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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완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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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나 刹那
불교에서 시간의 최소단위를 나타내는 말
산스크리트의 ‘크샤나’, 즉 순간(瞬間)의 음역인데, 《대비파사론(大毘婆沙論)》 권136에 따르면, 120의 찰나를 1달 찰나(一씻刹那:tat-ksana, 순간의 시간), 60달 찰나를 1납박(一臘縛:lava, 頃刻의 뜻), 30납박을 1모호율다(一牟呼栗多:muh後rta)를 1주야로하고 있으므로, 이에 따르면 1찰나는 75분의 1 초에 해당한다. 그러나 이설도 있다. 불교에서는 모든 것이 1찰나마다 생겼다 멸하고, 멸했다가 생기면서 계속되어 나간다고 가르치는데, 이것을 찰나생멸(刹那生滅)·찰나무상(刹那無常)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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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상천하유아독존 天上天下唯我獨尊
석가가 태어났을 때 외쳤다고 하는 탄생게(誕生偈).
석가는 어머니 뱃속에서 나오자마자 일곱 발짝을 걸어가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고 게(偈)를 외쳤다고 한다. 즉 이 우주만물 중에서는 내가 가장 존엄한 존재라는 뜻인데, 이것은 인간의 존귀한 실존성을 상징하는 말이며, 석가의 탄생이 속세로부터 성스러운 세계로의 초탈을 상징하는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말은 지금에 와서는 “천하에 자기만큼 잘난 사람은 없다”고 자부하거나 또는 그런 아집(我執)을 가진 사람을 일컫는 말이 되었다. 《전등록(傳燈錄)》의 글귀를 소개하면, “석가모니불초생 일수지천 일수지지 주행칠보 목고사방왈 천상천하유아독존(釋迦牟尼佛初生 一手指天 一手指地 周行七步 目顧四方曰 天上天下唯我獨尊)”이라고 하였으며, 《대장엄경(大莊嚴經)》 전법윤품(轉法輪品)에는 “天上天下 唯我最勝”이라고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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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태종 天台宗
중국 수(隋)나라의 천태대사(天台大師) 지의를 개조(開祖)로 하는 불교의 한 종파.
후난성[湖南省] 남부 화룽현[華容縣] 출신의 지의는 광주(光州) 대소산(大蘇山:河南省 남단)에서 혜사(慧思)에게 사사하여 선관(禪觀)을 닦고 《법화경(法華經)》의 진수를 터득한 뒤, 진릉[金陵:南京]에서 교화활동을 하여 많은 귀의자를 얻었지만, 575년 38세 때 저장성[浙江省]의 천태산(天台山)으로 은둔하여 사색과 실수(實修)를 닦았다. 이것이 천태종 성립의 단서가 되었으며, 지의는 《법화경》에 따라 전불교를 체계화한 《법화현의(法華玄義)》, 천태의 관법(觀法)인 지관(止觀)의 실수를 사상적으로 정립한 《마하지관(摩訶止觀)》 《법화경》을 독자적인 사상으로 해석한 《법화문구(法華文句)》의 이른바 <법화삼대부경(三大部經)>을 편찬하였다.
이것은 중국 ·한국 ·일본을 일관하는 천태교학의 지침서가 되었을 뿐 아니라, 인도 전래의 불교를 중국 불교로 재편하는 계기도 되었다. 그의 문하인 장안(章安) 관정(灌頂)을 필두로 지위(智威) ·혜위(慧威) ·현명(玄明)을 거쳐 제6조 담연(湛然)으로 교학이 전승되었다. 그들은 지의의 삼대부경에 상세한 주석을 가하여 《석첨(釋籤)》 《묘락(妙樂)》 《보행(輔行)》을 저술, 천태 교의를 선양하였고 초목도 성불할 수 있다는 초목성불설(草木成佛說)까지 전개하였다.
당나라 말기에 쇠했던 불교가 북송 때에 부흥하여 12조인 의적(義寂)과 그의 동문 지인(志因)의 양계통에서 많은 학승이 배출되었는데, 전자를 산가파(山家派), 후자를 산외파(山外派)라고 한다. 의적의 제자 의통(義通), 그 문하 지례(知禮)의 계통이 송대에 융성하여 천태종의 주류가 되었으며, 남송(南宋) 대에는 선월(善月) ·지반(志盤) 등이 강학에 뛰어났고, 원대(元代)에는 불교 전반의 교학적인 쇠퇴와 함께 쇠하였지만, 명대(明代)에 다시 부흥하여 선(禪)과 정토(淨土)와의 융합이 이루어지고, 명 말기에는 지욱(智旭)이 교학을 진흥시켰다. 지의는 《법화경》의 정신을 근거로 전불교 경전에 의의를 부여하여 오시(五時:華嚴時 ·鹿苑時 ·方等時 ·般若時 ·法華涅槃時)의 교판, 화의사교(化儀四敎:頓敎 ·漸敎 ·??密敎 ·不定敎) 및 화법사교(化法四敎:藏敎 ·通敎 ·別敎 ·圓敎)로 구분하였으며, 공(空) ·가(假) ·중(中)의 삼관(三觀)을 교의의 중심으로 하였다.
