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마고우(竹馬故友)
권 정택
말잠자리, 청개구리, 물방개 쫓다
홀랑 벗어던지고 멱 감던 어깨동무야.
꼴 베고 토끼풀 망태에 담다
대나무 칼 전쟁놀이 정겨운 벗들아,
썰매 타다 냇가 얼음 깨 뱃놀이하고
쥐불놀이 깡통 돌리던 개구쟁이들아,
다 나와라 제기차기라도 해서
어린 날 즐거움 속에 빠져나 보자.
떼 지어 시끌벅적 팽이 돌리던
옛 골목 담장 가도 다시 가보자.
비석 치기, 자치기, 구슬치기, 딱지치기
땅 따먹던 옛 벗들아.
고무줄놀이 줄넘기 재주 해는 지는데
동창회 잠시 보고 소식 끊긴 소꿉동무야.
책보 도시락 허리춤 달고 말놀이 하다
군대 간다 막걸리 잔치 고향 친구야.
다 나와라 술래잡기라도 해서
보고픈 그 얼굴들 만나나 보자.
아득히 멀어진 꼬리 연 따라
뛰어가던 옛 꼬맹이들 다시 뭉쳐보자.
어린 날의 동네 골목에는 아이들이 참 많았다. 위로는 형들이 그리고 누나들이 아래로는 꼬맹이들이 쏟아져 나오면 긴 골목을 가득 메웠다. 한쪽에선 동요를 부르며 깡충깡충 팔딱팔딱 경쾌하게 뛰는 고무줄놀이가 벌어지고 있었다.
이때 부른 동요는 4분의 4박자 곡 ' 금강산 찾아가자 일만 이천 봉 / 갈수록 아름답고 신기하구나 - ' , ' 고향 땅이 여기서 얼마나 되나 / 푸른 하늘 끝 닿은 저기가 거긴 가 - ' , '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 진달래 - ' , 등등 많았다. 고무줄놀이는 단순히 고무줄을 밟고 당기는 걸로 끝난 게 아니었다.
이 고무줄놀이를 하며 날마다 부른 노래 연습을 기반으로 한국의 음악계가 크게 성장해서 성악이 발전했고 대중가요계에 많은 인물들이 배출되었다. 뿐 아니다. 고무줄 높이를 발목에서 출발해서 무릎, 허리, 겨드랑이, 목, 머리까지 단계 별로 올렸다. 올릴 적마다 발을 높이 올려야 했고 심지어 거꾸로 물구나무서기를 하는 자세도 나와야 했다. 이런 의욕적이며 자발적인 반복적 동작은 한국 체조계의 기초기술을 다지는 발전에도 크게 이바지하였다.
골목 담벼락 아래를 자리 잡은 비석 치기는 비석으로 줄지어 세워둔 손바닥만 한 돌들을 쓰러뜨리려 아이들이 돌을 던져 맞추는 환호와 탄성으로 시끌벅적하였다. 이는 비만 안 오면 온 동네에서 날마다 벌어지는 즐거운 이벤트(event) 행사였다.
비석을 마치 묘비나 공덕비처럼 일렬로 일고여덟 개를 세운 것 같았으니 얼마나 흥미롭고 볼만했을까. 더구나 다 죽었는데 혼자 7명의 친구들을 살려내는 귀염둥이 골목 친구는 아이들 입에 신바람 나는 함박웃음ㄹ 실어주었다. 이 친구는 전국체전 투포환 경기에서 좋은 성적으로 입상하였다.
어느 날은 놀이 친구와 땅바닥에 넓게 사각형으로 줄을 긋고 바둑알보다 조금 큰 납작한 돌로 한 귀퉁이에 손을 활짝 펴서 중지 끝에 대고 한 뺨을 반지름으로 반달 모양의 선, 반원을 그렸다. 중지로 튕긴 돌이 반달 안으로 들어오고 나가며 움직인 선을 따라 줄을 그어 땅의 면적을 넓혔다. 그러다가 나간 돌이 돌아오지 못하는 실수를 하면 친구와 순서를 바꿔 놀이를 했다. 일명 땅따먹기였다. 당연히 흙에서 놀았으니 손은 흙손이었다.
문방구점에서는 유리구슬을 팔았다. 주로 검은 구슬, 암청색 구슬이 많았으나 노랑, 주홍, 파란색 꽃무늬가 들어있는 투명 유리구슬도 있었다. 아이들은 땅바닥에 세 걸음 간격으로 띄어서 주먹만 한 구멍 네 개를 팠다. 그리고 구멍을 봄, 여름, 가을, 겨울이라고 부르고 쭈그리고 앉아 첫 구멍 봄에 한 손을 대고 또 한 손은 그 위에 얹고 엄지와 중지 사이의 구슬을 튕겨 여름 구멍에 넣었다. 구멍에 들어가지 못하면 다음 사람이 구멍을 통과하고 그 낙오된 구슬을 맞춰 포로를 취했다. 그리고 실수한 친구는 봄부터 다시 시작해서 겨울 구멍을 돌아와야 했다.
