 “새로운 길” 시인의 새로운 길이 민족이 걸어가야 할 새로운 길일 것이다.
힘차게 흐르는 맑은 강물, 이 일대는 일본의 유명한 우지녹차 생산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