또한 일상심(日常心)의 일념 가운데 지옥으로부터 부처의 경지가 내재한다는 일념삼천(一念三千)의 사상과 일체가 원융(圓融)한 실상(實相)을 주장하였다. 한국에서 천태종이 하나의 종파로 성립된 것은 대각국사(大覺國師) 의천(義天)에 이르러서였지만, 그 교학이 전래된 것은 훨씬 이전이다. 신라의 현광(玄光)은 지의에게 법을 전한 혜사(慧思)에게서 법화삼매(法華三昧)를 배웠으며, 신라의 연광(緣光), 고구려의 파약(波若) 등은 직접 지의의 문하에서 공부하였다.
특히 고려 제관(諦觀:960년 중국에 감)의 《천태사교의(天台四敎儀)》는 천태학의 입문서로서 크게 성행하였다. 의천의 문하에 교웅(敎雄) ·계응(戒膺) ·혜소(慧素) 등이 유명하며, 그 후에도 덕소(德素) ·요세(了世) ·천인(天因) 등이 교세를 떨쳤다. 이와 같이 천태종은 고려 일대를 통하여 크게 성하였으나 조선시대에 이르러 척불정책으로 쇠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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탱화 幀畵
불교의 신앙내용을 그린 그림.
내용은 신앙대상이 되는 여러 존상(尊像)만을 그리는 존상화와 경전내용을 그림으로 그린 변상도(變相圖)의 성격을 지닌 것이 있다. 탱화는 기능에 따라 본존의 후불탱화(後佛幀畵)와 신중탱화(神衆幀畵)로 나누어지고 신중탱화는 다시 팔부(八部)신중탱화와 사천왕(四天王)탱화 등으로 나눌 수 있다. 후불탱화가 본존불의 신앙적 성격을 보다 구체적으로 묘사한 것이라고 한다면 신중탱화는 수호신적인 기능을 띤 것이다. 다만 후불탱화의 경우 본존불이 무슨 불(佛)이냐에 따라 탱화의 구도가 달라지고 신중탱화의 경우에도 수호의 기능을 어디에 강조점을 두느냐에 따라 내용과 구도가 달라진다.
한국의 사찰은 어디든지 신앙대상으로 불상을 봉안하고 그 뒤에 탱화가 걸려 있게 마련인데 일본이나 중국 등지의 사찰에는 이와 같은 탱화가 없다. 물론 한국 탱화와 비슷한 불화(佛畵)가 없는 것은 아니나 이들 불화는 한국 탱화와 같이 직접적인 신앙대상으로 봉안되거나 불상의 뒷벽에 거는 후불탱화로서의 성격을 지니지 않는다. 한국 탱화의 기원은 확실치 않으나 석굴암의 석조탱(石彫幀)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멀리 신라시대까지 소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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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도사 通度寺
경남 양산시 하북면(下北面) 영취산(靈鷲山)에 있는 사찰.
종파 : 대한불교 조계종
소재지 : 경남 양산군 하북면
한국 3대 사찰의 하나로, 부처의 진신사리(眞身舍利)가 있어 불보(佛寶)사찰이라고도 한다. 사찰의 기록에 따르면 통도사라 한 것은, 이 절이 위치한 산의 모습이 부처가 설법하던 인도 영취산의 모습과 통하므로 통도사라 이름했고(此山之形通於印度靈鷲山形), 또 승려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모두 이 계단(戒壇)을 통과해야 한다는 의미에서 통도라 했으며(爲僧者通而度之), 모든 진리를 회통(會通)하여 일체중생을 제도(濟道)한다는 의미에서 통도라 이름지었다고 한다. 이 절의 창건 유래에 대한 《삼국유사》의 기록을 보면 신라의 자장(慈藏)이 당나라에서 불법을 배우고 돌아와 신라의 대국통(大國統)이 되어 왕명에 따라 통도사를 창건하고 승려의 규범을 관장, 법식(法式)을 가르치는 등 불법을 널리 전한 데서 비롯된다. 이때 부처의 진신사리를 안치하고 금강계단(金剛戒壇)을 쌓아, 승려가 되고자 원하는 많은 사람들을 득도케 하였다. 이렇게 창건된 이 절은 이후 계율의 근본도량이 되었고, 신라의 승단(僧團)을 체계화하는 중심지가 되었다. 창건의 정신적 근거이며 중심인 금강계단은 자장과 선덕여왕이 축조하여 부처의 진신사리를 안치한 이후 오늘날까지 잘 보존되고 있다.
경내의 건물들은 대웅전과 고려 말 건물인 대광명전(大光明殿)을 비롯하여 영산전(靈山殿) ·극락보전(極樂寶殿) 외에 12개의 법당과 보광전(普光殿) ·감로당(甘露堂) 외에 6방(房), 그리고 비각(碑閣) ·천왕문(天王門) ·불이문(不二門) ·일주문(一柱門) ·범종각(梵鐘閣) 등 65동 580여 칸에 달하는 대규모이다. 이 건물들은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1601년(선조 34)과 41년(인조 19) 두 차례에 걸쳐 중수하였는데 대광명전을 제외하고는 모두 근세의 건물들이다.