이 구슬치기는 유치해 보여도 어른들보다 신사적이었다. 여름 구멍에 구슬을 넣으려 받쳐준 손을 절대 떼지 않고 뻗지 않았다. 참 자율적 규범을 모두 지켰다. 그렇다 당시 은행동 골목의 어린이들은 매우 작고 깨끗한 꼬마 신사들이었다.
이 놀이가 싫증 나면 땅바닥에 얼굴만 한 삼각형을 그려 참가한 아이들이 유리구슬을 삼각형 안에 하나씩 혹은 두 개씩 내려놓고 순서를 정하고 일곱 걸음 밖에서 옹기종기 모인 유리구슬을 맞춰 삼각형 밖으로 튀어나온 구슬을 갖는 놀이를 한다.
이 놀이 방식 외에도 땅바닥에 두 뺨 정도 길이의 줄 두 개를 한 뺨 간격으로 나란히 평행선을 긋고 바깥쪽에 짧은 줄 하나를, 반대쪽 줄에는 짧은 줄 세 개를 그었다. 한 아이가 한주먹으로 유리구슬을 보이지 않게 꼭 쥐고 있으면 한 아이는 1, 2, 3의 경계선 속에 두 군데에 유리구슬을 놓아 33% 확률의 수를 맞추는 놀이를 한다. 이는 예측력 또는 통찰력의 소양을 키워주었다. 이때 짧은 줄 하나는 1, 긴 줄 평행선은 2, 반대편 긴 선의 바깥쪽의 짧은 세 줄은 3을 나타내었다.
아이들은 수리와 도형을 결합한 평면 위에서 수학적으로 놀았다. 이 놀이는 오직 세계에서 한국의 어린이들이 고안한 천재적인 수준의 자랑스러운 놀이였다.
손안에 든 구슬의 수가 세 곳 중 빈 곳 하나에 걸리면 두 군데에 올려진 구슬을 다 갖고 유리구슬 얼마를 올려놓은 두 군데 중 하나에 걸렸으면 걸려있는 곳의 유리구슬 수만큼 내주는 놀이이다. 이때 사용한 언어가 으찌, 두비, 쌈이라는 말을 썼다. 놀이 주체가 보상을 하여 실점을 하면 구슬을 딴 친구가 즉시 놀이 주체가 되어 손안에 구슬을 감추고 알아맞히는 놀이는 지속된다.
가위 바위 보라는 말 대신 꾸, 찌, 빠라는 용어를 쓰는 놀이도 하였다.
동네 골목은 이렇게 아이들 노는 소리로 붐볐다. 이 많은 놀이를 제안하고 수용하고 소화해낸 어린 시절의 질서 정연한 골목은 참으로 위대하였다. 전국의 어린이들이 사서 놀은 고무줄 매출자금은 타이어 공장으로 육성하는 데에 이바지했고 유리구슬로 벌어들인 자금은 건축 및 차량용 강화유리공업 성장에 일조를 하였다.
그런데 그 많던 유리구슬이 전국적으로 다 모으면 작은 동산 하나는 되고도 남을 터인데 그 구슬들 다 어디로 갔을까. 이 나이에 유리구슬의 행방을 묻다니 참 웃긴다. 다 모았으면 유리구슬 기념공원을 만들 수도 있고 해변에 깔아 유리구슬 해변 명소도 나올 수도 있었을 텐데 말이다.
비석 치기에서 같은 팀의 죽은 친구 7명을 모두 살려낸 멋진 골목 친구는 지금 어디서 어떻게 또 누구를 살려주며 살아가고 있을까.
그 두꺼운 얼음판을 겁 없이 토끼로 찍어내어 얼음배를 만들고 가운데 구멍 뚫어 장대를 꽂아 배를 몰던 아이는 어디로 갔을까. 불이 활활 타는 쥐불놀이 깡통을 들고 얼음배로 팔짝 뛰어오르던 아이, 그 배를 또 도끼로 갈라, 배 두 척을 만들어 얼음배를 부딪히며 겁없이 놀던 아이들은 대체 어디서 어떻게 살고 있을까.
4인 계주 릴레이 반 대항 경주에서 꼴찌 팀으로 패색이 짙던 상황에 선두 주자들을 하나하나 다 제치고 1등으로 골인 테이프를 끊어 역전의 짜릿한 맛을 보여준 우리들의 영웅이 있다. 막판 뒤집기를 성공하여 운동장을 발깍 들어올려 환호와 찬사와 감동이 뒤 썩이게 한, 아득히 어리던 날의 함성이 들려오는 추억이 있다.
수학여행에서 한밤 중에 맹장염으로 고통스러운 학우를 업고 병원으로 뛴 마음을 저리게 하는 감동의 친구가 있다.
그렇다. 우리 어린이는 가진 게 없어도 위대했다. 사람을 많이 죽인 영웅들은 전혀 위대하지 않다. 사람 축에도 못 끼는 잔인한 짐승들이며 단지, 빼앗으려 물어뜯는 야수들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솔선하여 이끌어 주고, 창의력을 발휘하고 담력이 뛰어난 아이들이, 희생적인 멋진 아이들이 있어 나라가 역동적이고 이렇게 따뜻하게 복되게 발전한 거다. 오늘의 이 모두 다가 초롱초롱한 눈빛을 발하던 착한 어린이들의 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