잿빛 우울함이 드리워졌던 11월을 보내고 한 해를 마무리하는 12월을 맞이한다. 생체리듬이 1년 단위로 달라지는 걸 자각하기 때문일까? 이맘때가 오면 조건반사처럼 주변을 돌아보며 상념에 젖게 된다.
12월 TV에는 유난히 사건, 사고 소식이 많이 등장한다. 어쩌면 때가 때이니만큼 그런 뉴스가 나를 자극하는지도 모르겠다. 노숙자 천막으로 둘러싸인 지역이 화면에 비치면서 토론토의 노숙자 수가 만여 명에 달한다는 뉴스를 전한다. 열악한 환경에 사는 그들은 가을과 겨울에 사망하는 사람이 많다고 한다. 그들도 한때는 찬란한 미래를 꿈꾸었을 텐데 이렇게 추운 거리에 나앉는 삶을 살아가게 되리라 상상이나 했을까?
스카보로 아파트 발코니에서 4살, 5살 남자아이 둘이 떨어져 사망하고 25살 아이 엄마는 크게 부상을 입고 병원으로 이송됐다는 뉴스가 이어진다. 이번 달 아이들 아빠가 백혈병으로 사망했는데 아마도 그를 따라 동반 자살한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살아남은 아이 엄마에게 1급 살인죄가 적용되는 모양이다. 집 문 앞에는 아이들 죽음을 애도하는 꽃과 장난감이 놓여 있다. 산타를 기다리며 크리스마스 선물 받을 기분에 들떠 있어야 할 아이들에게, 그리고 그들을 바라보며 행복해야 할 젊은 엄마에게 이런 비극이 일어나다니 도대체 삶이란 왜 이리 잔인한 것일까?
연말 쇼핑몰은 사람들로 붐빈다. 연신 크리스마스 캐럴이 울려 퍼지고 반짝이는 12월의 화려함에 취해 가족과 친구를 위한 선물을 사느라 모두 상기된 표정이다. 나도 그 속에 파묻혀 어떤 선물로 손녀를 감동하게 할 수 있을지 고민하며 장난감 매장을 열심히 찾아다닌다. 아들 내외에게 선물 힌트를 받았지만, 그에 적합한 물건을 찾는 쇼핑은 결코 만만하지 않다. 손녀에게 충분히 표현하지 못한 애정을 마치 선물로 보상이라도 할 것처럼 애쓰는 내 모습이 우습기만 하다.
설마 했건만 덜컥 코비드에 걸리고 말았다. 쇼핑몰을 방문할 때나 크리스마스 공연장에서 마스크를 쓰고 있을 걸, 뒤늦게 후회해 본들 무슨 소용이 있으랴. 약기운 탓인지 속이 메슥거리고 현기증이 난다. 몸이 아프면 그동안 굳건히 쌓아 올린 정신력은 맥없이 무너진다. 크리스마스 아침에 가족이 모두 모여 선물을 풀고 즐거운 시간을 가지려고 하던 계획은 물거품이 되어 버렸다. 잔뜩 기대를 하고 있는 손녀가 실망할 걸 생각하니 미안할 따름이다. 한 해를 떠나보내는 길목에서 덫에 걸려든 기분이다.
엘니뇨 영향으로 인해 올겨울 토론토는 그리 춥지 않을 거라 한다. 스페인 마드리드 북부 지방은 12월 중순인데 섭씨 30도를 웃돌아 해변에서 더위를 식히는 진풍경을 보여준다. 해를 거듭할수록 물질문명은 급속도로 발전하지만, 자연으로부터 좋은 소식은 들려오지 않는다. 자연을 보호해야 한다고 하면서 문명의 이기를 누리려고 하는 한 악순환은 계속될 것이다. 나만 해도 자그마한 실천에서 곧잘 실패를 거듭한다. 일회용 플라스틱 물통은 가급적 쓰지 않으리라 다짐했는데 몸이 힘드니까 그런 결심 역시 쉽사리 흔들린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는 <월든>에서 이렇게 말했다.
"사람이 내가 이미 말한 여러 가지 방법으로 몸을 따뜻하게 하고 나면 그다음에는 무엇을 바라겠는가? 같은 종류의 열을 더 바라지는 않을 것이 분명하다. 즉, 더 많고 기름진 음식, 더 크고 화려한 집, 입고 남을 정도의 더 좋은 옷, 끝없이 타오르는 더 뜨거운 불 따위를 바라지는 않을 것이다. 그가 생활의 필수품을 마련한 다음에는, 여분의 것을 더 장만하느니보다는 다른 할 일이 있는 것이다. 그것은 먹고사는 것을 마련하는 투박한 일에서 여가를 얻어 인생의 모험을 떠나는 것이다."
먹고사는 투박한 일에서 여가를 얻은 지 오래지만 인생의 모험을 감히 꿈꾸지 못한다. 소로가 40대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서 60 넘은 사람의 열정과 체력을 헤아리지 못해서가 아닐지 추측한다. 자신감은 떨어지고 몸을 도사리는 내 존재만 초라하게 꿈틀거리고 있다. 내가 40대라 해도 미련 없이 모험을 찾아 떠날 수 있을는지 그 또한 자신이 없다. 욕심으로 덕지덕지 사들인 잡동사니가 주변에 가득 차 있다. 정리한다고 했는데 뭐가 또 필요했는지 온통 숨 막히는 물건들이 나를 에워싸고 있다. 이들로부터 자유로워지는 방법은 버리거나 떠나는 것인데... 머리로는 이해하면서도 실천은 늘 어렵다.
며칠 동안 꼼짝없이 갇혀 지낼 생각을 하니 육신의 고통보다 정신적 허탈감에 내가 제자리에 없는 듯하다. 감성보다 이성이 앞서는 계절은 봄, 여름, 가을, 겨울 중 어디쯤 있으려나. 나는 그나마 코비드라는 복병을 만나 크리스마스에 가족과 함께하는 즐거움을 잃었을 뿐이지만, 예상치 못한 삶의 복병을 만나 인생을 송두리째 저당 잡히거나 목숨까지 위태한 상황을 맞이한 사람들은 어떻게 되는 건지...
실상을 알 수 없는 답답함이 깊은 데서 치밀어 오르다가도 돌이킬 수 없는 비극 앞에 던져진 사람들을 생각하면 더는 말을 이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