이 사찰은 부처의 진신사리를 안치하고 있어 불상을 모시지 않고 있는 대웅전이 보물 제144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이 밖에 보물 제334호인 은입사동제향로(銀入絲銅製香爐), 보물 제471호인 봉발탑(奉鉢塔)이 있고, 보물전시관에는 병풍 ·경책(經冊) ·불구(佛具) 및 고려대장경(해인사 영인본) 등의 사보(寺寶)가 소장되어 있다. 소속 암자로는 선원(禪院)인 극락암을 비롯하여 백운암 ·비로암 등 13개의 암자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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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계 破戒
불교에서 계(戒)를 받은 사람이 그 계의 내용을 깨뜨려 계법을 위반하는 일.
파계에도 경중이 있어, 교단이나 종문에서 추방되는 벌을 받기도 하고 월 2회의 모임인 포살(布薩)에서 참회하고 용서를 받기도 한다. 파계는 자기 스스로를 해할 뿐만 아니라, 죽어서 악도(惡道)에 떨어진다 하여, 그 몸가짐을 엄하게 계율하는 교단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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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문 破門 (Excommunication)
불교에서 교단(敎團)이나 종파(宗派)로부터 추방되는 일.
파라이(波羅夷)에 해당하며, 승려로서 받는 가장 무거운 벌이다. 또 사승(師僧)이 제자를 추방하여 사제(師弟)의 관계를 끊는 것을 말하는데, 뜻이 변하여 보통 스승이 제자를 그 문인(門人)으로부터 추방 ·제적하는 것을 의미한다. 유대교나 그리스도교에서도 원래 원어 excommunicatio가 ‘배찬금지(陪餐禁止)’의 뜻으로 사용되어 교회 계규(戒規)의 벌칙의 하나로서 시행되어 왔다. 신앙상 또는 도덕상의 이유에서 성찬(聖餐)에 배석하는 것이 부적당한 사람에 대하여 일시적으로 배찬을 금지하는 것을 말한다. 로마 가톨릭에서는 이 제도를 더 발전시켜 소(小)파문 ·대(大)파문으로 구분하였는데, 소파문은 성사(聖事) ·준(準)성사나 교회의 모든 직위에서 제외시켰으며, 대파문은 현세에는 물론 내세에서까지도 교회에서 배제시키는 뜻을 담고 있다. 그리하여 중세에 교황과 국왕과의 권력 다툼에서는 이 파문이 큰 무기로 작용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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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상도 八相圖
석가모니의 일생을 여덟 단계로 나누어 그린 불화.
불교에서 그 개조인 석가모니의 일생을 8단계로 나누어 극적인 장면을 그린 그림이다. 사찰의 팔상전이나 영산전(靈山殿)에 봉안하며, 팔상정(八相幀)·팔상성도라고도 한다.
첫번째 그림은 도솔래의상(兜率來儀相)으로, 탄생을 위하여 도솔천을 떠나 흰코끼리를 타고 북인도의 카필라 왕궁을 향하고 있는 모습이다. 두번째 그림은 비람강생상(毘藍降生相)으로, 마야(摩耶)부인이 산달을 맞아 친정으로 가던 도중 산기가 있어 룸비니 동산으로 가서 부처를 낳는 모습이다. 부처는 부인의 오른쪽 옆구리로 출생하였다.
세번째 그림은 사문유관상(四門遊觀相)으로, 부처가 도성의 성문을 나가 노인과 병자, 죽어 실려 나가는 시체를 보고 북문에서 출가하는 사문을 만나 출가를 결심하는 그림이다. 네번째 그림은 유성출가상(踰城出家相)으로, 29세 되던 해에 사랑하는 처자와 왕위를 계승할 태자의 자리를 버리고 성을 떠나 출가하는 모습이다.
다섯번째 그림은 설산수도상(雪山修道相)으로, 6년 동안 갖은 고행을 겪으며 스승을 찾아다니다가 스승은 밖에 있지 않고 자기 안에 있음을 깨달아 부다가야의 보리수 아래에서 선정에 들어가는 모습이다. 여섯번째 그림은 수하항마상(樹下降魔相)으로, 선정에 들어가 갈등이 심하지만 수행이 자신과의 투쟁임을 깨닫고 용맹 정진하여 마침내 마군의 항복을 받고 대오각성의 경지에 드는 모습이다.
일곱번째 그림은 녹야전법상(鹿野轉法相)으로, 대오각성한 석가모니가 그곳에서 500리쯤 떨어진 녹야원으로 가서 처음으로 5명의 수행자에게 설법하여 그들을 귀의시키는 모습이다. 여덟번째 그림은 쌍림열반상(雙林涅槃相)으로, 수많은 사람들에게 법을 전한 후 제행무상(諸行無常)과 용맹 정진할 것을 당부하고 사라쌍수 아래서 열반에 드는 모습이다.
