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잔디가 가득한 야트막한 언덕을 넘어서자 별로 크지 않은 연못이 나타났다. 그곳이 원더랜드 호수 공원인 모양이다. 원더랜드 호수는 연못에 가까운 작은 호수이다. 그런데 주변은 그림 같이 아름답다. 푸른 잔디에 아기자기한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호수 한쪽에서는 낚시를 즐기는 사람도 있었다. 콜로라도는 우리의 충청북도처럼 바다가 없는 주이다보니 주민들이 낚시를 즐길 수 있도록 주에서 호수에 일부러 물고기를 풀어 넣는다고 한다.
호수 주변으로도 달리기를 즐기는 사람들이 숨을 헐떡이며 달리고 있다. 건강한 삶이 습관이 된 듯하다. 하루라도 책을 안 읽으면 입에 가시가 돋는다는 안중근 의사의 말처럼 이곳 사람들은 하루라도 달리기를 하지 않으면 발에 무좀이라도 생기는 모양이다. 군데군데 배낭을 둘러매고 걷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가족과 서로 손을 잡고 걷는 사람도 있었다.
그런가 하면 노부부가 비록 느린 걸음이기는 하지만 그 길에 동참을 하고 있기도 했다. 두 시간 가까이 걷다가 다시 원래의 공원으로 되돌아 왔다. 여전히 아이들은 눈부시게 푸른 잔디 위에서 신나게 뛰고 있었다. 가까이 가서 아이들이 무엇을 하는지를 살폈다. 모두가 미식축구를 배우고 있었다. 방학을 하고 아마도 우리 식으로 말하자면 하계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모양이었다.
10여 명의 아이들이 양쪽으로 편을 갈라 공격과 수비를 하고 있었다. 둘레에는 부모들이 의자를 놓고 앉아 아이들을 응원하고 있었다. 너른 잔디밭에는 그렇게 미식축구를 배우는 학생들이 대여섯 팀은 되어 보였다.
우리의 방학은 집에서 놀거나 학원을 가서 학교 수업을 연장하거나 가족과 함께 여행을 가거나 하는 것이 거의 전부다. 그 어느 것도 자연을 벗 삼아 호연지기를 기르거나 체육활동으로 신체를 건강하게 하는 경우는 거의 없는 편이다. 우리는 땀을 흘리며 체육활동을 한다는 것 자체를 그의 금기로 여기는 문화다. 체육활동이 두뇌를 활성화한다는 수많은 연구들에는 관심조차 기울이지 않는다. 오로지 공부, 공부, 또 공부다.
그렇게 아이들이 열심히 공부해서 대학을 들어가면, 그것으로 끝이다. 대학은 해방의 공간이다.
어릴 때부터 놀이문화에 익숙하지 못하다보니 잘 놀 줄도 모른다. 그러니 그저 삼삼오오 모여서 하는 놀이라는 것이 먹고 마시는 것이 대부분이다. 건전한 놀이문화는 아예 없는 듯하다. 눈앞 잔디 위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뛰어다니는 학생들의 한없이 부럽게 느껴졌다.
멋진 풍경을 눈에 담고 사진기에 담으면서 유유자적하게 걷다보니 어느덧 두 시간이 훌쩍 넘었다. 식구들과 만날 약속 시간이 가까워지는 탓에 걷기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려고 시내 쪽으로 길을 잡았다. 출발하기 전에 혹시 하는 마음에 며느리가 가르쳐준 스마트폰의 지도를 켜들고 방향을 확인하려고 했지만 그게 말처럼 쉽지 않았다. 분명히 며느리가 스마트폰의 지도에 집 위치 표시를 지정해 놓았는데도 출발지와 도착지인 집 위치를 연결할 수가 없었다.
늘 국내에서 여행할 때는 우리나라 지도 어플리케이션을 사용한 탓인지 구글 지도는 처음 사용하는 것이라 다소 생소했다. 몇 번을 시도했지만 허사였다. 하는 수 없이 지도를 포기하고 기왕에 걷는 것이니 대강 방향만 잡고 무작정 걷기로 했다. 다행히 볼더의 랜드 마크인 ’flatiron‘이 멀리서도 보이기 때문에 그곳을 향해 걸으면 볼더를 벗어나는 일은 없다.
공원 입구에서 오른쪽으로 길을 잡고 브로드웨이 길을 걸었다. 미국의 도로에는 어디를 가나 브로드웨이가 도로표지판에 올라있다. 남북으로 뚫린 길을 브로드웨이라고 한단다. 그러니까 볼더에서 브로드웨이 길이 로키 산을 따라 아래로 이어지는 경우 남쪽으로 가고 있는 것이다. 낯선 도시에서도 도로 표지판에 브로드웨이가 눈에 띄면 남북 방향의 도로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하면 길을 찾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물론 이걸 이해하기 위해 아들에게 한참을 설명을 들어야 했다. 우리의 도로는 지명에서 따온 것이 대부분이지 방위와 관련된 길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국은 브로드웨이 로라고 하면 어느 도시나 같은 의미를 갖는다. 낯선 이에겐 무척 유용한 참으로 합리적인 표현 방식 같다.
한참을 걷는데도 산 아래 길이라 그런지 길이 조금은 단조로워 걷는 재미가 없었다.
그래서 시내 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걷기 시작했다. 얼마간 걷고 있는데 승용차 한 대가 내 옆에 멈추더니 운전사가 길 반대편에서 걷고 있는 내게 목을 빼고 길을 묻는다. 이런, 난감할 데가. 내 영어 실력은 그의 빠른 말을 알아들을 수가 없다. 하는 수 없이 No, no와 함께 I’m sorry를 내뱉는 수밖에 달리 도리가 없었다.
그러자 운전자는 다시 고개를 집어넣고는 휭하니 쏜살같이 내닫는다. 하필이면 말도 알아듣지 못하는 동양인에게 길을 묻다니 하고 자책이라도 하는 듯이 말이다.
길을 이리저리 구불거리며 눈요기를 하는 재미가 쏠쏠했다. 한참을 걷다보니 어느 한 식당 앞에 그림이 세워져 있었다. 볼더의 사계를 담은 사진이었다. 주인의 눈치를 살피다 카메라를 들어보였더니 미소를 띠며 고개를 끄덕인다.
걸으며 수도 없이 사거리를 지나고 다시 새로운 사거리 앞에서 신호를 기다리다보니 신기하게도 맞은편이 바로 집 앞이었다. 말 그대로 봉사 팔매 새잡기 격이 되었다. 기온이 점차 더 떨어지고 있는 판에 다행이다 싶었다. 거의 세 시간 동안을 걸었다.
집에 들어와 샤워를 하고 사진 자료를 정리하고 있는데 아들이 들어왔다. 그리고 첫 마디가 집을 잘 찾아오던데 라는 것이었다. 어떻게 알았냐고 물으니 내 사진기 끝에 달아놓은 위치 추적기가 내 위치를 실시간으로 아들의 스마트폰으로 전송이 된다고 했다. 아들은 내가 혼자 다니는 것이 염려가 되었던지 연구실에서 공부를 하는 중에도 스마트폰에서 눈을 떼지 못한 모양이었다. 나는 아직은 지도가 없어도 집을 찾아올 만큼 건재하다고 했더니 아들이 씩 웃는다. 오늘 저녁은 집사람이 아들 내외를 위해 모처럼 엄마 맛을 보여주겠다며 부엌으로 들어갔다.