화폭마다 제목을 적어 내용을 쉽게 이해할 수 있게 한 것이 이 불화의 특징이다. 부처가 도솔천에서 내려오는 도솔래의상(兜率來儀相), 룸비니동산에서 탄생하는 비람강생상(毘藍降生相), 사문에 나가 세상을 보는 사문유관상(四門遊觀相), 성을 넘어 출가하는 유성출가상(踰城出家相), 설산에서 수도하는 설산수도상(雪山修道相), 보리수 아래에서 마귀의 항복을 받는 수하항마상(樹下降魔相), 녹야원에서 첫 설교를 하는 녹원전법상(鹿苑轉法相), 사라쌍수 아래에서 열반에 드는 쌍림열반상(雙林涅槃相)의 8장면인데, 8폭으로 구성하는 것이 보통이지만 한 폭에 2개씩 묶어 모시기도 한다.
옛날 불화 중 현존하는 팔상도는 그리 많지 않으나, 경기도 용문사와 경북 예천의 용문사, 승주 송광사, 하동 쌍계사 등에는 18세기 초의 팔상도가 보존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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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안 彼岸
산스크리트의 파람의 번역어.
강 저쪽 둔덕이라는 의미에서 종교나 철학에서 이쪽의 둔덕,즉 차안(此岸:현세를 가리키는 말)의 상대어로, 진리를 깨닫고 도달할 수 있는 이상적 경지를 나타내는 말이 되었다. 특히 일상적인 세속(世俗)으로부터 초월한다는 뜻을 표현하는 말로 많이 쓰인다.
불교에서 해탈(解脫)에 이르는 것을 ‘到彼岸’(산스크리트의 파라미타의 번역어이며 波羅密多로 음사함)이라 칭하는 일은 예로부터 있었다. 불교에서는 불도의 도피안을 위해 육바라밀(六波羅密 혹은 六度), 혹은 십바라밀행(十波羅密 혹은 十度)을 강조하고 있으며, 니체도 ‘선의(善意)의 피안’을 설파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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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하사 恒河沙
항하의 모래라는 뜻으로, 셀 수 없이 많음을 의미하는 불교용어.
항하(恒河)는 인도의 갠지스강을 말한다. 항하사수(恒河沙數)라고도 한다. 여러 경전에서 셀 수 없이 많다는 것에 비유할 때 쓰인다. 《지도론(智度論)》에는 ‘항하사는 부처가 나신 곳이고 유행(遊行)하는 곳이며 제자가 나타난 곳이다.’라고 하였다.
또 ‘항하는 복덕이 있는 강으로 이곳에 몸을 씻게 되면 죄와 허물이 모두 없어진다’라고 기록하였다. 이런 까닭에 많은 사람들이 항하사를 공경하게 되었다. 《아함경(阿含經)》에는 항하가 아욕달지 동쪽에 있다고 하고 우구(牛口)에서 나와 500개의 하수를 거두고 동해로 들어간 뒤 사자구(師子口)에서 나와 500하천을 따라 남해로 흘러간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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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인사 海印寺
경남 합천군 가야면(伽倻面) 가야산 남서쪽에 있는 사찰.
종파 : 대한불교 조계종
소재지 : 경상남도 합천군 가야면 치인리
신라 제40대 애장왕(哀莊王) 때의 순응(順應)과 이정(利貞)이 당나라에서 돌아와 우두산(牛頭山:가야산)에 초당(草堂)을 지은 데서 비롯된다. 그들이 선정(禪定)에 들었을 때 마침 애장왕비가 등창이 났는데 그 병을 낫게 해주자, 이에 감동한 왕은 가야산에 와서 원당(願堂)을 짓고 정사(政事)를 돌보며 해인사의 창건에 착수하게 하였다. 순응이 절을 짓기 시작하고 이정이 이었으며, 그 뒤를 결언대덕(決言大德)이 이어받아 주지가 되었다. 918년 고려를 건국한 태조는 당시의 주지 희랑(希郞)이 후백제의 견훤을 뿌리치고 도와준 데 대한 보답으로 이 절을 고려의 국찰(國刹)로 삼아 해동(海東) 제일의 도량(道場)이 되게 하였다. 1398년(태조 7)에 강화도 선원사(禪源寺)에 있던 고려팔만대장경판(高麗八萬大藏經板)을 지천사(支天寺)로 옮겼다가 이듬해 이 곳으로 옮겨와 호국신앙의 요람이 되었다. 그 후 세조가 장경각(藏經閣)을 확장 ·개수하였으며, 그의 유지를 받든 왕대비들의 원력(願力)으로 금당벽우(金堂壁宇)를 이룩하게 되었다. 제9대 성종(成宗) 때 가람을 대대적으로 증축했고, 근세에 이르러서는 불교 항일운동의 근거지가 되기도 하였다.
이 사찰은 창건 이후 일곱 차례의 대화재를 만나 그때마다 중창되었는데, 현재의 건물들은 대개 조선 말엽에 중건한 것들로 50여 동에 이른다. 창건 당시의 유물로는 대적광전(大寂光殿) 앞뜰의 3층석탑과 석등 정도가 있을 뿐이다. 특히 국보 제32호인 대장경판과 제52호인 대장경판고(大藏經板庫) 및 석조(石造) 여래입상(보물 264)은 유명한데, 불가사의한 일은 몇 차례의 화재를 당하면서도 팔만대장경판과 장경각만은 화를 입지 않고 옛 모습 그대로 있는 일이다. 그 밖에 주요 문화재로 보물 제518호인 원당암 다층석탑 및 석등, 보물 제128호인 반야사 원경왕사비(般若寺元景王師碑)도 있다. 통도사(通度寺:僧寶사찰) ·송광사(松廣寺:僧寶사찰)와 더불어 삼보(三寶)사찰 가운데 하나로 법보(法寶)사찰로 유명하다. 현재는 불교학원인 해인총림(海印叢林)이 있어 많은 학인(學人)들로 붐빈다. 부속 말사(末寺)는 75개에 달하고 부속 암자로 백련암(白蓮庵) ·홍제암(弘濟庵) ·약수암(藥水庵) ·원당암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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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인사 고려각판 海印寺高麗刻板
경상남도 합천군 가야면(伽倻面) 치인리(緇仁里) 해인사에 있는 고려시대의 불경각판(佛經刻板).
지정번호 : 국보 제206호
지정연도 : 1982년
소장 : 해인사
소재지 : 경남 합천군 가야면 치인리
시대 : 고려시대
크기 : 총 28종 2,725장
종류 : 불경각판
1982년 국보 제206호로 지정되었다. 총 28종 2,725장. 이들 불경 각판은 이미 국보 제32호로 지정된 대장경판(大藏經板)과는 달리, 대장경판을 보관한 두 판고(板庫) 사이에 있는 동재(東齋)와 서재(西齋)에서 뒤섞인 채로 해인사 잡판으로 불리어 오다가, 정리 과정에서 《팔만대장경》보다 훨씬 전에 새겨진 것이 발견되는 등 문화재로서의 귀중한 가치가 뒤늦게 인정되어, 1983년 총 54종 가운데 28종이 국보로 지정되고 26종은 보물로 지정되었다.
이 경판 가운데에는 고려의 간경도감판(刊經都監板)·지방관판 등 관에서 판각한 것 이외에 해인사가 아닌 다른 사찰에서 판각한 것과 개인이 판각한 것 등이 있는데, 판각 연대는 고려 초에서 조선 후기에 걸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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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인사 대장경판 海印寺大藏經板
해인사 경내의 2동(棟)의 경판고(經板庫)에 보관되어 있는 대장경판.
지정번호 : 국보 제32호
지정연도 : 1962
소장 : 해인사
소재지 : 경남 합천군 가야면 치인리
시대 : 고려
크기 : 8만 1340장
종류 : 대장경판
8만 1340장. 국보 제32호. 1237년(고종 24)부터 16년간에 걸쳐 고려에 침입한 몽골군의 격퇴를 발원(發願)하여 대장도감(大藏都監)과 분사도감(分司都監)을 두어 만든 것이다. 경판고 안에 5층의 판가(板架)를 설치하여 보관하고 있는데, 판가는 천지현황(天地玄黃) 등의 천자문(千字文)의 순서로 함(函)의 호수를 정하여 분류 ·배치하고, 권차(卷次)와 정수(丁數)의 순으로 가장(架藏)하였다.
판목의 크기는 세로, 24cm 내외, 가로 69.6cm 내외, 두께 2.6∼3.9cm로 양끝에 나무를 끼어 판목의 균제(均齊)를 지니게 하였고, 네 모서리에는 구리판을 붙이고, 전면에는 얇게 칠을 하였다. 판목은 남해지방에서 나는 후박나무를 썼고, 무게는 3∼4kg 가량으로 현재도 보존상태가 좋은 편이다. 천지(天地)의 계선만 있고, 각 행의 계선은 없이 한쪽 길이 1.8mm의 글자가 23행, 각 행에 14자씩 새겨 있는데, 그 글씨가 늠름하고 정교하여 고려시대 판각의 우수함을 보여주고 있다.
처음에 강화 서문(江華西門) 밖 대장경판고에 두었고, 그 후 강화의 선원사(禪源寺)로 옮겼다가, 1398년(태조 7)에 다시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 1995년 12월 석굴암 ·종묘와 함께 세계문화유산목록에 등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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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탈 解脫
불교에서 인간의 속세적(俗世的)인 모든 속박으로부터 벗어나 자유롭게 되는 상태.
인간의 근본적 아집(我執)으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한다. 인도사상(印度思想)·불교는 이것을 종교와 인생의 궁극 목적으로 생각하였다. 즉 범부는 탐욕·분노·어리석음 등의 번뇌 또는 과거의 업(業)에 속박되어 있으며, 이로부터의 해방이 곧 구원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 구원은 타율적으로 신에게서 오는 것이 아니라 지혜, 즉 반야(般若)를 증득(證得)함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하는 데 특징이 있다. 결국 번뇌의 속박을 떠나 삼계(三界:欲界·色界·無色界)를 탈각(脫却)하여 무애자재(無弓自在)의 깨달음을 얻는 것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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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 玄萬 [602?~664]
중국 당(唐)나라의 고승(高僧).
본명 : 위(褘)
국적 : 중국 당(唐)
활동분야 : 종교
출생지 : 중국 허난성[河南省] 뤄양[洛陽] 거우스현
주요저서 : 《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
이름 위(褘). 진혜(陳惠)의 아들. 허난성[河南省] 뤄양[洛陽] 동쪽에 있는 거우스현[里氏縣] 출생. 10세에 뤄양 정토사(淨土寺)에 들어갔으며, 13세에 승적에 올랐다. 장안(長安) ·청두[成都]와 그 밖의 중국 중북부의 여러 도시를 여행하며 불교 연구에 진력한 뒤, 많은 의문을 풀기 위하여, 또한 불교 경전을 가져오기 위해 627년(일설에는 629년) 인도로 떠났다. 도중 고창국(高昌國) 왕 국문태(麴文泰)의 대접을 받았으며, 인도에 도착한 후 나란다 사원에 들어가 계현(戒賢:시라바드라) 밑에서 불교 연구에 힘썼다. 당시 카나우지에 도읍하고 있던 하르샤 대왕 등의 우대를 받았는데, 641년 많은 경전과 불상을 가지고 귀국길에 올라, 힌두쿠시와 파미르의 두 험로를 넘어 호탄을 거쳐서 645년 정월에 조야의 대환영을 받으며 장안으로 돌아왔다. 태종(太宗)의 후원을 받아 74부 1,335권의 경전을 한역한 이외에도, 인도 여행기인 《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 (12권)를 저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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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국신앙 護國信仰
한국 불교의 일관된 신앙으로, 숭신(崇信)으로 호국한다는 사상.
불교를 굳게 믿음으로써 국가와 왕실(王室)의 번영을 생각하는 이른바 현세불교적 신앙에서 나왔다. 불교와 왕권은 이 호국신앙과 굳게 결부되어 있었고, 그리하여 역대 제왕들은 더욱 불교를 숭상하고 장려해 왔다. 이와 같은 신앙은 삼국통일을 전후하여 독자적인 성격을 가지고 우리의 정신계를 이끌어가는 원동력이 되었으며, 선덕여왕 때 황룡사 9층탑이 왕조의 무궁함을 바라는 호국 기원에서 세워졌고, 문무왕(文武王)이 당병(唐兵)의 내침을 물리치고 백제 ·고구려의 옛 땅을 통합한다는 사상에 입각하여 사천왕사(四天王寺)를 창건한 사실, 또한 전설에, 문무왕이 평소 지의법사(知義法師)에게 “내가 죽은 뒤에는 호국의 대룡(大龍)이 되어 불법을 숭봉하고 우리 나라를 수호하고 싶다”고 한 사실 등은 모두 이에서 연유한 사상이다.
이같은 사상은 고려시대에도 일관되었는데, 사원(寺院)은 불교 자체를 위하기보다 국가를 위한 비보사원(裨補寺院)으로서의 의의가 컸다. 고려 태조의 《십훈요(十訓要)》 제1조에 “우리 국가의 대업은 반드시 제불호위(諸佛護衛)의 힘에 의존한다”라고 한 것이라든지, 문종(文宗) 때 불교의 법력(法力)에 의해 국가의 복리를 증진한다는 목적에서 흥왕사(興王寺)를 세운 것 등도 이 사상에서 연유된 것이다. 또 외침을 막기 위하여 《대장경(大藏經)》을 간행한 것은 더욱 유명하다. 조선시대에는 억불책(抑佛策)으로 불교의 발흥을 보지 못하였으나 임진왜란 때에 구국운동에 앞장섰던 승군(僧軍)의 활동은 모두 호국신앙의 발현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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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두 話頭
불가의 수행자가 깨달음을 얻기 위해 참구(參究)하는 문제.
선종(禪宗)에서는 고칙(古則)·공안(公案)이라고도 한다. 원래 공안은 공부안독(公府案牘)의 약칭이며, 정부에서 확정한 법률안으로 국민이 준수해야 할 사안(事案)을 뜻하는 말이나, 이것을 선가에서는 고래로 조사(祖師)들이 정한 설(說)·언구(言句)·문답 등 불조(佛祖)와 인연된 종강(宗綱)을 수록하여 공안이라 하고, 선(禪)의 과제로 삼아 인연화두(因緣話頭)라고 한다. 간화선(看話禪)은 이 화두를 참구하여 오경(悟境)에 이르는 참선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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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신 化身
석가가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서 여러 모습으로 이 세상에 나타난 일.
응신(應身)이라고도 한다. 니르마나는 변신을 뜻하며, 카야는 신체를 의미한다. 불교사상의 발전과 더불어, 특히 대승불교에서는 육신으로서의 석가에 대해 영원한 법칙을 바탕으로 하여 법신(法身)을 생각했고, 더 나아가 그것이 중생 구제를 위하여 여러 가지 모습으로 변신해서 나타나는 이른바 화신을 생각하게 되었다. 이는 마치 그리스도교에서 신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가 인간의 몸으로 태어났다는 사상과 너무 흡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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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엄종 華嚴宗
중국 당(唐)나라 때에 성립된 불교의 한 종파.
《화엄경》을 근본 경전으로 하며, 천태종(天台宗)과 함께 중국 불교의 쌍벽을 이룬다. 동진(東晉) 말 북인도 출생의 승려 불타발타라(佛陀跋陀羅)가 《화엄경》을 한역한 이래 《화엄경》 연구가 활발해졌으며, 특히 511년 인도의 논사(論師) 세친(世親)의 저서 《십지경론(十地經論)》을 모두 완역한 것을 계기로 지론종(地論宗)이 성립되었는데, 이는 화엄종 성립의 학문적 기초가 되었다.
한편 《화엄경》을 사경(寫經) ·독송(讀誦)하는 화엄 신앙과, 이 신앙에 근거하는 신앙 단체인 화엄재회(華嚴齋會)도 발생하여 화엄종 성립의 기반이 성숙되었다. 이러한 배경 아래 두순(杜順)은 종래의 화엄에 대한 교학적 연구보다 실천적 ·신앙적 입장을 선양하여 화엄종의 제1조가 되었다. 새로이 중국에 전해진 현장(玄萬)의 유식설(唯識說)을 채용하면서 종래의지론종 학설을 발전시킨 사람이 화엄종의 제2조인 지엄(智儼)이며, 이 지엄의 학문을 계승하여 화엄종 철학을 대성시킨 사람이 현수(賢首)이다.
그 후 징관(澄觀) ·종밀(宗密)이 나와 화엄종을 계승하였으나, 선종의 발흥과 함께 일시 쇠퇴하였다. 그러나 송(宋)나라의 자선(子璿) ·정원(淨源) 등이 화엄의 맥을 이었으며, 그 후 많은 선사(禪師)들의 사상에도 화엄사상은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였다. 한국에서는 화엄사상을 신라의 원효(元曉) ·의상(義湘) 등이 크게 선양하였는데, 원효의 《화엄경소》는 현수의 《탐현기(探玄記)》에 인용될 만큼 영향을 끼쳤다. 특히 의상은 두순에게서 화엄 교학을 배운 적이 있고, 부석사(浮石寺)를 창건(676)하여 화엄의 종지(宗旨)를 널리 편 이래 해동화엄종을 개창(開創)한 사람으로 숭앙되고 있다.
그의 《화엄일승법계도(華嚴一乘法界圖)》는 방대한 《화엄경》의 정수를 요약한 것으로 화엄학 연구에 큰 영향을 끼쳤다. 또한 신라의 심상(審祥:?∼740)은 당나라 도선(道璿)과 함께 일본으로 건너가 화엄학을 전달하기도 하였다. 통일신라시대에는 ‘화엄십찰(十刹)’이라 하여 화엄학 연구의 중요한 사찰을 헤아리기도 하였다. 통일신라 말 화엄학은 부석사를 중심으로 하는 희랑(希朗)과, 화엄사를 중심으로 하는 관혜(觀惠)의 북악(北岳) ·남악의 두 파로 갈라져 논쟁이 치열하였다.
고려에 이르러 균여(均如)는 이를 조화시켰으며, 대각국사(大覺國師) 의천(義天)은 고려 불교의 통합이라는 관점에서 화엄 ·선(禪) ·천태(天台)를 융합하였다. 그 후 어느 종파에 속하더라도 화엄학 연구는 필수적인 것이 되었다. 화엄종 교리의 중심은 전세계가 일즉일체(一卽一切) ·일체즉일(一切則一)의 무한의 관계를 갖는 원융무애(圓融無弓)를 설하는 법계연기관(法界緣起觀)이다. 그 원융무애한 모습은 십현(十玄) 연기를 설하며, 그 이유로써 육상(六相:總 ·別 ·同 ·異 ·成 ·壤) 원융의 논리를 전개하였다.
요컨대, 화엄종은 일체의 천지만물을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의 현현(顯現)으로 보며, 불타의 깨달음의 경지에서 전우주를 절대적으로 긍정하는 통일적 입장에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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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룡사지 皇龍寺址
경북 경주시 구황동(舊皇洞)에 있는 사찰 터.
지정번호 : 사적 제6호
지정연도 : 1963
소재지 : 경북 경주시 구황동
시대 : 기공 553년, 완공 644년
종류 : 사찰터
사적 제6호. 1963년 지정. 왕명으로 553년(신라 진흥왕 14)에 창건하기 시작하여 566년에 주요 전당들이 완성되었다. 그러나 이 때까지에 모든 건물이 완공된 것은 아닌 듯하다. 금당(金堂)은 584년(진평왕 6)에 비로소 완성되었고, 신라 삼보(三寶)의 하나인 9층목탑은 643년(선덕여왕 12)에 착공되어 그 다음해에 완공된 사실이 《삼국사기(三國史記)》에 기록되어 있다.
이 절은 신라 왕성인 월성(月城) 동쪽에 있었는데, 그 창건 기록에는 진흥왕이 신궁을 월성 동쪽 낮은 지대에 건립하려 했으나 그곳에서 황룡이 승천하는 모습을 보고, 왕이 신궁 조영을 중지하고 절로 만들게 하여 황룡사라는 사명(寺名)을 내렸다고 한다. 국가적인 사찰이었기 때문에 역대 국왕의 거둥이 잦았고 신라 국찰 중 제일의 자리를 끝까지 지켰다.
신라 멸망 후에도 황룡사는 고려 왕조에 이어져 깊은 숭상과 보호를 받았으며 9층목탑의 보수를 위해 목재까지 제공받았다. 그러나 1238년(고종 25) 몽골군의 침입으로 탑은 물론 일체의 건물이 불타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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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룡사 구층목탑 皇龍寺九層木塔
경상북도 경주시 구황동 황룡사지에 있었던 목탑.
소재지 : 경북 경주시 구황동 황룡사지
건립연도 : 643년(선덕여왕 12)
건립자 : 자장(慈藏)
신라 삼보(三寶)의 하나로 643년(선덕여왕 12) 당나라에서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자장(慈藏)의 요청으로 건조되었다 한다. 아홉 개의 층은 모두 신라 변방의 나라들을 가리켰고 탑을 세움으로써 이웃의 침해를 누를 수 있었다고 한다.
이 탑은 건립된 후 50년이 지난 698년(효소왕 7) 벼락을 맞아 불탄 이래 여러 차례 중수되어 그 웅장한 모습을 유지해왔으나 1238년(고려 고종 25) 몽골의 병화(兵火)로 가람 전체가 불타버려 그후로는 중수되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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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정 休靜 [1520~1604.1.23]
조선 중기의 승려 ·승군장(僧軍將).
본관 : 완산(完山)
호 : 청허(淸虛) ·서산(西山)
별칭 : 자 현응(玄應) 아명 여신(汝信)
활동분야 : 종교
출생지 : 평남 안주(安州)
주요저서 : 《청허당집(淸虛堂集)》
주요작품 : 《선교석(禪敎釋)》 《선교결(禪敎訣)》 《삼가귀감(三家龜鑑)》
본관 완산(完山). 속성 최(崔). 자 현응(玄應). 호 청허(淸虛)·서산(西山). 아명 여신(汝信). 안주(安州) 출생. 1534년(중종 29) 진사시(進士試)에 낙방하자 지리산(智異山)에 입산, 숭인(崇仁) 문하에서 승려가 되어 《전등록(傳燈錄)》과 《화엄경(華嚴經)》 《법화경(法華經)》 등을 배웠다. 그 후 일선(一禪)에게 구족계(具足戒)를 받고 영관(靈觀)의 법을 계승하였다.
1552년(명종 7) 승과(僧科)에 급제, 대선(大選)·중덕(中德)을 거쳐 교종판사(敎宗判事)·선종판사(禪宗判事)를 겸임했으며, 보우(普雨)를 이어 봉은사(奉恩寺) 주지가 되었다. 1556년 요승 무업(無業)의 무고로 정여립(鄭汝立)의 역모에 연루되었다 하여 투옥되었다가 곧 풀려났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73세의 노구로 왕명에 따라 팔도십육종도총섭(八道十六宗都摠攝)이 되어 승병(僧兵) 1,500명을 모집, 명나라 군대와 합세, 한양 수복에 공을 세웠다. 이 공로로 국일도대선사선교도총섭 부종수교보제등계존자(國一都大禪師禪敎都摠攝扶宗樹敎普濟登階尊者)가 되었으나 1594년 유정(惟政)에게 승병을 맡기고 묘향산 원적암(圓寂庵)에서 여생을 보냈다.
좌선견성(坐禪見性)을 중시하고 교(敎)를 선(禪)의 한 과정으로 보아 선종(禪宗)에 교종(敎宗)을 일원화시켰다. 한편 유(儒) ·불(佛) ·도(道)는 궁극적으로 일치한다고 주장, 삼교통합론(三敎統合論)의 기원을 이루어 놓았다. 묘향산 안심사(安心寺), 금강산 유점사(楡岾寺)에 부도(浮圖)가 서고, 해남(海南) 표충사(表忠祠) 등에 배향되었다.
문집 《청허당집(淸虛堂集)》이 있고, 편저에 《선교석(禪敎釋)》 《선교결(禪敎訣)》 《운수단(雲水壇)》 《삼가귀감(三家龜鑑)》 《심법요(心法要)》 《설선의(說禪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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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누구나 좋은 사람을 만나고 싶어 하고 좋은 사람을 눈에 담으면 사랑을 느낍니다.
좋은 사람을 마음에 담으면 온기가 느껴집니다. 좋은 사람과 대화를 나누면 향기가
느껴지고 좋은 사람을 만나면 좋은 일만 생깁니다. 웃는 얼굴엔 가난이 없습니다.
오늘도 좋은 일들로 즐겁고 행복한 시간들로 가득 하십시오. 사랑합니다.
쌀쌀한금요일!
날씨는 춥지만마음은 따뜻한 당신이기를 빌어 봅니다..
오늘밤도 행복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